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칙1) 화산의 북을 치는 뜻〔禾山打鼓〕
(본칙)
화산(禾山)스님이 법어를 하였다.
“익히고 배우는 것을 들음〔聞〕이라 하고, 더 배울 것이 없는 것을 (도에) 가까움〔鄰〕이라 한다.”
-천하의 납승들이 벗어나지 못한다. 구멍 없는 쇠망치로다. 무쇠말뚝이군.
이 두 가지를 초월해야만이 참된 초월이라고 한다.
-정수리에 외알눈을 달고서 무엇 하려고?
스님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떤 것이 참 된 초월입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표를 그어버렸다. 한 개의 무쇠말뚝이 있다.
“(나는) 북을 칠 줄 알지.”
-쇠말뚝, 쇠가시다. 튼튼하구나.
“무엇이 참다운 이치〔眞諦〕입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두 겹으로 된 공안이다. 또 하나의 무쇠말뚝이 있다.
“북을 칠 줄 알지.”
-쇠말뚝, 쇠가시다. 튼튼하다.
“마음이 바로 부처〔卽心卽佛〕라는 것은 묻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구(坵)․급(扱)․퇴(堆)의 글자의 모양이 서로 다르군. 또 하나의 무쇠말뚝이 다.
“북을 칠 줄 알지.”
-쇠말뚝. 쇠가시다. 튼튼하다.
“향상인(向上人)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무슨 말을 하느냐? 네 바가지씩이나 더러운 물을 뒤집어썼구나. 또 한 개의 무쇠 말뚝이 있다.
“북을 칠 줄 알지.”
-쇠말뚝, 쇠가시다. 튼튼하다. 말해보라. 요지가 무어냐? 아침에 서천에 갔다가 저녁에 동토(東土)로 되돌아왔다.
(평창)
화산스님이 설법하여 말하기를 “배우고 익히는 것을 들음〔聞〕이라 하고, 더 배울 것이 없는 것을 (도에) 가까움이라 한다. 이 두 가지를 초월해야만이 참된 초월이라 한다”하였다. 이 칙(則)의 말은 「보장론(寶藏論)」에서 나왔다.
학문이 더 배울 것이 없는 데〔無學〕에 이른 것을 학문을 끊었다〔絶學〕고 한다. 그러므로 “얕게 듣고서도 깊게 깨치는 것도, 깊게 듣고서도 깨치지 못하는 것도 ‘학문을 끊었다’고 한다”하였다.
일숙각(一宿覺) 영가스님은 “나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쌓았으며 또한 일찍이 주소(注疏)와 경론(經論)을 탐구하였다”고 하였다. 익히고 배우는 것을 다하였을 때 그것을 일러 배울 것이 없는 하염없이 한가한 도인〔無爲閑道人〕이라 한다. 더 배울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도에 가까워진다. 바로 이두 배움과 배울 것이 없는 것을 초월하는 것을 참된 초월이라 한다.
그 스님도 꽤나 총명하다 하겠다. 스님이 이 말을 들어 화산스님에게 묻자 화산스님은 “북을 두드릴 줄 알지”라고 하였다. 이는 이른바 ‘아무 맛도 없는 본바탕의 맛’을 말한 것이다. 공안을 밝히려면 반드시 끝없이 초월해가는 사람〔向上人〕이어야, 이 말이 이치와도 관계없고 따져볼 수도 없는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마치 통 밑바닥이 빠져버린 것처럼 되리라. 바로 이 자리가 납승이 이르러야 할 곳이며,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에 계합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설봉스님의 공 굴림〔輥毬〕과 화산스님의 북 두드림〔打鼓〕과 혜충국사의 수완(水碗)과 조주스님의 차 마심〔喫茶〕은 모두가 향상을 제창한 것이다.”
또 “어떤 것이 참다운 이치〔眞諦〕입니까?라고 묻자, 화산스님은 ”북을 두드릴 줄 알지“라고 하였다. 참다운 이치에서는 결코 하나의 법도 세우지 않았지만, 세속의 이치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 으뜸가는 뜻〔聖諦第一義〕이다. 또다시 ”마음이 곧 부처라 함은 묻지 않겠습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북을 두드릴 줄 알지”하였다. 마음이 곧 부처라 함은 알기 쉬워도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경지에 이르기는 어렵다. 여기에 이른 사람은 적다.
또다시 “향상인이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자, “북을 칠 줄 알지”하였다. 향상인이란 곧 사무치게 초탈하여 말끔한 사람이다. 이 네 구절의 말을 총림에서는 종지(宗旨)로 여겼으니, 이를 화산스님의 네 차례 북 두드림〔禾山四打鼓〕이라고 한다.
어떤 스님이 경청(鏡淸)스님에게 물었다.
“새해에도 불법이 있습니까?”
“있느니라.”
“무엇이 새해의 불법입니까?”
“정월 초하룻날이 되니 만물이 모두 새로웁다.”
“대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노승이 오늘은 손해를 보았군.”
이 대답은 마치 18종의 손해를 본 것과 같다.
또 어떤 스님이 정과(淨果)스님에게 물었다.
“높은 소나무에 학이 서 있을 때는 어떠합니까?”
“수치스런 곳에 발이 빠진 꼴이지.”
“모든 산에 눈이 뒤덮였을 때는 어떠합니까?”
“해가 돋아 난 뒤에는 한바탕 수치니라.”
“회창(會昌) 연간의 불법 사태를 겪을 때 호법선신(護法善神)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삼문(三門) 밖 두 놈이 창피를 당했다.”
이를 총림에서는 “세 번의 창피「三忄麽忄羅」”라고 말한다.
또 보복(保福)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이 법당 안에는 어떤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가?”
