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64칙 조주의 짚신을 머리에 얹고〔趙州載鞋〕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0:36
 

 

 

제64칙1) 조주의 짚신을 머리에 얹고〔趙州載鞋〕

(본칙)

남전스님이 다시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 조주스님에게 묻자,

-그렇지만 반드시 같은 마음, 같은 뜻이라야 이렇게 할 수 있다. 같은 길을 가는 자만이 알 것

이다.


조주스님은 문득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결국 진흙물을 뒤접어쓰는군.


남전스님은 말하였다.

“네가 그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텐데.”

-쿵짝이 서로 맞구나. 속뜻을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 자신의 잘못이 가지고 남까지 잘못되게 하

네.


(평창)

조주스님은 남전스님의 적자(嫡子 : 맏이)이다. 처음을 말하면 끝을 알고 거량하자마자 의도를

알았던 것이다. 남전스님이 저녁 때 다시 앞에 했던 이야기를 꺼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조주스

님은 노련한 작가였기에 대뜸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 버리자, 남전스님은 말하였

다.

“네가 그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텐데.”

말해보라, 참으로 살릴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남전스님이 말한 “말할 수 있다면 고양이를 베지 않겠다”는 것은 번뜩이는 전광석화와 같은 것

이다.

조주스님이 대뜸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밖으로 나가버린 것은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를 참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마다 새롭고 시각마다 새로워, (이 자리는) 일천 성인이라도 한 실오라기

만큼도 바꾸지 못한다. 모름지기 자기 자신 속에 (원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보배에서부터 우러나

와야 조주스님의 온전한 기틀과 큰 작용〔全機大用〕을 알 수 있다.

조주스님이 “나는 법왕이 되어 모든 법에 자재하다”라고 했는데, 모두가 잘못 이해하고서 “조주

스님은 방편으로 짚신을 가지고 고양이를 대신했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그가 ‘말할 수 있다면

고양이를 베지 않겠다’는 말을 할 때 대뜸 짚신을 이고 나갔어야 했다. 이는 그(남전스님)가 고양

이를 벤 것이지 나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석을 하나,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며 오로지 망상

분별을 한 것일 뿐이다. 이 어른들의 뜻이란 널리 하늘을 덮고 두루 땅을 떠받들어주는 것과 같음

을 모른 것이라 하겠다.

이들의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의기투합하여, 기봉(機鋒)이 일치되므로 저쪽에서 처음을 거량하면

바로 끝을 알았는데, 요즈음의 학자들은 옛사람의 몸을 비꼈던 곳〔轉身處〕을 모르고 부질없이

생각의 길〔意路〕에서 헤아리고 있다.

이를 알고저 한다면 조주스님과 남전스님이 몸을 비꼈던 곳을 보아야 할 것이다. 송은 다음과 같

다.

(송)

공안을 분명하게 하여 조주스님에게 물으니

-말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다시 벨 필요가 없다. 상여 뒤에 약봉지를 매달았구나.


장안성 안에서 마음껏 한가로이 노니네.

-이처럼 쾌활하고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 손에 잡히는 대로 풀을 꺾어 참으로 이렇게 지

도를 하는구나.


짚신을 머리에 이었으나 아는 사람 없어

-한명은커녕 반 명도 없다 따로이 한 가풍이로다. 밝은 것에도 어울리고 어둔 것에도 어울린다.


고향산천에만 갔다하면 모두가 쉬게 된다.

-그 자리에서 30방망이를 때렸어야 좋았을걸. 말해보라, 어느 곳에 허물이 있었는가를. 바람이 없

는 데에서 풍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두 스님이 모두 놓아버렸다. 이렇게 하지 못할까 염려스   러울 뿐 이렇게 한다면 몹시 기특하지.


(평창)

“공안을 분명하게 하여 조주스님에게 물었다”는 것은, 경장주(慶藏主)가 말하기를 “이는 판결을

하는 것과 똑같다. 여덟 대 때려야 할 사람에게는 여덟 대를, 열세 대를 때려야 할 사람에게는 열

세차례를 때려 결단을 내버렸다”고 하였다.

이 공안을 가지고 조주스님에게 물으니 조주스님은 그의 집안 사람이었으므로 남전스님의 뜻을

알았다. 그는 투철한 사람이었기에 이리치고 저리치며〔著磕著〕바로 몸을 뒤재켜 본분작가의

안뇌(眼惱)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바로 떠나버린 것이

다.

설두스님은 말하기를 “장안성 안에서 마음껏 한가로이 노니네”라고 하였으니, 허물이 적지 않다.

옛사람의 말에 “장안이 좋기는 해도 오래 살 곳은 못 된다”하였고, 또한 “장안은 몹시 시끄럽지만

우리 동네는 편안하다”고 하였으니, 또한 “장안은 몹시 시끄럽지만 우리 동네는 편안하다”고 하였

으니, 모름지기 어떤 상황에서 한 말인가를 알고 길흉을 분별하여야만 된다.

“짚신을 머리에 이었으나 아는 사람 없어”라는 것은 짚신을 이었던 것은 조금도 이러쿵저러쿵

할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만이 알 수 있고 자신만이 증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한

다. 이로써 남전스님․조주스님․설두스님이 똑같이 체득하고 똑같이 활동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말해보라, 지금은 이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를.

“고향산천에만 갔다하면 바로 쉬게 된다”고 하였다. 고향산천은 어디일까? 그(설두스님)가 알지

못했다면 결코 이처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벌써 알고 있었다. 말해보라, 고향산천이 어디

에 있는가를. (원오스님은) 쳤다.

1)제64칙에는 〔수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