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젊은 불교를 위하여-③ 가장 행복한 공부

通達無我法者 2008. 1. 21. 09:21

    젊은 불교를 위하여


- 바른 참선 방법

화두를 참구할 때는 바로 그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놓치지 말고 참구하십시오. 이것은 '이뭣고' 선(禪)에 여실히 다 밝혀져 있습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한 물건은 무엇인가? 이것은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니고 오직 생명의 본래면목 자리란 말입니다. '이뭣고'는 '나에게 있는 본래면목 자리가 무엇인가'를 참구하는 것입니다. 검기는 칠보다 검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으니 천지우주를 두루 비추는 광명의 생명이며, 또한 하늘을 떠받치고 땅을 괴고 있는 것, 천지우주에 가득 차 있는 그것이 나와 더불어 있는데,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한 그것이 무엇인가를 참구하자는 겁니다. '이뭣고'는 나에게 있는 '오직 하나의 도리, 오직 하나의 진여불성, 그게 무엇인가'이지 그냥 아무렇게나 '이뭣고'가 아닙니다. 이것은 육조(六祖) 혜능(慧能)스님께서 분명히 밝혀 놓으신 가르침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이쪽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 그런 데 1천 7백 공안(公案)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화두를 참구하든지 근본성품 자리를 놓치지 않아야 참다운 조사선이 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즉 상(相)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에 의지해서 공부하면 참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상에 의지하지 않고, 자취도 모양도 없고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그 자리, 우리의 본래 성품자리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있어야 참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다고 보면 참선은 선방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집안에 있으나 어디에 있으나 운전을 하든 밥을 먹든 언제나 우리 마음이 상에 걸리지 않고 우리 마음이 일체 존재 나나 너나 모든 존재의 실상자리, 이른바 생명의 실상자리에 입각하면서 공부하면 어느 공부나 다 참선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어 '오 주여!' '하나님이시여!' 하는 것이 더 좋은 사람들은 말은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모든 상을 떠나서 진여불성 자리에 두고 '오 주여!' 해도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이것은 '똥 마른 막대기'라는 화두에서도 입증됩니다. 운문(雲門) 스님한테 가서 '여하시불(如何是佛)잇고' 하니 '똥 마른 막대기라!' 하였는데, 상을 떠나버린 자리에서는 똥 마른 막대기가 되었든 또는 쇠막대기가 되었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금생에 잔뜩 무명병(無明病), 그 가운데서도 유루병(有漏病), 즉 '있다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진여불성도 텅텅 비어 있는 것이지 진여불성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무병(無病), 없다는 공병(空病)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무병이란 말입니다. 단견상견(斷見常見)이라, 우리는 항시 있다는 유루병도 끊어야 하고 아무것도 없다는 공병도 끊어야 합니다. 우리 중생의 어두운 눈으로는, 상이 있는 눈에는 안 보인다 하더라도 상이 없는 청정한 우리 마음은 분명히 진여불성을 봅니다. 그것은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냥 가장 소중한 내가 없고, 가장 소중한 저 사람도 공이라 하니 허무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거기까지만 생각하면 굉장히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의 실상은 일체의 행복과 지혜, 자비를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가 진전되면 진일보한 만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감로수 같은 맛이 옵니다.

동산양개(洞山良价) 화상한테 "더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고 추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까 동산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대는 어째서 춥고 더움이 없는 그 자리를 구하지 못하는가?"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미우면 미운 채로 좋으면 좋은 채로 더우면 더운 채로 고생합니다. 그러나 더위도 추위도 미움도 좋아함도 다 떠나서 오직 청정한 해탈의 자리에 가버리면 그런 것은 다 조복(調伏)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저부터 그런 자리에 온전히 못 갔으므로 분명히 저도 덥고 춥습니다. 더위도 추위도 없는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다 초월해 있습니다.

참선을 많이 해보신 분들은 짐작이 되실 것입니다. 뜨거운 선방에 앉아서도 공부가 잘될 때는 그냥 시원한 기운 때문에 자기 눈에서도 분명히 시원한 바람이 푹푹 일어난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신비로운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한없는 지혜, 한없는 자비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유루병과 무병 때문에, 있다는 병과 없다는 병 때문에, 우리의 그러한 무한한 공덕을 딱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를 하실 때 지금까지 해오던 지장보살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또는 아미타불이나 무자 화두 같은 공부 방법을 바꾸실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이런 공부 방법들은 현상 따라서, 인연 따라서 제시된 방편일 뿐입니다. 그런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본래의 성품자리를 말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본래 성품자리에 가 있다면 지장보살을 하나 무엇을 하나 다 한가지입니다.

따라서 지장보살을 외우는 분들이 관세음보살하고 다르다고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는 화두를 해야 참선인데 지장보살을 하면 참선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의 명호자리, 모든 보살님의 명호자리는 본래가 하나입니다. 하나의 진여불성 자리인데, 그 자리는 무한한 공덕이기 때문에 한 말로 표현을 못합니다. 다만 자비로운 쪽으로 표현할 때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표현할 때는 문수보살, 또는 중생의 영혼을 극락세계나 천상세계로 인도하는 쪽에서 보면 지장보살,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쪽에서 본다면 약사여래 등으로 표현을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총 대명사는 아미타불입니다. 원래 둘이 아닙니다.

불교는 이런저런 신이 따로따로 있다고 보는 다신교(多神敎)가 아닙니다.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다 그 속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도《논어》도《도덕경》도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하고 있는 공부 방식을 바꿀 필요 없이, 다만 마음만 돌이키면 됩니다. 그것을 회광반조(回光返照)라 합니다.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즉 상을 두고 있는 마음만 돌이켜서 상이 없는 그 자리만 훤히 비추고 있으면 됩니다. 정말로 그 자리는 훤히 빛나는 자리입니다.

가시적인 태양광과 같은 눈부신 광명이 아니라 청정적광(淸淨寂光)입니다. 청정광명(淸淨光明)이, 청정생명(淸淨生命)의 광명이 언제나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한 번 생각하면 한 번 생각한 만큼 마음의 어둠이 가십니다. 바르게 화두를 참구하면 그만큼 우리 마음의 어둠은 가시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 파사닉이라는 왕녀가 있었는데, 얼굴이 굉장히 못생겼었습니다. 얼굴이 하도 못나서 자나깨나 얼굴 생각만 합니다. 얼굴 때문에 남편한테 소박을 당하고, 문 밖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임금님도 자기 딸이 부끄러워서 밖에 내놓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왕녀가, 세상에 둘도 없는 추녀가, 부처님한테 간절히 기원을 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정말로 제가 이와 같이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저도 좀 예쁜 사람으로 바꿔 주십시오' 하고 몇달 몇년을 두고 간절히 기원을 드렸습니다. 차츰 공덕이 쌓이고 쌓여서 자기 업장이 소멸될 만큼 되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방 문틈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광명이 훤히 비춰 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광명을 보자마자 왕녀의 추한 얼굴이 아주 절세미인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 내용이 팔상록(八相錄)에 나와 있습니다. 추녀가 얼굴을 다시 바꿔 미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남을 미워할 때 자신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 얼굴이 얼마나 추악합니까? 남에게 베풀고 자비로울 때 자신의 얼굴을 보십시오. 얼마나 온화하게 보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