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정진-① 만 갈래 마음을 하나로 모아

通達無我法者 2008. 1. 22. 09:11

    <가장 행복한 공부>/ 제Ⅲ부 정진


- 여러 갈래 길

'만양당(萬羊當)'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르는 양떼가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날 경우에, 그 양들을 잡는 방법이 오직 한 길이면 수월하겠으나, 길이 너무 많으므로 쉽게 잡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길이 많으면 한편으로는 좋은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어느 길이 옳은지를 선택하는 데 대단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의 공자나 맹자 같은 분들이 출현한 때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도 역시 어느 정도 개명되어서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하고, 인간 정신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끝에 가지가지의 유파가 생겼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는 "인간의 본성은 착한 것이다"라고 하는, 소위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있는 반면에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라고 하는 성악설(性惡說)도 있었습니다.

부처님 법문도, 우리가 본래 부처이므로 부처가 되고 나면 쉬울 텐데, 우리 중생들의 업연이 하도 복잡해서 또는 과거 숙세로부터 지어 내려온 업장이 두터워서 갑자기 성불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도 팔만 사천 갈래의 법문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불교의 수행방법 또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참선법입니다. 참선을 할 때는 마땅히 이런저런 생각을 다 정리해서 자기에게 알맞는 성불의 방법이 딱 정립되어야 공부가 잘 됩니다. 제가 여러 스님네도 만나 보고, 또 재가불자들도 만나 보았습니다만, 모두 자기 수행법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굉장히 회의를 품습니다.

경(經)을 보면, 의심이라는 것은 잘하면 좋은데, 잘못 하게 되면 괜히 큰 망상만 됩니다. "의시해본(疑是解本) 의시혹본(疑是惑本)"이란 말처럼, 의심이란 우리 마음을 풀고 열어주는 근본이 될 수도 있지만, 미혹을 더하는 근본도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 하시는 분들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는 말을 외워 두시길 바랍니다. 그 의미는 모든 천만 갈래의 마음을 하나에 다 모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 타성일편이 안 되면 사실은 참선이 안 됩니다. 따라서 참선할 때는 타성일편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이란 무엇이고, 또 물질이란 무엇인가? 혹은 유주무주(有住無住), 유상무상(有相無相)의 존재가 많은데 그런 존재는 대체로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공부를 바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선도 교(敎)를 다 보고 나서 사상이 통일된 뒤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고 합니다. 즉 타성일편을 하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이래저래 생각하는, 물질인가 정신인가 또는 무슨 주의(主義)인가 자연인가 하는 모든 생각을 하나의 도리로 해결시켜 버려야 합니다.

-《무문관》

《무문관(無門關)》은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가 공부하는 화두법을 48칙으로 꾸민 책입니다.《무문관》의 대의는 우리 중생들이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다 '무'요, 모든 것이 다 허망하다는,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 하는 그 관문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런 무의 관문을 뚫고 못 넘어가므로 자꾸 문제가 생깁니다. 모두가 없다는 무의 관문은 공부를 시키자고 억지시설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부처님 법문이나 도인들 법문은 모두가 다 사실 그대로를 말한 법문입니다. 진실법문입니다. 이른바 우주의 실상 그대로를 말씀하신 법문입니다. 따라서 무문관도 있는 것을 어거지 방편으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없는 것이기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번뇌 때문에 '무'를 느끼지 못합니다. 삼독심에 가린 흐리멍덩한 우리 중생의 안목으로는 '무'를 못 느낍니다. 현상만 보고, 현상만 실제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욕계, 색계, 무색계가 모두 다 마음뿐인, 즉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또는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바로 식(識)뿐이라는, 즉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하지 않습니까?

만법은 모든 존재를 의미합니다. 깨달은 차원에서 볼 때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모든 법계가 다 마음뿐인 것입니다. "일체존재가 다 식뿐이다"라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우리 중생들의 눈에는 실제로 그렇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들에게는 만법이 다 물질로 보입니다. 만법이 다 물질로 보이기 때문에 유물론이 생기고, 따라서 공산주의가 생기고 그러는 것입니다. 일체존재가 부처님의 사상대로 마음뿐이고 식뿐이라고 생각할 때는 유물론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유물변증법에 의한 공산주의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모든 것을 있다고만 봅니다.

내 몸뚱이도 이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므로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맙니다. 자기 몸뚱이를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권속도 중요하겠지요. 따라서 자기 권속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희생 같은 것은 별로 안중에 없습니다. 자기가 소속한 단체를 위해서는 다른 단체는 배격해야 하는 것이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는 국수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나라만 제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주의를 신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보는 이 모든 환경과 물질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반야심경》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자들이 보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데 우리 수행이나 공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견(正見), 즉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늘 대하는《반야심경》을 보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다 허망하다고 부정합니다.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육식(六識)의 모든 것, 즉 우리 중생의 생리적인 눈ㆍ귀ㆍ코ㆍ입ㆍ촉각ㆍ신근(身根) 등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있지 않다면, 우리가 보는 색(色)이나 소리나 형태나 맛이나 감촉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주관도 없고 객관적인 환경도 없다면, 이를 토대로 일어나는 우리의 판단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이라는 것은 우리의 주관과 객관이 합해져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나라는 주관이 있고, 상대적인 대상이 있어서 판단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반야심경》에서는 우리의 육근, 즉 우리 자신의 근(根)이나 외계의 대상이나 또는 이 둘의 만남으로 일어나는 식(識)은 없다고 누누이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반야심경》이 전하는 그런 소중한 진리를 그때그때 놓쳐 버립니다.

