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17.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다는 뜻이 무엇인가 ?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7:39
17. 불신이 법계에 충만하다는 뜻이 무엇인가 ?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 군생 앞에 두루 나타나시고.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시나
   항상 보리좌를 떠나지 않으시네.

   佛身充滿練法界 普現一切群生前
   隨綠卦惑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천하의 총림에서 부처님을 찬양하는 데에 이 게송을 많이 사용한다.
이 게송은 「화엄경」 제 6권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백호상(白毫相)의 과광명 속에
 일체법승음보살(一切法勝踵菩薩)의 소리를 나투어 보이셨다" 했다.
이 말이야말로 「화엄경」 전체의 핵심이고,
또한 모든 조사들이 외길에서 서로 만났던 골수이기도 하다.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다'는 소리를
어는 곳에서라도 부처님을 모셔 앉히려고 헤아리겠는가라고 설명하고,
`일체의 군생 앞에 두루나타나시고'를
눈과 귀 속에 딱 붙어 있어 볼래야 볼 수가 없다고 설명하고,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시나'라는 귀절을
허공에 허공을더하고 바닷물에 바닷물을 집어넣는다는 뜻이라고 풀이하며,
끝으로 `항상 보리좌를 떠나지 않으시네'를
언제나 변치않는 처소가 있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풀이한다면 일반적인 해석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본 뜻을 모르고서 잘못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몸 법계에 충만하여' 란
더딘 해가 강산에 걸린 것이며,
`일체 군생 앞에 두루 나타나시며' 란
봄바람에 화초가 향기로운 소식이며,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하시네' 란
지저귀며 서로 어울려 나는 제비이며,
`항상 보리좌를 떠나지 않으시네' 는
따뜻한 모래에서 졸고 있는 원앙새의 소식이다.
이렇게 알아들어야 일체법 수승한 음성을 들은 것이다.
마치 물을 한움큼 움켜쥐니 손에 달빛이 그득하다는 소식이다.

두보(杜甫:712∼770)의 시(詩)에
"꽃 속을 노니니 그 향기 옷에 가득하네[弄華香滿衣]" 라는 귀절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야광주를 굴리고 구슬을 희롱하네[珠轉玉回]" 라고 한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부처님의 몸>이란 유리궁전에 있는 흰 옥호보(玉毫¿)이며,
연화대 위에 있는 황금상(黃金相)이라 말해도 일부만을 파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32상 80종호까지도 눈 속의 금가루일뿐이니
모두 쓸데없는 소리이다.
<부처님의 몸>은 작위가 없어 모든 것에 속하지도 않는다.
언어문자를 가지고 알음알이를 낸다면
수만리의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법계에 충만한 부처님 몸>에 대해 말해본다면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그렇다고 마음으로도 알 수 없으며,
지혜로도 안되고 나아가 알음알이로도 이해할 수 없다.
오직 운문(雲門:?∼949)의 "똥 묻은 막대기가 부처이다" 는 화두와,
동산(洞山;910∼990)스님의 "부처란 삼[麻] 세 근이다" 라는 화두만이
그것에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기가 막힌 담론도 모두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 비방하며 달갑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그럴듯한 이론을 광대하게 인용하여 말하기를,
"부처님 몸은 태허(太虛)를 싸고 만상(萬象)을 머금는다.
 그리하여 물질[色]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모든 물질[色]에 두루하며,
 공(空)으로도 알 수 없으나 공(空)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것을 앞장서서 안내한다 해도 불신(佛身)을 앞선 것이 아니며,
 그것 뒤에 따른다 해도 불신(佛身)에 뒤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

쉿! 쉿! 허튼 소리 하지 말아라.
그 따위 소리는 밥 짓는 아낙네도 젖 빠는 어린애도 모두 할 수 있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아라.
설사 <부처님 몸[佛身]>이라고 말하더라도 잘못이다.
그러니 `군생 앞에 두루 나타나신다' 느니 또는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한다' 느니 하는 귀절에 대해서도
이러고 저러고 논하지 말자.

