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선의 맛
참선의 공덕을 일컫는 말 가운데 '현법락주(現法樂住)'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락을 맛본다는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 분들은 '참선 공부해도 고통스럽고 다리도 아프고 별 맛이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참선을 하면 분명히 법락이라는 맛이 있습니다. 법락이라는 맛은 우리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더 '환희용약(歡喜踊躍)'으로 우리한테 온단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정말로 개운하고 뛰놀듯이 행복한 것이 환희용약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참선 공부나 염불 공부에 분명히 있습니다.
참선 공부는 우리의 생명을 모조리 바쳐서 갈 만한 소중한 생명의 길입니다. 이 점은 이미 여러 다른 훌륭한 선지식 스님들한테 들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 같은 사람도 45년 동안이나 참선한다고 다소나마 애는 썼으니까 체험담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정말로 참선 공부는 가장 행복한 공부입니다. 어째서 행복한가 하면 그것은 우리의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병을 고칠 수 있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한국병이니 무슨 병이니 하는 '병'소리가 많이 나옵니다만, 사실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 무명병(無明病)에 걸려 있습니다. 한국병이나 미국병이나 모두가 다 근본적으로는 무명병입니다.
그러면 무명병이란 무슨 병인가? 무명병은 '있다, 없다' 하는 병입니다. 우리 중생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참말로 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텅 비어 있는 물질은 있다고 하고 참말로 있는 진여불성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생병입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므로 한국병이 생기고 무슨 병이 생깁니다. 또는 우리 몸뚱이에 있는 이런저런 병, 암이나 에이즈 같은 것도 결국은 우리 마음의 병, 바로 그 무명병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명병을 치유하는 것이 우리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가장 급선무입니다.
그러면 무명병 가운데서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병'이 무엇인가? 이것은 유루병(有漏病)이라는 병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처님의 시각, 성자의 견해에서 본다면 내 몸뚱이도 명명백백 빈 것인데, 우리는 있다고 본단 말입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무명으로 해서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일체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거기서 모든 중생들의 병이 파생됩니다.
감투병이나 남을 미워하는, 혹은 좋아하는 병이나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아랫물을 맑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윗물부터 다스려야 하듯이 무명병만 다스리면 그때는 모든 병이 자동적으로 다스려지고 모두가 정화되고 다 풀립니다.
있다는 병, 내가 있다는 병, 무엇인가 대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병, 이 병은 우리 불자님들이 일생을 통하여 다스려야 할 가장 근본적인 병입니다. 이 병을 쳐부수어야 합니다. 있다는 병을 쳐부수지 못하면 참다운 불자가 못 됩니다. 따라서 참다운 참선도 할 수 없습니다. 서로간의 갈등, 가정의 불화, 여러 가지 불평등 등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 '있다는 병'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일러 주는 법문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있다는 병을 쳐부숴서 없다는 자리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있다는 병 때문에 칭칭 묶여서 마음이 폐쇄되어 있습니다. 있다는 병이 있으면 교만심 등 별것이 다 나옵니다. 그러나 본래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래 없다는 도리, 이것이 곧《금강경》의 도리요《반야심경》의 도리이며, 반야공 도리입니다. 따라서 적어도 부처님의 정법을 이야기하려면 누구든 꼭 반야의 공 도리, 모든 존재가 본래는 공이라는 도리를 분명히 말씀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뚱이도 본래 없으므로 자기 몸뚱이도 자기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자기 소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절, 자기 물건, 어느 것도 자기 소유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생이라는 잠깐의 나그네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그네길의 짐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집도 기왕이면 좋은 집, 옷도 기왕이면 좋은 옷, 음식도 가장 좋은 음식, 자기 배우자도 가장 좋은 사람, 이러한 짐들을 다 짊어지고 어떻게 텅텅 비어 버린 공의 고향에 갈 수 있겠습니까?
