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조사선의 수행체계 / 정성본

通達無我法者 2008. 3. 7. 15:27

 

 

 

 

 

1. 序言

 

問題의 提起

일반적으로 祖師禪이라면 唐代의 傑僧 馬祖道一(709-788)이 조사선의 정의라고 할 수 있는 平常心是道라는 주장처럼,

수행이 필요없는 일상 생활 그대로의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종교로 안이하게 간주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또한 [이 마음이 곧바로 다름아닌 부처]라고 하는 卽心是佛의 주장은 이러한 생각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간주되어 왔다.

사실 唐代의 조사선에서는 마조의 설법에서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道不用修)]라는 주장을 비롯하여,

寶林傳에서나 臨濟錄에서도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無修無證)]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언뜻 생각하기에는 수행과 깨달음의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는 주장도 보인다.

 

그리고 傳燈錄이나 당대의 禪語錄을 보면,

조사들은 대게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깨달음을 체득하기도 하고,

스승과의 일상 대화(禪問答)나 일상의 作務(勞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깨달음을 얻게된 機緣을 많이 전하고 있기 때문에 선수행의 기본이 되는 좌선의 실천은 하지 않았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사실 馬祖道一이 南嶽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 좌선 수행을 하고 있을 때,

懷讓禪師가 [그대가 좌선수행으로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은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이 되도록 하는 것과 같다]고 좌선 수행을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逸話에서 좌선 수행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몇가지 특수한 경우의 事例와 그 선문답에 대한 내용의 의미를 잘 못 파악하여 조사선의 본질과 참된 수행 정신을 잘못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필자는 조사선의 본질적인 정신과 수행 체계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이에 대한 오해와 실천 수행에 착오가 없도록 제시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제기하여 조사선의 수행체계를 논해 보고자 한다.

 

회양선사는 왜 좌선 수행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 마조의 좌선을 비판하고 있는가 ?

조사선에서 좌선 수행은 무의미한 것인가?

또한 마조는 왜 平常心이 道라고 하면서 "道는 수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道不用修)"주장하고 있는가?

 

그가 주장하는 平常心은 어떤 마음이며,

平常心이 道라고 주장하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러면 조사선의 수행체계는 어떻게 이루어 졌으며,

平常心이 道인 그 사실과 "道는 수행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사실"을 어떻게 체득하여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것인가?

 

이상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조사선의 기본 정신과 수행체계를 唐代의 禪語錄 등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2. 조사선의 기본정신

平常心是道

조사선의 본질을 한마디로 "日常性의 종교" 혹은 "생활속의 종교" "자각의 종교" 등으로 다양하게 제시 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의미에서 먼저 馬祖道一이 주장한 "平常心是道"라는 조사선의 정의를 통해서 살펴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傳燈錄 제28권에는 馬祖道一의 "平常心是道"에 대한 설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道를 이루는데 修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더럽히지(汚染)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이 汚染이 되는가?

生死의 마음을 일으키고,

造作하여 趣向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汚染이 된다.

 

만약 곧바로 道를 알고자 한다면 "平常心이 바로 道"이다.

平常心이란 造作이 없고 是非도 없고,

取捨도 없고,

斷常도 없으며,

凡聖 등의 차별심,

분별심도 없는 그 마음이다.

 

經에 말씀하시길,

[凡夫行도 아니요 賢聖行도아닌 바로 그것이 菩薩行 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다만 지금의 行住坐臥에서 환경에 순응하고 사물을 접하는 것(平常心)이 바로 道인 것이다.

道는 즉 바로 法界인 것이며 恒河沙와 같은 많은 미묘한 작용(妙用)도 이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大正藏』 51권 440 쪽, 上 )

마조의 설법은 傳燈錄과 語錄 등의 馬祖傳에 한결같이 전하고 있는 유명한 일단 인데,

여기서 먼저 그가 주장하는 "平常心이 바로 道"라고 하는 "平常心"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조의 설법에 "平常心"이란 "수행하여 깨닫고 부처가 되려고 하는 造作된 마음이 없고,

옳고 그름을 시비하는분별심도 없고,

좋은 것은 取하고 싫은 것은 버릴(捨)려고 하는 간택하고 선택하는 차별심도 없고,

편견과 고정관념의 마음도 없고,

범부나 성인을 구별하는 차별,분별심도 없는 本來心"을 가리키고 있다.

 

信心銘에서도 "지극한 道를 이루는데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다.

다만 取捨選擇하는 하는 마음만 없으면 된다.(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고 읊고 있는 주장과 똑같은 입장임을 알 수있다.

 

어떠한 경계에서도 편견과 고정관념도 없고,

일체의 차별 분별심도 일으키지 않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本來心을 마조는 "平常心"이라고 부르고, 이 平常心이 바로 道이며,

平常心이 곧 다름아닌 부처(卽心是佛)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중국 선불교의 사상적인 발전을 잠깐 살펴보면 荷澤神會(684--758)의 南宗禪과 六祖壇經에서는 妄念이 없는 無念의 眞如自性을 頓悟하도록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自性淸淨한 眞如自性과 번뇌의 妄念을 구분하는 입장에서 頓悟見性(自性)의 수행 구조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마조는 이러한 眞如自性과 妄念을 구분하지 않고,

이를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平常心으로 통합하여 주장하고,

이러한 平常心 이외에 달리 眞如自性이나 근원적인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마조가 주장하는 "平常心"은 경전에서 주장하는 "眞如自性"이나 "自性淸淨心"인 인간의 본래심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馬祖語錄"에 전하는 그의 설법을 통해서 확인해 보자.

또 질문했다. 

"어떠한 견해를 지어야 도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까?"

마조대사가 대답했다. 

"自性은 본래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善惡의 事象에 구애되지 않는다면 修道人이라고 할 수 있다.

善을 취하고 惡을 버리며 ,

空을 觀하여 禪定에 드는 것은 바로 造作하는 행위(業)이다.

