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35/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3. 5. 11:07
 

 

 

 

서장 대 강좌 9 - 1강

 

 

  앞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에 있지 않고 實參(실참) 實究(실구)를 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기회가 되거든 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만들어서 좌선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좌선을 통해서 그 동안 이론적으로 알았던 것. 설사 불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어떤 문제. 자신의 가정사라든지 이런 문제까지도 좌선을 해보면, 내 가슴에 닥아 오는 느낌이 다르고, 또 어떤 해결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제가 이 강의 초기에 우스갯소리로 평생 事判(사판)노릇을 하다가 선방에 대중공양을 좀 내고, 방부를 들여서 한참 한 달쯤 참선을 하다가

   “알았다.”

“무엇을 알았나?” 대중들이 궁금해서 물어보니까

“수년전에 돈을 5전인가 누구한테 꿔 줬는데 누구에게 꿔 줬는지 몰라서 궁금했었는데, 아 이제 누구에게 꿔 줬는지 알았다.”이런 우스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우스개 이야기 같지만, 그 이야기 속에 시사하는 바도 큽니다. 그래서 이 실참 실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스스로 이것은 해 봐야 돼요. 요즘은 시민선방도 많고, 또 주말에 산사를 찾아가서 1박2일 정도 용맹정진을 하고 돌아오는 그런 기회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서 한 번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상식이 없다면 『서장』에서 권하고 있는 狗子無佛性(구자무불성). 이 화두를 우선적으로 참구 해보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보다 더 쉬운 화두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좀 더 풀면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제일 일반적으로 많이 참구를 합니다. 그런 것들도 한 번씩, 정말 화두를 들 때는 세상이 어떻게 되던, 지구가 거꾸로 돌아가든, 해가 서쪽에서 뜨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말고 心中無一事(심중무일사)라. 내 마음 가운데 하나의 일도 남겨두지 않는 그런 기분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 한 시간만 그런 기분이 되어 봐도 그것은 대단한 경험입니다. 한 시간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잡다한 세상사. 잡다한 모든 인연사를 늘 감지하고 살아갑니다. 사실은 함께 굴러가고 있습니다. 내가 의식 아니 해도 늘 함께 하면서 사는데, 화두를 든다는 이 공부는 그런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다 놓아버리는 겁니다.

지구가 돌든 안 돌든, 그 문제까지도 내 마음으로부터 놓아버리는 그런 기분이 되는 겁니다. 그런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고, 선불교에서만이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경험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화두를 드는 동안만은 내 인생의 어떤 중요한 일마저도 다 한 번 놓아보는 것. 한두 시간. 또는 1박2일 정도. 아니면 한 1주일 용맹정진을 한다면, 한 1주일 동안 깡그리 잊어버리고 살아도 아무 탈 없습니다.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넘어가고, 지구는 여전히 탈 없이 돌아가고, 올 봄은 여전히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걱정하지 마시고 탁 놓아버리는 것. 우리 방하착 배웠지요?

  동양화에서 餘白(여백)의 중요성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삶의 한 기간 중에서 정말 철저히 텅 빈 여백을 만들어 보는 것. 크게 깨달으면, 재수 좋아서 크게 깨달으면 더 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제쳐두고라도 정말 철저히 비우는 시간을 오직 화두 하나에 내 삶을 다 걸고 몇 시간이라도 보내보는 것이 아주 신비한 경험이 되고, 아주 특수한 경험이 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선불교가 서양에서도 크게 빛을 보는 것입니다.  

p. 151

     20. 허사리 수원에게 답함(1)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저 앞에서도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땅과 같아서, 땅은 토양이 좋아야 되고, 또 그 흙이 두터울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 믿음이 있겠지만 그 믿음이 더욱 더 기름진 토양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믿음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의 어머니로서, 길이 일체 선한 법을 기른다”고 하셨습니다.

화엄경에 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믿음은 나이든 사람들의 지팡이와 같은 것이다. 이런 표현도 했고 또 “믿음은 손과 같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손이 들어서 무엇이나 붙잡을 수가 있고, 책을 잡았다면 책장도 넘길 수 있고, 연필을 잡고 쓸 수가 있습니다.

