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처님께 가까이
우리는 본래로 무한의 지혜공덕과 행복을 갖추고 있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느껴야 바른 신앙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분명히 느끼고 나도 최선을 다해서 부처가 되고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끔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 남편한테나 자기 아들한테나 자기 친구한테나 누구한테나 가장 큰 선물이고 가장 큰 공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가 부처님 가르침을 바로 닦으면서 그 사람도 부처님이 되게끔 인도하는 것입니다.
늙으신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서 옷이고 음식을 잘 대접하는 것도 효도가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단지 유한한, 때묻은 효성밖에는 못 되는 것입니다.《화엄경》에 보면 하해 같고 태산 같은 부모님 은혜를 갚기 위해서 부모님한테 최상의 음식을 대접하고 최상의 화려한 옷을 입혀 드리고 그렇게 해도 부족해서 부모님을 양쪽 어깨에 태워서 천하를 몇 바퀴를 돌면서 천하의 명승지를 구경시켜 드린다 하더라도 오히려 갚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법문이 있습니다.
세간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지극한 효도지만,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 역시 때묻은 유루(有漏) 효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입니다. 그러면 참다운 효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모님을 생사가 없는 영생의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으로 이끌어 드리는 것입니다. 무위법(無爲法)의 효도입니다. 그것은 유루 효도에 비교할 수 없는 몇천 배 수승한 효도인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화엄경》에도 있고《부모은중경》에도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또는 학문이 깊고 얕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얼마만큼 부처님한테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가, 또는 모든 사람을 얼마만큼 부처님한테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우리가 부처님의 반야사상을 마음에 새겨서 무아, 무소유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 몸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본래 비어 있다는 겁니다. 죽은 뒤에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색즉공(色卽空)이라, 지금 이대로 비어 있단 말입니다. 내 몸도 비었거니 하물며 내 소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정치가든 누구든 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우주의 도리, 우주의 진리입니다. 우주의 도리에 못 따르면 항시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든 부처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인류 사회에 전쟁이나 불안한 요인이 항시 끊이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기에 플라톤도 그의 저서《공화국》에서 "성자가 정치가가 되고 정치가가 성자의 길을 닦기 전에는 인류의 해악이 영원히 끊이지 않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이데거나 키에르케고르 등 실존철학자들은 순수한 불교인들은 아니지만,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무철학(無哲學)은 근본적으로 모든 존재의 허망무상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을 바탕으로 참다운 실존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여불성이 참다운 실존이고 실상입니다.
모든 것은 다 허망하고 다 비어 있고 참다운 실상은 오직 진여불성뿐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낀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그 모진 습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습관은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들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정념상속(正念相續) 오욕적중(五欲敵中) 불위소해(不爲所害)'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정념이 상속되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공부가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체가 진여불성이 아님이 없다, 일체가 하나의 불성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견(正見)입니다. 이러한 바른 견해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일상성에 매몰되어서 그런 정념을 상속시키지 않으면 공부가 참다운 참선으로 못 이어집니다. 이와 같이 정념을 상속시키면, 오욕적중이라, 잠이나 식욕이나 이성욕(異性慾)이나 명예욕이나 재물욕 등 오욕의 원수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원수가 우리를 해롭게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 보는 마음, 즉 무명심(無明心)에 있습니다. 무명심으로 내가 있으면 당연히 탐욕심이 있고 진심(瞋心)이 있겠지요. 오욕심은 모두가 다 무명심에서 오는 것입니다. 즉 도둑 마음입니다. 이러한 도둑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우리 마음을 침범합니다. 과거 무수생(無數生) 동안의 도둑 마음이 우리 잠재의식의 소(沼)에는 꽉 차 있습니다. 금생에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대체로 '있다, 없다' 그런 것만 배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비었다는 반야사상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알아서 그렇게 살기는 살아야겠는데, 그 순간뿐이지 자꾸만 '있다, 없다'에 걸려 버립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려면 정념이 지속적으로 상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삼독오욕(三毒五欲)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심독오욕의 침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간적인 상(相)을 놓고 복을 비는 것은 상의 범위 안에 구속되어 큰 복이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을 떠나버린 참다운 공부를 한다면, 우리가 굳이 부르지 않아도 진여불성 가운데는 무한의 공덕이 있기 때문에 저절로 공덕이 다 오는 것입니다.
우리 불성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압니다. 우리 진여불성은 나보다도 나를 훨씬 더 잘 압니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내가 "부처님이시여, 나한테 무슨 재산을 주십시오" 이렇게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여불성은 다 미리 아신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불행은 진여불성 자리에서 본다면 불행이 될 수가 없습니다. 천지우주는 모두가 그 자체로 불성이기 때문에 우주는 바로 부처님 덩어리입니다.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진여불성 덩어리가 바로 우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불행이라는 것은 다만 상(相)에서 봐서 불행인 것이지 진여불성에서 본다면 불행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나 염불 공부나 무슨 공부나 다 하나의 공부입니다. 다만 우리의 본체 본성품을 안 떠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육조단경》을 보면, "내 법(法)은 본성품을 안 여읜다"고 하는 말씀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본성품을 안 여의고 공부를 해야 참다운 공부이고 그래야 참선이 됩니다. 공부하실 때는 그와 같은 마음 자세를 가지고서 꼭 정(定)과 혜(慧)가 쌍수(雙修)가 되어야 합니다. 정과 혜를 아울러서 공부를 해야 공부가 빠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진여불성 가운데는 선정(禪定)과 지혜와 자비가 온전히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공부 역시 진여불성에 걸맞는 공부를 해야 이른바 계합(契合)이 빠르단 말입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혜는 혜대로 또는 선정은 선정대로 닦으면 공부의 계합이 더딘 것입니다.
