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24칙 철마의 늙은 암소〔鐵磨牸牛〕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8:44
 

 

제24칙 철마의 늙은 암소〔鐵磨牸牛〕


(수시)

높고 높은 봉우리 위에 서 있노라니 마구니며 외도가 알지 못하고, 깊고 깊은 바다 밑을 가노라니 부처의 눈으로도 엿보지 못한다. 설령 눈은 흐르는 별처럼 민첩하고 기봉(機鋒)은 번개 치듯 하여도,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끄는 것처럼 자취를 없애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본칙의 거량을 살펴보아라.


(본칙)

유철마(劉鐵磨)가 위산(潙山)에 이르자,

-찾아오기 힘들다. 이 노파가 본분을 지키지 않았군.


위산스님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늙은 암소야, 네가 왔느냐?”

-잘 말했군. (물고기를 유인해서 잡으려는) 탐간영초(探竿影草)다. 어찌 알아보기 어려우리요?


“내일 오대산(五臺山)에서 큰 재(齋)가 있답니다. 스님, 가시렵니까?”

-화살을 헛되게 쏘진 않았군. 당나라에서는 북을 치는데 신라에서는 벌써 춤을 추는구나. 용서해주는 것은 너무나 빠르고 처벌하는 것은 너무나 늦구나.


위산스님이 눕자

-맞혔구나. 그대는 어느 곳에서 위산을 만나리요? 바다와 같은 위산의 도량 속에 좋은 생각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까?


철마는 곧바로 나가버렸다.

-지나갔군. 눈치를 채고 움직인 것이다.


(평창)

유철마는 비구니다. 마치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아서, 머뭇거리기만 하면 목숨을 잃는다. 선도(禪道)의 긴요한 곳에 어찌 허다한 일이 있겠는가? 작가들이 서로 알아보는 것은 마치 담장 너머 뿔만 보고서도 소인 줄을 알고, 산너머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서 불이 난 줄을 아는 것 같다. 툭 건드리면 바로 움직이고 누르기만 해도 곧 몸을 비낀다.

위산스님은 말하기를, “노승이 죽은 뒤엔 산아래 한 신도의 집에 암소로 태어날 것이다. 왼쪽 옆구리에 다섯 글자 ‘위산승모갑(潙山僧某甲)이라고 쓰여 있을 것이다. 그때에 위산이라 불러야 되겠느냐, 암소라 불러야 되겠느냐?”고 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물어도 확실히 이를 대답하지 못한다. 유철마는 오랫동안 참구하여, 기봉이 높고 준험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유씨 쇠절구〔劉鐵磨〕라고 불렀다. 그는 위산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암자를 세웠다. 하루는 위산을 방문하자, 위산스님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보고서 “늙은 암소, 네가 왔느냐?”하니, 유철마는 말하였다. “내일 오대산에서 큰 재가 있다 하는데, 화상은 가시렵니까?” 그러자 위산은 누워버렸으며, 유철마는 곧바로 나가 버렸다. 그들은 마치 서로 대화한 것 같으나, 이는 선(禪)도, 도(道)도 아니다. 이를 아무것도 일삼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느냐? 위산과 오대산과의 거리는 수천 리이다. 유철마는 무엇 때문에 위산스님에게 머나먼 오대산 재에 가자고 하였을까? 말해보라, 그뜻이 무엇인가를.

이 노파가 위산스님의 말을 알아듣고 실오라기를 당겼다가 늦춰주듯 한 번은 놓아주고 한 번을 거둬가면서 번갈아가며 주고받았다. 이는 마치 두 거울을 마주 비추면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듯, 기연마다 서로가 맞고, 구절마다 서로 투합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세 차례나 툭 쳐도 되돌아보질 않는다. 그러나 이 노파는 조금치도 속일 수 없었다. 이는 세재(世諦)로서의 정견(情見)이 아니다. 마치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려 있듯, 맑은 구슬이 손아귀에 있는 듯, 붉은 놈이 오면 붉게 보이고 검은 놈이 오면 검게 나타난 것이다. 그는 향상(向上)의 일을 알았기에 이처럼 한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저 아무것도 일삼지 않는 것인 줄로 알고 있을 뿐이다.

오조 법연(五祖法演) 스님이 말하였다. “있는 일을 없는 이로 만들지 말라. 일이란 더러는 없는 일에서 발생한다.” 그대들이 참구하여 이를 깨치면 그가 이처럼 말했던 것이 여느 사람의 대화와도 한가지였음을 알게 된다. 언어에 얽매이는 일이 많기에 모르는 것이다. 지음(知音)만이 이를 알 수 있다.

이는 건봉(乾峰)스님이 대중 법문에서

“하나〔第一義諦〕를 말할지언정 둘〔第二義諸〕은 말하지 않는다. 한 번 용서해줬다가는 제이의제에 떨어진다”하니. 운문스님이 대중 가운데에서 나와 말하였다.