평소에 손이 그냥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요? 크게 쓸모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한 번 활용하기 시작하면 못 만들어 내는 것이 없습니다.

  위대한 음악도, 위대한 조각도, 위대한 그림도, 수 억 만 원짜리의 고려청자도 손이 만듭니다. 야~ 손은 대단하지요. 평소에 손에 뭐가 나옵니까? 안 나와요. 음악도 나오지 않고, 그림도 나오지 않고, 어떤 조각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손이 그런 모든 것들을 다 만들어냅니다. 이 강의실 건물도 전부 손이 만든 것 아닙니까?

아주 맹목적인 신심을 가진 불자들의 그 신앙의 강도를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대단합니다. 저쪽 다른 종교의 광신도 못지않습니다. 다른 종교광신도 뺨칠 정도로 우리도 그런 아주 광적인 믿음을 가진 불자들이 사실 많습니다.그런데 그것이 정상적인 믿음이 됐으면 참 좋겠다 싶고, 또 너무 이론적으로 이렇게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은, 믿음은 아주 반듯하고 정말 본보기가 될 만한데, 믿음의 강도가 좀 약합니다. 토양이 좀 기름지지가 못합니다.

  여기도 이야기 했지만, 信爲道源功德母(신위도원공덕모)라. 도의 근원이다. 공덕의 어머니다 그랬어요. 일체도와 일체공덕을 다 이 믿음이 바탕이 되어서 거기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손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손에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손이 그 뛰어난 예술품을 다 손이 만들어내지 않습니까?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모든 불보살이 무엇에서부터 불보살이 되었겠습니까?

믿음으로부터 되었거든요. 그래서 화엄경 같은 데서도 그렇게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번 우리가 깊이 마음에 새겨둘 일이지요.

  천 리를 가고자 하면 한 걸음부터 시작한다. 그렇지요.

십지보살이 장애를 끊고 법을 證得(증득)하는 것도 처음에는 十信(십신)으로부터 들어간 뒤에 法雲地(법운지)에 올라 正覺(정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처음 歡喜地(환희지)도 믿음을 인하여 歡喜心(환희심)을 낸 緣故(연고)입니다.

대혜스님의 불교적인 지식의 强點(강점)이 화엄경에 있다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깨달으시기 전에 一切示敎(일체시교)를 다 보았습니다. 하지만 깨닫고 나서 화엄경을 봤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거든요.

모를 때 본 것과 알 때 본 것의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그래서 이 서장에도 화엄경을 지주 인용하는 이유가 그런데서 볼 수 있습니다.

  十信이라고 하는 것도, 맨 처음 十信(십신)· 十住(십주)· 十行(십행)· 十廻向(십회향)· 十地(십지)· 等覺(등각)· 妙覺(묘각) 이렇게 五十二位(오십이위)의 地位漸次(지위점차)를 나열해 놓은 것이 화엄경인데, 여기 法雲地라고 하는 것이 十地.

50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50번째 지위에 해당되는 것인데, 그것도 결국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되었다는 것을 순차적으로 나열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만약 결코 척추 뼈를 돋게 세워 세간과 출세간의 한량없는 度量(도량)을 가진 놈이 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생철로 鑄造(주조)된 사람이라야 바야흐로 될 수 있습니다.이것이 아주 참 제가 선방에 있으면서 잊지 못하는 구절 중에 바로 이겁니다.

生鐵鑄就底(생철주취저). 생철로 주조해서 만든 사람. 線(선)이 아주 굵고, 근기가 아주 뛰어나고, 용맹심이 있고, 삼국지의 장군으로 치면 관우 장비를 넘어서서 조자룡 같은 그런 백만 군중 안에서 조자룡 혼자 썩은 칼로 무 베듯이 하는듯한 기백. 선사들이 그런 예를 잘 들거든요.

