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경훈(緇門警訓)

권참선문 勸參禪文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17:39
 

 

 

 

 

권참선문 勸參禪文 

 

夫! 解須圓解, 還他明眼宗師; 修必圓修, 分付叢林道伴.[1] 初心薄福, 不善親依, 見解偏枯, 修行懶惰, 或高推聖境, 孤負己靈, 寧知德相神通, 不信凡夫悟道. 或自恃天眞, 撥無因果, 但向胸襟流出, 不依地位修行. 所以麤解法師, 不通敎眼, 虛頭禪客, 不貴行門, 此偏枯之罪也. 或則渾身破碎,[2] 滿面風埃,[3] 三千細行全無, 八萬威儀總缺.[4] 或卽追陪人事, 緝理門徒, 身遊市井之間,[5] 心染閭閻之態.[6] 所以山野常僧, 未免農夫[7]之誚, 城隍[8]釋子, 反爲儒士之羞, 此懶惰之罪也. 何不再離煩惱之家, 重割塵勞之網, 飮淸風而訪道流, 探微言而尋知己, 澄神祖域, 息意宗乘, 靜室虛堂, 斂禪衣而宴坐, 靑山綠水, 携錫杖以經行? 忽若心光透漏, 凝滯氷消, 直下分明, 豈昧三祇之極果,[9] 本來具足, 何妨萬行之因華?[10] 由是, 宗說兼通,[11] 若杲日[12]麗虛空之界,[13] 心身俱靜, 如琉璃合寶月之光, 可謂蓬生麻中, 不扶自直, 衆流入海, 總號天池.[14] 反觀前非, 方知大錯. 忠言逆耳, 敢冀銘心, 此世他生, 同爲法侶. 

무릇 알기를 모름지기 원만히 알고자 한다면 저 밝은 눈을 가진 종사에게 돌아 갈 것이요, 수행을 반드시 원만히 닦고자 한다면 총림의 도반에게 부촉할 것이다. 처음 마음을 일으킨 자가 박복하여 친한 이에게 의지함을 잘하지 못하면 견해가 치우치고 메마르며 수행이 게을러지고 혹은 성현의 경계를 높이 밀쳐 놓아 자기의 영명함을 저버리는 것이니 어찌 덕상德相과 신통神通을 알겠는가, 범부도 도를 깨달을 수 있음을 믿지 않을 뿐이다. 

혹은 본래가 참된 부처님(天眞佛)이란 것만 지나치게 믿고 인과는 없다 하여 무시해 버리며 다만 흉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대로 놓아둘 뿐 지위에 의지하여 수행하지 않는다. 그러한 까닭에 견해가 거친 법사는 교리의 안목에 능통하지 못하고 실속 없는 선객은 수행의 문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이것이 견해가 치우치고 메마름으로 인한 잘못이다. 혹은 온몸은 깨뜨려 부서지고 온 얼굴은 바람에 날리는 티끌이라, 3천의 세밀한 계행이 전혀 없으며 8만의 위의가 모두 결핍되었다. 혹은 유명인사들을 쫓아다니며 모시고 문도를 얽어 다스리니 몸은 대처의 저자거리 사이에서 노닐고 마음은 여염집의 작태에 물들었다. 그러한 까닭에 산야의 하릴없는 승려는 농부의 꾸짖음을 면하지 못하고 성안의 스님네는 도리어 선비들이 수치스러워 하는 바가 되나니, 이것이 게으름으로 인한 잘못이다. 

어찌하여 다시 번뇌의 집을 여의고 거듭 고뇌의 그물을 베어 내며, 맑은 바람을 마시고 도 닦는 무리들을 방문하며, 미묘한 언어를 탐색하고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찾아다니며, 정신을 조사의 영역에서 맑히고 최상의 깨달음에서 뜻을 쉬며, 고요하고 빈 당실에서 참선하는 옷깃을 수렴하여 편안히 앉으며, 푸른 산 초록빛 물줄기에 석장을 거머쥐고 경행하지 않는가? 

문득 만약 마음의 빛이 환히 비쳐나와 맺혔던 것이 얼음 녹듯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서 분명해지거늘 어찌 삼아승지겁을 거쳐서 열리는 깨달음의 열매가 미혹된 것일 것이며, 본래 모두 갖추어져 있거늘 어찌하여 만 가지 보살행으로 피어나는 인과의 꽃이 방해롭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을 겸하여 능통하면 마치 밝은 해가 허공의 세계에서 빛나는 것 같으며 마음과 몸이 모두 고요함은 마치 유리가 보배로운 달빛을 머금은 것과 같으니, 가히 쑥이 삼 가운데 나면 북돋우지 않아도 스스로 곧게 되고 뭇 물줄기들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아울러 부르기를 천지天池라고 일컬을 수 있음이다. 예전의 잘못을 되돌아보아야만 바야흐로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고의 말이 귀에는 거슬릴 것이지만 마음에 새겨 두기를 감히 바라니, 이 세상과 다른 내생에 함께 법을 나누는 도반이 될지어다. 

