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53칙 마조의 들오리〔馬祖野鴨〕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0:19
 

 

 

제53칙 마조의 들오리〔馬祖野鴨〕


(수시)

온 세상 어디에도 감추지 못하고 완벽한 기봉을 드높이 드러내며, 어디에도 막힘이 없어 한수 한

수마다 몸을 벗어날 기틀이 있으며, 말마다 사심이 없어 사물마다에 살인의 뜻이 있다. 말해보라,

옛사람이 필경에 어느 곳에서 쉬었는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마조(馬祖)스님이 백장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들오라기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시원찮은 두 놈들이 풀 속에서 헤매는군. 갑자기 돌아봐서 뭐하려는가?


스님이 “이게 뭐지?”라고 하니

-큰스님이라면 알아야 할텐데. 이 늙은이가 질문의 요지도 모르는군.


백장스님이 말하였다.

“들오리입니다.”

-목숨이 이미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구나. 오로지 죄상을 말했을 뿐 (판결은 아직 내리지 않았

다.) 두 번째 물음이 더 악랄하다.

“어디로 날아가느냐?”

-앞에 쏜 화살은 그래도 가벼운데 뒤에 쏜 화살이 깊이 박혔군. 두 번째 쪼아대니 마땅히 스스로 가 알아야지.


“날아가버렸습니다.”

-단지 그의 말만 쫓아다니다 보면 정통으로 빗나가버린다.


스님이 마침내 백장스님의 코끝을 비틀자,

-부모가 낳아준 이 목숨의 존망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다니……. 창끝을 되돌려 콧구멍을 찢어버리는구나.


백장스님이 고통을 참느라 신음하였다.

-이 아파하는 여기에 ‘그것’이 있군. 그래도 들오리라고 말하겠느냐! 참으로 가려운 데를 알겠느  냐!

스님은 말하였다.

“뭐 날아가버렸다고?”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 늙은이가 원래 귀신 굴 속에서 살릴살이를 하는군.


(평창)

바른 안목으로 살펴보면 백장스님은 정인(正因 : 佛性)을 갖추었고 마조스님은 바람이 없는 데에

서 풍랑을 일으켰다고 하겠다. 여러분이 불조와 동등한 스승이 되고저 한다면 백장스님을 참구하

여야 하고, 자신마저 구제하지 못하려거든 마조스님을 참구하여야 한다. 옛사람들을 살펴보면 하

루종일 ‘여기’에 마음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백장스님은 어린 나이에 세속을 떠나 삼학(三學)을 두루 연마하였는데 때마침 대적(大寂 : 마조

스님의 시호)이 남창(南昌) 지방에서 교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마음을 다하여 그에게

귀의하여 20년간 시자를 하였다. 그런 뒤에 다시 참방하였을때의 일할(一喝)에 처음으로 크게 깨

쳤다. 요즈음 어떤 사람은 “본디 깨달을 것이 없는데도 깨닫는 문을 괜히 만들어 이런 짓을 했다”

고 말들 하나 이러한 견해는 마치 사자 몸에 있는 벌레가 사자의 살을 갉아먹는 것과 같다. 듣지

못하였느냐, 옛사람〔菅子〕이 말하기를 “원천이 깊지 않으면 멀리까지 흐르지 못하고 지혜가 크지 못한 자는 멀리 보지 못한다“고 한 것을. 만일 깨침이 없는 데서 괜히 이런 일을 만든 것이라 한다면 어떻게 오늘날까지 불법이 전해올 수 있었겠는가…….

살펴보면, 마조스님과 백장스님이 길을 가다가 날아가는 들오리를 보았는데, 마조스님인들 들오

리임을 왜 몰랐겠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처럼 물었을까? 말해보라, 그의 의도가 어디에 있

었을까?

백장스님은 오로지 그의 뒤를 따라걸었을 뿐이다. 마조스님이 마침내 그의 콧구멍을 비틀자 백장

스님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신음하니 마조스님은 말하였다.

“뭐 날아가버렸다고?”

이에 백장스님은 단박에 깨쳤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이를 잘못 이해하고 이 이야기를 물어보면

‘아야, 아야!’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좋아하시네. 뛰어넘질 못하는군.

종사께서 사람을 지도함에 모름지기 철저하게 가르친다. 그가 깨치지 못했음을 알고서는 칼날을

상하고 손을 다치면서도 그만 두질 않았다. 요는 백장스님이 ‘이 일’을 깨치도록 지도하는데 있다.

깨치기만 한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마음대로 사용하겠지만 깨치지 못하면 세속 이치〔世諦〕에 말

려들게 되는 것이다.

