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심요(圓悟心要)

113. 조부사(詔副寺)에게 드리는 글

通達無我法者 2008. 2. 21. 15:41
 





113. 조부사(詔副寺)에게 드리는 글



옛날 설산(雪山)동자는 게송 반 구절을 들으려고 온몸을 버렸고, 혜가조사는 팔을 끊고 무릎이 눈에 빠지도록 서서 한 마디를 구하였고, 노행자(盧行者 : 6조)는 8개월 동안 방아를 찧었습니다. 상골(象骨 : 설봉스님)은 밥을 짓고 물통을 져 나르며, 원두(園頭)를 본 암두스님과 바느질을 한 흠산스님과 함께 공부하면서, 동산(同山)에 아홉 번 오르고 투자(投子)스님에게 세 번이나 갔었습니다. 이는 오직 이 일을 참구하려고 한 것이었으며, 그 밖에 힘을 다해 애쓰고 눈과 서리 위에서 잠을 자며 괴롭게 공부하면서 담박한 음식을 먹었던 일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애초에 명예와 이익에 매였던 것이 아니고 모두가 생사대사를 가슴 깊이 품고 불조의 씨앗[種草]을 계승하고 융성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 쌓인 숲이 광채를 묻고서 소리와 자취가 인간에 이르지 않았으니, 많은 분들이 늙어 죽을 무렵까지 이르러서, 마치 새가 새장을 벗어나듯이 탈쇄(脫灑)하게 홀로 체득하였습니다. 분명하게 깨달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기(傳記)에 실린 경우는 태산에서 한 털 끝이나, 백천만 가운데서 불과 얼마 안되는 작은 경우일 뿐입니다. 고상하고 깊숙하게 은둔하여 강과 골짜기에 유전하면서 영원히 떠나 되돌아보지 않았으니,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고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큰 뜻과 온전한 기틀은 알음알이나 설명을 초월했고 그림자나 자취를 넘어서 성량(聖量)마저도 벗어났으니, 그러니 어찌 자잘한 일이라 하겠습니까. 분명히 지향하는 목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숙세에 익혀온 종자가 수승하여 근기와 역량이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아야만 그런 뒤에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비록 머리, 눈, 골수, 뇌라 할지라도 스스로 아끼질 않는데, 더구나 소소한 어려움과 수고로움이겠습니까. 지난날 크게 통달한 사람들은 종지를 체득한 뒤에 깊숙이 문을 잠그고 견고하게 숨었습니다. 그리고는 맞고 거슬리는 방편을 사용하여 고의로 해를 끼치기도 하고 노여움을 나타내 옥하고 매질하고 꾸짖기도 하는 등의 백천 가지 수단으로 학인을 시험코저 하였습니다.



그런 고초를 거치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기를 기다렸다가 한 번 살짝 밀쳐주고 한 조각 말과 조그마한 방편을 베풀었습니다. 이는 마치 매우 배고프고 피곤했던 사람이 음식을 얻은 듯, 제호(醍?)와 감로수를 부어주듯 했습니다. 소중하고도 기쁘게 부지런히 하여 잃지 않고 큰 법기를 성취하여 향상인의 지름길을 밟았습니다. 오히려 너절한 경지에서 푹 썩혀 익어야 비로소 부촉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회양(懷讓)스님은 조계스님에게 있은 지 8년만에야 비로소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옳지 않습니다”하였으며, 능(慧稜)스님은 설봉스님에게 가서 15년 동안 좌복을 일곱 개나 떨어뜨렸습니다. 영운(嶺雲)스님은 30년을, 용천(涌泉)스님은 40년을 있었으며, 덕산스님과 임제스님도 모두가 오랜 세월을 스승의 문하에 의지해 있었습니다.



이 도는 모든 성인도 전하지 못하는 오묘한 것인데, 어찌 경솔하고 태만한 마음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영가스님은 말하기를 “분골쇄신해도 은혜를 갚기에는 부족하니, 한 구절에 요연히 백억 구절을 뛰어 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상화(霜華)라는 수행인이 대위산에 있으면서 소임을 볼 때였습니다. 하루는 창고 앞에서 키질을 하는데 대원(大圓)스님이 떨어뜨린 쌀을 한 톨 줍더니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수행인이여, 이 한 톨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백천 톨이 한 톨에서 나온다.”

그러자 상화가 따져 물었습니다.

“백천 톨이 이 한 톨에서 나온다면 화상께서는 말씀해 보십시오. 이 한 톨은 어디서 나왔는지를.”

대원스님은 소매를 떨치고 가버렸는데 저녁 소참(小參)에서 대중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대중들아, 쌀 속에 벌레가 있구나”라고.



조주스님이 동성(桐城) 땅에 갔을 때 길에서 투자스님을 만났는데 투자스님은 인절미떡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조주스님이 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투자스님의 소문을 들어왔는데, 그저 인절미 파는 늙은이일 뿐이네.”

“그대는 아직 투자를 알지 못했네.”

“어떤 것이 투자인가?”

투자스님이 인절미를 집어 들더니 말하였습니다.

“인절미, 인절미지.”



쌀 속의 벌레가 어찌 인절미 속의 벌레만이야 하겠습니까. 만약 투자를 참구할 수 있다면 석상(石霜)을 보게 될 것입니다.“ 듣지도 못하였습니까? ”대중 속에 있는 사람아, 납승이라면 첫 번째 금강의 안목을 얻어야 하며, 두 번째는 금강의 보검을 얻어야 하며, 세 번째는 주장자를 얻어야 하며, 네 번째는 납승의 본분소식을 얻어야만 한다“고 했던 말을. 설사 낱낱이 꿰뚫었다 해도 거기에 다시 마지막 한 구절[末後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