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25칙 연화봉 암주의 주장자〔蓮花柱杖〕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8:45
 

 

 

제25칙 연화봉 암주의 주장자〔蓮花柱杖〕


(수시)

기봉〔機〕이 단계적인 지위를 떨쳐버리지 못하면 독바다〔毒海〕에  떨어지게 되고, 말이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지 못하면 저속한 데 빠지게 된다. 만약 돌 부딪치는 불빛〔石火〕속에서 흑백을 구별하고, 번뜩이는 번갯불에서 살(殺)․활(活)을 분별한다면, 시방(十方)의 (논란을) 꽉 틀어막아 천 길 벼랑처럼 우뚝하리라. 이러한 상황을 아느냐? 본칙의 거량을 살려보자.


(본칙)

연화봉(蓮花峰)의 암주(庵主)가 (입적하던 날에) 주장자를 들고서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자, 봐라! 이마 위에 (진리를 보는) 또 하나의 눈을 갖추었다. 그렇지만 세상사람들의 고정된 관념의 함정일 뿐.


“옛사람들은 여기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머물려 하지 않았는가?”

-허공에 말뚝을 박는 헛수작 부리지 말라! 방편으로 궁전을 세워 사람을 유인하는군.


대중들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천 사람 만 사람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래도 조금 멀었다. 애석하다. 새장에 갇힌 송골매(수행승)로군.


스스로 대중을 대신하여 말하였다.

“그들이 수행의 도상에서 별 도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행의 도상에서 이러쿵저러쿵 분별한다면, 아직 반쯤밖에 안 된다. 설사 도움을 얻은들 무엇 하려고? 어찌 전혀 한 사람도 없을라구.


다시 이어 말하였다.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천 사람 만 사람이 여기에 앉아 있지만,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 한 사람 내지는 반 사람만이 알았을 뿐이다.


또 스스로 대신해 말하였다.

“주장자를 비껴든 채 옆눈 팔지 않고 첩첩이 쌓인 산 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가노라.”

-얼씨구. 30방 먹여라! 그가 외통수이기 때문이지. 뒤통수에서 뺨이 보이는 놈과는 사귀어서는 안 된다.


(평창)

여러분은 연화봉 암주를 알 수 있겠느냐? (전혀 자취를 남기지 않아) 발꿈치조차도 땅에 대지 않았다. 그는 송(宋)이 건국됐을 무렵 천태산 연화봉에 암자를 세웠다. 옛사람들은 도를 얻은 뒤에는, 초옥이나 석실(石室)에서 발 부러진 가마솥에 나물 뿌리를 삶아 먹으면서 날을 보냈다.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인연 따라 일전어(一轉語)를 하면서,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하고저 하였다.

그는 어떤 스님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바로 주장자를 들고서, “옛사람이 여기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을까?”라고 물었다. 이렇게 전후20여 년간을 지내왔으나, 끝내 한 사람도 대답한 자가 없었다. 이 물음에는 방편도 있고 진실도 있고, 지혜도 있고 행동도 갖추어져 있다. 그의 속셈을 알았다면 말해줄 것이 없다. 그대들은 말해보라, 무엇 때문에 20여 년간 이처럼 물었는가를? 이는 종사(宗師)이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인데, 무엇 때문에 언어의 말뚝에 얽매여 있는가? 만일 이 경지를 알아차리면 자연히 알음알이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2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설명하기도 했고 의견을 붙이기도 하면서 자기가 이해한 바를 드러내기에 온 힘을 다하였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해도 궁극의 자리에는 이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록 이 경지는 언구 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구가 아니고서는 분별하지 못한다. 듣지 못하였느냐? “도란 본디 말이 아니지만 말로 인하여 도는 나타나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을. 그러므로 사람을 시험하는 급소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알아차려야 한다. 옛사람이 남긴 일언반구(一言半句)는 다름이 아니라, (그 급소를) 아는가 모르는가를 보려는 데 있다.

암주는 학인들이 알지 못한 것을 보고서 스스로 대신하여 “그들이 수행의 도상에서 도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보아라. 그는 제대로 말했기 때문에 자연히 이치와 기틀에 계합했다. 어찌 종지를 잃었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말을 들으면 모름지기 종지를 알아야지, 제멋대로 기준을 세우지 말라”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오로지 한 번 부딪쳐 보고는 그걸로 그만이니, 심정이야 알겠다만 뻔뻔스럽고 미련한 일임을 어찌하랴.

만일 작가 선지식한테 가서, 삼요어(三要語)로 허공에 도장을 찍고〔印空〕, 진흙에 도장을 찍고〔印泥〕, 물에 도장을 찍어서〔印水〕 그(작가 선지식)를 시험하면, 곧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는 듯하여 들어맞을 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자기와 똑같이 도를 깨친 자를 찾아보아도, 그 경우에 어느 곳에서 이를 찾아야 좋을까? 만일 (본분소식을)아는 사람이라면 가슴을 열어놓고 소식을 주고받음에 어찌 불가능함이 있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그 소식을) 가슴속 깊이 간직해두어야 한다.

