- 감로의 맛
부처님 법은 그 본성품으로 본다면 자취도 없고 말도 끊어지고 어떻게 헤아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연에 따른 상대적 차원에서는 가지가지 정도에 따라서 높은 법문, 낮은 법문의 차별이 있습니다.
《법화경》에서는 최상의 법문을 법설주(法說周)라 했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방편을 곁들이지 않고 실상 그대로, 법성 그대로 표현한 법문으로, 법설설법(法說說法)입니다. 그 다음에는 비유주(譬喩周)라, 법설설법으로는 일반대중이 다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비유를 들어 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비유주라 합니다. 다음에는 공부가 별로 안 되어서 비유담도 못 알아듣는 소승 근기의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그것을 인연주(因緣周)라 합니다. 그것은 과거 전생의 인연이라든가 또는 금생에 자기가 지은 인연이라든가, 그런 인연을 밝혀서 하신 법문입니다.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지금 우리는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 이러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복잡다단해서 조직이 많이 생깁니다. 따라서 갈수록 많은 조직 또는 내용으로 보면 보다 규율이 복잡한 조직 속에 우리 현대인들은 함몰되어 있는 딱한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한시도 편안할 때가 없습니다. 기계문명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정밀함이 더 깊어가고, 저 같은 구닥다리는 사실 그런 현대의 정밀문명을 다 향수할 수 있는 지식도 없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는 그런 불안한 상황을 이기기가 곤란스럽습니다.
길을 가는데 물안개가 끼여 있으면 앞도 투명하게 보이지 않고, 또 이미 지나온 뒤쪽도 어두워서 잘 안 보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긴 다리가 하나 놓여 있는데, 만일 그 다리의 뒤끝도 안 보이고 지금 나가고 있는 앞도 안 보인다면 마음이 굉장히 불안할 것입니다. 우리 사바세계 중생들은 지금 그와 똑같습니다.
대체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초에 떠나온 곳은 어디인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 확실히 모릅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일체 현상계라 하는 것은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스로 판단할 때는 내가 아는 지식은 확실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이 알고 있는 것은 모두가 유한 상대적인 것입니다. 엄격히 말씀드리면 어떤 학자라도, 제아무리 박식하고 정밀한 물리학자라 하더라도 머리카락 한 개도 확실히는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를 압니다. 전자, 중성자, 혹은 양성자 같은 차원에서는 모든 물질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입자이기 때문에, 이런 미립자들은 확실하지 않은가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에서도 지적되는 것처럼 가령 미립자의 위치를 측정하려고 하면 운동속도를 알 수가 없고, 역으로 진동하는 운동속도를 측정하려고 하면 위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불확실한 것들, 즉 위치나 운동에 대하여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는 전자, 양자, 중성자들이 모여서 불확실한 원소들이 결합되어서 세포가 되고 우리 몸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부처님 명호(名號) 가운데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라는 명호가 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감로라는 것은 맛 가운데서 가장 좋은 최상의 맛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체험하는 맛 중에는 감투의 맛도 있을 것이고 또는 물질의 맛도 있을 것이고 음식의 맛 등 가지가지가 있지만, 그러한 것은 모두가 허망무상한 맛입니다. 참다운 맛은 감로의 맛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감로의 맛을 모르면 참다운 자유와 참다운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감로의 맛을 모르면 우리에게 칭칭 감겨 있는 구속을 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속박을 다 풀어버리는 참다운 경계, 참다운 일체 존재의 근본성품, 그런 자리를 완벽하게 깨닫고, 우리 중생들한테 감로수 같은 법문을 주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많은 명호 가운데 감로왕여래라는 명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감로수 같은 맛을 얻을 것인가? 감로의 맛은 늙지 않고 죽지 않고 또는 이별도 없고 모든 지혜, 자비, 일체 능력이 온전히 완전하게 구비된 맛입니다. 그 맛을 어떻게 알 것인가? 감로 맛을 알기 위해서는 오온환신(五蘊幻身)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신과 몸뚱이 또는 일체 존재가 다 오온법(五蘊法)에 해당합니다. 허깨비 환(幻)자 몸 신(身)자, 오온환신이라, 즉 오온법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깨비 같은 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의식을 비롯해서 우리 몸뚱이나 일체 존재, 삼천대천세계 모두가 다 오온법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렇게 소중한 몸이 오온법의 환신, 다시 말하여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고 허망한 몸'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굉장히 실망하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오온이 허망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감로의 맛, 즉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또는 병들지 않는 참된 행복의 맛을 음미할 수 없습니다.