게다가 다시 밖에서 道를 구하려 한다면 道와는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續藏經 119 권, 406 쪽 a 단)

 

마조가 주장하는 平常心은 인간 누구라도 본래 구족하고 있는 "自性淸淨心"이며,

인간의 근원적인 本來心을 인간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그 본래의 마음(平常心)이라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중국적인 일상생활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平常心은 무한히도 충실하고 완전한 것이며,

더군다나 본래심이기 때문에 또다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간의 평법하고 소박한 그 마음인 것이다.

이러한 平常心으로 살아가는 것이 다름아닌 道이며,

근원적인 本來淸淨心인 平常心이 다름아닌 부처(卽心是佛)라고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사실 마조가 주장한 平常心은 일체의 차별,분별과 편견과 고정관념을 완전히 탈피한 근원적인 인간의 本來心을 말하는 것이지,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며 분별과 차별심에 떨어져 시기 질투를 일으키는 범부의 몰자각된 衆生心을 지칭하는 말이 아님을 잘 알아야 한다.

 

다시 앞에서 인용한 마조의 설법으로 되돌아가 이 점을 재확인해 보자. 

"道는 修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만 더럽히지(汚染)않도록 하라.

무엇을 汚染이라고 하는가?

生死의 마음을 일으키고,

造作된 마음으로 수행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은모두 汚染이 된다"

라고 설하고 있다.

 

마조는 "平常心이 道"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道의 생활은 汚染이 없는 平常心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조는 번뇌를 일으켰다가 없애고 하는 生死心 ,

차별심,분별심이나 조작된 마음을 일으켜 수행하여 도를 이룰려고 하거나 부처가 되려고 하거나 하는 마음을 모두 汚染이라고 말하고 있다.

 

汚染이 없는 마음은 다름아닌 청정한本來心인 것이며,

이러한 본래심을 平常心이라고 말하고 있다.

 

傳燈錄 제5권 慧能章에 "도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道由心悟)"라고 말하고,

祖堂集 제3권 등에서 "無心이 바로 道(無心是道)"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실 道는 자각된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떤 외부적인 場所나 事象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근원적인 本來心으로 자각된 "平常心이 바로 道"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본래심의 자각에 의해 道가 이루어 지는 것임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汚染이란 말은 마조설법의 독창적인 용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平常心이 自性淸淨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표현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마조가 말하는 平常心은 단순한 범부의 몰자각적인 衆生心을 지칭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평상심을 자각하고 일상생활에 자유롭게 오염되지 않고 전개할 수 있는 입장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하지 않고도 가능한 일인가?

 

汚染과 더불어 禪佛敎의 修證論으로 항상 문제가 되고 있는 중요한 禪問答이 육조혜능과 남악회양과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화이다.

즉 傳燈錄 제5권 南嶽懷讓章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六祖 ;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회양 : [嵩山에서 왔습니다.]
六祖 ;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회양 ; [一物이라고 說似하여도 맞지(옳치) 않습니다.]
六祖 ; [또 다시 修行하고 證得해야 할 것이 있는가?]
회양 ; [修證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더럽혀서(汚染)는 안 됩니다.]
六祖 ; [단지 이 더럽히지 않는 것(不汚染)만이 諸佛이 護念하는 것이다. 그대가 이미 이와 같고 나 또한 이와 같다.]
(大正藏  515 권 240쪽, 下 )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六祖와 懷讓과 의 禪問答은 회양이 六祖慧能의 불법을 계승하게된 근거가 되고 있는 機緣의 일단이기도 하다.

이 일단의 대화는 사실 마조계의 禪宗史書인 寶林傳 (801년성립)에 최초로 등장되고 있는 것인데,

祖堂集 제3권 南嶽懷讓傳 등에도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회양이 "설사 한 물건(一物)이라고 말해도 옳치 않습니다!"

라는 말은 불법의 본질을 직접 체득하여 자기 자신의 경지에서 자신있게 제시한 한마디인 것이다.

회양은 이 한마디로 六祖慧能으로부터 인가 받게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臨濟錄 등 당대의 선어록에 자주 인용되고 있으며,

宋代에 재편된 六祖壇經에서 혜능의 心偈를 本來無一物로 고칠 수 있게된 사상적인 근거가 되는 말이기도 하다.

 

說似一物卽不中이라는 회양의 말이나,

本來無一物은 똑 같은 의미로서 因緣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모든 존재는 無常한 것이며,

결국은 本來의 空으로 되돌아가는 필연적인 것이기에 어떤 고정된 존재로나 형체로서 이름 붙일 수가 없다는 입장을 말한다.

 

이러한 本來無一物의 경지를 깨닫고 제시한 말이다.

金剛經에서 말하는 "고정된 정법이란 있을 수가 없다( 無有定法)"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다시 말하면 本來無一物은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一切皆空의 입장을 말한다.

때문에 육조는 회양이 이러한 一切皆空의 본질을 깨닫고 說似一物卽不中이라는 질풍같은 한마디에 곧바로 印可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혜능이 다시 "그러면 그대는 다시 修行하고 證得해야 할 것이 있는가(還可修證否)?"

라고 재차 회양의 경지를 재확인하자,

 

회양은 "修證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더럽힘(汚染)이 있으면 안됩니다.

(修證卽不無,汚染卽不得)"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자 혜능은

"이 不汚染만이 諸佛이 護念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자네가 이미 이와 같고 나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면서 재차 회양의 修證觀을 확실히 認定하고 있다.

 

여기에는 혜능과 회양이 諸佛과 마찬가지로 不汚染의 修證을 체득하고 있음을 六祖慧能이 확인하여 확신시켜주고 있는 일단인데,

 

不汚染의 修證觀은 어떠한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

이것은 마조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수행하여 도를 이루고 부처가 되려고 하는 조작된 마음과 生死心,

차별심,분별심,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근원적인 本來心(平常心)으로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그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自性淸淨한 本來心은 坐禪修行하고 깨달음을 체득하여 얻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 인간 각자가 본래 구족하고 있는 근원적인 마음이기에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본래심(평상심)을 오염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육조혜능도 [汚染되지 않는 수행과 깨달음(修證)]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마조의 [平常心이 道]가 되는 조사선의 일상생활의 종교는 이러한 汚染없는 청정한 本來의 平常心으로 일상생활을 지혜롭고 무애자재하게 전개하는 자각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범부의 몰자각적인 중생심이 아님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平常心으로 깨달음의 지혜로운 道의 생활을 전개하는 조사선의 汚染없는 수행과 깨달음은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가?