여기 生鐵鑄就底. 생철로 지어 만든 사람이라야 바야흐로 될 수 있다. 그렇습니다.

  불교공부. 특히 간화선을 하다보면, 정신에도 뼈가 생긴다고 제가 했지요? 근육이 생기고  뼈가 생긴다는 말을 했습니다. 화두를 들면 사실 그래요. 기도만 열심히 해도 그렇습니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데 그 중에서도 화두를 들고 마음을 집중하는 이 정신운동은, 깨달음을 위한 공부가 정신운동이니 무슨 정신집중이니 이런 표현이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우리수준으로 이야기 해본다면 대단한 정신운동이거든요. 정말 근육이 생기고  뼈가 생깁니다. 흐물흐물한, 그늘에서 자란 풀 같은 근기라 하더라도 정말 생철로 만든 듯한 근기가 됩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 것을 해보면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만약 반은 밝고 반은 어두우며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다면, 하는 듯 마는 듯, 시들시들한... 그렇게 한다면

결코 통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일은 人情(인정)이 없어서 전해 줄 수 없으니, 모름지기 스스로가 살펴 發心(발심)해야 비로소 향해 나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 판단한다면 영겁이 지나도록 쉴 때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불자들이 정확하게 알아야할 것이 흔히 우리가 “염화시중”하면 이심전심. 또 다자탑전반분좌.

부처님의 三處傳心(삼처전심) 이야기를 하면 의례히 이심전심이라는 것이 따라 다니고, 거기에는 전한다는 말이 또 의례히 따라 다니고,

禪家(선가)에서는 법을 전했느니 전해 줬느니 전해 받았느니 하는

“전한다.”는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했지요? 인정이 없어서 전해 줄 수 없으니, 모름지기 스스로 자기가 살펴서 發心해야 된다. 고 했잖아요.

그냥 認證(인증)해 주는 것이지. 전해주는 것은 추호만큼도 없습니다.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제가 가끔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것은 전해주고 전해 받고 하는 것 같으면 부처님이 제일 먼저 누구에게 전해 줬겠습니까?

야수다라에게 전해 줬을까요? 라후라에게 전해 줬을까요?

저는 그것이 판단이 잘 안 섭니다. 허허허허허허하하하하하하~~~ 가섭이나 아란은 뒷전입니다.가섭. 아란은 순번에 들지도 않을 겁니다.

또 마하파사파제비구니도 있습니다. 아주 가까운 그런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 줬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전해준다.”는 말이 왜 그렇게 많으냐?

전해 받느니 주느니 하는 말이 그렇게 흔하냐? 이겁니다.

  불교를 이해하는 데는 말에 떨어지고, 말을 따라가고, 말에 속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누차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함정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일부러 함정 파서 함정이 생긴 것이 아니고, 저절로 말은 본래 사실을 표현하는데 불합리한 도구이기 때문에 저절로 함정이 생깁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獅子(사자)는 咬人(교인)하고 韓盧(한로)는 逐塊(축괴)한다.

사자는 돌을 던진 사람을 가서 물어요. 그런데 똥개는 자기를 해치려는 그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돌이 먹을 것인가 하고 거기 가서 코를 킁킁 댄다는 겁니다.말을 쫓아가면 바로 똥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말을 통해서 이치를 깨닫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말을 쫓아가면 사자가 돼야할 판인데 똥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말로서 표현될 수 없는 이치이기 때문에, 그러나 의사 전달을 하는데 제일 좋은 조건이 그래도 말이거든요. 그러므로 말을 안 쓸 수가 없습니다.이런 점에 대해서도 우리가 확고하게 자기의 소신을 세워두면, 불교이해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사를 이해하는 데도 아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는 여론들을 그대로 잘 안 믿습니다.‘무슨 뜻으로 이렇게 표현 했을까?’‘무슨 뜻으로 이렇게 발표 했을까?’ 전부 속에 딴 뜻이 있는 겁니다. 겨우 이제 말 쫓아가지 않을 정도는 됐습니다.