【1】叢林, 乃衆僧捿身行道之所也. 草不亂生曰叢, 木不亂長曰林, 言其內有規矩法度也. 又《大論》云: 「衆多比丘, 一處和合, 是名僧伽, 譬如大樹叢聚成林. 一樹不名爲林, 一比丘不名爲僧, 諸比丘和合叢聚處, 得名叢林.」 

【2】言全無戒行檢束也. 

【3】言奔走風塵也. 

【4】三聚各有一千, 幷三千; 貪‧嗔‧癡‧等分各二萬一千, 幷八萬四千. 

【5】市‧恃也, 養贍老小, 恃而不匱. 祝融作市, 又神農所作. 市, 交易之處; 井, 共汲之所. 古者, 朝聚汲水處, 將貨物於井邊買賣故, 曰市井. 

【6】閭閻, 皆里門名也, 謂染於俗態也. 

【7】厲山氏有子, 曰農, 能植百穀故, 後世因名耕田氓爲農. 

【8】隍,《說文》: 城池. 有水曰池, 無水曰隍. 

【9】佛佛皆修因於三阿僧祇劫, 以成佛果. 

【10】諸菩薩皆修萬行, 以爲成佛之因. 

【11】淸凉云: 「宗通自修行, 說通示未悟.」 

【12】日在木下曰杳, 日在木中曰東, 日在木上曰杲. 

【13】《易》「日月麗乎天, 百穀草木麗乎土.」 麗音離, 附也, 著也. 

【14】南溟也. 

【1】叢林이란 대중스님들이 몸을 의탁하여 도업을 수행하는 곳이다. 풀이 어지럽지 않게 자란 것을 叢이라 하고 나무가 어지럽지 않게 성장한 것을 林이라 하니 [총림이라 함은] 그 내부에 규율과 법도가 있음을 말한다. 또《대론》에 이르기를 「무리를 이룬 많은 비구들이 한 곳에서 화합하며 지내는 것을 이름하여 僧伽라 하는데 비유하자면 큰 나무들이 정연히 모여 숲을 이룬 것과 같다. 나무 한 그루를 숲이라 부르지 않듯이 한 명의 비구를 僧이라 이름하지 않나니, 모든 비구들이 화합으로 정연히 모인 곳이라야 叢林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하였다. 

【2】계를 지키는 행위나 단속함이 전혀 없음을 말한다. 

【3】풍진에 분주함을 말한다. 

【4】三聚에 각기 1천이 있으니 아우르면 3천이요, 탐‧진‧치와 등분에 각기 2만1천이니 아우르면 8만4천이다. 

【5】市는 믿어 의지함이니, 늙은이와 어린이를 봉양하고 구휼함에 믿고 의지하기를 모자라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축융이 市를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또는 신농씨가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市는 교역의 장소이며 井은 함께 물을 긷는 곳이다. 옛날에는 아침이면 물을 긷는 곳에 모여 물건들을 가지고 와서 우물 근처에서 사고 팔았던 까닭에 市井이라 하였다. 

【6】閭와 閻은 모두 동리의 문짝 이름이니 세속의 형편에 물들었음을 말한다. 

【7】여산씨에게 農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모든 곡식을 능숙하게 경작하였던 까닭에 후세에 그로 인해 밭을 경작하는 백성들을 이름하여 農이라 하였다. 

【8】隍은《설문》에서 성 주위로 파 놓은 못이라 하였다. 물이 있으면 池라 하고 물이 없으면 隍이라 한다. 

【9】여러 부처님들은 모두 삼아승지겁 동안 因을 닦음으로써 부처님의 果를 이루게 되었다. 

【10】여러 보살들은 모두 만 가지의 行을 닦는 것으로써 成佛의 因으로 여겼다. 

【11】청량이 말하였다. 「宗通은 종지를 스스로 잘 수행하여 깨달았음이요, 說通은 아직 깨닫지 못한 이에게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잘 드러냄이다.」 

【12】해가 나무 아래에 있으면 杳요, 해가 나무 가운데 있으면 東이요, 해가 나무 위에 있으면 杲이다. 

【13】《역》에 말하기를 「해와 달은 하늘에 붙어 있고 백곡과 초목은 땅에 붙어 있다」 하였는데, 麗는 음이 리(離)요 붙어 있다 또는 부착되어 있다는 뜻이다. 

【14】南溟(南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