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34/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3. 4. 09:16
 

 

 

 

 

서장 대 강좌 8-4 강

 

  이와 같이 공부를 해 가도 철저하지 못할 때에야 바야흐로 근성이 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둔하다 영리하다.

불법공부는요.

사회의 학문과 달라서 학교에서 공부하는 공부 하고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심성이 밝은 사람.

타고난 종교성이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데 자꾸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종교성이 상당히 발전이 됩니다.

종교적인 성향이 아주 발전되어서 이런 것을 얼른 알아듣고 여기에 상당한 가치 부여를 하고,

다른 세속적인 가치에 별로 관심 없고,

여기에만 아주 심취해서 여기서 어떤 법희선열을 평생 맛보며 사시는 그런 분들도  많습니다. 

 

  만약 당장에 곧 말하기를 ‘나는 자질이 둔해 능히 금생에 철저하지 못하고, 부처 종자를 심어서 인연을 맺겠다.’고 한다면,

이는 가지 않으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 옳지 않습니다.

바른 말 했네요.

부처 종자를 심어서 인연이나 맺겠다.

이런 생각 하시는 분 많지요.

‘아이고 내 같은 사람이, 특히 세속에서 지지고 볶고 살면서 무슨 공부 되겠나? 그저 적당히 어떤가?

그저 구경이나 하지 인연이나 좀 맺어놓자.’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가지 않으면서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라 옳지 않습니다.

집에 가야할 판인데 가지도 않고, ‘왜 집에 도달 안 되나?’

‘왜 집에 도달 안 되나?’ 교실에 앉아서 

‘왜 집에 안 가지나?’ ‘안 가지나?’

이렇게 엉터리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다고 그랬습니다.

 

  p. 147

  제가 매번 道 믿는 사람을 위하여 점점 하루 가운데 힘 덜림을 아는 곳이 문득 부처를 배워 힘을 얻는 곳이라 말하였습니다.

공부하다보면요.

처음에는 상당히 어려워요.

그래도 자꾸자꾸 하다보면 쉬워져요.

듣는 것도 얼른얼른 알아듣고 참 쉬워진다고요.

 

그것이 힘이 덜리는 것입니다.

운전 처음에 배울 때는 얼마나 신경을 많이 씁니까?

옆에 아무 것도 볼 겨를이 없지요.

한 두 시간 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힘을 줬는지 팔이 뻐근합니다.

그런데 익숙해지면 볼 것 다 보고 이야기할 것 다 하고,

산에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다 보고 옆에 사람하고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콧노래 부르고 라디오 소리 다 들어가면서 해도 하나도 피곤하지도 않고 그런 겁니다.

 

힘을 얻는 곳이 힘이 덜리는 곳이고, 힘을 덜 드는 곳이 힘을 얻는 곳.

그것이 得力입니다.

여기 得力處가 生力處고 생력처가 득력처라는 말씀을 서장에서 상당히 여러 번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 얻는 곳은 남이 모르며, 또한 잡아내서 남에게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요.

여기 운전 잘하는 사람.

운전 못하는 사람 전혀 표시 없잖아요.

아무 표가 없는 겁니다.

그냥 자기가 체득하고 있을 뿐이지 어떻게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여주겠습니까?

혹 비행기를 운전 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가 없는 것이지요.

道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보여줄 수가 없는 겁니다.

 

盧行者(노행자)가 道明上座(도명상좌)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육조스님.

노행자가 밤에 오조스님한테 법을 전수 받고,

가사와 발우떼를 가지고 도망을 갔지요?

도망을 가는데 도명상좌라고 하는 장군 출신이 제일 먼저 뛰어와서 붙잡았어요.

 

노행자는 겁이 나서 그 가사와 발우를 가져가려면 가져가라고 바위에다 얹어놓고 숨어있었다고요. 

그랬는데 도명상좌가 그것을 잡으려고 딱 생각하니까 아니거든요.

그 때부터 벌벌 떨리기 시작한 겁니다.

 

도저히 그것을 가져갈 일이 아닌 겁니다.

그 발우떼하고 가사 가져가서 뭐하게요.

