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15. 애증심으로도 도를 깨칠 수 있는가 ?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7:21
15. 애증심으로도 도를 깨칠 수 있는가 ?


정(情)은 애(肯)와 증(憎) 때문에 생기고,
자취는 진(進)과 퇴(退) 때문에 생긴다.
바로 이 애증과 진퇴 때문에 인간이 생사에 유랑하며,
3계(三界)에 윤회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세간을 초월하고 멀리 성도(聖道)에 계합하여
보리를 신속하게 증오(證悟)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유랑>과 <초월>은 무슨 뜻이겠는가?
성인께서 언교(言敎)를 통하여 알려주려 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도를 깨닫도록 한 것이고,
또 하나는 업에 얽매이는 이유를 밝히려 한 것이다.
아끼는 마음[肯] 때문에 도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은
공적인 재물을 아끼고 여러 사람을 아낀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상주물(常住物)을 마치
자기의 안목(眼目)을 보호하듯이 아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공적인 재물을 아낀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 가르침에도,
"내가 많은 생을 통하여 깨닫기를 바랬던 까닭은, 일체 중생을 구호하여
괴로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중생을 아끼는 것이다.
이렇게 아끼는 마음을 품게 되면
깨달음을 기약하지 않아도 자연히 깨닫게 된다.

아끼는 마음에 업에 결박된다는 것은 자신을 아끼는 것이고,
자기의 가까운 권속을 아낀다는 뜻이다.
자신을 아끼기 때문에
아첨·질투·반연·치축(馳逐)·광망(狂妄)·전도(倒)가 마구 일어난다.
자기의 권속을 아끼려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고 마구 날뛴다.
이렇게 몰지각하게 권속을 아끼다 보면
생각마다 생사의 업습(業習)과 뒤얽혀버리고 만다.
이와는 반대로 증오가 있어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자기를 책망하는 것이다.
자기의 가까운 권속 중에 올바른 수행을 안하는 자를 또한 책망한다.
자기를 책망하기 때문에 게을러서 그저 편함만 바라는 잘못이 있게 되면,
스스로를 경책하고 이 점을 뼈아프게 생각하며,
깊이 반성하여 고치고 후회한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따로 깨달으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반면 자기의 잘못을 증오하는 태도를 버리는 경우,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들춰내게 되고
급기야는 분노가 가슴 속에 쌓이고 불만이 얼굴에 가득해진다.
이것이 바로 업에 얽매이는 것이다.
사랑과 증오의 도는 이와 같고,
진퇴의 이치 또한 이와 같다.
유가(儒家)에서 말하기를 "벼슬자리에 나아가면 충성을 극진히 하고,
벼슬에서 물러나면 자기의 허물을 보완한다" 는 훈계가 있다.
그러니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인들 어찌 그와 다르겠는가?

나아간다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나아가는 것은 깨달음을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꾸준히 용맹스럽게 수행을 하고 계행을 낱낱이 지켜서,
아침에는 저녁이 빨리 올까 걱정하고,
저녁에는 아침이 밝을까 걱정하듯 열심이 해야 한다.
또한 생각생각이 머리에 불을 끄듯 하여
잠시라도 잊어버리려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나아가는 것은 공무(公務)를 관장하고
교화의 방편을 행하는 것이다.
침식을 잊을 정도로 부지런히,
추위와 더위도 잊으며 털끝만치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면
반드시 실천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사람은 감히 자기의 이익 때문에 공무를 태만히 하지 않는다.
이 경우를 두고 공직을 맡는 것이 도를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훌륭한 공직살이라고도 한다.
혹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명리를 구하는 마음을 허망하게 일으켜
얼굴이 꺼멓게 되고 발에 못이 박히도록 숨돌릴 겨를 없이 분주하기만 하다.
그 결과 생각할 수도 없이 업보만 계속 쌓여
공직에 나가 있을수록 더더욱 업에 얽히고 만다.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도 또한 두 종류가 있다.
숨어서 운둔하는 생활을 고상하게 여겨
도념(道念)을 지키기만 하는 부류가 있고,
조용하고 한가한 것을 숭상하여 세상을 업신여기는 부류가 있다.
이 두 부류를 모두 공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러나 진짜 물러나는 것과는 그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크다.
정말로 타인을 위해 일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고
세상을 교화할만한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어서 공직에서 물러나
은거해 열심히 도를 닦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자기의 수행을 마치지 못해
감히 세상 일에 망령되이 간섭하지 않고 깊은 산 속에 은거하여
인적이 끊어진 곳에서 자신과 세상을 잊어버린 경우가 있다.
이런 물러남이야말로 비로소 도에 합치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개중에 어떤 사람은 교제를 끊게 되면 구애를 받지않아
먹고 사는 것에 부족함이 없어
따로 세상에서 더 구할 것이 없다고 믿기도 한다.
따뜻한 옷에 배불리 먹으면서 제멋대로 지낸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속세를 끊었다"고 말한다.
높은 누각에 누워서 쓸데없는 이야기나 늘어 놓으면서
도리어 대중들을 나무라고,
공적인 소임을 맡은 사람을 비웃기도 한다.
게으르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자기가 여태껏 입은 은혜를 갚을 줄도 모른다.
이럴 경우 어찌 공직에서 물러나 도를 닦는 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 어느날 문득 보연(報緣)이 다한다면,
앞으로 닥칠 업(業)을 어찌 피하겠는가?
생사의 굴에 빠져들어
자기의 배꼽을 스스로는 깨물지 못하는 것처럼 피하지 못한다.

애증과 진퇴의 이치는 흑백처럼 분명해서 깨닫는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번뇌의 업을 쌓는 쪽으로 가거나 아니면
번뇌의 업을 쌓는 쪽으로 가게 된다.
한 생각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받는 과보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능엄경」에서도,
"그대를 윤회전생하게 하는 생사의 결근(結根)은
너의 6근(六根)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대가 신속히 깨달아야 할 해탈과 묘상(妙常)도 너의 6근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니라" 라고 한다.
이것은 애증과 진퇴가 도에 합치될 수도,
업을 맺을 수도 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 말이겠는가?

눈밝은 납자들이여!
업의 결박이 깊지 않고 도가 멀리 떠나지 않았을 때
부지런히 용맹수행하여 기연을 굴리고 일찌감치 깨치기를 노력하소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걸핏하면 업의 결박을 만나게 되리니,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