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95칙 보복의 차나 마시고 가게〔保福喫茶去〕

通達無我法者 2008. 3. 3. 14:17
 

 

 

제95칙 보복의 차나 마시고 가게〔保福喫茶去〕


(수시)

부처가 있는 곳에 머물지 말라. 머물면 뿔이 돋게 된다. 부처가 없는 곳은 빨리 지나쳐라. 지나치지 않으면 (번뇌의) 풀이 한 길이나 우거질 것이다.

설령 맑게 훌훌 벗고 텅 비어 말끔하여, 일삼더라도 마음을 두지 않고〔事外無機〕 마음을 쓰더라도 일삼지 않는다〔機外無事〕. 그렇다 하더라도 그루터기를 지키며 날마다 토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말해보라, 결국 이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행하여야 할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장경스님이 어느 때 말하였다.

“차라리 아라한(阿羅漢)에게 삼독(三毒)이 있다 말할지언정

-불타버린 곡식에서는 싹이 트지 않는다.


여래에게 두종류의 말씀이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벌써 석가노인을 비방해버렸구나.


여래께서 말씀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래도 부끄러운 일이다. 산산조각났구나.


두 종류의 말씀이 없었을 뿐이다.”

-빙 돌려서 한 것이다. 무슨 제삼․제사 종류의 말씀을 말하느냐.


보복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여래의 말씀인가?”

-한 번 잘 내질렀군. 무슨 말을 하느냐.


“귀먹은 사람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하소연한다. 갈기갈기 찢겼구나.


“그대가 제이의(第二義)에서 말했다는 것을 참으로 알겠군.”

-눈 밝은 사람을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느냐. 콧구멍을 쥐어틀었군. 어찌 제이의제에 그치리요(제삼․제사이다).


장경스님이 보복스님에게 되물었다.

“어떤 것이 여래의 말씀일까?”

-잘못됐다. 아직 조금 멀었다.


“차 마시고 정신차려라〔喫茶去〕!”

-알았다. (원오스님은) 다시 말하기를, 알았느냐고 하였다. 빗나가버렸다.


(평창)

장경스님과 보복스님이 설봉의 회하에 있으면서 항상 서로가 거량하고 경각시키며 일깨워왔는데, 이날도 평상시처럼 대화하며 말하였다.

“차라리 아라한에게 삼독이 있다 말할지언정 여래에게 두 종류의 말씀이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범어(梵語)의 아라한이란 중국 말로 번역하면 (번뇌의) 적을 죽임〔殺賊〕이라 하는데, 이는 그 기능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81품(八十一品)의 번뇌를 끊고 모든 번뇌를 다하여 범행(梵行)이 갖추어지니, 이것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아라한(阿羅漢)의 지위이다. 삼독(三毒)이란 탐욕〔貪〕․성냄〔瞋〕․어리석음〔癡〕으로 근본 번뇌(根本煩惱)이다. 81품도 끊어 다하였는데 삼독이야 말해 무엇하랴.

장경스님의 “차라리 아라한에게 삼독이 있다 말할지언정 여래에게 두 종류의 말씀이 있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대의는 여래에겐 진실한 말씀 아닌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한 일만 진실할 뿐 나머지 둘은 진실이 아니다.” 또 “일승법(一乘法)이 있을 뿐, 이승도 삼등도 없다.”

세존께서 300여 회에 걸쳐 중생의 근기를 살피시어, 가르침을 내리시고 병에 따라 약을 주시듯 하였으나, 모든 설법이 결코 두 종류의 말씀이 아니었다. 부처님의 의도가 이러니 그대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부처님이 일음(一音)으로 연설하신 법이 없지는 않지만, 장경스님은 결국 여래의 말씀을 꿈에서도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음식을 말로만 하는 사람은 끝내 배부르지 않는 것과 매우 같기 때문이다.

보복스님은 그(장경스님)과 평상시에 교(敎)를 말하는 것을 보고 질문을 하였다.

“어떤 것이 여래의 말씀인가?”

“귀 먹은 사람이 어떻게 이것을 들을 수 있겠느냐?”

그(장경스님)는 언제나 귀신 굴 속에서 살람살이를 해왔었다.

보복스님은 말씀하셨다.

“그대가 제이의제로 말했다는 것을 참으로 알았다.”

과연 그 말이 적중하여 문득 다시 묻기를,

“사형(師兄)! 어떤 것이 여래의 말씀입니까?”

라고 하자, 보복스님은 말씀하셨다.

“차 마시고 정신차려라!”

이는 거꾸로 다른 사람에게 창을 빼앗겨버린 꼴이다. 대단하신 장경스님이 돈도 잃고 죄를 지었다. 여러분에게 묻노니, 여래의 말씀은 몇 개나 있느냐? 반드시 한마디, 한 구절도 없다고 알아차려야 만이 두 사람의 잘못을 알게 될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 사람 모두 방망이를 맞아야 한다. 이들은 모두 한 가닥(제이의제의) 길을 터놓고서 그와 함께 알음알이를 내었다.

