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33/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 28. 11:14
 

 

서장 대 강좌 8-3 강

 

 

  서장은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그 사람의 근기와 불교적 수준에 맞추어서 대혜스님이 답장을 썼기 때문에, 앞에 진소경에게 보낸 편지.

앞에서 공부한 그 내용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차원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여기 조대제 도부에게 답한 편지는 보면 우리가 발심은 무엇인가? 이런 것도 이야기를 했고, 信心(신심).

가장 기본이 되는 신심이 아주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기초가 되고 기본이 되는 신심이야기도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신심이니 뭐니 하는 이런 차원이 아니었는데?’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분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또 이 가운데 신심이 좀 부족하면 이런 것을 가지고 보충 할 수도 있기는 있습니다.

 

  p. 145

19. 조대제 도부에게 답함

  보인 편지를 일일이 다 이해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있는 사람은 모두 부처가 된다.”고 하셨으니, 이 마음은 무슨 마음인가 하니 세상 번뇌 망상의 마음이 아니고 위없는 큰 菩提(보리)를 발한 마음이다.

보리심을 발한 마음입니다.

보리심을 발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이 마음입니다.

만약 이 마음이 있으면 성불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한 번 마음 냈으니까 그것은 씨앗을 심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을 낸 사람은 다 성불할 수 있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이니, 길이 일체 善法(선법)을 기르며, 의심의 그물을 끊고 애욕의 흐름에서 벗어나 위없는 열반의 도를 열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화엄경에 있는 말인데, 신심 하면 의례히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信爲道元功德母(신위도원공덕모) 長養一切諸善法(장양일체제선법).

그렇지요.

우리가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이 자리에 모였고, 또 이런 시간을 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새록새록 어떤 先知(선지)가 되었든,지혜가 되었든, 아니면 신심이 되었든, 불교에 단순한 관심사가 되었든 간에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야~, 불교 괜찮다.’ ‘아~, 선불교가 특히 아주 괜찮은데’ 이런 마음이 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음으로 해서 잘 한다고요.

그래서 어떤 데는 “믿음은 大地(대지)와 같다.” 곧 봄이 오지요?

대지에서 온갖 식물이 싹을 틔우고 자라지 않습니까?“믿음은 대지와 같다.”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지금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이런 시간을 마련했고, 이런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들 모르는 사이에 저 아뢰야식 속에서 아주 신선한 정법의 새싹이 자라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것 참, 믿음의 힘은 아주 대단한 것입니다.

  아함경 같은 것도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부처님이 갠지스 강 동쪽에서 설법을 하고 있었습니다.

갠지스 강 건너 저 서쪽 마을에 어떤 신심 있는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하던 일을 마치고 얼른 뛰어와서 부처님설법을 듣고 싶은 그런 마음에서 막 그냥 뛰어온 겁니다.

뛰어와서 강을 건너려고 하니까 강이 상당히 깊어 보이거든요.

강가에 있는 사람은 별로 신심이 없는지 그냥 고기만 잡고 있는 겁니다.

“제가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어디로 건너면 얕은 곳입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여기가 제일 얕은 곳”이라고 “아마 무릎 정도 밖에 물이 안 찰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저 부처님한테 가서 설법 듣고자 하는 그 욕심하나로, 그 신심하나로 그냥 다리 걷고 물위로 텀벙텀벙 건너가는 겁니다.

물위로 건너가니까 저 강 건너 갠지스 강가에서 부처님이 자주 설법하셨잖아요.경전에 많이 나오잖아요.

부처님이 한창 열을 올려서 설법하시는데, 젊은 청년하나가 갠지스 강 그 깊은 물. 그 깊은 물을 척척척 걸어 올라오는 겁니다.

부처님 설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처님 설법에 아무 관심 없어요.

그 청년의 신통에 관심이 다 가서 부처님 설법이고 뭐고 전부 거기를 보고 저것 보라고. 저것 보라고 저런 사람이 있다고. 저 갠지스 강 깊은 물을 그냥 사정  없이 건너오사람이 있다고. 이래서 부처님도 할 수없이 설법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할 수없이 부처님도 설법을 중단하고, 그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금방 건너와서부처님한테 예배하고 부처님 설법 들으려고 앉는 겁니다.

모두 궁금할 것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능력으로, 무슨 신통력으로 그 깊은 갠지스 강을 그렇게 건너왔느냐? 부처님이 대중들의 마음을 이해시키려고.

부처님이야 다 알고 있지요.

그렇지만 부처님의 마음은 대중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물었지요.

그렇게 물으니까 “부처님이 여기서 설법 하신다는 소리를 듣고, 제가 얼른 와서 설법을 들어야 되겠다 해서 강가에 고기 잡는 사람에게 물으니 얕은 곳을 가리켜 줍디다.