참다운 우리 고향은 불심의 고향입니다. 불심의 고향에 가기 위해서는 '일락서산(日落西山)에 월출동(月出東)', 즉 해가 떨어져야 달이 솟아오르듯이 유루병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제아무리 요설변재(饒舌辯才)로 이렇게 저렇게 법문을 많이 한다 해도 참다운 불성자리에는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런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가? 먼저 바른 이해,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먼저 믿고 해석하고 또는 행하고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주 들으셔서 그런 도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선 어떻게 믿을 것인가? 아직 우리는 공부도 못하고 증명도 못한지라 우선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공이라고 하면 공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믿은 다음에 어째서 공인가 하는 도리는 앞서 말한 것처럼 물리학적으로 또는《구사론(俱舍論)》같은 부처님의 논장(論藏)을 보면서 공부해야 합니다.
모든 물질이 본래 에너지일 뿐이다, 모든 물질은 공간성과 시간성이 없는 에너지뿐인데 에너지가 진동해서 상(相)을 나타내기 때문에 모양이 있는 것같이 보일 뿐이며 사실은 있지 않다, 이런 정도는 현대물리학에서 다 증명되고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인 우리가 이러한 도리를 모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해한 다음 우리는 이에 따른 공부를 해야 합니다. 먼저 이해한 다음에 공부한다는 것은 어느 방면으로 보나 중요합니다. 가령 우리가 주문을 외운다 하더라도 그런 도리를 알고 주문을 외워야 훨씬 더 가피도 많이 입고 마음도 빨리 정화됩니다.
- 우주의 멜로디
주문이라는 것도 그냥 그렁저렁한 말이 아닙니다. 다 빈자리에 있는 우주의 음(音)이며, 우주의 멜로디입니다. 실은 다 비어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실상자리인 진여불성은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자비, 지혜, 행복 또는 가장 청정한 범음(梵音)이 있습니다. 영원한 우주의 멜로디가 있단 말입니다.
'옴마니반메훔'이나 광명진언(光明眞言)의 음(音)이나, 또는 대다라니(大陀羅尼)나 모두 다 우주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그것만 외운다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약간의 공부가 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주문에 불과한 것이며, 참선은 못 됩니다.
기왕이면 주문을 외우면서 참선을 하고 싶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면서도 참선을 하고 싶은 것이 우리 아닙니까?
"참선 공부는 제일 높은 공부이고, 다른 공부는 저 밑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관세음보살을 몇십 년 동안 해왔는데, 관세음보살을 안 외우면 내 마음이 허전하다. 그런데 참선도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불자님들은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근본자리, 근본 성품자리에다 마음을 두고 하시면 됩니다. 성품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마음을 둘 것인가? 이것도 부처님 말씀에 우선은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비어 있지만, 단지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의 모든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다, 이렇게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상(相)에 안 걸립니다.
《금강경》을 몇천 번 하신 분들도 계십니다.《금강경》도리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떠나는 것입니다. 또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우리 마음이 상에 걸리지 않고, 상이 없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는 좋은 것이 있고 싫은 것이 있다는 상을 두면《금강경》도리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상은 본래 비어 있다, 이렇게 아시고서 '옴마니반메훔'을 외우시면, 주문을 하시는 것 자체로 참선을 하시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이 저 밖 어디 계신다, 아미타불은 십만 억 국토 저 밖에 계신다' 하는 식으로 염불하면 그것은 그저 칭명염불(稱名念佛)인 것이지 참선은 못 됩니다.
또는 법성이고 불성이고 진여불성이고 다 없애버리고 그냥 무자(無字) 화두나 '이뭣고' 화두만 들고 있으면 참선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화두라는 것이 어째서 나왔는가? 우리 불자님들은 화두나 염불, 또는 그 둘의 상관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이 투명해야 번뇌가 안 생기고 확신이 섭니다.
그러면 참선은 무엇이고 또 염불은 무엇인가? 이에 관해서 뿔뿔이 생각하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어긋납니다. 둘이 아닌 법문에 어긋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실 필요없는 논쟁들이 많습니다.
