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가장 행복한 공부] 정진-③ 만 갈래 마음을 하나로 모아

通達無我法者 2008. 1. 23. 21:05

    만 갈래 마음을 하나로 모아 - 제Ⅲ부 정진


- 텅 빈 것

우리 중생은 모든 법이, 자신과 주변의 모든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모든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 부처님 참선 공부는 이것저것 다 글러져 버립니다. 모든 존재를 있다고 생각하면 바로 집착이 생기게 되므로, 단체를 꾸며 보나 가정을 꾸며 보나 다 불화와 갈등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가 오직 한 성품의 진여불성뿐이라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타성일편이 되어야 합니다. 믿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여태까지 배운 것이나 느낀 것이나 모두가 다 있다고만 배웠으니까, 쉽게 공(空)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구구순숙이란 말이 그토록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두고두고 '다 비었다' '다 비었다' '내가 없다' '내가 없다' 이렇게 되뇌어야 합니다. 자기 암시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내가 원래 부처다' '부처다' 이렇게 하다 보면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어 버립니다. 염불의 본뜻은 그런 데 있습니다. 본래 부처인지라 자꾸만 부처님 이름을 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결국은 부처가 되어 버립니다. 자꾸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참말로 마음이 어둡고 나쁘게 되어 버립니다. 자기 암시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화두나 주문이나 염불 같은 공부는 모두가 다 원래의 자리, 진여불성 자리, 원래 모든 존재가 하나인 자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본래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자리를 구한다 하더라도 딱 믿고 구해야지 본래 하나임을 믿지 않고 구하면 항시 괴롭습니다. 백 년 묵은 체증(滯症)도 좋은 사약(瀉藥; 설사약)을 먹으면 그냥 내려갈 수 있듯이, 우리는 그 있다, 없다 ― 있다, 없다는 결국은 있다고 생각하니까 없다는 것도 나오겠습니다만 ― 고 하는 것만 버리면 됩니다. 그런 관념을 못 떠나면 우리의 병은 가실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병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리적인 병도, 마음도, 몸도 다 빈 것이기 때문에 둘이 아닙니다. 따라서 마음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즉시 우리 몸에 가서 반영됩니다.

참선할 때, 젊은 분들은 여러 모로 괴로워도 하고 고생도 하실 겁니다.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인가? 모든 괴로움의 근원은 자신의 관념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있다는 생각에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원래 없기 때문에 원래 없다는 생각이 투철해 버리면 나도 없고 우리 주변도 다 없습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오직 진여불성뿐입니다.

지금 갑이라는 사람과 을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사이가 이렇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원소의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산소나 수소가 없는 공간이 어디 있습니까? 원소의 차원에서만 본다 하더라도 나와 남은 모두가 다 붙어 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 있지 않단 말입니다. 더구나 그보다 더 근원적인 불성 차원에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불성, 이것은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자체가 바로 불성이고, 우주는 바로 불성뿐입니다.

이렇게 확실히 알아 버려야 합니다. 화두나 염불을 해도 이렇게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선 내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단지 '깨닫고 보면 위대한 도인도 되고 무엇이든 많이 알게 되겠지' 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암중모색으로 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을 할 때나 무슨 공부를 할 때는 우선 큰 믿음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른바 믿음이라는 큰 뿌리가 없으면 바른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다. 참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의 믿음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고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고 참선하면 머리도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집니다.

다 놓아버려서 모두가 다 텅 빈 것이라고 생각할 때는 가사 우리에게 심장병이 있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텅 빈 것인데 심장병만 따로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본래 내 몸뚱이 전체가 비어 있는 것인데, 내 세포가 다 비어 있는데, 심장병이나 암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회에서 하도 많이 듣고 그렇게 배웠으므로 모든 게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백퍼센트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도 역시 공부를 하다 보면, 오랫동안 순수한 마음으로 익히고 익히다 보면, 즉 구구순숙하다 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비어 옵니다. 누구든 참선을 막 배울 때부터 그냥 시원스럽고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눈앞이 깜깜하고 목구멍도 깔깔하고 어쩐지 호흡이 잘 안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툭 트여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 전체가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물론 그냥 쉽게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선근을 바탕으로 용맹정진하여 쉽게 성취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굳은 믿음입니다. 우선 부처님 법을 확실히 믿어야 참선에 진전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비었다'는 반야의 진리, 반야바라밀을 굳게 믿고 시작해야 참선이 됩니다. 반야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참선은 어렵습니다.

하나의 공부방법을 가지고 먼저 확실히 제법공 자리를 믿어야 합니다. 이때 공(空)은 다만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공이 아닙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허무주의에 떨어지고 맙니다. 공의 알맹이, 공 그 자체는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일체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이 내 본성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나 몸에 끼치는 공덕은 굉장히 큽니다. 설사 묵은 병이 있다 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확실하다면 그냥 순식간에 그 병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인도의 심령요법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바라문교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초기 원시불법도 사념주관(四念住觀)입니다. 일체가 다 괴로운 것이고 모두가 다 무상한 것이고 이 몸뚱이는 결국 우리가 잘못 보아서 그렇지 참 더러운 것일 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냥 이 몸 이대로 좋다, 이 몸 이대로 귀엽다고 생각하므로 탐심을 내고 하겠지요. 그러나 이 몸 이대로는 귀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깊이 보면 더러운 것만 충만해 있습니다. 사념주관도 이 몸이 더럽다는 부정관(不淨觀) 아닙니까? 우리가 부정한 것을 좋다고 생각하고 구하려고 하므로 그때는 고통이 안될 수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본다 해도 이 몸은 결국 무상한 것이고 무아입니다.

내 몸뚱이가 무상한 것이고 무아인데 자기 소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 사회도 앞으로는 마땅히 우리 승가의 생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이런 삶을 본받아라' 하면 되겠습니까? 먼저 우리 승가부터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사람 마음부터 제도해서 자기 마음으로 느끼게 해야지 공산혁명처럼 억지로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하면 그때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적어도 출가 수행자는 자기 평생 내 소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만약 출가 수행자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고 내 책도 내 것이고 내 사는 집도 내 것이라고 할 때, 그때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사실이 빈 것이므로 부처님께서 사실대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딱 비우고 공부에 임해야 합니다. 물론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량공덕을 분명히 갖추고 있지요. 경(經)에도 보면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확신해 버리면 그 즉시부터 공부가 후퇴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도 석가나 예수의 그런 모든 신통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른바 삼명육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내가 아픈 것이나 내가 모르는 것이나 내가 부족한 것이나 문제될 게 없습니다. 계발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중생을 일컬어서 '금덩이를 짊어지고 빌어먹는 거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원래 우리는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소유가 없다고 해서 조금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장에 죽는다 하더라도 손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 몸뚱이는 자기 것이 아니지요. 지금 몸을 버리면 금방 다른 몸 받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했으면 바로 극락으로 가는 것이고, 극락은 진여불성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업에 실패하든, 자기가 죽든, 자기 이웃이나 가까운 사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든, 어떤 경우든 아무런 손해도 없습니다. 다만 중생의 있지 않은 상(相)만 바뀌고 변동이 있는 것이지 본바탕은 그대로 가만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