그냥 가서 맞추면 되는데요.

승복집에 가서 사면되는데요.

그것을 가져갈 일이 아닙니다.

 

그 순간 그것을 깨달은 겁니다.

뭔가 전기가 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것을 뺏으려왔는데 도저히 손이 가지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도저히 가져가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 하는 말이, “내가 이 발우떼를 뺏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한테 법을 배우러 왔습니다.”

 

眞心반 假心반으로,

허허 진심도 섞여있고 약간 거짓도 섞여있어요.

어쨌든 그렇게 외치니까 노행자가 나왔어요.

나와서 노행자가 도명상좌에게 법을 일러주지 않습니까?

不思善 不思惡하라.

선에도 치우치지 말고 악에도 치우치지 말라.

지금 보니까 여기까지 뺏으러 온 것은 악이고,

이것은 세속적인 마음이다.

 

그런데 이 순간에 와서 뭔가 느끼고는 그것을 도저히 가져가지 못하는 마음은 선이다.

그래 선에도 치우치지 말고 악에도 치우치지 말라.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그랬을 때 그대의 본래면목. 그대의 참 모습이 무엇일까?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있는 당신의 實體.

당신의 眞面目.

이것이 무엇일까?

이런 근사한 법문을 듣고는 거기서 환히 밝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얼른 다른 사람들이,

무식한 사람들이 잡으러 오니까 도명상좌도 거기서

‘아 이분을 보호해 줘야 되겠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묻고 얼른 돌아가서 그 쫓아오는 사람들을 전부 막고, 이분이 도망갈 수 있도록 보호해 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에게 지금 일러준 이것 외에 또 다른 은밀하고 비밀한 법의 요체가 혹시 있습니까?”

지금 이렇게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그런 운명입니다.

그러니 “다른 또 일러줄 것이 없습니까?

아주 은밀한 법이 있으면 일러 주십시오.”하니까

그 다음의 대답입니다. 

 

  “네가 만약 자기 본래면목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 은밀한 뜻이 다 너에게 있다.”

자기의 본래면목에 눈을 돌이키면 은밀하던지 비밀하던지

비호의 창고든지 그것은 전부

“너 자신에게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말이다.

그런 법문입니다.

그런 전후 사정이 다 있는 것이지요.

 

은밀한 뜻이라는 것은 문득 일상에서 힘을 얻는 곳이며, 힘을 얻는 곳은 곧 문득 힘을 더는 곳입니다.

이것이 자기만이 아는. 이것은 오로지 자기 살림살이 이고, 자기 것입니다.

남이 이해해주고 알아주고 대접해주는 것 하고는 하등의 관계없는 겁니다.

 

공부 잘 했다고.

도통 했다고 누가 존경하고,

도통 했다고 누가 알아주고 도통 했다고 누가 돈을 갖다 주는 것 하고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옛날에 소산스님이라고 하는 이는 도는 아주 하늘만치 통했는데,

얼마나 박복 했던지 이름이 호가 소산입니다.

성길疏(소)자 뫼山자입니다.

 

부엌에 불 땔 나무도 없어서,

나무가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듬성듬성 있다고 해서,

듬성듬성 있을 疏자거든요. 호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박복하고 가난하게 산 아주 훌륭한 도인도 있었어요.

그 분은 어떤 법맥이라든지 道談(도담)을 논하면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안목을 가지고 있는데도,

물질적인 것은 인연을 짓지 못했으니까 그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 하고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불교 인연해서 돈 벌려고 하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그러기로 하면 소산스님 같은 이는 그렇게 불 땔 나무가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아니잖아요?

이것은 도하고 그것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또 어떤 부자가 되고 싶은 그런 秘策(비책)도 불교 안에 있기는 있는데,

지금 간화선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하면 안 되지요. 하하하하하하하하~~~

나중에 또 그 비책 가르쳐 달라고 뒤로 와서 만날까봐 겁납니다.

허허허~~~

 

  세상 티끌의 번거로운 일은 하나를 잡으면 하나를 놓아서 무궁무진합니다.

그렇지요.

세상사는 그렇지 않습니까?

