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51칙 암두의 최후의 언구〔巖頭末後句〕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0:11
 

 

 

제51칙 암두의 최후의 언구〔巖頭末後句〕


(수시)

시비가 생기자마자 혼란스러워 마음을 잃게 되고, 단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또한 알 수 없다.

말해보라. (설명을) 늘어놓아야 할까 아니면 그만두어야 할까? 여기에 이르러서 실오라기만큼이라

도 알음알이가 있어, 말에 막히고 기연이나 경계에 얽매인다면, 모두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은

〔依草附木〕것처럼 허망한 짓이 될 뿐이다. 설령 완전히 벗어난 상태에 이르렀다 하여도 만 리나

떨어진 곳에서 고향을 바라보는 것과 같을 뿐이다. 이를 알겠느냐? 아직 알지 못했다면 (설명이

붙여지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는 공안을 깨치도록 하라! 거량해보리라.


(본칙)

설봉스님이 암자에 주석할 때에 두 스님이 찾아와 예배를 하자,

-무엇 하느냐? (두 놈의 죄를) 똑같은 죄목으로 판결하라.


설봉스님은 그들을 보고서 암자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서 말하였다.

“뭐냐?”

-귀신같이 잘도 보는군. 구멍 없는 피리이다. 꽉 들이받았다.


객스님 또한 “뭐냐?”라고 말하자,

-진흙으로 만든 탄환이로군. 방음 장치가 된 판대기〔亶毛拍板〕이다.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고 있는 것처럼 절묘하군.


설봉스님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가버렸다.

-물렁물렁한 진흙 속에도 가시가 있다. 마치 용에게 발이 없고 뱀에게 뿔이 돋는 것과 같다. 여  기에서는 어떻게 손을 대기 어렵네.


그 스님이 그 뒤 암두(巖頭)스님 처소에 이르자,

-(암두스님에게) 물어봐야만 되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어야 알 것이다.


암두스님이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반드시 작가 선지식이라야만 대답할 것이다. 이놈이 번번이 실패한다. (설봉스님과 함께) 동참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이 객승을) 그냥 놓쳐보낼 뻔했다.


“영남(嶺南) 지방에서 왔습니다.”

-무슨 소식을 전하려고 왔느냐? 반드시 이 소식을 밝혀야 한다. 설봉스님을 보았느냐?


“설봉스님한테는 갔다 왔느냐?”

-속셈을 감파해버린 지 오래이니 가보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갔다 왔습니다.”

-진실한 사람 만나기 어렵다. 양쪽(설봉스님과 암두스님)에게 모두 헤어나지 못했군.


“무슨 말을 하더냐?”

-결국은 이런 꼴이 되고 마는군.


스님이 지난날에 했던 대화를 말씀드리자,

-결국은 이런 꼴이 되고 마는군. 거듭거듭 잘못하는구나.


암두스님이 말하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

-바로 때려쳤어야 옳지. 콧구멍(급소)을 잃어버렸다.


“설봉스님은 아무런 말씀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또 졌구나! 그대들은 말해보라, 설봉스님이 뭐라고 했는지를.


“아-아,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일러주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큰 파도는 아득히 질펀하고 흰 물결은 하늘까지 넘실거린다.


“그에게 일러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스님을 어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문둥이가 짝을 끌고 가는구나. 꼭 그렇지 않다. 수미산이라도 부서질 것이다. 말해보라, 그의 올

  가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그 스님이 여름 안거〔夏安居〕 끝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추어내어 법문을 청하였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도적이 가버린 지 한참되었다.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기는 격

이군.


“왜 진작 묻지 않았느냐?”

-선상(禪床)을 들어 엎어버렸어야 옳았다. 벌써 지나가버렸다.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

-이 방망이를 이 스님에게 먹였어야 한다. 콧구멍을 뚫어버렸다. (하안거 동안) 감옥 속에 틀어박   혀 못된 지혜만 키웠구나. 두 번 거듭된 잘못이다.


“설봉스님이 나와 한 가지(덕산스님의 제자이므로)에서 나기는 했으나, 나와 똑같지는 않다.”

-하늘과 땅을 뒤덮었군.


“말후구를 알고저 하는가? 다만 이것뿐이다.”

