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칙 운문의 육대(六大)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雲門六不〕
(수시)
하늘이 어찌 말을 하랴마는 사계절은 (절도있게) 운행하고, 땅이 어찌 말을 하랴마는 만물을 자라게 한다. 사계절이 운행하는 속에서 본체를 볼 수 있고 만물이 생장하는 곳에서 오묘한 용〔妙用〕을 볼 수 있다. 말해보라, 어느 곳에서 납승을 볼 수 있을까? 어언동용(語言動用) 내지는 행주좌와에 의존하지도 말고, 말로도 설명하지 말고, 분별할 수 있겠느냐?
(본칙)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신(法身)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했었지. 일천 성인이라도 벗아나질 못한다. 허물이 적지 않구나.
“여섯으로는 알 수 없다.”
-못을 자르고 쇠를 끊는다. 팔각형 맷돌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끈다. (조짐 이 보이지 않았을 때 알아도 벌써 제2의 속제이며, 조짐이 생긴 뒤에 알아차리면 또한 제3의 자리에 떨어지며, 또한 언어로써 알려고 한다면 좋아하시네, 전혀 관계가 없다.)1)
(평창)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여섯으로는 거두지 못한다”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뭐라고 하기가 어렵
다. 조짐이 나뉘어지지 않은 때에 뭐라고 할 수 있다 해도 벌써 제2의 속제이며, 조짐이 생긴 뒤
에 알면 제3의 자리에 떨어지며, 언구로 분별하고 밝히려 했다가는 끝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렇다면 결국 무엇을 법신이라 할까? 작가라면 듣자마자 거량할 줄 알아서 바로 가버리지만, 생각
하거나 기연에 매였다가는 엎드려 처분을 듣고야 만다.
태원(太原)의 부상좌(孚上座)는 본디 강사였는데 하루는 법좌에 올라 강의를 하던 즈음에 법신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시간으로는 과거․현재․미래에 두루하고 공간으로는 시방(十方)에 뻗쳤다”고 하자, 어떤 한 선
객이 그곳에 있다가 피시식 웃어버렸다. 부상좌는 법좌에서 내려와 말하였다.
“제가 조금 전에 무슨 잘못이 있었습니까? 선승은 말씀해보십시오.”
“좌주(座主)께서는 법신을 헤아리는 일만을 강의했을 뿐 법신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잠시 강의를 그만두고 고요한 방에 앉아 참선을 해보시오. 반드시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부상좌는 그의 말을 따라서 하룻밤을 고요히 좌선하다가 오경(五更)을 알리는 종소리에 문득 크
게 깨쳤다. 마침내 선객이 머무는 곳의 문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나는 알았습니다.”
“어디 말해보시오.”
“나는 오늘 이후론 다시는 부모가 낳아주신 이 몸을 가지고 재주를 뽐내지 않겠습니다.”
또 교학〔敎中 : 금광명경〕에서는 말하기를,
“부처님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 사물을 따라 형태를 나타내니 물 속에 어린 달과 같도
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스님은 협산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신입니까?”
“법신은 모습이 없다.”
“어떤 것이 법안입니까?”
“법안은 티가 없다.”
운문스님이 말한 “여섯으로도 알 수 없다”는 공안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는 6근․6식․6진이
다. 이 여섯이 모두 법으로부터 생겨나므로 6근으로는 법신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처럼 망정으
로 헤아린다면, 좋아하시네, 전혀 이와는 관계가 없으며 나아가 운문스님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다.
보려면 바로 보아라. 천착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듣지 못하였느냐, 교학(법화경)의 말을.
“이법은 사량이나 분별로써 헤아릴 바 아니다.”
그의 대답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음알이로 야기시켰다. 그러므로 한 구절 속에서는 반드시 삼구
(三句)가 구비되어 반드시 그의 물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나아가 상황에 딱 들어맞아 한 말씀 한구절과 한 점 한 획에서도 몸을 벗어나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구절을 깨치면 천 구
절 만 구절을 일시에 깨친다”고 하였다. 말해보라, 이는 법신일까, 조사일까? 그대들에게 삼십 방망이를 먹이리라.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또 세고 또 센다. 낙숫물 지는 족족 얼어붙는다. 궁리를 많이 하여 무엇하려고?
푸른 눈 달마가 셈하여도 다하지 못하리.
-삼생육십겁(三生六十劫) 걸려도 다 셀 수 없다. 달마인들 꿈엔들 알았겠는가? 스님은 무슨 까닭 에 알면서도 일부러 범하였느냐?
소림(少林)에서 신광(神光)스님에게 부촉했다고 부질없는 말들을 하더니만
-한 사람의 헛소문에 많은 사람이 진짜인 줄로 전한다. 애시당초부터 잘못 되었다.
옷을 걷어붙이고는 또다시 천축(天竺)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하네.
-한 배를 탄 사람을 모두 속였다. 부끄러움이 적지 않군.
천축은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는데,
-어느 곳에 있을까? 비로소 태평하구나. 지금은 어느 곳에 있을까?
간밤에 유봉(乳峰)을 건너다보면서 잠을 잤네.
-네 눈을 멀게 하는군. 괜히 풍랑을 일으키는군. 말해보라. 이는 법신일까, 불신일까? 그대에게 삼십 방망이를 먹이리라.
(평창)
설두스님은 꿰맨 흔적도 없는 것(여섯으로는 알 수 없다는 말)에 대해, 훌륭히 안목을 드러내어
송으로써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운문스님은 “여섯으로는 알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설두스님은
무엇 때문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이라 했을까? 설사 달마스님이라 할지라도 세지 못하리
라. 그러므로 “달마스님이 알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깨쳤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반드
시 그 (운문스님)의 자손이어야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본칙의〔평창〕에서 말한 “한 말씀 한 구절이 상황에 딱딱 들어 맞는다”고 한 것을 철저히 깨치
면 “언구에 있지 않다”는 말을 알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알음알이로 이해하고 말 것이다.
오조(五祖) 큰스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비천한 엉뚱한 짓하는 놈이며, ‘뜰 앞의 잣나무’는
하나, 둘, 셋, 넷, 다섯이다”라고 하였다. 자세히 운문스님의 말을 잘 알아차리면 단박에 그러한 경
계에 이를 것이다.
“소림에서 신광(神光)스님에게 부촉했다고 부질없는 말들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조(二祖)스님의
처음 이름이 신광이었다. 이어서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한 것은, 달마스님을 웅이산(熊耳山) 아
래에 장례를 치뤘는데,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령(西嶺 : 파미르
고원)에서 한쪽 신만을 들고 서천으로 되돌아가는 달마스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송운이 이를 황제
에게 아뢰어 무덤을 파헤치니 한쪽 신만 남아 있었다.
설두스님은 “실로 ‘이 일’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으리요, 결코 전해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
은 옷을 걷어붙이고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말들을 하는군”이라고 말하였다. 말해보라, 무엇 때문
에 이 국토에 6대의 조사들이 계속 이어서 전해왔었는가를. 이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모름지
기 이를 알아야 비로소 작가 선지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축은 아득하여 찾을 곳 없는데, 간밤에 유봉을 건너다보면서 잠을 잤다”고 하였다. 말해보라,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를. (원오)스님은 한 차례 친 후 말하였다. 눈이 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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