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62칙 운문의 보물 한가지〔雲門一寶〕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0:32
 

 

 

제62칙 운문의 보물 한가지〔雲門一寶〕


(수시)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 얻은 지혜〔無師智〕로 작위(作爲)없는 묘용(妙用)을 발휘하며, 조건 없는

자비로써 청하지 않는 훌륭한 벗이 되며, 한 구절에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한 기연속에

놓아주고 사로잡기도 한다.

말해보라. 어떤 사람이 일찍이 이처럼 했는가를. 거량해보리라.


(본칙)

운문스님이 대중 설법을 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물다. 천지사방을 거두려 해도 안된다.


우주의 사이에

-귀신 굴 속에서의 살람살이 따위는 그만두어라. 빗나가버렸다.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어

-어디에 있느냐? 광채가 나는구나. 절대 귀신의 굴 속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형산(形山)에 감춰져 있다.

-꽉 부딪쳐, 까발려라!


등롱(燈籠)을 들고 불전(佛殿)으로 향하고,

-(그 정도야) 알음알이로 알 수 있지.


삼문(三門)을 가지고 등롱 위로 왔노라.”

-운문스님이 옳기는 하지만 잘못됐다. 아직 좀 모자란다. 자세히 점검해본다면 썩은 냄새에 불과

할 것이다.


(평창)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의 우주의 사이에,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어 형산(形

山)에 감춰져 있다”하였는데, 말해보라, 운문스님의 의도는 그 말에 있는 것일까, 등롱 위에 있는

것일까? 이는 승조법사(僧肇法師)의 「보장론(寶藏論)」에 있는 몇 구절인데, 운문스님이 이를 들

어 설법한 것이다.

승조법사는 후진(後秦) 시대에 소요원(逍遙園)에서 논(論)을 지었다. 그는 「유마경(維摩經)」을

베껴 쓰다가 장자와 노자가 오묘함을 다하지 못했음을 알고, 이에 구마라집(鳩摩羅什)에게 예배를

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와관사(瓦棺寺)에서 발타바라(跋陀婆羅)법사를 참방하였는데, 그는 서

천(西天) 27조(二十七祖 : 船若多羅)에게 심인(心印)을 전수받은 스님이었다. 승조법사는 27조스님

의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렀는데 어느날 난을 만나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때 7일간의 여가를 얻어

「보장론」을 지었다.

운문스님은「보장론」 가운데에서 네 구절〔四句〕을 들어 그 대의를 설법하기를 “무엇 때문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배〔無價之寶〕가 음계(陰界)속에 숨겨져 있느냐?”고 했다.「보장론」의

내용은 종문(宗門)의 말들과 일치되고 있다.

듣지 못하였느냐, 경청(鏡淸)스님이 조산(曹山)스님에게 물었던 것을. 즉,

“맑고 비어〔淸虛〕있는 이치는 결국 몸이 없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치〔理〕는 이과 같은데, 그럼 현상〔事〕은 어떠한가?”

“나 조산 한 사람이야 속일 수 있겠지만 많은 성인의 눈은 어떻게 하려느냐?”

“많은 성인의 안목이 없었다면 그 사실을 화상께서는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 용납할 수 없지만 사적으로도 수레도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사이 우주의 사이에,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어 형산(形山)에 감춰져  

있다”고 하니, 「보장론」의 대의는 사람마다 모두 갖추어져 있고 낱낱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운문스님이 이를 들어 시중(示衆)하였지만 온전히 그대로 드러난 것이므로 좌주(座主 : 강사)들처

럼 괜히 그대에게 주해를 달아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비로써 다시 그대들에게 주해를

붙여 말하기를 “등롱(燈籠)을 들고 불전으로 향하고, 삼문(三門)을 가지고 등롱 위로 왔노라”하였

다. 말해보라, 운문스님이 이처럼 말했던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듣지 못하였느냐? 옛사람(영가스님)이 말하기를 “무명(無明)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佛性)이요,

환화(幻化)의 빈 몸〔空身〕이 큰 법신(法身)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청량의 「화엄경대소」의 서

문에서는) “범부의 마음속에서 부처의 마음을 본다”고 하였다.

형산(形山)이란 사대 오온(四大五蘊)을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어 형산에 감춰져 있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이 마음에 있는데도 미혹한 사람은 바깥에서 구하느라고, 자신에게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배가 간직되어 있는데도, 일생 쉴 줄을 모른다.”

“불성은 당당하게 뚜렷이 나타나 있으나 모양〔相〕에 머무는 중생은 보기 어렵다. 중생 그 자체

가 무아(無我)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나의 얼굴이 어찌 부처의 얼굴과 다르리요!”

“마음은 본래의 마음이며, 얼굴은 어머니가 낳아주신 얼굴이다. 겁석(劫石)은 옮길 수 있어도 그

가운데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어떤 사람은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昭昭靈靈〕한 것을 보배로 여기면서도 그 묘용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 묘용을 체득하지 못하므로 꼼짝달싹 하지 못하며 그 보물을 들추어내지 못한다.