조사선의 수행과 실천구조를 語錄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3. 조사선의 수행체계

조사선의 기본 정신은 자각된 근원적인 平常心(本來心)으로 일상생활을 일체의 경계에 埋沒되거나 걸림없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생활종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사선에서 말하는 禪이란 다름아닌 平常心으로 일상생활을 자유롭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그 전부를 말한다.

말하자면 禪은 [平常心이 바로 다름아닌 道]인 그 생활이며,

이 깨달음의 平常心으로 부처의 경지를 전개하는 [卽心是佛]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일체의 경계에 끄달림 없고 차별,분별심,번뇌의 生死心이 없는 本來心 ,

즉 汚染없는 자각된 平常心으로 무애자재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체득해야 이러한 [平常心是道]와 [卽心是佛]의 선의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범부의 차별심과 분별심으로 얼룩진 汚染된 衆生心으로는 결코 이러한 平常心으로 일상생활의 종교를 전개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평상심으로 道의 생활을 전개하기 위한 조사선의 기본적인 수행체계는 坐禪과 禪問答,

그리고 作務로 나누어서 살펴 볼 수 있다.

 

1 ) 坐禪 수행의 실천

사실 좌선은 선불교의 기본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坐禪은 수행자 개인(一人)이 己事究明을 위한 기본 수행으로,

坐禪堂을 중심으로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는 靜中의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좌선을 통해서 깨달음의 正念을 이루며,

正念決定의 확신을 통해 깨달음을 체득하는 자각적인 수행이다.

 

사실 중국선종의 성립은 좌선수행의 집단에서 출발한 것이다.

굳이 붓다의 樹下 坐禪을 들지 않드라도, 嵩山 少林寺에서 달마가 9년간 面壁 좌선 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비롯하여 雙峰山에서 東山法門을 펼친 四祖道信(580-651)은 초학자들을 위한 최초의 坐禪儀을 설하고 있다.

 

도신의 문하에서 말없이 묵묵하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좌선 수행에 힘쓴 五祖弘忍(601--674)의 구법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특히 禪院淸規에는 夏安居와 더불어 冬安居를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안거는 좌선수행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생각해야 할 점이다. 『臨濟錄』에는 황벽과 임제와의 좌선수행과 임제가 安居를 破한 機緣 등을 전하고 있으며,

선어록에는 안거에 대한 선문답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문제제기한 바와 같이 조사선에서 좌선을 완전히 부정하는 주장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曹溪大師傳』에 혜능이 [도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 어찌 坐禪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한 말이나, 마조가 [도는 修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혹은 [청정한 불성은 본래나 지금도 마찬가지(本有今有)이기에 修道 坐禪을 假借하지 않는다.] 라고 주장에서도 언뜻 보기에는 坐禪을 부정하는 것처럼 이해되기 쉽다.

 

특히 『傳燈錄』제5권 南嶽懷讓傳에 전하는 회양과 마조와의 선문답인 유명한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로 만든다(磨塼成鏡)]는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주장이다.

開元中에 道一이라는 傳法院에서 매일 좌선을 하고 있었다.

대사는 그가 法器임을 알고 가서 물었다.

[大德은 무엇 하려고 坐禪을 하는가?]

道一은 [ 부처가 되려고(作佛) 합니다.]라고 대답 했다.

 

대사는 곧 기왓장을 가지고 암자 앞의 바위에서 갈기 시작 했다.

道一은 이를 보고,

[대사께서는 무엇 하십니까?]라고 질문 했다.

懷讓은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라고 答했다.

도일은 [기왓장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될 수 있습니까!] 라고 하자,

대사는 곧 [ 坐禪을 한다고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에 도일은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라고 묻자,

대사는 [사람이 수레를 몰고 갈 때, 수레가 나아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라고 되물었다.

도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사는 다시 말했다. [그대는 坐禪을 익히는가? 坐佛을 배우는가?

만약 坐禪을 익힌다면 禪은 坐臥에 있지 않는 것,

만약 坐佛을 배운다면 佛은 정해진 모습이 없다.

無住法에서 取하고 버릴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그대가 만약 坐佛을 배운다면 그것은 부처(佛)를 죽이는 일이요

만약 坐禪하는 모양(相)에 집착한다면 불법의 참된 이치를 깨닫지 못하리라!]

 

도일은 대사의 교시를 듣고 마치 우유(醍 )를 마신 것과 같았다. (『大正藏』51권 240 쪽 下 )

이 일단은 마조도일이 남악회양의 불법을 계승하게 된 機緣인데,

마조의 설법에서 [道不用修]나 임제의 [無修無證]을 강조하는 조사선의 실천적인 입장을 대변해 주는 구체적인 실례의 일화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일단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조사선의 실천 정신을 懷讓과 道一의 師資求法과 傳法의 기연으로 엮어서 구체적인 事例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坐禪 수행의 고정관념과 편견,

그리고 坐相에 얽메이고 집착하고 있는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아 주는 선지식의 간절한 지도편달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坐禪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 造作과 趣向을 떨쳐 버리고,

取捨나 선악 등의 차별 분별심,

生死의 마음을 떨쳐 버리도록 하는 조사선의
실천 정신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일단인 것이다.

 

육조의 설법에서도 [汚染없는 修證]을 강조 하였고,

마조의 설법에서도 汚染없는 平常心을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汚染이 없는 수행과 깨달음은 좌선수행을 기본으로 하면서 좌선의 모양과 고정관념,편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 좌선인 것이며,

또한 좌선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 造作心과 趣向心,

즉 목적달성을 위한 마음이나,

취사 선택의 分別心,差別心,

生死의 煩惱心이 없는 本來心의 좌선수행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조사선의 수행에서 아무리 좌선을 부정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고 해도 좌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의 전제아래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선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불법을 닦는 수행에 좌선은 三學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일상생활의 일이며 기본인 것인데,

앉아 跏趺坐로 좌선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쓸데 없는 마음(편견과 고정관념)이 잘 못 된 것임을 지적하고 이를 바로 잡아주고 있다.