그대들에게 묻노라. 주장자란 평소 납승이 사용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행의 도상에서 도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했을까? 옛사람은 이런 경지에도 머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금가루가 비록 귀하기는 해도 눈에 떨어지면 장애물이 되는 것과 같다.

석실 선도(石室善道)스님은 당시에 당 무종(武宗)의 법난(法難)을 만났다. 항상 주장자를 들고서 설법하기를,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이러했고,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러할 것이며 현재의 모든 부처님도 이와 같다”라고 했다.

설봉스님이 으뜸에 하루는 승당(僧堂) 앞에서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중등 내지는 하등의 근기를 지닌 사람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때에 어떤 스님이 대중 속에서 나오면서 말하였다.

“갑자기 으뜸의 근기를 지닌 사람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이에 설봉스님은 주장자를 집고서 바로 자리를 떠나버렸다.

운문스님이 말하였다.

“나라면 설봉처럼 엉망진창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스님이 “그럼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운문스님은 대뜸 후려쳤다.

무릇 묻는 것은 복잡할 것이 없다. 그대들이 밖으로는 산하대지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안으로도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있다고 여기거나, 위로는 우리가 도달해야만 하는 부처님의 경지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래로는 제도해야 할 중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일랑 모두 토해버려라! 그래야지만 하루종일 행주좌와하는 가운데 한결같아지리라. 그러하면 비록 한 터럭 끝이라도 대천사계(大千沙界)만큼이나 넓으며, 확탕․노탄 지옥에 있어도 안락국토에 있는 듯하며, 온갖 보배 속에 있어도 초라한 띠풀집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같은 일은 툭 트인 작가 선지식이라면 옛사람의 참된 경지에 이르는 데 자연히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연화봉 암주)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것을 보고서 다시 다그쳐 물었다.

“궁극적으로 무엇인가?”하고는, 어찌할 수 없어 스스로가 말하였다. “주장자를 비껴 든 채 옆눈 팔지 않고 천봉우리 만봉우리 속으로 곧장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일까? 말해보라. 어디가 그의 영역이라 하겠는가? 참으로 구절 속에 눈이 있고, 말밖에 뜻이 있어, 스스로 일어났다가 스스로 넘어지고, 스스로 놓았다가 스스로 거둬들인 것이다.

듣지 못하였는가? 엄양존자(嚴陽尊者)가 길가에서 한 스님을 만나자 주장자를 세우면서 말한 것을.

“이것이 무엇이냐?”

“모르겠습니다.”

“한 자루의 주장자도 모르는군.”

엄양존자가 다시 주장자를 땅에 내려꽂으면서

“알겠느냐?”고 하자, 여전히 스님은

“모르겠다”고 하니,

“움푹 패인 구멍도 모르는군”하고, 엄양스님은 다시 주장자를 걸머지면서 말하였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주장자를 비껴든 채 옆눈 팔지 않고 천봉우리 만봉우리 속으로 곧바로 들어간다.”

옛사람이 여기에 이르러 무엇 때문에 머물려 하지 않았을까?

설두스님에게는 다음과 같은 송(頌)이 있다.


어느 누가 기봉을 당하랴.

전혀 속이지 못하리니

꽤나 희귀하기도 하여라.

높은 경지 꺾어버리고

현미(玄微)함을 녹여버렸네.

겹겹의 관문 활짝 열어 젖히고

작가 선지식은 남과 같은 길을 가지 않는구나.

달은 찼다가는 이지러지고

해는 날아갈 듯하나 날지 않는구나.

노공(盧公 : 설두스님 자신)은 어디로 갔을까?

흰 구름, 흐르는 강물만이 아련하다.


왜 산승(원오스님 자신)은 “뒤통수에서 뺨이 보이는 사람과는 함께 사귀지 말라”고 주석하였을까? 사량분별을 하자마자 바로 흑산(黑山)의 귀신 굴속에서 살림살이하는 것이다. 만일 사무치게 보고 믿음이 따르면, 모든 사람이 그를 얽매이려 해도 어찌하지 못하리라. 움직이거나 한 대 내질러도 자연히 살리거나 죽이거나 자유자재하리라. 설두스님은 “천봉우리 만봉우리 속으로 곧바로 들어간다”고 한 암주의 뜻을 알고서 송을 지었다. 그의 의도를 알려고 한다면 설두스님의 송을 보아라.


(송)

눈 속의 티끌, 귓속의 흙이여!

-삼백 짐의 무게만큼이나 어리석네. 바보 멍청이, 끝이 없네. 게다가 이런 놈이 있구나!


천봉우리 만봉우리에 머물려고 하지 않네.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말해보라, 이 무슨 까닭인가?