참선을 한다는 것 역시 방금 말씀드린 감로의 맛을 좀 봐야 제대로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오온환신, 오온법이 다 공(空)인 도리를 모르면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 저는 참선 수행자를 자주 만납니다. 그러나 바른 이해, 바른 반야바라밀, 바른 반야지혜를 얻지 못하고 단지 선방에 앉아서 그냥 하나의 테크닉으로, 하나의 기능으로 가부좌를 틀고 화두를 참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디. 그렇게 해서는 참선 공부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조금씩은 나아간다 하더라도, 참선 공부할 때는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되어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이것은 지금 동남아에서 하고 있는 비파사나(毘婆舍那)와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조사선이란 어떤 것인가? 어떠한 것이 참다운 참선인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가장 소중하게 알고 있는 우리 몸부터,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수상행식, 우리가 분별시비하는 의식, 다시 말씀드리면 감수(感受)ㆍ상상(想像)ㆍ의지(意志)ㆍ의식(意識)하는 것 모두가 다 비었다고 분명히 느껴야 참다운 반야지혜가 되고, 반야지혜가 되어야 내 몸뚱이가 본래로 비어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느끼고 선방에 들어앉아야 공부가 됩니다.
- 먼저 마음을 열고
참선에 대해서는 선오후수(先悟後修)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먼저 막힘없이 마음을 열어놓고 나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이른바 중국에서 들어온 조사선의 도리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부처님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이런 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참다운 조사선이 못 됩니다. 천지우주를 오직 하나의 생명으로 합해 버려야 비로소 참선 공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천지우주는 오직 하나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인슈타인도 이미 과학적으로 이론을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주는 하나의 통일장(統一場)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을 모으고 참선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으로 아는 헤아림은 딱 끊어져야 합니다.
《반야심경》이나《금강경》의 도리는 모두가 다 비었다는, 즉 공(空)도리 아닙니까? 꿈속에서 볼 때는 삼천대천세계가 명명백백하게 있지만, 깨어나서 보면 모두가 다 텅텅 비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질이라는 것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두가 다 마음으로 짓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두가 다 마음으로 되어 있다는 확신이 선 상태에서 공부를 해야 참선 공부가 됩니다.
보통 불자님들은 알기 어려운 그런 문제보다 우선 복 받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모두가 하나의 진리라는 부처님의 실상을 제대로 모르면서 하는 복 받는 공부는 제한된 복밖에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공부는 불교의 근본 목적인 성불(成佛)로 인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 몸뚱이를 포함하여 이른바 물질이라는 것은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경에서는 또한 지불가득(地不可得)이라 하여 땅기운도 결국은 얻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수불가득(水不可得)이라 하여 물기운도 얻을 수가 없다고 하고, 불기운이나 바람기운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나 일체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땅기운, 물기운, 불기운, 바람기운 이런 요소들도 부처님의 말씀에 따른다면 '불가득', 즉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바로 모든 것이 비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현대물리학은 이런 사실들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물질이든 여러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각 원소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가 어떤 형태로 모여 있는가, 이러한 소립자들의 결합 형태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됩니다. 이 사실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는 무엇인가? 미세한 차원에 이르면 모두가 다 장(場) 에너지라는 것입니다. 이 공간 속이나 성층권, 삼천대천세계 어디에나 충만해 있는 장 에너지 말입니다.