-같은 배 탄 사람들은 모두 속이는군. 나 원오는 믿지 않는다. 하마터면 구별하지 못할 뻔했다.


(평창)

종문의 가르침을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분별하여 진퇴와 시비를 알아야

하며 죽이고 살리며 잡고 놓아줌을 밝혀야 한다. 만일 눈동자를 갖추지 못했으면서, 이러쿵저러쿵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한다면, 목숨을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맡긴 거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결코

모른 것이다.

그런데 설봉스님과 암두스님은 모두 덕산(德山)스님 밑에서 동참수학했다. 그 객스님은 설봉스님

을 참방하고서도 그 느낀바가 그저 그랬고 암두를 뵙고서도 눈꼽만치도 깨치지 못하였다. 부질없

이 두 노스님을 번거롭게 하면서 묻고 답하고 사로잡고 놓아주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천하인에게

까다롭고 배배 꼬이게 하여 이를 밝히려 해도 밝힐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말해보라, 까다롭고 배배 꼬인 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설봉스님이 두루 총림을 편력하긴 했으나

나중에 오산(鰲山)으 주막에서 암두스님의 한마디에 격발되어 의심 덩어리를 완전히 끊고 크게 사

무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암두스님은 그 뒤 사태(회창법란)를 만나 어느 강가〔鄂渚湖〕에서 뱃사공이 되었는데 강의 양쪽

언덕에 각기 판자 하나를 걸어 놓고 사람이 와서 판자를 두드리면, 암두스님은 “그대는 어느쪽으

로 가려고 하느냐?”고 묻고 갈대 숲 사이에서 노를 흔들면서 나왔었다.

설봉스님은 영남으로 돌아가 암자에 주석하게 되었는데, 객스님도 오랫동안 참구했던 사람이었

다. 설봉스님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 암자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서 “뭐냐?” 말하였다. 요즈음 사

람에게 이렇게 물으면 대뜸 뭐라고 말했을텐데, 이 스님은 또한 괴짜였다. 도리어 그에게 “이 뭐

냐?”라고 하자, 설봉스님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가버렸다. 더러는 이를 “말없는 이해”라

하나, 이 스님이 어떻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설봉스님이 이 스님에게 한 번 질문을 당하고 곧 아무런 말씀 없이 암자로 돌아가

버렸다”고 말하지만, 설봉스님에게 목숨을 노리는 날카로운 곳이 있었음을 참으로 모른 것이다.

설봉스님이 비록 적절하기는 했다. 그러나 몸은 숨겼지만 그림자가 나타난 것을 어찌하랴.

이 스님이 그 뒤 설봉스님을 하직하고 이 공안에 대해서 암두스님에게 물어보려고 그곳에 도착

하자, 암두스님이 물었다.

“어느 곳에서 왔느냐?”

“영남에서 왔습니다.”

“설봉스님을 만나봤느냐?”

이 물음의 뜻을 알아차리려거든 단박에 착안해야만 한다. 스님은 말하였다.

“만나보았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이 또한 괜히 해본 말이 아닌데 이 스님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저 그의 말에 휘둘리고 말았

다. 이에 암두스님이 말하였다.

“그(설봉스님)가 무슨 말을 하더냐?”

“그는 머리를 숙인 채 아무런 말없이 암자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그 객스님은 암두스님이 짚신을 신고 자신의 마음속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

이다.

암두스님은 말하였다.

“아-아, 처음 설봉스님을 만났을 때 그에게 뒷부분의 한마디를 일러주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

다. 그에게 일러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스님을 어찌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암두스님도 강한 자(설봉스님)를 부추기고 약한 자(객스님)는 도와주지 않았다. 이 스님은 여전히

깜깜하여 흑․백을 분별하지 못한 채 마음속 가득히 의심을 품고서 “설봉스님이 모르더군요”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하였다.

여름 안거 끝에 전에 말했던 대화를 말씀드리면서 암두스님에게 다시 법문을 청하자, 암두스님은

말하였다.

“왜 진작 묻지 않았더냐?”

암두스님에게 꾀가 생긴 것이다. 객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감히 쉽사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설봉스님이 나와 같은 가지에서 나오긴 했으나 나와 똑같지는 않다. 말후구를 알고저 하느냐?

