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간록(林間錄)

15. 선업 닦기를 권함 / 승록 찬녕(僧錄贊寧)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3. 12. 08:58

 

 

 

양문공(楊文公 : 楊億)의 「담원기(談苑記)」에 의하면, 금릉보지(金陵寶誌:418~514)스님의 「동패기(銅牌記)」에서는 미래의 일을 예언하기를, ‘기천(冀川)에 진인(眞人) 한사람이 있는데 입을 벌리고 활[弓]을 당긴 채 왼편에 있으니, 자자손손이 만만년을 누리리라’하였다.  

이윽고 강남의 중주(中主)가 그의 아들을 홍기(弘冀)라 이름하였고, 오월(吳越) 전당(錢塘)지방의 많은 자제들은 모두가 클 홍(弘)자를 넣어 이름을 지어 이에 맞을 것을 기대하였으니 당(唐) 선조(宣祖)의 이름이 바로 그 예언에 맞았던 것이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후주(後周) 세종(世宗:954~959)이 구리 불상을 모두 부수어 엽전을 주조하면서 재상에게 말하였다.

   “불교에서는 ‘나의 머리, 눈, 골수, 뇌라도 중생에게 이롭다면 아낄 바 없다’고 하는데 한낱 동상을 아끼겠는가? 동주(銅州)의 대비(大悲) 불상은 신령한 감응이 있다 하니, 이를 깨부셔야겠다.”

   그리고는 동상의 가슴 부위를 도끼로 부수었는데 송(宋) 태조(太祖:960~997)가 몸소 이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 후 세종(世宗)은 북정(北征) 길에 가슴 부위에 등창이 생기니 모두 대비 불상을 파괴한 응보라고들 하였고, 태조는 이를 계기로 불교를 숭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1007~1072, 歐陽修)의 「귀전록(歸田錄)」의 첫머리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태조가 처음 상국사(相國寺)를 찾아갔을 때 승록(僧錄)직을 맡은 찬녕(贊寧)스님에게 물었다.

   “부처님께 절을 올려야 합니까?”

   “절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를 물으니 찬영스님은

   “현재불은 과거불에게 절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것을 제도화하였다 한다.

   두 분의 기록에는 모두 깊은 뜻이 담겨 있으며 결코 구차스럽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군자는 사람들이 선을 실천하도록 돕는 일을 즐긴다 하니, 불선(不善)한 이를 선(善)하게 하는 그것을 긍지로 생각한 것이다.  

문충공은 항시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기 어렵다고 한탄하였지만 정말 그랬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