 

선문답에서도 [자네 몇 년이나 坐禪 했는가?]라고 질문하는 일은 없다.

『臨濟錄』에서 수좌가 오로지 순진무구하게 좌선 수행을 열심히 하고 있는 임제에게 [그대는 이곳에서 몇 년 지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行業純一은 좌선을 중심으로한 수행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좌선은 지극히 당연한 일상생활이기 때문이다.

 

선불교에서 좌선수행의 실천정신을 체계있게 정립한 것은 敦煌本『六祖壇經』이라고 할 수있는데,

『六祖壇經』에서는 새로운 남종선의 실천 정신을 [좌선의 정의]로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南宗禪에서 좌선의 실천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南宗禪에서 가르치는 좌선의 실천이란 일체의 경계에 걸림없이(無碍)하는 것이다.

즉 밖으로 일체의 경계에 대하여 妄念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坐라고 하며,

자기의 불성을 깨달아 산란됨이 없는 것을 禪,이라고 한다.

(此法門中 何名坐禪. 此法門中 一切無碍.外於一切境界上, 念不起爲坐,見本性,不亂爲禪.)

 

이 일단은 번뇌퇴치나 명상의 사유에 머무른 종래의 좌선과 북종선의 좌선실천에 문제점을 제기하고 남종선의 새로운 좌선의 실천정신을 제시하고 있는 말이다.

이와 똑같은 내용으로 주장된 좌선의 정의는 『神會語錄』에 최초로 보이는 말이지만 『六祖壇經』에서 혜능의 설법으로 재편함에 따라 새로운 조사선의 실천정신을 철학적으로도 확고하게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좌선의 가르침을 일체의 경계에 걸림이 없다는 말은 다름아닌 空의 실천을 말한다.

즉 일체의 경계에 대하여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坐 라고 함은 경계에 끄달려서자신의 본래심이 埋沒되지 않은 경지를 말한다.

 

그리고 본성(佛性)을 깨달아 산란됨이 없는 것을 禪 이라고 함은 남종선에서 주장하는 頓悟見性의 주장을 말하고 있다.

불성을 깨닫는 것은 자각의 주체를 일체의 경계에서 상실하지 않고,

깨달음의 지혜로 일체의 경계를 無碍自在하게 자아를 전개하는 입장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남종선의 좌선의 정의는 般若의 空思想과 불성사상을 좌선의 실천으로 통합한 새로운 대승불교의 실천정신임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번뇌망상을 퇴치시키기 위한 종래의 禪定의 실수나 명상의 차원을 벗어나 일체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本來心(佛性)을 자각하고,

자각된 본래심으로 일체의 경계에 산란됨과 망각됨이 없이 주체적인 삶을 무애자재롭게 살아가도록 하고 있다.

 

돈황본『六祖壇經』에서 제시한 좌선의 정의는 선불교의 좌선 수행의 정신을 실천철학으로 정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정신을 地上의 일상 생활속에서 참선의 생활로 전개한 것이 조사선의 좌선수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좌선수행 정신을 토대로 하여 宋代에는 宗의『坐禪儀』도 편찬되었는데,

여기서는 먼저 『臨濟錄』의 일단을 통해서 본래심(평상심)을 자각하는 좌선수행의 실천정신을 재조명해 보기로 하자.

 

그대들이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하면 生死의 바다속에 빠졌다 떳다 할 것이다.

번뇌는 妄心에 연유하여 있는 것이니 妄心이 없으면(無心) 번뇌에 어찌 구애 되리요.

애써 분별하여 모양(相)에 집착하지 않으면 자연히 잠간 사이에 道를 얻으리라.

그대들이 다른곳(傍家)에서 분주히 三阿僧祗劫을 배운다고 할지라도 결국 生死를 벗어나기 어렵다.

無事히 선원(叢林)에서 坐禪牀에 가부좌를 하고 좌선수행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으리라. (13---13)

 

임제가 여기서 말하는 生死는 마조의 설법에서 말하는 생사와 마찬가지로 번뇌가 일어나고 없어지는 生死心(生滅心)을 말한다.

범부와 성인을 분별하여 차별심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번뇌망상의 生死心인 것이다.

또한 道를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깨닫지 않고,

밖(傍家)을 향해 찾아 다닌다면 아무리 많은 세월을 배운다고 해도 도를 얻지 못하고 결국 生死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단정지우고 있다.

 

밖을 향해 도를 찾는 마음,

聖凡을 구별하는 차별심을 모두 쉬고 妄心이 없이(無心) 無事히 선원에서 좌선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제는 또 [그대의 一念의 妄心이 쉰 그 곳이 菩提樹라 할 수 있고,

그대의 一念의 妄心이 쉬지 못한 그 곳이 無明樹라고 할 수 있다.](13--20) 라고도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망념이 없는 본래심을 無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사선의 어록에서 어디서나 [지금 여기서 자기] 가 [ 無心으로 無事하게 ] 살아가도록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조가 말한 [平常心是道]의 경지를 말한다.

 

『臨濟錄』( 13--19) 에는 또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좌선 수행의 실천방법을 설하고 있다.

여러분!

바로 그대들의 目前에서 작용하는 자네들이 조사나 부처와 다를 바가 없다.

단지 그대들이 이러한 사실을 믿지 않고 곧장 밖을 향해서 도를 구하고 있다.

그릇치지 말라!

밖을 향해도 얻을 法도 없고,

안으로도 역시 얻을 것이란 없다.

그대들이 내가(山僧) 입으로 한 말을 취하려고 하는데,

모든 妄念을 쉬고 또 쉬어(休歇) 無事히 지내는 것이 제일이다.

이미 일어난 妄念은 妄念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고,

아직일어나지 않은 妄念은 그냥 내버려 두라.

이와 같이 좌선수행한다면 그대들이 十年동안 行脚한 수행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 『大正藏』47권 500쪽 下 )

 

佛法은 마음을 깨닫는 心法이다.