무궁무진 하지요.

이것 하나 처리하고 나니 저 일이 또 터지고,

저 일을 막아 놓으니까 이쪽이 또 터지고,

인생사는 끝도 없습니다.

‘그것을 다 끝내고 공부 하겠다.’

‘다 끝내고 나서 중 되겠다.’

그런 사람치고 중 된 사람 아무도 못 봤어요.

많이 있었어요.

‘아, 이 일만 끝내고’

‘이 일만 끝내고 간다.’

 

  그 전에 무슨 고시 준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번에 내가 고시가 되던 안 되던 무조건 출가합니다.”

저한테 와서 그랬다고요.

됐는지 떨어졌는지 도대체 소식이 없어요.

하하하하하하~~~

 

뭔가 또 다른 일이 생겼겠지요.

그 일은 덮어놓고 또 다른 일이 생겼을 겁니다.

몇 번 왔다고요.

몇 번 와서는 사람도 괜찮아요.

고시 준비하는 사람이니까 심성도 좋고요.

괜찮은 상좌하나 들어오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무슨 일이 생겼는지 도대체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되고 싶을 때 그냥 돼버리는 겁니다.

그냥 돼버려야지,

“이것 처리하고 저것 처리하고 하고나서 내가 시작한 것이니까,

한 10년 준비한 것이니까 이번에는 되던 안 되던 한 번 쳐보고나 들어오겠습니다.”

그래놓고는 아무 소식이 없는 겁니다. 

돼서 안 오는지 안 돼서 안 오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네 가지 威儀(위의) 안에 일찍이 서로 버리지 않은 것은

行 · 住 · 坐 · 臥지요. 四威.

시작 없는 때로부터 그와 더불어 맺은 인연이 깊었던 것이고,

세상사는 우리가 오랜 세월.

수 억만 겁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인연을 너무 깊이 맺었고,

반야의 지혜는 어떻습니까?

반야의 지혜는 시작 없는 때부터 아주 오랜 세월 이전부터.

수수 억 겁 전부터 그와 더불어 맺은 인연이 얕았던 연고입니다.

그러므로 공부가 잘 안 되지요.

허허허~~~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이런 공부 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인연이 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불교공부가 되었든,

아니면 꼭 자기가 다음 생에 피아니스트가 되어서 세계적인 음악가로서 명성을 날리고 싶은 그런 꿈이 있는 사람은 불교 공부하러 오지 말고,

바로 그 일부터 하세요.

자기가 하고 싶은 그것을 자꾸 익히는 겁니다.

끊임없이 익히는 겁니다.

끊임없이 익히면 그것이 薰習(훈습)이 되어서 다음 생에 아주 잘 됩니다.

 

여기에 이야기 해놨잖아요.

세상사는 왜 익숙하냐?

수수 억 겁 전부터 해왔던 것이 익숙한 겁니다.

불교공부는 왜 잘 안 되냐?

수수 억 겁 전부터 안 해왔기 때문에 그래요. 서툴다고요.

 

  그런 말이 있지요.

“내 생에 잘 하려면 금생에 잘 해야 된다.”

그래서 ‘전 생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

欲知前生事.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면,

今生受者是라.

금생에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전생에 했던 일입니다.

 

어느 정도 했던 일이라고요.

전생에 우리가 모두 만났던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금생에 이렇게 만나는 것이지요.

欲知來生事인댄 今生作者是라.

내생에 그럼 내 인생이 어떨까?

내일의 내 인생이 어떨까?

내생은 모르니까 이야기하지 말고,

내일의 내 인생이,

아니면 내년에 내 인생이 어떨까?

지금 오늘 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내일의 내 인생입니다.

 

  오늘 소득이 많았었으면 자고나서

‘야, 오늘은 서장 강의 없나?’

이런 생각이 들 거라고요.

그래서 교재도 한 번 펼쳐 보기도 하고,

또 요즘 불교 TV에 나오니까 한 번 틀어서 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또 듣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내일의 내 인생은 바로 오늘 내가 하고 있는 것에 달려있다.

