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칙 운문의 손을 펴보임〔雲門展手〕
(수시)
생사를 뚫고 나오며 (機關 : 조사들이 상대의 깨달음을 격발시켰던 사연)도 헤치고 나와 무심히
(우리를 속박하는) 무쇠를 끊고 못을 자르며 어느 곳에서나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
말해보라, 이는 어떠한 사람의 경지인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운문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요즈음 어디에 있다가 왔느냐?”
-서선사(西禪寺)라고 말해서는 안되지. 상대를 유인하고 있네. 동서남북 어느 곳이라도 말해서는
안된다.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
-예상했던 대로군. 너무 솔직히 말해버렸군. 당시에 본분종사를 기르는 솜씨를 보여주었어야 옳 다.
“서선사에서 요즈음 무슨 얘기들을 하던가?”
-(내가 대신) 말해주고 싶어도 큰스님(설두스님)을 놀라게 할까 염려스럽다. 찾아온 상대방을 잘
파악했군. 역시 큰스님처럼 매한가지로 잠꼬대를 하는구나.
스님이 양 손을 벌리자,
-졌구나. 도적을 끌어들여 집안을 망쳤다. 참으로 사람을 어리둥절케 하는구나.
운문스님이 한 차례 뺨을 후려치니
-법령대로 다스렸군. 잘 쳤다. 이처럼 통쾌한 일은 만나기 어렵지.
스님은 말하였다.
“제게도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
-그대는 진술을 번복하려고 하느냐? 대장의 깃발을 찢고 북을 빼앗는 솜씨가 있는 듯하구나.
운문스님이 문득 두 손을 펴 보였다.
-위험하군. 청룡(靑龍)을 타고서도 몰 줄을 모르다니…….
스님이 말이 없자,
-애석하다.
운문스님이 대뜸 후려쳤다.
-그냥 놓아주어서는 안된다. 이 방망이는 운문스님이 먹어야 한다. 왜냐하면 처벌해야 할 일을 처벌하지 않으면 도리어 환란을 부르기 때문이다. 큰스님(설두스님)은 어느 정도 방망이를 먹어
야 할까? 한 번 봐주겠다.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창)
운문스님이 이 스님에게 “요즈음 어디에서 왔느냐?”라고 묻자, 스님은 “서선사(西禪寺)에서 왔다”
고 말하였다. 이는 정면으로 맞대놓고 하는 대화로서 번뜩이는 번갯불과도 같다. 운문스님의 “요
즈음 무슨 말들을 하느냐?”는 말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인데도 스님 또한 작가인터라 대뜸 거꾸로
운문스님을 시험하느라 양 손을 벌리었다. 여느 사람이었다면 이 한 차례 시험을 당하여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만 운문스님은 전광석화와 같은 기봉이 있어 바로 한 차례 후려쳤던 것이다.
스님이 한 “때리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제게도 할 말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말은 이 스님이
상대의 공격을 한 번 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운문스님이 놓아주면서 양 손을 벌렸던 것인데 스님
이 말이 없자 운문스님은 후려쳤던 것이다.
이를 살펴보면 운문스님은 원래 작가였다. (이 스님이) 한 걸음을 나아가면 그만큼 깨달아, 그 의
도를 알았으며, 앞을 바라볼 줄도 알고 뒤를 돌아볼 줄도 알고서 근원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
스님은 앞을 바라볼 줄만 알았지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일시에 호랑이 머리와 꼬리를 잡으니
-살인도(殺人刀)․활인검(活人劒)이다. 반드시 이 (운문)스님이어야만 이렇게 할 수 있다. 일천 병사는 얻기 쉬워도 한 장수는 얻기 어렵다.
늠름한 위엄이 4백 고을〔州〕에 떨치네.
-천하 사람의 혀를 옴짝달짝 못하게 하네. 천지를 뒤덮는 기상이다.
묻노니 어쩌면 그처럼 준험한가!
-눈먼 놈이 남을 형틀에 채울 수 없고, 애꾸눈이 남을 두르릴 수는 없다. 설두스님은 원래 모르 고 있었다. (설두)스님은 곧바로 착어를 했다.
설두스님은 “한 번 용서해주노라”고 했다.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또한 어찌할텐가? 천하 사람들이 일시에 손해를 보았다. (원오스님은) 선 상을 한 번 내려쳤다.
(평창)
설두스님이 이 송은 지극히 알기 쉽지만 큰 뜻은 운문스님의 기봉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시에 호랑이의 머리와 꼬리를 잡았다”고 말한 것이다.
옛사람(羅山道閑)스님의 말에 “호랑이 머리에 타고서 호랑이 꼬리를 잡아 첫마디에 대뜸 종지를 밝힌다”고 하였다.
설두스님은 자백에 따라서 죄를 판결하므로, 운문스님이 호랑이 머리에 탈 줄도 알고 호랑이 꼬
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을 좋아했다. 스님이 양 손을 벌리자 운문스님이 대뜸 후려쳤던 것은 호랑
이 머리에 탄 격이며, 운문스님이 양 손을 폈는데도 스님이 말이 없자 또다시 후려쳤던 것은 호랑
이 꼬리를 잡은 격이다. 일시에 머리와 꼬리를 잡은 안목은 유성(流星)처럼 순식간에 해치운다. 자
연히 전광석화처럼 늠름한 위엄이 4백 고을에 떨쳤으며 온 누리에 세찬 바람이 일어난 것이다.
“묻노니 어쩌면 그처럼 준험한가”라는 말은 참으로 준험한 곳이 있다 하겠다. 설두스님이 “한 번
용서해주니라”고 말하였는데, 말해보라. 지금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온 대지 모든 사
람이 방망이를 맞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의 선객들은 모두가 “그가 손을 벌릴 때 그에게 본분납자를 기르는 솜씨를 보여주었어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이는 비슷하기는 하나 옳지는 않다. 운문스님이 이처럼 그대들을 쉬도록 내버
려두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따로이 솜씨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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