앞에서도 혜능이 [ 道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불법을 밖에서 구하는 것은 마치 산에서 물고기를 찾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마조나 임제는 항상 밖을 향해서 도를 구하지 말라(莫向外馳求),

다른 곳(傍家)에서 불법을 배우려고 하지 말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또한 내가 설하고 있는 이 말 속에 끄달려서도 안되고,

일체의 망념을 쉬고 無事히 本來心으로 살아가는 좌선의 실천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다.

 

즉 [이미 일어난 妄念은 妄念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妄念은 그냥 내버려 두라.(已起者莫續,未起者 不要放起)]

는 일절은 사실 좌선 수행의 기본 要諦가 되는 설법이다.

 

이미 일어난 妄念(번뇌)을 �지 말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妄念은 신경쓰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라는 말이다.

지나간 妄念과 쓸데 없는 일에 신경쓰지 말고 지금,

여기의 자신을 자각하여 本來心으로 살도록 강조하고 있는 말이다.

 

『祖堂集』 제6권 洞山章 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問 .如何是病. 무엇이 病 인가?
師曰. 瞥起是病. 잠시 일어나는 妄念이 病이다.
進曰 .如何是藥. 무엇이 藥인가?
師曰. 不續是藥. 妄念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藥이다.

 

이 일단은 『宗鏡錄』38권에도 인용되고 있는데,

좌선 수행의 잘못된 점(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로 잡아 실천해야 하는 하는지 그 처방(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일단의 선문답도 앞에서 살펴본 임제의 설법과 똑 같은 좌선 수행의 실천방법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좌선의 실천정신은 『大乘起信論』에 토대를 둔 荷澤神會의 설법에도 구체적으로 제시된 바도 있고,

종밀의 『都序』나 황벽의 어록에서도 누차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선불교의 좌선 실천의 기본구조인 것이다.

 

宋代의 宗 은 이러한 좌선의 실천정신을 토대로 하여 『坐禪儀』를 편찬하면서 다음과 같이 체계있게 정리하고 있다.

일체의 善惡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말라.

망념이 일어나면 곧 망념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하도록 하라.

망념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하면 망념은 곧바로 없어진다.

 

이렇게 오래 오래 하여 일체의 인연을 잊게 되면 자연히 자기와 경계가 하나가 되리라.

이렇게 하는 것이 좌선의 要術인 것이다.

(一切善惡 都莫思量. 念起卽覺,覺之卽失.久久忘緣,自成一片.此坐禪之要術也.)

 

[일체의 善惡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말라]는 주장은 처음 荷澤神會의 설법에서 강조된 것인데,

뒤에 『六祖壇經』에서는 盧行者 혜능이 五祖弘忍의 佛法을 전해 받고 남쪽으로 도망하던 중 대유령(大庾嶺) 고개에서 혜능의 뒤를 �아온 慧明선사에게 최초로 설한 설법 내용으로 주장되고 있는 유명한 일단이다.

 

그러면 선과 악을 모두 함께 사량하지 않는 좌선의 실천이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坐禪儀』에서도 [좌선의 要術]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에 좌선 수행의 실천 방법이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마조의 설법에서 범부와 성인.

取捨하는 분별심은 모두 汚染이라고 한 것처럼,

善惡에 대한 분별과 차별심,

그리고 어느 한 쪽을 취하고 버릴려는 마음은 모두 분별심이며 차별심인 것이다.

 

이러한 망념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구체적인 실천이 [망념이 일어나면 자신이 망념을 일어났음을 자각하도록] 하고 있다.

망념이 일어난줄 자각하지 못하면 자신은 妄念의 바다속에서 浮沈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生死苦海에서 허덕인다고 하고 生死輪回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좌선을 통해서 妄念이 일어났음을 자각했을 때,

곧바로 망념은 없어지고 자신의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좌선은 철저하게도 본래심을 자각하는 구체적인 수행인 것이다.

善惡,凡聖,取捨등의 상대적이고 차별,

분별적인 생각인 妄念(汚染)이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본래심(平常心)으로 되돌아가서 자각적인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다.

 

혜능과 마조가 말하는 汚染이 없는 수행과 깨달음은 이러한 좌선의 실천을 통해서 망념이 없는 본래심을 자각하는 실천에 의해서 체득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2) 禪問答을 통한 修行

禪問答을 통한 참선수행은 스승과 弟子와의 두 사람(二人)의 상면과 대화(언어)를 통해서 깨달음을 체득하고,

또한 깨달음의 생활을 확인하는 수행을 말한다.

말하자면 일상생활상에서 말과 언어를 통해 스승과 道伴,

내지 사람과 사람과의 선문답으로 參禪의 생활을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참선생활의 일상 대화를 왜 [禪問答]이라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禪은 자각적인 本來心 (平常心)을 전개하는 것인데,

선문답은 각자의 자각된 근원적인 本來心의 대화라는 의미다.

범부의 차별,분별심, 衆生心으로 살아가는 일상생활의 대화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래심의 작용을 언어와 대화로서 전개하는 선의 생활이 다름아닌 선문답이라고 할 수 있다.

 

선문답은 본래심(佛性)의 全體作用하는 言語肯定과 더불어 일상생활상의 禪問答(對話)로 전개되면서 일반화된 참선생활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있다.

또한 禪院淸規의 성립과 함께 선원수행자들의 교육적인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실시된 示衆이나 上堂法門, 小參法門 등을 통해서 공개적인 선문답이 실행되기도 하였다.

 

당대에 새롭게 등장한 선종의 어록은 이러한 선문답의 내용과 선사의 言行을 집록한 것임은 잘알고 있는 사실이다.

좌선은 각자가 혼자 조용히 앉아서 자기의 본래심을 자각하고,

자기 전체의 통일적인 기반을 확립하는 구체적인 수행이라고 한다면,

선문답은 어떤 상황과 경계와의 만남과,

그리고 스승과 제자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환경과 경계에 떨어지지않는 본래심의 지혜와 인격을 언어와 대화를 통해서 전개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본래심의 자각적인 좌선생활이 사람과의 만남과 경계에 의하여 하나의 전환(一轉)이 일어나게 되며,동시에 좌선하고 있는 자신은 누군가?

지금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자신은 누군가?