그래서 얕은 곳이라고 하기에 그냥 다리만 걷고 이렇게 건너왔을 뿐이지, 저는 아무런 신통도 없고 그저 농촌에서 농사짓는 청년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부처님도 설법이 바닥이 났는데 ㅎㅎㅎ~~~

잘 됐다 싶어 가지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보라 믿음의 힘은 그와 같은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그 믿음과 그 신심. 그리고 법문을 듣고자 하는 환희심. 그것 하나로 단순하게 얕은 강이라고 하니까 그냥 얕다고 생각하고 건너왔을 뿐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도 생긴다.”

그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신심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아주 차원 높은 공부하다가 다시 유치원으로 떨어져 가지고... 하하하허허허

유치원생에게도 배울 것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제대로 다지지 못하신 분들은 또 다질 기회도 되는 것이지요.

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팡이와 같습니다.

제가 지팡이를 잘 짚고 다니는데 상당히 의지가 됩니다.

지팡이 없으면 길을 못 나설 정도로 상당히 의지가 됩니다.

여러분! 불교에 대한 믿음! 부처님에 대한 믿음! 이것을 신심이라고 하지요?

소박한 신심도 좋습니다.

선불교적인 그런 차원 높은 것을 두고도 아주 소박한 신심이라 하더라도 신심. 그것 하나 없으면요? 인생 허전합니다. 정말 허전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소박한 믿음이라 하더라도 믿음하나 가지고, 법당에 있는 부처님. 나무로 깎았든지 돌로 했던지 그것은 나는 알바 없고, 내가 다니는 원찰. 그 원찰. 그 원불. 나는 그 부처님께 가서 예배하고, 친견하고 거기 가서 절하고 기도하고 그런 신심도 참 좋은 겁니다.

그런 신심이라도 우리가 신심을 가지고 있을 때 나를 지탱시켜주고 붙들어주고, 몸 아픈 사람들의 지팡이와 같은 역할을 얼마든지 한다는 것을 절대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도 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다.

길이 일체 善法(선법)을 기르며, 의심의 그물을 끊고 애욕의 흐름에서 벗어나 위없는 열반의 도를 열어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믿음은 능히 智慧功德(지혜공덕)을 더하고 자라게 하며, 믿음은 능히 반드시 여래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원찰. 원불에게 가서 소박한 신심으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그 마음이라도 끝내는 여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밑바탕이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하지요.

우리가 아주 차원 높은 그야말로 불교 중에서도 아주 극 명품 불교를 공부 하더라도 그래도 또 한편 이런 소박한 신심을 늘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선불교는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그 소리를 식은 죽 먹듯이 하고 듣는데, 그런 면이 있는가하면 그러나 법당에 나무로 깎아놓은 저 부처님이 나에게는 진짜부처님이야.

이런 소박한 마음으로 가서 기도하고 절하는 그런 믿음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兩邊(양변)에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고 하는 그런 고차원적인데 치우치지도 않고, 또 소박한, 단순한 시골 할머니들이나 믿을 수 있는 그런 믿음에도 치우치지 않고, 무불무중생.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는 고차원적인 안목도 또한 가지고 있고, 두 가지를 다 수용하면서 두 가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자세를 中道正見(중도정견)이라고 하지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다 수용할 줄 아는 마음.

선불교 공부 좀 했다고, 서장 강의 몇 번 다녔다고 괜히 목에 힘주고, 단순한 불교 신앙인들을 무시하거나 낮추어 볼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도 언젠가 뭐라고요?여래의 경지에 오른다.

  보인 편지에 둔한 사람이 능히 철저히 깨닫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마음 밭에 부처 종자나 심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비록 淺近(천근)하나 또한 深遠(심원)하니 다만 긍정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반드시 서로 속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선방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이고, 나는 참선할 근기가 못돼, 후원에 가서 하소임이나 살고, 공양주나 살고 채공이나 살고 공부하는 스님들 뒷바라지나 하고, 이렇게 해서 복이나 짓고, 그래서 어느 날 근기가 성숙하면 그때 나도 참선도 하고 경전도 보지, 내 둔한 머리에 복 짓는 것만으로도 오감하다.”

이런 마음 가진 스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공부하다 보면 벽에 부딪치거든요.

누구나 벽에 부딪칩니다.

벽에 부딪치면 이런 생각을 내는 겁니다.

 

여기 나와 있는 대로요.

이 사람이 아마 그런 편지를 대혜스님에게 보냈나 봐요.

선근의 종자나 심어서 그런 말을 했지요?

차라리 마음 밭에 부처 종자나 심겠다고, 佛種(불종)을심겠다고 그랬습니다.

부처 종자. 그냥 평범한 불자 노릇이나 해서 인연이나 맺어놓자.

