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성사(叢林盛事)

22. 천동사의 수좌 / 차암 수인(且菴守仁)선사

通達無我法者 2008. 2. 25. 16:48
 



22. 천동사의 수좌  / 차암 수인(且菴守仁)선사



차암 수인(且菴守仁)선사는 월주(越州) 상우(上虞)사람이다. 어려서 천태교(天台敎)를 익히다가 처음 괄창(括蒼)땅에서 설당(雪堂道行)스님을 따라 구주(衢州)오거사(烏巨寺)를 지나는 길에, 때마침 설당스님의 보설(普說)법회를 듣게 되었다.

"지금 그대들이 공부하는 일은 마치 활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아서 먼저 발을 안정시켜 놓고 그 다음에 활쏘기를 배워야 한다. 뒤에는 비록 무심결에 쏘아도 오래 익혔기에 쏘는 족족 명중하게 된다."

그리고는 악!하고 할을 하면서 "지금 화살 날아간다!" 하니 수인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숙이며 화살 피하는 자세를 취하다가 밝게 깨쳤다.

여름안거가 끝나자, 모친이 연로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인사를 드리니 설당스님이 게를 지어 전송하였다.



지난 날 유엄(惟儼)스님 `사상(事相)'을 모두 알고

신발 벗고 남쪽으로 큰스님 찾아갈 제

석두(石頭)로 가는 미끄러운 길 고생을 마다않고

몽둥이로 뒤통수 얻어맞으니 모든 게 마땅하구나

그대의 굳건한 뜻을 그 누구와 견주리오

괄창산 백련주(白練州)로 나를 찾아왔구나

거센 파도 소용돌이 치는 곳에

큰소리로 불러봐도 뒤돌아보지 않고

서산에 늙도록 함께 살자 하였더니

다시금 산넘어 고향길을 가겠다하네

돌아올 땐 아마 이 해도 저물겠지!

거기다가 조주에는 노두구(爐頭句)가 있으리라.

儼老昔年窮事相

脫履南游扣宗匠

石頭路滑不辭勤

腦後一槌曾兩當

仁禪勁志許誰儔

訪我蒼山白練州

萬浪千波洶通處

果然呼喚不回頭

西山積老期同住

又設重尋越山路

歸時應是歲華深

趙州更有爐頭句



수인스님은 그후 매산(梅山)땅으로 돌아가 16년간 암자에서 살았다. 그 후 천동사(天童寺)정각(宏智正覺:1091~1157)스님이 대주(隊州)에서 상우(上虞)에 이르러 그의 암자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침상을 맞대고 함께 이야기해 보고는 그를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정각스님이 천동사로 돌아와 하안거가 끝나가도록 수좌(首座)를 맞이하지 않자 일 맡은 이들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아뢰었다. 정각스님은 우리 수좌가 조만간 이곳으로 올 것이라 하고 시자를 월주(越洲)로 보내 수인스님을 맞이하였다. 수인스님이 천동사에 도착하자마자 수좌실로 초빙하니, 대중들은 이를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으나 얼마 후 수인스님에게 불자를 잡고 패(牌)를 걸게 하니, 대중들은 그에게 굴복하였다.

그 후 2년만에 굉지스님이 입적하자 묘희스님이 장례를 주관하였는데 동서 반열(班列)의 모든 승려가 포복(布服:승려의 喪服)을 입었으나 수인스님만은 이를 입지 않았다. 묘희스님이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묻자 수인스님은 은밀히 그 사유를 말하였다. 이에 묘희스님은 "원래 이 사람은 설당 회하에서 온 사람이였군!"하였다.

그는 후일 장노사(長蘆寺)의 주지를 지냈으며 법석이 크게 융성하였다.

오대산 노파 화두에 대하여 지은 송이 있는데 학인들은 앞다투어 이를 읊었다.



등심초며 쥐엄나무 약초를 파는 점포를 열어 놓고

날마다 한 되 한 홉 사갈 사람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는데

끊임없이 장마는 계속되어

본전 ․ 이자 모두 날리고 수심에 젖어 문전에 기대섰다.

開箇燈心皁角鋪  日求升合度朝昏

只因霖雨連綿久  本利一空愁倚門



현모(顯謨閣學士) 여정기(呂正己)가 일찍이 스님에게 도를 묻고 떠나면서 게를 써달라 하니 스님은 붓을 쥐었다.



그대가 오늘 이렇게 장노사에 왔는데

나의 옷 털어봐도 아무런 물건없네

가다가 만난 사람이 내살림 어떻더냐고 묻거든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거칠더라고 전해주오.

士今親切到長蘆  抖擻衣衫一物無

此去逢人如借問  但言風急浪華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