다음은 무엇을 <보리좌>라 하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 몸이 충만하면 보리 좌도 충만하다.
 그것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나눌 수도 없으며,
 구별할 수도 없기 때문에 나눌 수도 없다" 고 한다.
만일 <보리좌> 위에 따로 <부처님 몸>이 있다고 한다면 
`항상 떠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부처님 몸>이 충만했다면
덧없는 생사의 유루세간(有庄世間)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영가스님이 말한,
"꿈 속에서는 분명히 6취가 있었는데, 깨어나 보니 텅 비어
 대천세계도 모두 없더라" 한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깨어나면 부처님 몸이니 보리좌니 하는 말도 다 필요없다.
 그러니 그 어떤 말인들 잠꼬대가 아니겠는가!" 라고 한다.
참선하는 사람이 진정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부처님을 찬양한다 하더라도 도리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시방세계의 모든 것이 청정한 법신(法身) 그대로이다.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비추는 것처럼
털끝만한 장애나 가리움도 없는데,
까닭없이 한 점의 무명(無明)이 근본자리를 덮어버렸다.
그래서 우러러보고는 하늘이라 말하고,
굽어 살피고는 땅이라고 하며,
광대하게 엿보고는 법계(法界)라고 말한다.
산은 높고 물은 깊으며, 낮은 밝고 밤은 어두우며,
바람이 불면 먼지가 일어나고,
구름이 일면 새도 나는 등등의 모든 삼라만상의 빈 껍질을 벗기고
티없는 밝음[精明]을 드러내어 이른바 법신을 찾고자 한다면,
텅 비어 법신이라 할 것도 없다.
이처럼 분별망상을 일으켜 허망한 알음알이에 집착되면,
공을 색이라 하지도 못하고,
밝음을 어둠이라 하지 못하고,
친한 것을 소원한 것이라고 하지도 못하고,
증오를 바꾸어 사랑이라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것이 마음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고서는
무명의 진면목을 식별할 수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억지로 도(道)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고서 그들은
"나는 공(空)을 그저 볼 뿐이지 그것이 공(空)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며,
 색(色)을 볼 뿐 색(色)이라고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청정한 법신으로 관찰할 뿐이다" 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옳기는 옳으나
공(空)이니 색(色)이니 하고 구별하는 견해가 모두 없어진 것만은 못하다.

그것은 내가 능히 청정법신을 본다는 생각과 또 대상으로써
보여질 청정법신이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잊지도 못하고 끊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 바로 근본무명이다.
마르지 않은 무명의 물방울을 담박에 짜버리고
청정하지 못한 것은 세척해버려야 한다.
만약 세상의 갖가지 현상을 모두 밝혀서 무명을 없애려 한다면,
그것은 신발을 신고 신발 속의 가려운 곳을 긁는 정도도 못된다.
「원각경」에서 말한,
"이 무명이란 실로 본체가 없다.
 꿈 속에서 사람이 꿈을 꿀 때는 분명히 무엇이 있는 듯 하지만,
 깨고 나면 결코 아무 것도 없다" 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니 무명이 무슨 실체가 있어서 정해진 성품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바로 모든 본체가 그대로 청정법신일 뿐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경에서 말한대로, "깨고 나면 끝내 남는 것이 없다" 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깨어난 것인가!
아니다. 깨어난 것이 결코 아니다!
모름지기 <깬다〔醒〕>는 뜻은 두 가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 무엇보다 색·공(色·空)등의 법이 모두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으로서
청정한 법신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지말무명을 끊어버릴 수 있다.
그 다음에는 견문(見聞)의 알음알이가 없어지고
주관·객관[能·所]의 식(識)이 소멸하여,
한 법도 법신이라 여기지 말고
한 법도 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면 시시비비가 모두 사라지고 생각생각이 모두 여여(如如)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근본무명을 끊을 수 있다.
그러나 지말무명과 근본무명을 모두 담박에 끊어야 한다.
이 두 무명을 밑바닥까지 꿰뚫지 못하고
3∼5회쯤 나누어서 끊으려 한다면 안된다.
어찌 마음으로 사량분별하고 언어문자로 따지는 것이 용납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