낙화유수(落花流水)는 아득하기만 한데

-좋은 소식이다. 번뜩이는 번갯불 같은 기연이건만, 부질없이 수고하며 사량분별하는구나. 좌측을 돌아보는 사이 천생(千生)이 지나고 우측을 돌아보는 사이에 만겁(萬劫)이 지나간다.


눈썹을 치켜세우고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갔을까?

-발등 밑에다 깨달음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달아주련다. 원래 여기에 있었을 뿐이다. 암주의 발꿈치를 자르려는가? 그렇긴 하지만 모름지기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원오스님은) 때리면서 말하기를, 어찌 여기에만 있느냐?


(평창)

설두스님의 송은 매우 훌륭하다. 몸을 젖힐 줄 알았기에 한 곳에만 매이지 않았다. “눈 속의 티끌, 귓속의 흙”이라 하였는데, 이 한 구절은 연화봉 암주를 노래한 것이다. 납승들이 여기에 이르면 위로는 우러러볼 부처조차 없고, 아래로는 자기 자신이랄 것조차 없다. 항상 마치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듣지 못하였느냐? 남전(南泉)스님이 “도를 배우는 사람 중에서 어리석고 둔하여 (사량분별하지 않는) 놈을 만나기 어렵다”고 한 것을.

관휴(貫休 : 832~912)스님은 「선월집(禪月集)」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남전의 좋은 말씀 항상 기억하니

이처럼 어리석고 아둔한 놈도 드물다.


법등(法燈 : ?~974)스님은 “어느 누가 이 뜻을 알랴! 나로 하여금 남전스님을 그립게 하는구나”하였으며, 남전스님은 또다시 “황매산(黃梅山) 오조(五祖)스님 회하의 백 명 고승은 모두 부처를 안〔會佛〕사람이었으나, 오로지 노행자(盧行者 : 六朝)만은 부처를 몰랐다. 하지만 도를 알았기에〔會道〕의 의발(衣鉢)을 얻었다”고 하였다.

말해보라, 부처와 도는 어떻게 다른가?

설두스님이 염송하였다.

“눈 속에 모래를 넣으려 해도 되지 않으며, 귓속에 물을 부으려 해도 부을 수 없네. 만일 이런 사람이 잘 믿어서 간직하여 남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는다면, 불조의 말씀과 가르침인들 이 무슨 뜨거운 사발에 물이 끓는 것 같은 무의미한 소리냐! 청하노니 (행각을 그만두고) 바리때를 깊이 처박아두고, 주장자를 꺾어버려라. 이것이 정말 할 일 없는 도인이다.”

또다시 말하였다.

“눈 속에는 수미산을 붙이고, 귓속에는 큰 바닷물을 부었네. 이러한 자가 남들의 질문을 받으면, 불조의 말씀과 가르침은 용이 물을 얻은 것 같으며, 범이 산을 의지하는 것 같다. 모름지기 바랑을 걸머지고 주장자를 비껴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참으로 일 없는 한 도인이다.”

또다시 말하였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 그런 것들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일없는 세 도인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가려서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무쇠로 주조해 만든 것과 같은 놈이다. 왜냐하면 험악한 경계를 만나거나, 기특한 경계를 만나거나 그의 앞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한낱 꿈과 같다. 그는 육근(六根)이 있는지조차도 모르며, 또한 아침저녁이 있는지도 모른다. 설령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다 하여도, 썰렁하게 불꺼진 재와 같은 경계를 고수하여 깜깜한 곳으로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모름지기 몸을 젖힐 방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옛사람의 말을. “차가운 바위에 기이한 식물이 푸릇푸릇하게 돋아나 있는 듯한 경지를 지키지 말라. 흰 구름 위에 올라앉더라도 참된 경지는 아니다.”

이 때문에 연화봉 암주는 “그들이 수행의 도상에서 도움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반드시 곧 천봉우리 만봉우리 속으로 곧바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말해보라, 무엇을 천봉우리 만봉우리라 하는가를? 설두스님은 “주장자를 비껴든 채 옆눈 팔지 않고 천봉우리 만봉우리로 곧바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좋아했기 때문에 송을 하였던 것이다. 말해보라, 어느 곳을 향해서 갔는가를? 그가 간 곳을 아는 자가 있느냐?

“낙화유수 아득함이여!”라고 한 것은, 떨어진 꽃잎을 어지럽고, 흐르는 물은 아득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번뜩이는 번갯불같은 이거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무엇인가?

“눈썹 치켜 뜨고 찾아보았으나 어디로 갔을까?”하였는데, 설두스님은 왜 그가 간 곳을 몰랐을까? 산승이 “조금 전에 불자(佛子)를 들었다”고 말했었는데, 말해보라,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를. 그대들이 알았다면 연화봉 암주와 동참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선상〔三條椽下, 七尺單前〕에 앉아 자세히 참구해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