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질은 허망한 것
지금 이 사회를 둘러볼 때, 누구나 이 사회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병을 퇴치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는 다 무모합니다. 우리 종단도 그야말로 지독한 병을 앓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어느 분들은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그러기도 하고, 별스런 말을 다 합니다. 물론 그런 것도 의의는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자세입니다. 감투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몸뚱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단체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반야심경》에 있는 바와 같이 내 몸이라는 것은 산소나 수소, 탄소, 질소 등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잠시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하며, 지금도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그래서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한 것입니다. 오온이란 색(色)온, 이른바 물질인 몸뚱이와 수(受)온ㆍ상(想)온ㆍ행(行)온ㆍ식(識)온을 말합니다. 수온은 느낌을 말하며, 상온은 상상하는 것, 행온은 의지를 말하며, 식온은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우리 몸과 마음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다섯 가지 요소들이 잠시 인연 따라 모여서 우리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의 모음인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말은 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몸뚱이는 잠시 각 원소가 인연 따라서 생겨난 것이므로 한 찰나도 머물지 않고, 어느 순간도 고유한 것이 없습니다. 변동해 마지않는 것이므로 이 몸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내 마음이 아프다 혹은 좋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도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든, 상상하고 의혹을 품는 것이든 혹은 분별시비하는 것이든 모두 자취가 없습니다. 내가 '기분이 사납다'라고 한들, 그 기분 사나운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혜가스님이 달마스님한테 가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달마스님께서는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 봐라!"라고 하셨다지 않습니까?
불안한 마음, 좋은 마음이 자취가 어디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흔적도 없는 것을, 다만 우리의 습관 때문에 괜히 슬퍼하고 미워하고 좋아하고 하는 것입니다. '오온은 모두 공한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내 몸뚱이나 의식, 관념과 같은 것을 비추어 봄으로써 일체의 고난으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 불법이나 다른 종교, 철학 할것없이 모두가 다 인생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일체 고난을 해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을 제거하려고 할 때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선 무명심의 극단이 되어 있는 '나'라는 존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실제로 느껴야 합니다. 사실은 빈 것인데 우리가 잘못 보아서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따라서 백 가지 천 가지의 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검은 것인데 억지로 희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와 똑같이 부처님 지혜로 볼 때는 이 몸뚱이는 물질이 아니라 텅텅 비어 있습니다. 양자물리학으로 본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화두나 염불 같은 것을 복잡하게 공부하지 않더라도 사실은《반야심경》만 잘 보고 느낀다면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다 비었다는 것을 알아서 차근차근 마음을 비워 버린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허무하게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히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내 몸이 이렇게 나오고 천지우주가 생겨나겠습니까? 완전히 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 몸도 나오고 다른 것들도 나옵니다. 따라서 우선 우리가 잘못된 것, 잘못 있다고 생각한 것만 비워 버리면 실제로 있는, 실제적인 진여실상이 나온단 말입니다. 진여불성이라고도 하는 실재가 나오는 것입니다.
《무문관》의 화두 제일칙의 평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구구순숙(久久純熟)', 즉 화두ㆍ염불ㆍ주문 할것없이 무슨 공부를 하든 간에 오랫동안 익혀 나가면 자연히 안이나 밖이나, 다시 말해서 정신이나 물질 모두가 다 하나로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화두를 든다고 해서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공부하시는 분들은 대개 우선 마음만 급해서 "저는 자꾸만 이런저런 망상이 나옵니다"라고 말합니다만, 망상이 전혀 안 나오면 그 사람은 도인이겠지요. 응당 망상이 나오므로 우리가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범부와 성자의 차이가 어떤 것인가 하면, 우선 범부는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지 못했으므로 어리석은 마음으로 세상을 봅니다. 아직 불성을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을 구분해서 봅니다. 즉 '나'라고 구분하고, '너'라고 구분하며, 좋다고 구분하고, 나쁘다고 구분합니다. 반대로 도인은 구분하는 분별의식의 뿌리를 뽑아버린 사림입니다. 그러므로 망령되게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가 청정미묘한 진여불성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봅니다. 사실의 본바탕인 진여불성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존재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평등하게 보입니다. 진여실상과 같이 보는 것입니다. 나나 너, 좋은 것, 또는 어떤 것이나 할것없이 모두가 다 진여와 똑같이 봅니다.