절대 그런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淺近(천근)하다는 말은 아주 얕은 소리 같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주 深遠(심원)하다.

상당히 높은 차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은 저기 유치원생들에게나 해당되는 소리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미뤄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가 여기서, 대혜스님이 뭐라고 했든지 간에, 뭐라고요?

마음 낸 사람은 다 부처가 된다.

알고 보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면, “이미 다 부처다.”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일.

이것만이 남아있습니다.

내 주머니에 이미 수 억만금이 나가는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손으로 가서 만지느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확인 하느냐? 못하느냐?

이것만 남아 있습니다.

가지고 있긴 있습니다.

확인 아니 해도 내 주머니에 있습니다.

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절대 얕은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좀 건방져야 됩니다.

좀 건방지고 좀 넘쳐야 됩니다.

불법에는 좀 건방지고 좀 넘치고 소견이 좀 대단한 것 같이 하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절대 자기 자신을 비하한다든지, “나는 근기가 없다.” “소견이 좁다.” 이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제일 금물로 칩니다.

왜냐? 箇箇(개개)가 다 丈夫(장부)인데요.

不向如來行處行(불향여래행처행)입니다.

부처가 가는 곳을 나는 안 간다 이겁니다.

부처가 가는 곳을 가는 것만도 사실은 장부가 할 일입니다.

  그런데 부처가 가는 곳을 나는 안 간다 이겁니다.

그것은 그 부처가 가는 길이지, 내 부처는 내 갈 길이 따로 있다 이것이지요.

그렇게 표현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되어야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좀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집에서나 사회에서나 아무리 천시 받고 제대로 취급을 못 받아도 그것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부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존재입니다.

  최후에 설한 경전이 법화경이라고 하는데, 법화경에는 500제자 수기 품이 있고 그냥 수기 품이 있고, 유학 무학 인지 품이 있고, 수기만을 전문으로 다룬 3개의 품이 있고  그 외의 품에서도 수기를 많이 했습니다.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열반을 앞두고 유언삼아 물려줘야할 일.

최후로 가르쳐줘야할 일이 수기입니다.

 

그 수기의 내용은 거기에 보면 “너희들이 언제 어느 때, 무슨 이름으로 어느 나라에서 부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글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뜻은 “너희들은 이미 부처다.” 부처라는 내용입니다.

왜 그런가하니 거기에 방편 품에 보면 부처님 앞에 와서 절 한번 하는 사람도 皆已成佛道(개이성불도).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무 불” 이렇게 한 마디 하는 사람도 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

 

절하기 싫어서 부처님 앞에 와서 손 한번 번쩍 들어요.

친구 만나서 하듯이 손 한번 번쩍 든 사람도 개이성불도입니다.

이미 불도를 이뤄 마쳤다.

  어린아이가 저 모래사장에 가서 물이 없으니까 오줌을 싸서 모래를 뭉쳐서 불상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이 불상이라고 하고, 거기에 대고 절을 하는 그런 장난을 하는 아이도 개이성불도 이렇게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부처되는 인연이 될 것이며, 무슨 부처되는 공덕이 되겠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비하면 부처 천만 번 되고도 남지요.

안 그러겠습니까? 그럼 그 속뜻은 뭐냐? 이겁니다.

이미 다 부처입니다.

그렇게 아니해도 부처입니다.

부처를 비방해도 부처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자신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요.

 

정말 빙산의 일각.

조금 억만 분의 1을 알고 있을까 말까입니다.

불교 공부를 함으로 해서 자꾸자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가는 폭이 넓어져가고, 깊이가 깊어져 가는 겁니다.

이 일입니다.

불교 공부는 그것입니다.

이미 완전무결한 존재인데 이 완전무결한 사실을 폭을 넓게, 그리고 깊이 있게 이해해가는 일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p. 146

  지금 도를 배우는 선비가 가끔 느리게 할 곳은 급하게 하고 이것도 중요한 말입니다.

급하게 할 곳은 도리어 놓아 느리게 합니다.

비록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데知所先後(지소선후)면 則近道矣(즉근도의)니라. 유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을 아는 사람은 도에 가깝다그랬습니다.

앞뒤를 잘못 계산해서 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둑에도 보면 똑 같은 수인데, 수순 틀려버리면 그만 져버린다고요.

결국 그 자리에 놓는데 순서가 있습니다.

어디에 먼저 놔야 되느냐?

수순 따라서 승패가 갈라진다고요.

 

  그와 같이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평범한 삶을 사는데도 정말 먼저 해야 할 것. 정말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 이것을 늘 우리가, 취사선택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취사선택의 삶을 하루 종일 살고, 1년 내내 살고, 평생 내내 취사선택을 하는 겁니다.