옛사람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말하였다.

등롱을 들고 불전으로 향하는 것은 일상의 알음알이로도 알 수 있으나, 삼문(三門)을 가지고 등

롱 위에 온다는 것도 알 수 있겠느냐? 운문스님이 일시에 그대들의 정(情)․식(識)․의(意)․상

(想)과 득실 시비를 쳐부숴버렸다.

설두스님은 “나는 소양(韶陽 : 운문)스님의 참신한 공안을 좋아한다. 일생 동안 사람들이 집착한

못을 빼고 쐐기를 뽑아주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법상에 앉은 선지식들이 얼마인지를 아는가? 날

카로운 칼날로(얽매임을) 끊어주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운문스님은 “등롱을 들고 불전으로 향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이 한 구절로 (모두를) 절단해버리

고, 또다시 “삼문을 가지고 등롱 위로 왔노라”고 하니 이는 말하자면 전광석화와 같은 것이다.

운문스님은 말하였다.

“그대가 이 경지와 같아지려거든 먼저 깨닫도록 하라. 티끌처럼 많은 부처님이 그대의 발 아래

있으며, 삼장(三藏)의 말씀이 그대의 혀 끝에 있으니 이를 깨닫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스님

이여, 망상을 부리지 말라. 하늘은 하늘, 땅은 땅, 산은 산, 물은 물, 스님은 스님, 속인은 속인이니

라.”

말없이 한참 있다가 말을 이었다.

“나의 앞에 앞산을 가져와보아라.”

문득 어떤 스님이 나오더니 물었다.

“제가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어떻습니까?”

“삼문(三門)이 무엇 때문에 여기를 지나가느냐?”

그가 죽을까 염려스러워 손으로 한 획을 그린 후에 말하였다.

“이를 안다면 으뜸가는 제호(醍醐)의 맛이겠지만, 알지 못한다면 도리어 독약이니라.”

설두스님은 또다시 말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의 사이에, 그 가운데 하나의 보배가 있는데, 벽 위에 걸려 있다. 9년 면벽

을 한 달마의 정안(正眼)으로도 이를 보지 못하였다. 오늘날의 납승들이 보려 한다면 등줄기를 바

로 후려치겠다.”

살펴보건대, 본분종사들은 결코 실제의 법을 가지고 사람들을 얽어묶지는 않았었다. 현사(玄沙)

스님은 말하기를 “잡아 가두어도 머물지 않으며 불러도 되돌아보질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긴 하나 이도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끄는 것처럼 자취를 남기는 일이다.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살펴보고 살펴보라.

-크게 눈여겨보라. 살펴서 무엇 하려고? 검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구나.


옛 언덕에 어느 사람이 낚싯대를 잡고 있는가?

-고고하고 몹시 고고하며 절벽처럼 험준하고 매우 험준하다.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기는구나.

  뒤통수에 뺨이 보이는 (괴상한) 놈과는 왕래를 하지 말라.


구름은 뭉게뭉게

-끊어버려야 한다. 백겹 천겹이로군. 기름 때 찌든 모자요, 노린내 나는 무명 적삼이다.


물은 넘실넘실

-갈팡질팡. 앞이 막히고 뒤도 막혔구나.


밝은 달 갈대꽃을 그대여 스스로 살펴보오.

-보았다 하면 눈이 먼다. 운문스님의 말을 알 수 있다면 설두스님의 마지막 부분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평창)

운문스님의 말을 알 수 있다면 설두스님이 사람을 지도한 곳을 바로 알 것이다. 그는 운문스님의

대중 설법 마지막 부분 두 구절(등롱 운운한 부분)에 주해를 붙여 말하기를 “살펴보고, 살펴보라”

고 하였는데, 그대가 눈썹을 치켜 세우고〔瞠1)眉〕눈을 부릅뜨라는 말로 이해한다면 이와는 전

혀 관계가 없다.

옛사람이 말하였다.


신령한 빛 홀로 비치어

아득히 근(根)․진(塵)을 벗어나다.

진상(眞常)이 통째로 드러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심성(心性)은 물듦이 없어

본래 뚜렷하게 그대로이니

허망한 반연(攀緣) 여의기만 하면

바로 여여(如如)한 부처라네.


만일 눈썹을 치켜 세우고 눈을 부라리며 턱 버티고 있다면 어떻게 육근(六根)․육진(六塵)을 벗

어날 수 있겠는가?

설두스님은 말하였다.

“살펴보고, 살펴보라. 운문스님이 언덕에 낚싯대를 잡고 있는 것과 같다. 구름 또한 뭉게뭉게 피

어오르고 물도 넘실넘실한데 밝은 달은 하얀 갈대꽃에 비치고, 갈대꽃은 밝은 달에 비친다.”

바로 이러할 때는, 말해보라, 어떤 경계일까? 곧바로 볼 수 있다면 앞의 구(구름은 뭉게뭉게)와

뒤의 구(물은 넘실넘실)가 결국은 같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