를 진실로 깨닫는 覺性이 똑같은 통일의 主導(本來心)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각자의 본래심으로 좌선에서나 대화에서나 일상 생활의 每事나 경계에 매몰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주체적인 자각의 本來心이 작용될 수 있도록 하는 참선 수행이선문답을 통해서 실행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直指人心,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불교의 정신은 이러한 선문답을 통해서 실행된 선불교의 정신을 요약한 것이다. 直指人心은 스승이 질문하는 제자의 본래심을 곧바로 直指하여 깨닫도록 하는 구체적인 선교육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며,

이렇게 스승의 지시에 의해 곧바로 각자의 본래심을 깨달아 부처를 이루도록 하는 見性成佛은 선불교의 독창적인 교육과 수행체계라고 할 수 있다.

 

당대 조사선의 독특한 수행체계의 하나로서 이러한 선문답이 개발하게 된 것은 자각적인 본래심을 일상의 언어나 대화를 통해서도 如法하게 지혜의 眼目을 전개될 수 있도록 하는 參禪 생활로 窮究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坐禪은 각자 一人의 자기 修行이며 默無言의 생활이기에 일체 外部의 경계와 반연을 차단하고 절대적인 자기의 본래심의 세계를 구현하여 절대의 깨달음을 전개하는 수행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루를 坐禪의 생활로서만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行住坐臥와 語默動靜, 衣食住와 대소변을 보는 등,

인간 생활의 기본적인 每事를 영위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생활의 매사 가운데 言語와 대화를 통해서 본래심(평상심)을 상실하지 않고,

불법의 안목을 여법하게 전개할 수 있는 참선 수행으로 궁리되고 실행되도록 한 것이 禪問答이라는 독특한 수행방법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선문답의 수행은 [平常心是 道]라는 마조의 선사상에 사상적인 토대를 두고 있는 것으로, 인간의 일상생활 매사를 그대로 자각적인 본래심의 전개인 선의 생활(參禪)로,생활의 종교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구체적인 일상 생활에 전개되는 모든 경계나 사물,식물이나 생활 도구,작업이나 노동을 통해서 일체의 경계에 本來心이 埋沒되어 자각적인 주체를 상실하지 않도록 언어나 대화를 통해서도 익히고 수행하는 참선으로 선문답이 개발된 것이었다.

 

『楞伽師資記』에 보이는 [사물을 가리키며 그 본질을 묻는 것(指事問義 )]도 선문답의 하나라고 할 수 있고,

당대의 선문답에 많이 등장하는 다양한 생활도구나 동물,식물,일상생활의 茶飯事등의 선문답의 소재가 되고 있는 것은 일상 생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참선수행임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자기의 佛性(本來心)이 全體作用으로 전개될 수 있음과 동시에 각자의 본래심을 상실하지 않는 선의 생활을 마조는 [平常心是道]라고 하였고,

임제는 [隨處作主立處皆眞]이라고 조사선의 정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寶林傳』에 전하는 제22조 摩拏羅尊者의 傳法偈는 이러한 조사선의 실천 사상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心隨萬境轉, 마음은 언제나 여러 대상(경계)에 따라 움직이지만,

轉處實能幽, 움직이는 그곳에 진실 자취(머무름)을 남기지 않는다.

隨流認得性, 마음이 움직는 그대로 본성을 自覺 하고 있기에,

無喜亦無憂, 기쁨이나 근심의 차별심에 떨어지지 않는다.

 

『六祖壇經』에도 眞如 自性이 일체의 경계에 물들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일상생활 매사 언제 어디서라도 근원적인 본래심(평상심)을 상실하지 않고,

또한 일체 경계에 머무르거나 집착하여 망념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기쁨이나 근심, 차별 분별심 등의 妄念에 떨어지 않고 본래심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조사선의 경지를 읊고 있다.

 

말하자면 현실 생활속에서 일체의 경계에 본래심(平常心)을 상실하지 않고 곳에 따라 주인이 되어 如法하고도 지혜의 안목으로 살수 있는 수행을 師資의 대화를 통해서 자각하게 하고 서로 확인하고,

확실한 체험을 체득하게 하여 스스로 확고하게 생활의 종교로 살아갈 수있도록 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의 종교나 현실성의 종교라고 말하는 조사선은 이러한 구체적인 생활상에서 선문답의 수행을 익히고 각자가 철저히 확립하지 않고선 사실 생활속에서 실행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3) 作務와 노동생활

作務, 勞動(生産勞動과 일상생활상의 모든 雜務를 통해서 본래심(平常心)을 전개하는 動中의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인도불교에서는 출가승려들의 노동은 계율상에는 금지되어 있지만,

당대의 조사선에서는 『선원청규』를 제정하고 선원을 율원에서 독립하여 참선수행의 교단을 새롭게 확립하면서 작무와 생산노동에 전 대중이 모두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한 普請의 법을 제정하면서 일반화된 선원의 수행생활이다.

 

百丈懷海(749--814)의 『禪門規式』에는 [普請의 법을 실행하는 것은 上下의 모든 사람이 힘을 합치는 일이다.

(行普請法 上下均力也)]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贊寧『大宋僧史略』이나 『宋高僧傳』 10권 백장전에도 한결같이 전하고 있다.

 

普請法이란 선원의 長老인 方丈부터 行者까지 모든 대중이 빠짐없이 평등하게 동참하여 사원의 작업이나 생산노동에 힘을 합치도록 하는 勤勞의 의무규정인데,

多數의 대중과 함께 作務와 생산 노동 등,일상생활의 모든 행위를 통해 자각적인 본래심을 전개하는 참선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조사선을 일상생활의 종교라고 말하고 있는 점도 이러한 본래심의 자각과 행위긍정을 통해 지상의 생활속에서 佛法을 전개하는 참선생활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좌선은 本來心의 자각과 正念을 스스로 확인하는 구체적인 수행이라고 한다면,

선문답과 노동은 이러한 본래심을 일상생활을 통해서 전개하는 正念相續의 動中공부라고 할 수 있으며, 事上의 硏磨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인도불교에서는 苦行과 坐禪, 頭陀의 勤行이 불교수행의 방법으로 실시 되고 있었지만,

중국선종의 노동은 그 내용이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선종에서 작무와 노동이 일반화 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傳法寶記』나 『楞伽師資記』에 의하면, 동산법문을 펼친 五祖弘忍(601--674)이 처음 四祖道信(580--651)의 문하에서 수행할 때 낮에는 노동에 힘쓰고 밤에는 좌선에 힘썼다고 한결같이 전하고 있는 기록으로 확인 할 수 있다.

