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74칙 금우의 춤〔金牛作舞〕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1:15
 

 

 

제74칙 금우의 춤〔金牛作舞〕


(수시)

막야(鏌鎁) 보검을 종횡으로 어루만지니 칼날 앞에 언어 갈등의 소굴이 끊어지고, 밝은 거울을 높이 거니 언구 속에 비로인(毘盧印)이 나온다.

평온하고 정밀한 경지에서 옷 입고 밥 먹으니, 신통력 부리는 곳에 무엇 하러 머물랴. 분명히 알았느냐? 아래의 글을 보아라.


(본칙)

금우(金牛)스님은 언제나 점심 때〔齋〕가 되면 몸소 밥통을 가지고 승당 앞에서 춤을 추면서 껄껄대며 말하였다.

“보살아! 밥 먹어라.”

-낚싯대 끝의 실이 그대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흔들거리지만, 맑은 물결 어지럽히지 않으니 그 뜻이 남다르다. 제호와 독약을 동시에 활용한다. 옳기는 옳다. 모든 보배가 일시에 나열되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적은 것을 어찌하랴.


설두스님은 말하엿다.

“그렇긴 하지만 금우스님은 마음씨가 좋지는 않다.”

-도적이 도적을 알고 망상꾸러기가 망상꾸러기를 아는구나. 찾아와 시비하는 놈이 정말 시비하는 놈이다.


어떤 스님이 장경(長慶)스님에게 물었다.

“옛사람이 ‘보살아 ! 밥 먹어라’고 한 뜻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의심스럽네. 원래 귀결처를 몰랐구나. 장경스님이 무어라고 말할까?

“재(齋)로 인하여 축하하고 찬양하는 것과 똑같다.”

-분위기에 걸맞게 장단을 맞추네. 죄상에 의거하여 판결을 한다.


(평창)

금우스님은 마조스님 회하의 큰스님이시다. 점심 때가 되기만 하면 밥통을 들고 승당 앞에서 춤을 추면서 껄껄대며 웃고 말하였다.

“보살아! 밥 먹어라.”

이같이 줄곧 20년 동안 하였는데, 말해보라, 그의 뜻은 어디에 있었는가를. 이를 단순히 ‘밥 먹어라’라는 뜻으로 생각한다면 평소에 목어(木魚)를 두드리고 북을 두드리는 것도 또한 밥 때를 알리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밥통을 들고 와서 숱한 재주를 피우는 것일까? 이는 그가 미친게 아닐까? 아니면 법문을 하는 것인가? 만일 이를 법문을 하는 것이라 한다면 왜 보화왕좌(寶華王座 : 설법상) 위에서 선상을 두드리고 불자를 세우지 않았을까? 이처럼 해서 무엇 하려는 것이었을까? 요즈음 사람들은 옛사람의 뜻이 말 밖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왜 그들은 달마조사가 처음 붙인 제목이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지 않을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교(敎) 밖에 따로이 전하여 오직 심인(心印)만을 전한다”고 하였다. 옛사람의 방편이란 그대들에게 대뜸 알도록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헛되이 스스로 헤아리면서 “거기에 뭐 대수로운 일이야 있었겠나. 추우면 불 쪼이고, 더우면 시원한 바람 쏘이며,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잔다”고 말들을 한다.

이와 같은 상정(常情)으로 뜻 풀이를 하고 주석을 붙이면〔義解詮註〕 달마의 일종(一宗)은 땅을 쓸어버린 듯 없어질 것이다. 이는 옛사람이 하루종일 끊임없이 잊지 않고 이 일을 밝히려 했다는 점을 모른 것이다.

설두스님이 한 “그렇기는 하지만 금우스님은 마음씨가 좋지 않다”는 한 구절을 많은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다. 이른바 으뜸가는 제호의 맛이란 세상에서 최고인데 이런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독약이 되는 경우이다.

금우스님은 한 수준을 낮추어서 사람을 지도하였는데, 설득스님은 무엇 때문에 “마음씨가 좋지 않다”고 말하였을까? 무엇 때문에 이처럼 말하였을까? 납승이라면 반드시 쌩쌩한 정신〔生機〕이 있어야 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즈음 사람은 옛사람의 경지에 이르지도 못하고서 오로지 “무슨 마음을 보며, 무슨 부처를 보랴”고 말들을 한다. 이런 견해를 지닌다면 금우 노작가를 헐뜯는 일이니, 반드시 자세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입으로만 지껄인다면 깨칠 기약이 없을 것이다.

그 뒤 장경스님이 상당 법문을 하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옛사람은 ‘보살아! 밥 먹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뜻은 무엇입니까?”

“재(齋)로 인하여 축하하고 찬양하는 것과 똑같구나.”

존숙께서 너무도 자비로움이 많아 적잖은 허물을 지었다. (대답이) 옳기는 옳지만 “재로 인하여 축하하고 찬양했다”하니, 그대들은 말해보라. 축하하고 찬양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설두스님의 송을 살펴보라.


(송)

흰 구름 그림자 속에서 껄껄거림이여,

-웃음 속에 칼이 있다. 열을 내서는 안되지. 천하의 납승들이 귀결점을 모르는구나.


두 손으로 가져다가 그대에게 전해준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금우스님을 비방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밥통이라 말  해서야 되겠느냐. 본분 납승이라면 이런 밥은 먹지 않겠지.


황금빛 사자 새끼라면

-반드시 격식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가 안목을 갖추었다고는 인정하지만 안목이 바르지 못할까 걱정이다.


3천 리 밖에서도 어려운 곳을 알아차리리라.

-반푼 어치도 안된다. 한바탕 실수로군. 어려운 곳이 어디에 있느냐? 이 장님아!


(평창)

“흰 구름 그림자 속에서 껄껄거림이여”라고 하니, 장경스님은 “재로 인하여 축하하고 찬양한다” 말하였고, 설두스님은 “두 손으로 가져다가 그대에게 전해준다”고 하였는데, 말해보라, 이는 그에게 밥을 먹으라고 가져다 준 것일까, (아니면) 따로이 기특한 것이 있을까?

이를 분명히 안다면 황금빛 사자의 새끼일 것이며, 황금빛 사자 새끼라면 다시는 금우스님이 밥통을 가지고 춤추며 껄껄댈 필요가 없을 것이며, 곧바로 3천 리 밖에서 그의 잘못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옛사람의 말에 거울은 기틀(언어) 이전에 있어서 약간의 조작도 필요치 않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납승이라면 평소에 격식 밖에서 활용해야 비로소 본분종사라고 불리울 것이며, 언어에 의거한다면 허물을 면치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