사실 우리는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법문을 듣지 않아도 저절로 불성의 훈기가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큰 선지식을 만남으로써 밖으로부터 배워서 불성의 훈기가 안으로 배어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안과 밖에서 서로 훈습한다고 하여 '내훈외훈(內薰外薰)'이라고 합니다. 안에 있는 불성광명으로 인하여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내훈이라 하고, 타인이나 어떤 대상에 의하여 밝아지는 것을 외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40대에 어느 법회에 나가서 서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공부를 하신 분이 "지옥에 한번 떨어진 중생들에게는 스승도 없을 터이므로 영원히 지옥에서 못 빠져 나오고 그곳에만 있겠지요?"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 답변을 못해서 창피를 당했습니다. 지옥중생도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다하면, 즉 지옥중생으로서의 과보가 끝나면 결국은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천상의 중생도 역시 천상에서의 인연이 다하면 다시 내려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중생은 물론이고 천상의 중생들도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힘으로도 변화합니다.
불성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발랄하게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 자체의 법칙으로 움직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중생을 다 성불의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주의 중력인 인력도 모두가 다 그런 까닭입니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중력이요 인력인데, 우리 불교적인 뜻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모든 부처님의 원력인 일체중생을 다 근본자리로 이끄는 힘입니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마지막에 외우는 사홍서원도 원칙은 다 그런 뜻입니다. "모든 중생을 다 해탈시킨다" "모든 번뇌를 다 끊는다" "모든 법문을 다 배운다" "완벽한 깨달음을 다 얻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본래 그런 성품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의 일체 존재는 근본적으로 이와 똑같은 본질, 즉 부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사 잘못 살고 잘못 생각하고 행동해서 지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이 차근차근 배어 나와서 좋아집니다.
이것은 마치 탁수(濁水)를 가만히 두면 앙금이 가라앉아서 바닥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설사 지옥에 있는 존재라도, 누가 옆에 가서 제도를 하지 않는다 해도 저절로 부처가 되어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밖에서 부처님 교법을 만나는 인연이 있으면 좀더 쉽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불의 과정은 내훈외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서 배어 나오는 향기로운 불성의 훈기를 차근차근 내 것으로 만들고, 또한 동시에 공자나 예수나 석가나 소크라테스 같은 성자들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차츰 불성 쪽으로 몰아세워야 합니다. 성인들의 가르침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철저하고 덜 철저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본래 마음자리, 본래 진리로 우리를 몰아세우는 법문이라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아직 공부가 순숙되지 못했으므로 타성일편이 못 되겠지요. 순숙이라는 것은 공부를 아주 순순하게 해서, 공부가 익어간단 말입니다. 익어가면 본래가 부처인지라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마음이 맑고 몸이 가벼워 옵니다. 공부를 하고 있는데도 마음이 상쾌하지 못하고 몸도 천근만근으로 무거우면 공부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 우리 불성은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나'도 없는데 어떻게 무게가 있겠습니까?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겉만 보므로 물질로 보이는 것이지만 그 바닥에서 볼 때는 물질이 아니라 그때는 그야말로 다 불성뿐이기 때문에 원래는 무게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지만 만약 우리가 물질을 존중하고 중요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안 싸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통제가 있고 정해진 깨끗한 규범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내 물건이 있고, 네 물건이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안 싸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주의, 공자주의, 예수주의는 모두가 다 "물질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말씀한 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 아닙니까?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도 그러한 공(空)사상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금강경》,《반야심경》입니다.《화엄경》,《법화경》은 제법실상의 자리, "모두가 다 부처뿐이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 세계다"라고 적극적으로 표현했지만,《금강경》과《반야심경》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는, 부정을 주로 해서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못 본 것을 우선 부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부가 제대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는 실상에서 보면 그때는 색의 세계도 없고 소리도 없고 다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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