 

그리고 『六祖壇經』에는 홍인의 문하에서 盧行者 혜능이 디딜방아를 찧는 노동을 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출가승려의 노동은 당대 조사선의 형성과 더불어 단순한 노동과 작무가 아닌 참선 수행의 차원으로 새롭게 전개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傳燈錄』제6권 百丈章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雲巖이 질문했다.

[화상은 매일 그렇게 열심히 노동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백장선사는

[한 사람(一人)을 위해서 일세.]라고 대답했다.
운암은 다시 질문했다.

[왜 그러면 그에게 직접 일하도록 시키지 않습니까?]
선사는

[그는 생활할 수가 없네.(他無家活)]라고 답했다.

( 大正藏}51권 250 쪽 上 )

 

여기서 백장이 말하는 한사람(一人)은 자각된 자신의 本來人,

즉 無位眞人을 지칭하고 있다.

백장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노동은 누구라도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생활이며,

지금 여기서 생생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道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자각적인 본래심으로 道를 행하는 차원에서 坐禪과 똑같은 수행의 의미로 실행된 참선이었다.

平常心是道라고 주장하는 조사선의 사상적인 기반위에 지금 여기서 자신의 본래심으로 진실(道)되게 살아가는 삶이 중요한 것이지 坐禪이라는 형식과 고정관념에 구애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마조의 좌선을 남악회양이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선은 行住坐臥 語默動靜의 일상 생활속에서 참된 자기의 본래심을 상실하지 않고 진실(道)된삶을 살아가는 그것이다.

좌선이나 노동의 구분도 무의미한 일인 것이며,

그러한 분별은 오히려 자신을 차별심과 중생심의 苦海에 빠뜨리는 일이 될 뿐이다.

 

조사선의 참선은 단순히 坐禪의 실천으로 사량 분별과 번뇌심을 퇴치하는 소극적인 수행이 아니라,

일체의 인간 생활을 통해서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달음의 생활로 전개하는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수행인 것이다.

 

또한 조사선에서는 각자의 불성(眞如自性: 本來心 )이 평등하고 청정하다는 경전의 말씀과 불교의 정신에 입각해서 천박한 奴婢나 行者의 신분은 물론,

일상 잡무와 노동을 차별 분별없이 받아 들이면서,

이를 도리어 佛法修行의 새로운 기반으로 하여 참선수행의 길로 만들었다.

 

사실 인간의 존엄성이나 眞如自性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관념으로는 파악될 수도 없는 것이며,

의미도 없는 空想에 지나지 않는 주장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본인이 직접 일상생활상에 펼쳐지는 매사와 노동,작무 등의 차별세계를 통해서 직접 깨닫고 체득하여 스스로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자기자신이 그러한 불법의 정신을 자신있게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盧行者인 혜능이 黃梅의 五祖弘忍의 문하에 나아가 노동생활을 하는 가운데,

人種과 地域에 차별없는 불성의 평등성을 자각하여 일상생활상에서 이를 鍊磨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하면서 홍인으로부터 인가를 받게 되었고,

조사선의 새로운 인격으로 추앙받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당대의 선종에서 普請의 법을 제정하고 단체노동을 하면서 교단을 직책에 따라 체계있게 운영할 수 있었고,

또한 자급자족의 경제 생활까지 유지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작무와 노동은 하나의 선원의 생활규칙이었으며,

청정하고도 당연한 공동 생활의 규칙으로 [禪院淸規]가 제정된 것이다.

 

이러한 작무와 노동의 정신은 百丈懷海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

라고 하는 유명한 한마디로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청정하고도 평범한 인간의 건전한 노동과 수행 생활을 일체화한 삶의 모습을 여실히 전해주고 있다.

 

인도불교에서는 출가 수행자는 좌선과 명상이라는 정신적인 종교생활을 지키려고 한 점에 대해,

중국선종은 매일 매일의 단체 생활과 노동을 통해서 새로운 생활종교을 만들어 外來의 종교인 불교를 地上의 일상생활속에 정착시켰다.

 

실로 불교의 교단사를 통해 볼 때 계율에 위배되는 사항까지 가감하게 극복하면서 실행한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체 노동(普請)에는 무엇보다도 나무를 베고,땅을 일구고 농사를 짓는 등,

자연의 모든 존재와 항상 공동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점과,

그리고 언제나 자연과의 對話, 사람과 사람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대화(선문답)가 함께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臨濟錄』 行錄에 전하는 普請에서 황벽과 임제의 대화를 예를들어 보자.

느날 전체노동(普請)에 임제는 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황벽이 고개를 돌려 임제를 쳐다보니 손에 도구가 없었다.

그래서 [괭이는 어쨋는가?] 라고 하니 ,

임제는 [한 사람(一人)이 가지고 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황벽은 [이리 가까이 오게! 자네와 같이 이 일을 상의(商量)해 보자.]하였다.

임제는 황벽선사에게 가까이 다가가니,

황벽은 괭이를 번쩍 들고 말했다.

[오직 이 것은 天下人 이 들고가지못한다.]
임제는 황벽의 손에서 괭이를 가로채 들고서 [ 어째서 이 괭이가 내 손에 있습니까?] 했다.

황벽은[오늘 普請을 잘한 사람이 있다.]라고 하면서 곧장 선원으로 돌아 갔다.

 

여기 普請의 대화에 등장하고 있는 도구 괭이를 한 사람(一人)이 가져 갔다고 하는 임제의 말이나,

황벽이 말한 [普請을 잘한 사람]은 모두 본래심을 상실하지 않은 無位眞人 임제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처럼,

노동에 임하는 일이나 생활도구가 다양하게 등장할 지라도 그 대상이나 경계에 떨어져 자신의 평상심(본래심)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는 참선 수행의 대화를 읽어 볼 수가 있다.

 

선문답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 했지만,

자연과의 대화는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 졌다.