똥개는 면했나 봅니다. 하하하 그래도 가끔가끔 까딱까딱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불법을 이해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상과 인생을 이해하는 데도 사람이 깊이가 있어지고, 무게가 있어지고, 가벼워지지 않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마십시오.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 여기에 또 소개 되는데요. 믿음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날로 일어나 응용하는 자리가 완전무결해서 우리가 매일매일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응용해서 쓰는, 맞추어서 사용하는 그것이 너무나도 완전무결해서석가나 달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스스로 본인이 보기를 철저하지 못하면 뚫어 통과하지 못합니다.

온몸이 聲色(성색)안에서 활동하고 있어 도리어 그 속을 향하면서 나오기를 구하니, 더욱 교섭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불교는 정말 위대한 가르침이고, 또 이 세상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같은 그런 스승이 없다고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렇게 믿음이 가게 되는 것이 “내가 길이다.”“내가 빛이다.”←이런 말을 도대체가 어디에도 하지 않았고, 궁극에 가서는 

人人이 本具하고, 箇箇(개개)가 圓成(원성)이다.

사람 사람들이 본래로 다 갖추었고, 개개인이, 현재 이대로, 그 사람의 신분이 어떻든, 지위가 어떻든, 남녀노소 동서고금 불문하고 현재 아무리 도덕적으로, 또 어떤 세속적인 가치로서 허물이 많다 손치더라도, 또 설사 그 반대로 세상에서 상당히 추앙을 받는 훌륭하고 선량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런 것을 가지고 논하는 자리가 아니고,

  사람 사람들에게 기존의 것. 이미 있는 것. 이것을 보시고서 이것을 들어내시고, 이것을 開示悟入(개시오입).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그 속에 들어가서 살도록, 그 경계에 들어가서 살도록, 그러니까 이미 본인에게 본래로 갖춰져 있는 것. 현재 우리가 육바라밀을 닦았기 때문에, 불교에 입문했기 때문에, 불교의 초심자 과정을 졸업했기 때문에, 이런 조건이 전혀 붙지 않고, 그런 것하고는 전혀 관계없이, 불교를 비방하는 사람도,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도, 불교를 믿는 사람도, 거기에는 전혀 차별 없이 이미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위대성. 인간의 지고한 근본가치. 이것을 부처님은 들어내는 것이고, 이것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입니다.

  절대 자신이 길이다 빛이다 이런 말 아니합니다.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소리는 뭐냐? 그것도 만인이 공유하라는 뜻으로, 萬人共有(만인공유)의 입장에서 하는 소리지, 자기보고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것입니다. 여기 대해스님도 분명히 그것을 밝혔잖아요? 날로 일어나서 응용하는 자리가 완전무결해서 석가와 달마로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임제록에서 임제스님은 일보일배를 하면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가는 無着文喜(무착문희)선사라고 아주 대단한 선사입니다.

본래는 선사소리를 못 들었는데, 나중에 깨달아서 선사소리를 들었지만,

  그 분이 그렇게 신심이 장해서 一步一拜(일보일배). 요즘 우리가 티벳 불자들 일보일배를 하는 것 많이 보시지요? 그와 같이 하는 신앙을 가지고,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그렇게 가는데, 임제스님은 단호하게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없다. 내가 보니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일보일배를 하면서 가는 너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문수다.”단호하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자기 확신에 차지 않으면 그런 말 못합니다.

아무도 임제스님의 그 말이 틀렸다는 사람 없습니다.

  오대산에 문수 신앙이 얼마나 지극합니까?

또 관음도량에 관음신앙이 얼마나 지극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관음도량에 관세음이나, 문수도량에 문수나 똑 같습니다. 오대산에 문수가 없다면, 포탈라궁에 관세음보살도 없습니다.

“친견하러 가는 그 당사자야말로 정말 살아있는 문수다.”

제가 임제록에서 정말 숨 막히도록 감동한 대목이 그 대목입니다.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것. 이미 있는 것입니다. 닦아서 된 것도 아니고, 점차적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불교 안에는 닦아야 된다. 점차적으로 해야 된다고 해서 次第(차제)도 많이 나열하고, 닦는다는 이야기도 많고, 웬 그런 수행이 많은지요.