돈오돈수니 또는 돈오점수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보조국사 가신 지 적어도 팔백 년 세월 동안, 나옹(懶翁), 지공(指空), 태고(太古), 서산(西山), 진묵(震默) 등 여러 도인들이 다 옳다고 긍정을 했으므로 새삼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부질없이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지금 누구를 비방하자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법문은 모두 다 진실한 법문입니다. 깨달은 분들은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다 같습니다. 깨달은 분의 입장에서는 돈오돈수라고 말하든 돈오점수라고 말하든 아무런 흠이 될 게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그릇 따라서 도인들은 그때그때 성품을 안 여의고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무자 화두나 이뭣고 화두는 모두 다 근본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결국은 근본성품을 깨닫기 위해서 오신 것 아닙니까? '여하시 불(佛)잇고?' 즉 부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 위함인 것입니다.
대개 화두라는 것은 서쪽에서 달마스님이 이쪽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따라서 나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근본성품이 무엇인가, 근본성품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도인들이 상(相) 없이 그때그때 내뱉는 말이 무(無)가 되고 이뭣고가 되고 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화두를 참구할 때도 우리 마음이 상을 떠나버린 진여불성 자리에 딱 입각해 있어야 됩니다. 그러는 것이지 진여불성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의심만 한다면, 상기(上氣)가 되고 공부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땅히 바른 철학,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바른 가치관은 무엇인가? 불이법문이라, 일체 존재가 다 진여불성, 불심뿐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야말로 바른 가치관입니다. 우리 눈에는 명명백백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다 하더라도, 이 모두가 참말로 바로 본다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있지 않은 것을 있지 않다고 분명히 보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참선 공부는 그냥 앉아서 이런저런 모양만 의젓하게 취한다고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다 털어버려서 내 걸망이나 내 몸뚱이까지도 몽땅 다 비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참선을 하면, 용이 물을 얻어서 하늘로 올라가고 또는 호랑이가 언덕을 얻어서 천리 만리 달려가듯 우리 공부도 나아가게 됩니다.
참다운 생명의 창조는 제법공의 도리, 반야지혜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생명이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윤회의 법입니다. '있다, 없다'를 느끼는 그 마음을 일러 일승법(一乘法)에서는 도심(盜心)이라 했습니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면, 그 마음은 도둑의 마음입니다. 또는 '이 집은 영구히 내 집이다' 하는 그 마음도 부처님 시각에서 보면 도둑의 마음입니다. 모두가 다 본래 비었습니다. 자기 몸뚱이든 무엇이든 자기 것이 아닙니다.
금생의 이 몸뚱이는 어디서 왔는가? 과거 전생에 이와 같은 몸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미래 내생에 이와 같은 몸이 있을 것도 아닙니다. 금생에 몇십 년 동안 사는 이 몸뚱이는 분명히 있지 않은가? 이 몸뚱이도 찰나찰나 신진대사 해서 어느 순간도 같은 공간에 같은 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정확히 새겨 봐야 합니다. 어느 한순간도 지금 이 몸이 똑같은 형태로 있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몸은 한 찰나도 똑같지 않습니다. 찰나, 즉 75분의 1초 동안도 같은 몸은 없습니다. 신진대사 해서 먼젓번 세포가 죽고 나중 세포가 생겨납니다. 사실은 매순간 주름살이 더 깊어지는데, 우리 중생들은 몇십 년 되어서야 늙었다 합니다. 평소에는 그냥 내 몸 그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몸뚱이는 한순간도 같은 몸이 아닙니다. 순간 찰나도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사실 내 몸도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제법공인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제법공 도리를 알아야 참다운 대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소승교는 그저 '있다, 없다'고 하는 차원의 유교(有敎)입니다. 대승이 되려면 적어도 제법공의 도리, 반야지혜에서 출발해야 됩니다. 반야지혜, 반야의 보배가 있어야 참다운 염불이 됩니다. '모든 것은 진여불성뿐이다, 다른 것은 다 헛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하면 그것은 바로 염불인 동시에 염불선(念佛禪)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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