신중불공 모실 때,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반야심경》을 생략해 버립니다. 그러나 신중불공 모실 때는 꼭《반야심경》불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신분(神分)이라고 합니다. 신중불공이라 하는 이것은 삼마외도(三魔外道), 즉 마귀나 나쁜 기운들을 몰아내고 좋은 선신을 청해서 가피를 받게끔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삿된 기운들이 있으면 소원을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선신들의 가피를 얻으려면, 나쁜 신들을 물리쳐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에 적합한 법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바른 견해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른 견해를 지니지 못하면 나쁜 신이 됩니다. 천상(天上)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은 없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어디 저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정화되어서, 탐내는 마음과 분노하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인 삼독심이 차근차근 가벼워지면, 바로 그 자리가 천상입니다. 삼독심이 무거워질수록 욕계의 아래 차원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은 그야말로 완전히 닫혀 있어서 욕심과 성내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뿐인 의식을 갖는 존재가 바로 지옥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보다 훨씬 삼독심이 희박한, 가볍고 맑은 존재가 바로 천상입니다. 그것 역시 욕심을 완전히 떠나버리면 색계인 것이고, 또 물질의 관념을 떠나버리면 그대로 무색계입니다. 이러한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떠나야 비로소 참다운 깨달음이 온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신중불공을 모실 때《반야심경》을 외우면 나쁜 신들은 그냥 물러갑니다. 모든 것이 있다고만 생각하므로 나도 있고 너도 있습니다. 삼독심에 가려진 안목으로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우리 중생은 나쁜 마음을 품습니다.

그러나 나도 원래 허망한 것이고 너도 허망한 것이며, 좋다는 것도 또한 허망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귀신들이 우리를 해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반야심경》을 한 번 외우면 그냥 옆에 있는 사람만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의식도 정화되고 우리 주변도 정화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오염이라 하면 일산화탄소나 이산화탄소 혹은 아황산가스 같은 것만 오염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짙은 오염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중생의 나쁜 마음입니다. 탐욕의 마음만 품어도 벌써 그 마음이 우리 분위기를 오염시킵니다. 그 반대로 선량한 사람들은 우리 분위기를 정화시킵니다. 우리 스님네나 불자님들이 선방에서 공부할 때, 공부하는 분들이 누가 악심을 품겠습니까? 따라서 모든 상을 떠나서 오로지 성불하겠다고 하는, 성불을 지향하는 그 마음이 벌써 우주를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는 의병장으로 칼을 들고 나가서 싸웠지만, 진묵대사 같은 분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전장에 한 번도 안 나가신 분입니다. 요즈음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분들에게 진묵대사 같은 분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법은 그렇게 얕은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있다는 사실 혹은 칼을 잡고 안 잡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몸소 사회에 참여하느냐 혹은 칼을 들고 나아가 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의식이 얼마만큼 정화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중불공을 모실 때는《반야심경》을 외우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쁜 귀신은 못 배겨 냅니다. 무엇인가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해서 나쁜 맘이 생기는 것인데, 그런 것이 모두 허망하다고 풀어 버리므로 나쁜 마음도 차근차근 풀어집니다. 나쁜 귀신도 우리와 똑같이 자성은 진여불성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잘못 생각해서 마음이 얽히고설켜 나쁜 귀신이 된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귀신들은 이런 몸뚱이가 없습니다. 그런 상태를 유체(流體)라 합니다. 유체는 보다 미세한 몸이기 때문에 말을 잘 알아먹습니다. 자기 몸뚱이가 어떻게, 밥을 얼마나 먹어야 하고 칼로리를 얼마 섭취해야 하고, 이럴 때는 욕심을 내거나 하겠지만, 그런 유체라는 것은 미세한 분자 같은 몸이기 때문에 밥 같은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따라서 말을 더 잘 알아듣습니다.

그러므로 삿된 아귀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하면 우리 사람보다 더 잘 알아먹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신들이 있다가도《반야심경》을 외우면 '아! 그렇구나' 합니다. 석가모니 같은 분은 거짓말을 절대로 않는 분인데, 그분이 비었다고 했으니까 정말로 비었구나 하고 물러갑니다. 악신들이 물러가면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선신들은 부처님 법문을 제대로 다 알아듣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모여듭니다. 때문에 신중불공을 모실 때는《반야심경》을 꼭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변의 모든 삿된 것을 물리치고 선신들의 가호를 받으면서 원력을 세우고 축원을 해야 훨씬 더 효과적으로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