그것은 그런 근기들에게는 바로 본래적인 것을 들어 보이면 너무 허황하니까요.

  꽃을 들었는데 거기에 미소할 줄 아는 사람은 가섭 하나였으니까 별별 방편을 나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별별 이야기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간화선을 이야기하는 이 마당에서, 우리는 정말 본래의 불교. 순수한 불교. 거품 없고 정말 알맹이. 알맹이 불교를 우리가 이야기 하는 이것이 선불교의 특징이잖습니까?

왜 간화선인가? 지금 너무 불교 안에도 주의 주장과 학설들이 많아서 순수한 불교가 잘못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바른 불교. 정법불교를 배워서 정법 속에서 우리가 불교를 누리자고 하는 뜻에서 간화선이 빛을 보는 것이 어닌가? 저는 저 나름대로 그렇게 해석합니다.

  여기에도 석가와 달마로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랬습니다. 날로 일어나서 응용하는 그 자리가 완전무결해서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입니다. 화나면 화내는 그놈입니다. 그 능력이라고요.

석굴암 부처님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부처님이지만 화낼 줄 압디까?

그 부처님은 화낼 줄 몰라요. 웃을 줄도 몰라요. 조각해 놓은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야말로 목석이라고요.

좋은 것 보고 탐심 낼 줄 알고 마음에 안 맞으면 화낼 줄 아는 이것이 살아있는 부처라고요. 그러니까  탐욕이 즉시 도다. 라고 그럽니다.

“탐욕이 즉시 도”라고요. 선불교에서는 최소한도 그런 것이 수용이 되어야 합니다. 이해가 되어야 된다고요.

   ‘탐욕이 도라?’

   ‘아이탐욕, 그거 버려야 된다는데?’

  어떻게 하더라도 탐 진 치 삼독과 8만4천 번뇌를 다 제거하고 없애고 갈고 닦아야만 비로소 “도”라고 일반 불교에서는 대개 가르치고 있는데, 전혀 엉터리 아니냐? 그래요. 선불교는 그런 일반 저급한 불교에다 대면 엉터리 불교지요. 최소한도 그 수준을, 그 안목을 가지고 그 잣대로 재면 엉터리지요. 그러나 진짜 엉터리가 누군지는 그것은 아는 사람만이 알지요. “탐욕이 즉시 도”라고 그랬습니다. ←이런 데에 전기 스파크 일어나듯이 눈이 번쩍해야 되는데요.

어록을 읽다가, 경전을 읽다가 이런 대목에서 ‘아! 이거로구나!’하고 정말 눈을 한 번 번쩍 떠야 되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이야기라든지, 관세음보살이야기라든지, 여기에 대혜스님의 일용에 응용하는 것. 보고 듣는 그 사실. 그 놈. 그 당체.

그것이 완전무결해서 석가와 달마로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조건을 한 가지 달기를, 다르지 않지만 스스로 본인이 보기를 철저하지 못하여 그 사실에 대해서확신이 부족하다 이것이지요.

그래서 뚫어 통과하지 못합니다. 온몸이 聲色(성색)안에서 활동하고 이것은 어떤 사물과 들리는 소리에 그만 끄달려서 모는 그 놈을 망각하는 겁니다. 오대산에 문수가 있다는 거기에 끄달렸지,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가는 그 주인공. 그 당체는 그만 망각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온몸이 성색 안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경계에 끄달리는 것이지요.

  도리어 그 속을 향하며 나오기를 구하니, 더욱 교섭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 우리 인간이 본래로 가지고 있는 것. 아무 더 이상 닦을 것도 없고, 다듬을 것도 없고, 화장할 것도 없고, 더 이상 어떻게 첨가할 것도 없는 그런 지고한 가치. 완전무결한 인간본성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눈을 뜨면 불교공부는 끝입니다. 결국 그것 하나 가지고 여러 각도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저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 아닙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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