그러면 장 에너지는 무엇인가? 우주에 충만해 있는 장 에너지는 전자기장(電磁氣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기나 자기는 무엇인가? 전기나 자기, 이것은 본래 물질이 아닌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물질은 분석해 들어가면 결국에는 모두가 텅텅 비어 버린단 말입니다.
다이아몬드든 금이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해 들어가면 비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 몸뚱이는 이대로 소중히 있지 않은가?'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로 빛나고 있지 않은가?' '분석해 가면 공(空)이라 하더라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 말씀은 분석해서 공인 것이 아니라, 물질 그대로 공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외우신《반야심경》에 있는 것처럼 색즉공(色卽空)입니다. 여기서 색이라는 것은 일체 물질을 다 지칭합니다. 따라서 내 몸 이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 부처님 법문은 철두철미하게 과학적이고 철학적입니다. 불교는 가장 수승한 종교입니다. 과거의 미개한 시대에는 이런 어려운 말을 하면 아무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대체적인 물리학 지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왜 물질 그대로 공인가? 이것은 가장 미세한 물질인 전자나 양자 같은 미립자들은 사실 공간성을 지니지 않으며, 에너지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우주의 정기(精氣)인 힘만 진동하고 파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동하면 전자가 되고 저렇게 진동하면 양자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물질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이 현대물리학의 결론입니다.
따라서 물질의 가장 미세한 곳으로 가면 결국은 텅텅 비어 버립니다.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으니 응당 비어 버리겠지요.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는 것이 이렇게 활동하고 저렇게 진동하고 결합되어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된다 하더라도 빈 건 빈 것입니다. 산소나 수소도 결국은 빈 것이 모여서 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공은 공입니다.
우리의 무명(無明)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모두가 다 비었다고 생각할 때 모두가 다 하나가 되겠지요. 어떤 물질이 있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가 되려야 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유마거사를 비롯해서 모두가 다 이 하나의 도리, 즉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을 말씀했습니다.
그 하나가 물질이 아니라면,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성도 없고 시간성도 없는 진여불성입니다. 자취가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문자와 말을 떠나버린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그 자리가 바로 불성입니다. 진실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뿐입니다. 다른 것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비었으니 서로 다른 것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알고 공부하는 것이 조사선의 도리입니다.
《보조국사 어록》을 보신 분들은 상기해 보십시오. "자성청정(自性淸淨) 자성해탈(自性解脫)"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일체 존재의 근본성품이 자성입니다. 일체 존재의 근본성품은 원래 청정한데, 어떤 물질이 있다거나 오염이 있다거나 또는 번뇌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자성청정이 못 됩니다. 자성청정하기 때문에 본래 해탈이 되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참선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인류문화사를 통하여 가장 고도의 문화형태가 참선입니다. 사실은 참선을 모르면 진리를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교나 기독교, 도교나 이슬람교를 다 긍정합니다. 왜 긍정하는가? 모두가 다 부처님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보면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모두가 다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자성청정 자성해탈'인 것입니다. 본래 내 몸뚱이는 비어 있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 중생의 차원에서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는 말과 같이, 마음이요 부처요 중생이요 하는 모두가 다 차별없이 불성뿐입니다. 이렇게 알고 믿는 것이 참다운 대승적인 신앙입니다. 대승적인 신앙을 가져야 참다운 참선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근본실상, 우리 생명의 근본실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불성(佛性)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지금 불성을 체험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체험하지 않은 지식은 다 간혜지(乾慧地)입니다. 바싹 마른 지혜입니다. 간혜미능(乾慧未能)이라 하였습니다. 즉 바싹 마른 이론적인 개념만으로는 우리가 참다운 감로의 맛을 못 본다는 뜻입니다. 참다운 해탈의 맛을 못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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