다만 이것이니라.“

암두스님은 너무 눈썹〔眉毛〕을 아끼지 않고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여러분은 결국 이를 어떻게

이해하려는가?

설봉스님이 덕산스님의 회상에 있으면서 밥짓는 일을 하였는데 하루는 공양이 늦자 덕산스님이 바리때를 들고 법당으로 내려오니 설봉스님이 말하였다.

“종도 울리지 않았고 북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이 늙은이가 어디로 바리때를 들고 가는가?”

덕산스님은 아무런 말없이 머리를 숙인 채 방장실로 돌아가버렸다.

설봉스님이 이를 암두스님에게 말하자 암두스님은 말하였다.

“아이고 가엾게도 덕산스님이 뒷부분의 한마디를 몰랐구나.”

덕산스님이 이 소문을 듣고 시자에게 그를 방장실로 불러오게 한 후 물었다.

“네가 노승을 인정하지 않느냐?”

암두스님이 가만히 그 뜻을 아뢰자, 덕산스님이 다음날 상당(上堂) 법문을 했느데 평소와 같지

않았다.

암두스님은 승당(僧堂) 앞에서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반갑구나! 말후구를 알았구나. 이제부터는 천하의 그 누구도 덕산스님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3년뿐이다.”

이 공안 가운데 설봉스님은 덕산스님이 말이 없는 것을 보고서 아주 적절했다고 여겼겠지만 도

둑을 붙잡았음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도둑을 붙잡았기에 뒤에 와서 도적을 놓아줄줄 안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樂普山 元安스님〕이 말하기를 “맨 마지막에서 한 한마디가 비로소 견

고한 관문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암두스님이 설봉스님보다 훌륭하다”고 하지만 이

는 잘못 안 것이다.

암두스님은 항상 이 기틀을 사용하여 대중 법문을 하였다. “눈 밝은 놈은 (집착의) 소굴에 빠지

지 않아, 외물을 물리치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외물을 좇는 것을 하급으로 삼는다.“ 이 말후구는

설령 (달마) 조사를 친견하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덕산스님이 공양이 늦어져 늙은이가 몸소 바

리때를 들고 법당으로 가자, 암두스님은 “가엾게도 덕산스님이 아직 마지막 뒷부분의 한마디를 모

르고 계시구나”라고 하였는데, 설두스님이 이를 염(拈)하였다.

“일찍이 애꾸눈 용〔獨眼龍 : 明招得謙스님〕이 말하는 것을 들었더니, 원래 외알눈〔一隻眼〕만

갖추었을 뿐이다. 이는 덕산스님이 이빨 빠진 호랑이임을 참으로 모른 것이다. 만일 암두스님이

이를 알고서 깨뜨려주지 않았더라면 어제와 오늘이 같지 않음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여러분은 말후구를 알고저 하는가? 늙은 오랑캐(달마스님)가 알았다고는 인정해도 깨쳤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공안은 가시덤불처럼 천차만별이니, 그대들이 이를 철저히 사무치게 터득한다

면 천하 사람들이 당해낼 수 없으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곧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그대들이 아직 철저히 깨치지 못했으면, 암두스님이 말한 “설봉스님이 나와 같은 가지에서 나오

긴 했으나 나와는 다르다”는 말을 참구하라. 이 한 구절에 몸을 벗어날 곳이 있을 것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마지막 한마디를

-언어 이전의 소식인걸! 참되다고 말하려 했더니만 쯧쯧. 보려고 했다가는 눈이 멀고 만다.


그대에게 말하노니

-혀가 땅에 떨어졌다. 말로 할 수 없다. 머리만 있고 꼬리가 없으며 꼬리만 있고 머리가 없다.


밝음과 어둠이 쌍쌍으로 어울리는 시절이구나.

-말많은 노인이군. 소에 뿔이 없고 호랑이에 뿔이 돋는 것과 같다. 이것도 쌍쌍, 저것도 쌍쌍.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은 모두 알지만

-이 무슨 종족일까? 피차가 서로 관계가 없군. 그대는 남쪽 소상(瀟湘)으로, 나는 북쪽 진(秦)나

라로 간다.