자연과 사물이 단순한 경계도 아니며,

또한 風流의 대화나 대상이 아니라 本來心을 상실하지 않은 자기와 자연과 근원적인 차원에서 自他不二의 일체화된 세계를 이루는 진실의 대화가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다.

 

소동파의 유명한 게송에 [개울 물 흐르는 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이고, 우뚝 솟은 산의 모습 부처님의 법신일세!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자연의 존재를 여법한 진실의 당체로,

諸法의 實相에서 파악하여 이를 자기화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의 어록에 등장하는 모든 자연의 존재는 상대적인 대상이 아니라,

萬物一體와 一切皆空의 차원에서 자기화하여 전개된 자연의 사물이다.

선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대상,

경계가 제기 될지라도 본래심을 상실하지 않고,

자기와 자연의 모든 사물이나 경계에 차별심이 없이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된 경지에서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평상심으로 진실된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4. 參禪 ---선의 생활.

이상 조사선의 수행체계를 좌선과, 禪問答, 그리고 노동생활 등으로 나누어서 살펴 보았다.

사실 이러한 분류는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것이란 점이고,

그 기본적인 정신은 平常心(본래심)을 일상 생활 언제 어디서나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선의 생활 그 전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사선에는 선의 생활을 일반적으로 [參禪]이라고 한다.

參禪은 깨달음의 평상심으로 일체의 경계에 汚染되지 않고,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생활종교의 참모습을 말하고 있다.

參禪者나 參禪僧은 이러한 선의생활을 하고 있는 수행자를 말하며,

參禪學道나 參禪問道는 선지식을 참문하여 禪의 세계를 參問하고 道를 探究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證道歌』에는 參禪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遊江海 涉山川, 강과 바다를 거닐고, 산천을 넘어서 ,
尋師訪道爲參禪, 스승을 찾고 佛道를 찾아 參禪을하였네.
自從認得曹溪路, 曹溪의 佛法(道)를 깨닫고 부터는,
了知生死不相干, 生死의 문제에 상관 없음을 알았네.
行亦禪 坐亦禪, 걷는 것도 禪이요, 앉는 것도 禪이라,
語默動靜體安然, 말하고 묵묵하고,움직이고 멈추거나 本體(本來心)은 항상 평안하네.

 

『證道歌』에서 말하는 參禪은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佛道를 수행하는 구도자의 수행 생활과 本來心을 깨닫고 일체의 모든 경계에서 선의 생활을 전개하는 조사선의 경지를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노래이다.

 

조계의 불법을 깨닫고 부터는 生死事大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證道歌』의 작자인 永嘉玄覺(675--713)이 처음 六祖慧能을 참문하고 던진 [生死事大 無常迅速]이라는 문제를 깨달아 마쳤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는 일단이다.

 

여기서 말하는 生死문제도 앞에 [마조의 설법에서 인용한 生死와 마찬가지로 번뇌의 마음(生死心 )을 말하고 있다.

즉 生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고,

死는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生滅과 같은 말로서 끊임없는 번뇌속에 나고 죽는 生死의 고통에 허덕이는 범부의 衆生心을 말한다.

 

『傳燈錄』에 六祖慧能이 永嘉玄覺에게 [그대는 어찌 生死 없음을 체득하지 않고, 빠름이 없는 그 근본을 통달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처럼,

남이 없는 無生은 不生不滅의 경지를 말한다.

不生不滅이나 無生의 경지,

生死문제를 해결했다고 함은 범부의 중생심을 초월하고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달아 번뇌가 남이 없는 그 無生(不生不滅)의 경지를 체득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걷는 것도 參禪, 앉는 것도 參禪, 語默動靜에 언제나 본체가 항상 평안한 생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깨달음을 체득한 도인의 경지에서는 本來心(平常心)으로 일상의 매사를 일체의 경계에 걸림없이 무애자재하게 살아가는 參禪의 생활을 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煩惱의 生死心을 초월하여 근원적인 本來心(平常心)에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기에 언제나 평안하고 여유있으며 한가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읊고 있다.

『歷代法寶記』에서도 [一切時中總是禪]이라고 하고, 『頓悟要門』에도 [會道者 行住坐臥是道]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경전과 많은 禪語錄에서는 佛法은 일상생활을 하는 그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직접 체득하여 확실히 자기자신의 參禪으로 확립한 경지에서 자신있게 노래한 것이다.

 

조사선에서 말하는 禪은 本來心,

즉 平常心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參禪은 이러한 平常心으로 일상생활에서 자각적인 자기자신을 만들어 가는 선의 생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參禪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깨달음의 평상심으로 전개하도록 하는 자기수행이며,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參問하는 선의 생활을 말한다.

『無門關』12칙에 瑞巖和尙이 언제나 [主人公 ! ]라고 부르고는,

또 스스로 [예! ]라고 대답하면,

[ 깨어 있는가?(惺惺着)] 라고 하면서

[다른때 다른날 남에게 속임을 당해서는 안된다.]

 

라고 스스로 주의주고 있는 자각적인 참선수행의 모습은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전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의 본래심(平常心)이 경계에 떨어져 埋沒되어 主人公이 상실되고,

차별,분별심과 生死心에 汚染된 마음은 선의 생활이라고 할 수 없으며 [平常心是道]의 세계를 구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參禪은 자기 자신을 참문하는 일이다.

본래심(평상심)으로 일상의 每事를 선의 생활을 전개하는 깨달음의 전개인 것이다.

참선하는 수행자가 불법이나 道를 구하는 장소가 자기의 본래심(평상심)이 아닌 事象이나 경계에 있다면 엄청난 잘못이다.

 

마조나 임제가 [밖을 향해서 불법을 구하지 말라(莫向外馳求)]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있음은 이를 두고 한 경책인 것이다.

佛道나 參禪이나 佛法이나 모두 자기 자신의 일인 것이다.

참선은 결국 스승에게 참문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에게 참문하는 수행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宗門統要』제5권에 임제가 參禪은 [부처를 이루고 조사가 되는 일(成佛作祖)]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각자가 자기자신의 본래심을 깨닫아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여,

부처나 조사가 되어서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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