오늘 하고 있는 이것과 거의 유사하다고 알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반야와 세상사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잠깐 선지식이 말하는 것을 듣고 한결같이 헤아리기 어려움을 알 것입니다.

만약 시작 없는 때로부터 티끌의 번거로운 인연이 얕고 반야의 인연이 깊은 사람이라면 무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냥 척척척 다 되는 것이지요.

태어나면서부터,

어려서부터 아주 그 자기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많이 봅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전생에 익숙하게 한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렇게 될 리가 없습니다.

뭐 든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중 된 것을 보면 전생에도 아마 중노릇을 했던 것 같습니다.그래서 저는 저 나름대로 그렇게 믿고 삽니다.

그 믿는데 세금 드는 일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자기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딱 그려지면,

거기에 매진하세요.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거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다른 어떤 남이 비까번쩍하게 잘 하는 것에 기웃거릴 필요 없습니다.

 

각자 자기의 가치관이 있는데,

자기 소신이 확실하면 뭘 그렇게 남 잘 먹고 잘 살고 좋은 차타고 벼슬 높아 지는데에 기웃거릴 것 뭐 있습니까?

  처음에 여러 번 말씀 드렸지만,

우리가 불교공부를 하고 특히 선불교를 하시는 분들은 인생의 高手들입니다.

세속적인 가치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下手들이나 하는 겁니다. 下手들.

인생의 하수들이나 하는 것이지,

인생의 고수들은 그런 데에 기웃거리지 않는다고요.

남이 뭐라고 했든, 평가 기준이 어디 정해져 있나요?

평가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정말 출세간의 이런 공부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정말 하늘을 찌를듯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도 됩니다.

‘나는 서장 공부하는 사람이야.’

‘간화선 공부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대통령 10번 하는 것 보다 낫다고요.

꼭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가 서장에 임할 때 의외의 소득.

기대하지 않았던 큰 소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 구절은 별로 크게 긴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략을 하고 조대제 도부에게 답함 이라고 하는 공부를 다 한 것으로 오늘 서장 공부를 마치겠습니다.

  - 8강 終 -

 

******************************************

  질문은 정리 않고 답변만 정리 했습니다.

  탄허스님 화엄경 합론을 다 탈고를 하셔서 교열을 몇 달에 걸쳐서 함께 했는데,

제가 눈물을 흘린 대목이 바로 四弘誓願을 설명한 대목입니다.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것은 아닌데 화엄경을 해설한 청량국사의 글입니다.

천하의 그 美文.

아름다운 글을 쓰기로 유명한 분이 청량국사인데요.

그 분이 화엄경 어느 대목에서인가 四弘誓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면서 3가지 차원으로 사홍서원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서 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맹세코 다 건지리다.

중생이 중생이기 때문에 내가 맹세코 그를 다 건지겠다는 안목이 있는가 하면, 중생이 본래 공한 줄 알고,

나도 공하고 중생도 공한 줄 알고 중생을 열심히 건지겠다는 차원이 있고 또,

한 차원 올라가면 중생이 본래 부처인데,

부처인 중생인줄 알면서 내가 맹세코 다 건지겠다.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사홍서원을 그런 차원으로 쭉 끝까지 다 설명을 했습니다.

참 정말 ‘불교가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그때 제가 깨달은 바가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四弘誓願이라 하더라도 번뇌가 곧 보리.

煩惱無盡誓願斷.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이야기 하더라도 번뇌가 곧 보리입니다.

번뇌가 곧 보리.

生死가 곧 涅槃입니다.

그렇게 알고 번뇌를 열심히 끊어야 된다.

그것이 우리말로는 그런 모순의 말이 없습니다.

그런 모순적인 말이 없다고요.

 

특히 흑백논리로 비추어보면 그런 모순이 없는데,

불교를 이해하는 데는 그런 말이라야 설명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를 하면서 그런 말로 설명을 하고,

또 그런 말이 납득이 되어야지,

이것을 어떻게 흑백논리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질문하신 분도 본래 보리인 번뇌를 끊어야 된다.

이렇게 알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또 본래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

부처인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이 참 모순이지요.

모순이지만,

그렇게 알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서장의 정신과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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