어느 사람은 “보복스님의 말은 옳고, 장경스님의 말은 옳지 않다”고 하여, 오로지 말을 따라서 이해하고 “잘한 것도 있고, 잘못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옛사람(보복․장경스님)의 솜씨가 전광석화 같았음을 모른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옛사람이 휙 뒤집어놓았던 점을 살피지 않고 오로지 언구 아래 치달리며 말하기를 “당시 장경스님이 제대로 대꾸하지 않았기에 제이의제에 떨어졌다. 보복스님의 ‘차 마시고 정신차리게!’ 라는 말이 바로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라고 한다. 이처럼 이해했다간 미륵이 하생하여도 고인의 뜻을 알지 못하게 된다.

작가라면 끝내 이러한 견해를 일으키지 않고 이 소굴에서 뛰어나와 반드시 끝없이 초월하는 한 가닥 길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귀머거리가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들 어찌 틀린 곳이 있겠으며, 보복스님이 “차 마시고 정신차려라!”라고 말했으나 어찌 옳을 것이 있겠는가? 이는 더더욱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활구를 참구해야지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제95칙) 인연은 제89칙의 “변신시(徧身是)․통신시(通身是)”의 인연과 한가지로서, 계교와 시비를 할 곳이 없다. 모름지기 여러분의 발 아래가 말끔히 훌훌 벗어버린 경지가 있어야 옛사람이 주고받았던 의도를 알 수 있다. 오조노사(五祖老師)께서는 “이는 달리는 말 앞에서 씨름을 하듯이, 순식간에 딱 승부를 끝내야만 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제 눈으로 확인하고 손수하여야 한다.

이 공안을 바른 눈으로 살펴 잘잘못이 없는 곳에서 잘잘못을 분별하며, 가깝고 먼〔親疎〕 것이 없는 곳에서 가깝고 먼 것을 나눈다면 장경스님은 반드시 보복스님께 절을 올렸어야 했다. 왜냐하면 조금 교묘한 곳에서 운용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번개가 구르고 유성(流星)이 날 듯이 민첩하였으니 보복스님은 참으로 이빨 위에 이빨이 났으며, 발톱 위에 발톱이 달렸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제일의(第一義) ․제이의(第二義)여,

-우리 임금의 창고 속에는 이같은 일이 없다. 고금의 본보기이다. 삿되고 악한 것을 좇아   무엇하랴.


와룡(臥龍)은 고인 물에 나타나지 않는다.

-같은 길을 가야 알 것이다.


(용이) 없는 곳엔 맑은 파도에 달빛 어리고,

-사해(四海)에 한 척의 배로 홀로 가는구나. 부질없이 수고롭게 헤아리고 있다. 때 지났는데 무슨 밥그릇을 찾느냐!


있는 곳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물결이 일어났다.

-사람을 겁주는구나. 머리털이 쭈뼛 솟구친다.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한다. (용아스님) 이리 오너라.


능선객(稜禪客), 능선객이여.

-도적을 끌어들여 집안을 망하게 하는구나. 시끄러운 저자에 가지 말라. 돈도 잃고 죄를 받으리라.


3월의 우문(禹門)에서 이마만 다쳤구려.

-남에게 양보하는 자는 만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없다. 찍 소리 못 하네.


(평창)

“제일의․제이의여”라는 송을 두고 사람들은 제일의․제이의로만 이해하니, 이것이 죽은 물 속에서 살림살이하는 것이다. 이 알음알이〔機巧〕로써 제일의니, 제이의니를 이해하려 한다면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한다.

설두스님은 “와룡은 고인 물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썩은 물 속에 어떻게 용을 살게 할 수 있겠는가? 제일의니, 제이의니 하는 것은 바로 고인 물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격이다. 모름지기 거대한 파도가 크게 질펀하고 흰 물결이 하늘까지 넘실거리는 곳에만 용이 산다. 이는 앞(제18칙)에서의 “맑은 연못엔 푸른 용이 사는 것을 허락치 않는다”는 구절과도 같다. “썩은 물에는 용이 살지 않는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느냐! 또한 “와룡은 연못이 맑아질까 상당히 두려워한다”는 말까지 있다. 그러므로 “용이 살지 않는 곳엔 맑은 물결에  달빛이 어려 있어 바람이 잠잠하고 물결이 고요하지만, 용이 사는 곳엔 바람이 없는데도 풍랑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보복스님의 “차 마시고 정신차려라!” 라는 말은 바람이 없는 곳에 물결이 일어나는 것과 매우 같은 일이다. 설두스님이 여기에 이르러 일시에 알음알이〔情解〕를 한데 정리하여 송을 끝마쳤다. 그래도 (설두스님에게는) 노랫자락이 남아 있어 문장의 조리를 갖추어, 여전히 그 속엔 외알눈〔一隻眼〕을 붙여두니, 참으로 기특하다 하겠다.

한편, “능선객 능선객이여, 3월의 우문에서 이마만 다쳤구려”라는 것은, 장경스님이 용문(龍門)을 통과한 용이긴 하지만 보복스님에게 갑자기 한 차례 이마를 얻어맞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