마조스님이 그 당시 코를 비틀지 않았더라면 세속 이치에 말려 들게 되었을 것이다. 모름지기 경

계와 외연을 만나면 확 뒤집어서 자기에게로 귀결시켜 온종일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도록 하는 그

것을 ‘성품의 자리〔性地〕가 명백하다’고 한다. 다만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거나 (마치 종놈이)

나귀 앞에 섰다가 말 뒤에 섰다가 하는 것 같은 (주체적이지 못한) 알음알이가 무슨 쓸모가 있겠

는가.

마조스님과 백장스님의 이와 같은 기용(機用)을 살펴보면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한〔昭昭靈

靈〕듯하나, 그렇다고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한 곳에 안주하지는 않는다. 백장스님이 아픔을

참느라 신음소리를 냈다. 만일 이를 알아차리면 온 세상 어디에도 감추지 못하고 사물마다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한 곳에 투철하면 천곳 만곳이 단박에 뚫린다”고 한다.

마조스님이 그 이튿날 상당법문을 하였는데 대중들이 모이자마자 백장스님이 나와서 방석을 말

아버리니 마조스님은 곧 법좌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가면서 백장스님에게 물었다.

“내가 아까 상당 설법도 하지 않았는데 너는 무엇 때문에 방석을 말아버렸느냐?”

“어제 스님에게 코끝을 비틀린 아픔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제 어느 곳에 마음을 두었느냐?”

“오늘은 코끝이 아프질 않습니다.”

“너는 ‘오늘의 일’을 훤히 알았구나.”

백장스님이 이에 절을 올리고 곧장 시자실로 돌아가 통곡을 하자, 함께 일하는 시자가 물었다.

“그대는 왜 통곡을 하느냐?”

“그대가 큰스님을 찾아가 물어보아라.”

시자가 마조스님을 찾아가 묻자 마조스님은 말하였다.

“너는 백장에게 가서 물어보도록 하라.”

시자가 다시 시자실로 돌아와 백장스님에게 물으니 백장스님은 갑자기 껄껄대며 큰 소리로 웃었

다. 이에 동료인 시자가 말하였다.

“조금 전에는 통곡을 하더니만 지금은 무엇 때문에 웃는거냐?”

“조금 전에는 통곡을 했었지만 지금은 다시 웃는다.”

이를 살펴보면 그는 깨친 뒤에는 자유자재하여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연히 영롱하게 빛났던 것이

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들오리여!

-무리를 이루고 떼거리를 지었군. 또 한 마리가 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군.

-무슨 수작이냐! 삼대 같고 좁쌀처럼 (자세하게 알려주네).


마조스님은 만나자 말을 걸었네.

-이러쿵저러쿵 말로 해서야 언제 끝마칠 기약이 있겠는가? 말로 할 수 있겠느냐? 오로지 마조스님만이 (백장스님이) 준수한 놈임을 알았다.


산․구름․바다․달 등 온갖 것들에 대해 모두 말했으나

-동쪽 집(마조스님)의 국자 자루는 길고 서쪽 집(백장스님)의 국자 자루는 짧다. 많이 말해줬다

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전히 모르고서 도리어 날아가려고 한다.

-할! 그가 말을 이해 못 했다고 말하지 말라. 어디로 날아갔는가?


날아가려 하는 순간

-목숨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다. 이미 그에게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잡아들였네.

-노파심이 간절하군. 또다시 무엇을 말하느냐?


말해보라, 말해보라. (이 말은 설두스님의 착어임)

-무엇을 말하라고? 산승에게 말하라 해도 안되며 들오리 울음소리를 내서도 안된다. 아이고,    아이고! 그 자리에서 삼십 방망이는 때렸어야 옳다. 어느 곳으로 날아갔을까?


(평창)

설두스님이 첫머리에서 “들오리여!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군”하고 노래하였는데, 말해보라. 몇

마리나 있었을까?

“마조스님은 만나자 말을 걸었네”라는 것은 마조스님이 백장스님에게 “이게 뭐냐?”라고 묻자, 백

장스님이 “들오리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을 노래한 것이다.

“산․구름․바다․달 등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은, 백장스님에게 “어디로 갔느냐?”

고 거듭 물어 그를 지도하고자 하는 마조스님의 의지가 자연스럽게 고스란히 드러났는데도 백장

스님이 여전히 모르고서 “날아가버렸다”고 말하여, 거듭 빗나간 것을 노래한 것이다.

“날아가려 하는 순간, 잡아들였네”는 설두스님이 죄상에 의거하여 판결을 내린 것이다. 다음에

“말해보라, 말해보라”라고 (설두스님이) 말했는데, 이는 설두스님이 몸을 한 번 피한 것이다. 말해

보라, 어떻게 말해야 할까를. 아픔을 참는 신음소리를 내도 잘못이며, 아픔을 참는 신음소리를 내

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해야 할까?

설두스님이 그처럼 매우 오묘하게 노래할 수는 있었지만 뛰어넘지는 못했는데야 어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