그렇듯이 정말 한 시간의 삶도, 하루의 삶도 무엇이 먼저 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이것을 냉정하게 저울질해서 취사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어디에 가면 나에게 진정 이로울 일인가?

나에게 진정 이로울 일인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법화경 서두에 보면 부처님이 덕이 높은 많은 제자들을 이야기하는데, 그 덕이 뭐가 그렇게 덕이 높으냐?

그 표현 중에 逮得己利(체득기리)라 그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의 이로울 것을 제대로 챙길 줄 아는 사람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진정 자기에게 이로울 것을 제대로 챙길 줄 아는 제자들이다.

제자들의 덕을 표현하는데 체득기리.

진정 자기에게 이로울 것이 무엇인줄 아는 사람들.

그것이 아라한들의 덕을 찬탄하는데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느리게 해야 할 곳을 급하게 하고 급하게 해야 할 곳을 도리어 놓아 느리게 합니다.

방거사가 이르기를 “하루아침에 뱀이 잠방이에 들어가면 시험 삼아 종사에게 어떤 시절인가 물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無常殺鬼(무상살귀)입니다.

죽음이 가까워오는데 이 시절이 무슨 시절이냐?

죽음이 코앞에 당도 했는데 지금 무슨 시절이냐? 이겁니다.

 

그렇게 빈둥빈둥 놀고, 그대로 탐욕 부리고, 탐 진 치 삼독이 도라고 하기는 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평소에 살아온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아야 옳으냐?

한번 정신 차리고 정말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나에게 진정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하는가?

이런 것을 좀 깨우쳐주는 말씀이지요.

  어제 일도 오늘 오히려 기억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전생 일을 어찌 잊어버리지 않겠습니까?

‘내생에 공부하지...’ 천만에요.

어제 일도 모르는데 내생에 사람이 될지 불교를 만날지 못 만날지 그것을 어떻게 보장합니까?

아무도 보장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인연이 되어서 조금이라도 눈이 열렸고 귀가 열려서 조금이라도 듣고 보고 할 때, 이럴 때 바짝 좀 공부하라는 겁니다.

더 이상 보장 안 됩니다.

내일 공부 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보장 안 됩니다. 

‘아이, 내일 왜 보장이 안 되어있어?’ 사실은 거의 오늘과 별 다를 바는 없지요. 그렇지만 아무도 보장은 못합니다.

 

  결코 금생에 공부하여 투철하고자 한다면, 부처[佛陀]도 의심하지 말고 祖師(조사)도 의심하지 말고, 삶[生]도 의심하지 말고 죽음[死]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더 이상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라 이겁니다.

생사 문제다.

부처다.

중생이다.

조사다 이런 것에 휘둘리지 말고, 부처니 조사에 삶과 죽음에도 휘둘리지 말고 뭐라고요?

  모름지기 결정적인 믿음을 가지며, 결정적인 뜻을 갖추어서 생각 생각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如救頭燃(여구두연)이라고 처음에 절에 오면 외우는 글이 있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빠른데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머리에 불이 붙었다면 제일 급한 일 아닙니까?

제일 급한 일입니다.

제일 급한 일이기 때문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그러한 마음으로 하라”고 그랬습니다.

 

  어머니가 방에 어린아이를 눕혀놓고 부엌에서 밥을 짓습니다.

옛날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불을 한 곳에만 떼는 것이 아닙니다.

국 끓이는 불 따로 떼고 밥하는 불 따로 떼고 찌개 하는 불 따로 떼고, 옆에는 삼나무가 잔뜩 쌓여있고, 갑자기 어린아이가 “아~앙”하고 방에서 우는 겁니다.

그런데 불을 떼다가, 불이 밖으로 나오려고 그래요.

조금만 놓치면 금방 불이 탑니다.

삼나무에 불이 옮겨 붙는다고요.

그래도 어린아이가 울면 거기로 쫓아갑니다.

불이 나든 말든, 밥이야 넘든 말든, 밥이야 타든 말든 우는 어린아이한테 쫓아갑니다.

 

  우리가 그 만치 도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울면 진리는 달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는 쫓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우리가 진리의 어머니를 향해서 진리의 어머니를 찾느라고 한 번도 울어보지 못 했습니다.

울면 금방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울어보지 못하고 무슨 관광하듯이 슬슬 설렁설렁 그렇게 우리가 불교에 임하니까 이것이 알듯 말듯 하면서도 그쯤알고 마는 겁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울음을 터트릴 줄 알면...

 

  사람 때문에 울기는 많이 울지요.

돈 때문에도 울고요.

도 때문에 한 번 울어보세요.

도가 금방 쫓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도라고 하는 어머니가 금방 쫓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우는데 불이 나든 말든 어린아이에게로 쫓아가지, 그것 언제 쳐다볼 겨를이 있습니까?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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