- 생명의 길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를 안 여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선정이라는 정을 안 여의는 것인가? 우리 마음을 훤히 빛나는 진여불성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진여불성 자리는 우리 마음이 고향길로 가는 광명의 등불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인 생명, 광명입니다. 우주에 가득 찬 오직 하나의 광명입니다. 그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두는 것, 그것을 가리켜 우리 마음이 지혜에 머물러 있다고 그럽니다. 바꿔서 말하면 우리 마음이 본체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본성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이른바 육조스님의 단경 말씀대로 일상삼매(一相三昧)의 상태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그 자리를 느끼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앞생각 뒷생각 사이에 틈이 없이,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지속시켜야만 참다운 진여불성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금생에 나오신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은 무엇인가?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진여불성 자리를 알게 해서, 그 자리를 깨달아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이생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중생이 진여불성 자리를 깨닫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증명해 주고자 해서 이생에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자니까 마땅히 공부해서 진여불성 자리를 깨달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핵심적인 공부가 곧 정혜쌍수입니다. 정혜쌍수는 팔만대장경의 핵심입니다. 보조국사 어록도 보십시오. 정혜쌍수입니다.《화엄경》이나 모든 경들도 정혜쌍수, 즉 지혜와 선정이 아울러야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마음의 등불인 진여불성 자리에 딱 머물러 두고서 지속적으로 그 자리를 안 여의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육조 혜능스님 말씀으로 하면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삼매는 혜적(慧的)이고 지혜를 의미하고, 일행삼매는 정적(定的)이고 선정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지혜와 선정이 어우러져 공부할 때는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지혜와 선정이 균등히 되어야 참말로 참선이 됩니다.
우리의 생명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어버이 도리, 스승의 도리, 남편 도리, 아내 도리를 다하셔야 합니다. 게으름 없이 각각의 도리를 다하셔야 하나, 그러는 가운데도 앞서 말씀과 같이 진여불성 자리, 자기 생명의 본고향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 해야지 그 자리를 떠나버리면 우리 생명이 그냥 겉돌고 맙니다. 생사해탈의 성불과는 상관이 없어지고 맙니다.
마땅히 생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아무리 혼란스럽고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명백한 길인지라 조금도 에누리가 없습니다. 속임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결연한 마음으로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금생에 꼭 이 몸 이대로 부처님의 계행(戒行)을 착실히 닦으셔야 합니다. 살생하지 말고, 자기 배필 외에 어떠한 음탕한 행위도 하지 말고, 정당한 수입 아닌 것은 갖지도 말고, 정말로 적게 먹고 적게 써야 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써야 해탈의 길로 가는 자기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많이 두어 봐도 자기 성불, 참다운 감로왕여래의 공부, 영생해탈의 공부에는 아무런 도움이 못 됩니다.
마땅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최선으로 바로 살고 바로 말하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니므로 다른 생명을 해쳐서도 안 되겠지요. 개와 닭과 소와 나와도 둘이 아니므로 개고기, 쇠고기 그런 것도 안 먹어야 하겠지요. 그런 것 먹어서 살로 안 갑니다. 살로 안 갈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은 세포를 오염시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분명히 느끼셔야 합니다. 나보다 더 업장이 무거운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러한 세포가 나한테 온다고 생각할 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정말로 명명백백합니다. 명명백백한 가르침인지라 우리는 단호하게 믿어야 합니다. 믿고서 철저하게 계행을 지키고,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부처님 가르침이 빨리 이해되고 빨리 우리 몸과 마음으로 증명이 됩니다. 계행을 못 지키고 우리 몸이 더러우면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지라 부처님 마음이 증오(證悟)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이 본래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천지우주를 훤히 볼 수 있는 힘, 우주 만유를 다 알 수 있는 힘 모두를 갖추고 있으나 우리가 제대로 바르게 못 사니까 발휘하지 못하는 겁니다. 저 같은 사람도 오랫동안 공부를 하긴 했지만, 제대로 공부를 못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분명한 가르침을 제대로 다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행복, 자비, 지혜공덕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조금도 흠이 있거나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믿으시고 앞서 말씀과 같이 그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한순간도 놓치지 마시고 살아 가십시오. 누구와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저변은 부처님, 즉 우주의 실상인 생명으로 가는 마음이 흘러가도록 하십시오. 잠잘 때도 부처님한테 가고 있는 그 마음 그대로 흐르게 하고 잠을 자면, 잠자는 가운데서도 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성불하십시오.
허망한 세간에서는 아무것도 실상을 지니지 않았습니다. 감투도 대통령도 아무것도 실상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허상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속지 마시고 부처님 가르침을 정말로 바르게 믿으셔서 꼭 금생에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 마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감로왕여래.
<불기 2536년 9월, 대구 불교교육원 초청 특별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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