죽음을 달리한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군.

-주장자가 나의 손에 있는데 어찌하여 산승(원오스님 자신)을 괴이하게 여기는가? 그대들은 어찌

하여 목숨을 남의 손에 쥐어주었는가?


까맣게 모르는군.

-한 방 얻어맞고 싶냐? 알 리가 없고말고.


석가와 달마도 잘 분별해보아야만 알 수 있네.

-온 대지 사람들이 칼을 잃고 혀가 끊어졌네. 나는 이렇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늙은 오   랑캐가 알았다고는 인정할 수 있어도 깨쳤다고는 인정치 않겠다.


남북동서로 돌아가련다.

-수습했다. 발 아래 오색 실을 두루고 있다(설두스님이 아직 자취를 못 버리네그려). 그대의 주장

자를 빌려다오.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 눈을 함께 보노라.

-아직 반 정도뿐이다. 저 대지에 눈이 질펀하듯 많은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아는 사람이 없구나.

눈먼 놈들이다. 말후구를 알았느냐? (원오스님은) 탁쳤다.


(평창)

“말후구를 그대에게 말하노니”라고 하여 설두스님이 이 말후구를 송(頌)해준 것은 그 수준을 아

주 낮추어 상대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송을 지어 노래하기는 했으나 털끝만큼 조금 노래했을 뿐

이니, (말후구를) 투철히 사무치기에는 아직도 미흡하다.

다시 크게 입을 벌리어 말하기를 “밝음과 어둠이 쌍쌍으로 어울리는 시절이구나”는 그대들에게

아주 가느다란 (방편의) 길을 터놓은 것이며, 그대들을 위하여 한 구절〔一句〕로 송하여 몽땅 끝

내버린 것이다. 그리고 끝에서 다시 (흰 눈이 어떻다는 둥) 주석을 붙였다. 이는 다음 경우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초경(招慶)스님이 어느날 나산(羅山)스님에게 물었다.

“암두스님이 이렇고 저렇다(같은 가지에서 태어나고……)고 하는데 이 무슨 뜻입니까?”

나산스님이 “대사!”하고 불러서, “네!”하고 대답하니, 나산스님은 말하였다.

“한편으론 밝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두운 것이요.”

그러자 초경스님이 감사의 절을 올리고 갔다가 사흘이 지난 뒤에 또다시 물었다.

“전일에 스님께선 베푸신 자비를 입긴 했으나 간파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대에게 일러주었다.”

“스님께서는 분명하게 설명해주십시오.”

“그렇다면 대사께서 의심하는 곳에서 물어보십시오.”

“한편으론 밝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둡기도 한 것이란 무엇입니까?”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한 것입니다.”

초경스님은 그 당시 감사의 절을 올리고 떠나갔다.

그 뒤 어떤 스님이 초경스님에게 물었다.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할 때는 어떠합니까?”

“개 주둥이 닥쳐라.”

“대사께서도 입 닥치고 공양이나 드시지요.”

그 스님이 다시 나산스님에게 찾아와 물었다.

“같이 나서 같이 죽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뿔 없는 소와 같은 격이지.”

“같이 나기도 하고, 같이 죽기도 할 때는 어떠합니까?” 

“호랑이에게 뿔이 있는 것과 같다.”

말후구란 바로 이러한 도리이다.

나산스님의 회하에서 어떤 스님이 이것을 다시 초경스님에게 묻자, 초경스님이 말하였다.

“너나 나나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동승승주(東勝昇洲)에서 한마디 하면 서구야니주(西瞿耶尼

洲) 사람도 알고, 천상에서 한마디를 말하면 인간에서도 알아, 마음과 마음끼리 서로 알며, 마주

보고 서로 알기 때문이다.”

“같은 가지에서 났다”는 것은 그래도 알기 쉽지만, “죽음은 달리한다”는 것은 전혀 알 수 없으니,

석가와 달마가 알려고 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남북동서로 돌아가련다”는 것은 그래도 조금 나은 경계가 있다 하겠다.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 눈을 함께 보노라”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이는 밝음인지 어둠

인지,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인지, 같은 가지에서 죽은 것인지를.

안목을 지닌 납승이라면 이를 분별해보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