“어제 한 스님이 천태산(天台山)에서 왔다가, 곧바로 남악(南岳)으로 가버렸습니다.”

이에 건봉스님이 말하였다.

“전좌(典座)야! 오늘은 보청(普請 : 집단노동 등을 위한 집합)을 하지 않겠다.”

이 두 사람을 살펴보니, 놓아줄 때는 둘 다 놓아주고 잡아들일 때는 둘 다 잡아들인다.

위앙(潙仰)스님의 회하에서는 이를 경치(景致 : 상대방이 살던 곳의 풍경을 화제로 하여 일깨워주는 지도법)라고 말하는데, 바람․먼지․풀잎이 흔들리는 것까지 털끝 만한 것도 모조리 다 질문한다. 또 이를 격신구(隔身句)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뜻은 통하여도 말에는 막힘이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좌우로 자유로이 돌릴 줄 알아야만이 작가(作家)라 할 수 있다.


(송)

일찍이 철마(鐵馬)를 타고 겹겹이 쌓인 성을 쳐들어갔으나

-전투에 숙련된 작가이며, 변방 요새를 지키는 장수이다. (전투를 위한) 일곱 가지 장비를 몸에 갖추었다.


여섯 나라가 이미 평정되었다는 칙명을 전해듣게 되었네.

-개가 사면장(赦免狀)을 입에 물고 있다. 천하의 천자로구나. 바다는 고요하고 황하수는 맑아진 것을 어찌하랴?


그래도 쇠채찍 움켜쥐고 돌아오는 길손에게 묻건만,

-이 무슨 소식일까? 한 지팡이를 두 사람이 붙잡고 있군. 서로 부르며 함께 왔다갔다하는구나.


깊은 밤 뉘와 함께 대궐 앞을 거닐어볼까?

-그대는 소상강으로 나는 진(秦)나라로 말해보라,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평창)

총림에서는 설두스님의 이 송을 최고로 여기고 있다. 100칙의 송(頌) 중에 이 송이 논리가 가장 잘 갖추어졌고 특히 지극히 오묘하며 본질을 명확하게 송하였다.

“일찍이 철마를 타고 겹겹이 쌓인 성을 쳐들어갔다”는 구절은 유철마가 이처럼 찾아온 것은 노래한 것이며, “여섯 나라가 평정되었음을 알리는 칙명을 전해듣게 되었다”는 구절을 위산스님이 이처럼 물은 것을 노래한 것이며, “그래도 쇠채찍을 움켜쥐고 돌아오는 길손에게 물었다”는 구절은 유철마가 내일 오대산에 큰 재가 있다 하는데, 화상께서는 가시렵니까? 하고 물은 것을 노래한 것이며, “깊은 밤 뉘와 함께 대궐 앞을 거닐까?”라는 구절은 위산스님이 편히 눕자, 유철마가 곧바로 나가 버린 것을 노래한 것이다.

설두스님은 이러한 재주가 있어, 급하고 절실한 곳에서는 급하고 간절한 곳을 노래하였고, 느슨하게 여유있는 곳에서는 느슨하고 여유있게 노래하였다.

풍혈(風穴)스님도 일찍이 이를 염송(拈頌)하였는데, 설두스님의 뜻과 같았었다. 이 염송을 여러 총림에서 모두 찬미하였다.


높고 높은 봉우리 위에 서 있노라니,

마구니와 외도가 알지 못하고,

깊고 깊은 바다 밑으로 가노라니

부처가 눈으로도 엿보지 못한다.


한 사람은 편안히 눕고, 한 사람은 문득 나가 버렸던 일을 보아라. 만일 다시 어줍잖게 번거로이 말하였다면 그 자리에서 길을 잃었을 터인데 설두스님의 염송은 가장 훌륭하다. 이는 “일찍이 철마를 타고 겹겹이 쌓인 성 안에 들어간 경지”라 하겠다. 만일 똑같은 도를 얻고 똑같은 도를 깨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말해보라, 무슨 뜻을 얻은 것일까?

듣지 못하였는가? 어떤 스님이 풍혈스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위산스님이 말한 ‘늙은 암소야! 네가 왔느냐?’는 뜻은 무엇입니까?”

“흰 구름 깊은 곳에 황금빛 용이 뛴다.”

“유철마가 ‘내일 대산에 큰 재가 있다는데 화상께서도 가시렵니까’라고 말한 뜻은 무엇입니까?”

“푸른 파도 가운데 옥토끼가 놀란다.”

“위산스님이 눕는 체 한 뜻은 무엇입니까?”

“늙어서 추저분하고 게으르고 할 일 없는 날에 한가하게 누워서 청산을 마주하고 있다.”

이 뜻 또한 설두스님과 같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