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16. 불법의 비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7:27
16. 불법의 비방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한유(韓愈:768∼824)는 당나라의 유명한 유학자이다.
그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많은 글을 발표하여 불교를 비난했다.

태전(太 )스님이 그의 잘못을 강력하게 지적했는데도,
한유는 여러 서적에서 헐뜯고 비난하는 얘기를 계속했다.


유종원(柳宗元:773∼819)도 한유와 동시대 사람인데,
문장으로써 당대를 울렸고
많은 조사들의 비갈(碑碣)을 지어 불교를 세상에 드날렸다.
불교의 극치를 이룩하지는 못했으나
애초부터 한유가 불교를 헐뜯고 훼방했던 것을 본받지는 않았다.

한편 송나라 때에 구양수(歐陽修:1007∼1072)가 출현하여
문장을 한유를 본받고
한유의 「원도론(元道論)」을 근본으로 해서 불교를 비난했다.
날이 갈수록 불교에 대한 유생(儒生)들의 비난은 더욱 심해져서
불교는 더더욱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지는 그네들은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 부질없고 흉흉한 말만 많아졌을 뿐이지,
불교 자체를 비판하지도, 그렇다고 도와주지도 못했다.


이때에 명교(明敎:1007∼1072)스님이 「명교론(明敎論)」을 써서
한유의 배불론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한유를 비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양수의 잘못을 타일러 주기 위해서였다.
후세에도 한유와 구양수를 본받아 불교를 비방하는 유생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자 우리 불교의 스님들이 그들의 비난에 대해 가끔 비판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점을 이렇게 생각한다.
그네들이 불교를 질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실로 불교를
제대로 몰라서 그랬다는 것이다.
가령 저들이 불교를 제대로 알았다면 불교를 외호하려고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되지도 않게 억지로 헐뜯고 비방했으니
어찌 그들인들 마음 속에 부끄러움이 없었겠는가?
인과응보의 이론으로 따져보더라도 그 정도의 비방은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는 제바달다가 나쁜 계략을 세워
당신을 죽이려는 위험을 여러번 만났으나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미 제바달다가 당신에게
숙세의 원한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에서 서로 만나더라도,
과보가 다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조용히 관조하시며,
마치 감로수를 마시듯이 그 고통을 달게 받으셨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혼들렸겠는가.
저 한유와 구양수가 불교를 비방한 것도 제바달다의 원한이 씌워서
그런 것인 줄을 그 누가 알겠는가!
다만 정념(正念)을 굳건히 지니고
그저 제바달다의 원한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면,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도 저절로 사라지리라.

영가(永圈)스님은 말하기를,
"저네들이 비방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허공에 불을 붙이려는 것처럼
 쓸데없이 자기 자신만을 피로하게 할 뿐이다"라고 했다.
영가스님의 이 말씀이 참으로 옳기는 옳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말씀은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 듯하다.
영지원조(靈芝元照:1048∼1116)스님이 하루는
왕통(王通:584∼618)의 저서인 「중설(中說)」을 가지고 와서 묻기를,
"어떻게 불교를 비방하는 소리를 틀어막을까요?" 하자.
영가스님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 고 했다.
그러자 영지스님이 "그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대꾸하지 말라'는 말과,
`비방하더라도 내버려 둬라'는 것은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잘못이라고 여겨진다.
「원각경」에서는,
"내[我]가 공(空)하다는 것을 알면 나를 훼방할 것이 없느니라" 고 했다.
그러므로 저들이 비방하더라도 그냥 두라는 말과
대꾸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결국은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아! 슬프도다!
국가의 공론(公論)을 담당하는 자들은 근본은 따져보지도 않고
유생들이 불교를 이단이라고 배척하는 것만을 보고
그저 불교를 외도라 비난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시골 아낙네들이 싸리문을 붙들고
서로 욕지거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되어서야 어찌 무생자인(無生慈忍)의 힘과 인과응보의 원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겠는가?

옛날에 어떤 임금님이 500마리의 술 취한 코끼리를 풀어놓아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다.
그 때에 부처님은 다섯 손가락으로 코끼리를 살짝 들었다 땅에 내려 놓았다.
그랬더니 다른 코끼리들도 길이 잘 든 듯이 엎드렸었다.
바로 이 때에 아나율(阿那律)은 부처님의 다섯 손가락 끝에
각각 금빛사자가 나타난 것을 보았다.
이 때에 어떤 제자가 부처님께 질문했다.
"일찌기 듣자오니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몸은 헛된 것이므로 아끼고 보호할 필요가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자의 위엄을 나타내어 술 취한 코끼리의 위험을 막으시니,
그것은 헛된 몸을 아끼고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어찌 코끼리를 막겠다는 마음이 있었겠느냐.
나는 다만 오랜 세월 동안 자인삼매(慈忍三昧)를 닦았을 뿐이다.
지금도 손가락을 세우고 이 자인삼매에 들어가
코끼리가 짓밟고 해치는 대로 두었으나,
나의 삼매의 힘이 성숙했기 때문에 사자의 위엄이 저절로 나타난 것이니라"
부처님의 이 말씀을 가만히 새겨보니,
이것이야말로 재난을 극복하고 남의 비방을 막는 최상의 방법이다.
재앙을 막기 위해서 부처님이 말을 사용했나?
아니면 기지(機智)를 사용했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또 속담에도 이른바,
"훌륭한 도덕군자를 눈앞에 만나면 그 사람이 했던 말은 어드덧 사라지고,
다만 그 사람의 훌륭한 덕에 심취된다" 라는 말이 있다.
어찌 그 도덕군자가 일부러 그렇게 하리라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덕에 심취되겠는가!
바로 이것도 코끼리의 위험을 막는 한 방법이다.

혹시라도 그렇지 못한 경우는 모두가 자신이 초래한 것이다.
상대의 비방을 말로 이러구 저러구 따져서 물리치려 하면,
더더욱 그들의 비방만 늘어나게 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