“스님께서 직접 보십시오.”
“석가부처님이구먼.”
“사람을 속이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대가 나를 속인 것이다.”
다시 그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함택(咸澤)입니다.”
“혹시 (그 연못이) 바싹 메말랐을 때는 어떠한가?”
“누가 마르게 합니까?”
“내가 말리지.”
“스님은 사람을 속이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대가 나를 속였다.”
다시 그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업을 지었기에 그처럼 덩치가 큰가?”
“스님께서도 작지 않습니다.”
보복스님이 몸을 웅크리는 시늉을 하자, 스님은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사람을 속이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대가 나를 속였다.”
한번은 (보복스님이) 목욕탕 소임을 보는 스님에게 물었다.
“목욕탕 가마솥 크기가 얼마나 되는가?”
“스님께서 직접 재보십시오.”
보복스님이 재보는 시늉을 하자, 목욕탕 소임을 보는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사람을 속이지 마십시오.”
“도리어 그대가 나를 속였다.”
총림에서는 이를 보복스님의 네 번 속임〔四瞞人〕이라 말한다.
이와 함께 설봉스님의 네 개 칠통〔四漆桶〕의 경우도 모두가 예로부터 큰 스님이 각각 심오하고 오묘한 종지를 드러내어 수행인들을 제접한 기연들이다.
설두스님은 뒤이어 이중의 하나를 인용하여, 운문스님의 설법을 빌어서 이 공안을 송하였다.
(송)
한 사람은 연자방아를 끌고
-천하 제일인 천자의 칙명이다. 문둥이가 짝을 이끌고 간다. 향상인이란 이렇구나.
또 한 사람은 흙을 나른다.
-야전사령관의 명령이다. 두 죄인을 한꺼번에 처벌하라. 동병상련(同病相憐)이구나.
대기(大機)를 드러내려면 천 균(鈞)짜리 활이어야만 한다.
-삼 만 근이라 해도 뚫지 못하리라. 경솔하게 답변해서는 안되지. 죽은 두꺼비가 돼서야 안되 지.
일찍이 상골산(象骨山) 노스님(설봉스님)이 공을 굴렀다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 사람도 있었구나. 구멍 없는 쇠망치이다. 누가 그걸 모르랴?
화산(禾山)스님이 북을 칠 줄 안다는 것만 같겠느냐.
-쇠말뚝이다. 반드시 늙은이어야 할 수 있다. 한 자식(설두스님)만이 몸소 (그 도리를) 얻었구나.
그대에게 알리노니,
-설두스님 또한 아직 꿈에도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이로구나. 그대는 아는가?
제멋대로 해석하지 말라!
-이 한마디가 있구나. 그러나 미련하고 미련하군.
단 것은 달고 쓴 것은 쓰다.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주각(注脚)을 잘못 달았군. 좋게 삼십 방망이는 주어야지. 방망이를 맞을 수 있느냐?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했다. 여전히 캄캄하군.
(평창)
하루는 대중의 운력으로 연자방아를 돌릴 적에 귀종(歸宗)스님이 유나(維那)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연자방아를 끌려고 갑니다.”
“연자방아야 네 마음대로 돌리겠지만 중심에 꽂혀 있는 나무꼭지는 흔들리지 않도록 하게.”
목평(木平)스님은 처음 찾아온 스님이 있으면 먼저 세 삼태기의 흙을 운반하도록 하였는데, 목평이 송을 지어 대중 법문을 하였다.
동산의 길은 비좁고 서산은 낮으니
새로 온 사람은 세 삼태기의 흙 나르는 일을 사양하지 말라.
아- 그대들이 오랜동안 길에 머물러
밝고 밝으나 깨닫지 못하여 도리어 미혹하였구나.
뒷날 어떤 스님이 물었다.
“세 삼태기 안의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만 세 삼태기 밖의 일은 어떠합니까?”
“철륜천자(鐵輪天子)가 천하에 내린 칙명이니라.”
스님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목평스님은 후려쳤다.
그리고서는 “한 사람은 연자방아를 끌고 또 한 사람은 흙을 운반한다”고 말했다.
“대기(大機)를 드러내려면 천 균(鈞)의 활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설두스님은 이 대화를 삼만 근
쇠뇌로 비유하여 그가 수행인을 지도했던 것을 내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30근은 일 균(一鈞)이니
천균이란 삼만 근이다. 사나운 용과 호랑이와 맹수에게나 이 큰 활을 쏠 수 있지, 뱁새처럼 자그
만 짐승에게 가벼이 쏘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삼만 근 활로 생쥐를 쏠 수 없는 것이다.
“상골산 노스님도 일찍이 공을 굴렸다”는 것은, 설봉스님이 하루는 현사(玄沙)스님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세 개의 나무 공을 일제히 굴렸었다. 현사스님이 공을 도끼로 찍는 시늉을 하니, 설봉
스님은 그를 매우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록 모두가 전기대용(全機大用)이긴 하나 화산스
님의 해타고(解打鼓)만은 못한 것이다. 이는 매우 간결하고도 핵심을 찌른 것〔徑截〕이므로 이해
하기 어렵다. 그래서 설두스님은 “화산스님의 북 칠 줄 안다는 것만 같겠느냐”고 한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말을 가지고 살림살이를 하며 그 유래를 모르고 멋대로 해석할까 염려하셨기에
“그대에게 알리노니 제멋대로 해석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반드시 이러한 경지에 실제로 이르
러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제멋대로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으면 “단 것은 달고 쓴 것은 쓴
것”이다.
설두스님이 이처럼 문제제기〔拈〕를 했지만 결국 (화산스님의 올가미를) 뛰어넘지는 못하였다.
1)제 44칙에는 〔수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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