話頭·參禪

간화선 수행과 공안공부의 문제 / 간화선토론회 성본스님 발표요약

通達無我法者 2008. 3. 19. 22:06

 

 

 

간화선 수행과 공안공부의 문제  

간화선토론회 성본스님 발표요약 - 韓國禪文化硏究院 鄭性本

1. 序言 - 간화선의 수행구조

송대 오조법연선사에 의해 제기된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의 수행은 대혜종고선사가 새로운 선수행 방법으로 대성시켰다.

송대의 간화선은 唐代 조사선의 정신(불교의 경전, 어록, 禪問答 등)을 공안으로 간주하고 이를 마음의 눈으로 읽고(看) 공부하여 깨달음의 경지와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도록 하기 위해 창안된 새로운 선수행이다.

중국인들이 先例를 중시하는 尙古주의적인 정신으로 대승 經典과 唐代 조사들의 선문답을 깨달음의 先例(判例)인 公案으로 간주하고 이를 참구하여 각자의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正法眼藏)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한 것이 간화선이다.

따라서 간화선은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여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불성)을 깨닫는 無字公案參句와 餘他의 수많은 공안의 다양한 사례와 판례를 공부(看)하여 정법의 眼目을 체득하고 구족하는 公案공부를 병행하는 수행인 것이다.

간화선의 수행은 조주의 無字話頭 참구와 공안공부(看經,看話) 이 두가지를 병행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에서는 고려시대 普照知訥과 慧諶등 修禪社의 定慧結社 이후로 간화선의 수행체계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주로 無字公案을 참구하는 선수행이 중심이 되고 있고,

주지나 조실이 語錄이나「벽암록」「무문관」등을 提唱하여 正法眼目을 갖추는 看經과 看話의 본질적인 公案공부는 등한시 되고 있다.

不立文字, 敎外別傳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正法의 眼目없는 禪師들이 경전이나 어록, 공안집을 제대로 후학들에게 가르치지도 못하고,

학인들이 경전이나 어록 등을 읽고 보는 것 조차도 못하게 하여 불법의 본질과 정신을 모르는 불교인들을 만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불법의 본질과 정신을 철저히 교육울 통해서 배우고 익히지 못한 불교인은 자기 자신이 불교인으로서 올바른 안목을 갖춘 수행을 할 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참된 불교의 정신과 가치관을 토대로 지혜로운 삶과 인격형성을 할 수 없으며, 또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행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 제기되고 있는 한국불교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을 아예 무시하고 등한시할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간화선 수행의 제반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자성하여,

올바른 간화선의 수행방법과 공안공부, 지도방법 등을 바르게 파악하여 이 시대에 맞도록 개선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불교는 교단과 학교 교육 등 제반 문제점이 다양하게 돌출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출가 재가의 불교인이 전통적인 간화선 수행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나 실천 수행 방법의 문제,

불법정신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더군다나 불교인들이 불법의 정신을 제대로 모르고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슨 말로서 대변해야 하는가?

불교인들은 철저히 아프게 각성해야 한다.

선불교의 수행과 정신으로 이 시대와 미래 인류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갈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할 시대적인 요청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필자의 이 논문이 불교인들이 새롭게 발심하여 경전이나 어록, 공안을 참구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불법 공부와 자기자신을 번뇌망념의 중생심에서 깨달음의 불심으로 지혜롭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구도자의 수행생활을 철저히 확립하고,

한국불교 간화선 수행의 전통을 재정립하고 올바른 선수행이 실행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 선수행의 기본 구조.

대승불교의 실천체계를 정립한 「대승기신론」의 止觀門에는 다음과 같이 선불교의 실천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해야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止란 마음을 安定(집중)하여 대상의 모양(相)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곧 心眞如를 念하는 것)이다.

범어로 奢摩他( samatha : 寂靜)의 수행(觀)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觀이란 여러 가지 현상의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모양(心生滅의 相)을 분명히 파악하는 지혜이다. 이것은 범어로 毘鉢舍那( vipasyna : 智慧, 正見)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隨順해야 하는가?

사마타와 비파사나의 수행을 점차로 수습하여 이 두 가지의 수행이 하나가 되어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云何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隨順奢摩他觀義故. 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滅相. 隨順毘鉢舍那觀義故. 云何隨順.以此二義漸漸修習. 不相捨離雙現故.) (「大正藏」32권 582쪽 上 )

여기서 말하는 止란 sammatha 로서 寂止, 寂滅, 無念 실천을 말한다.

일체의 산란심이나 망념 망상을 멈추고, 마음이 본래 적정의 세계로 되돌아 가도록 하는 수행을 말한다.

좌선 수행을 통하여 禪定 三昧에 든다고 함은 止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삼마타(止)의 실천으로 根本 無分別智를 체득하는 요인이 되며,

이로 인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眞如門에 들게 된다.

그리고 觀이란 vipasyana로서 直觀, 智慧, 正見이란 의미인데 일체의 만법의 실상을 관찰하는 지혜를 말한다.

즉 觀察修習하는 수행으로 진리나 진실, 일체의 모든 만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불교의 근본진리인 四聖諦나 연기의 법칙 등이 일체의 생멸법은 붓다의 止觀 수행으로 체득된 사실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만법이 인연따라 생멸하는 중생의 生滅門에 들어가는 지혜로 後得智를 체득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3. 간화선의 화두참구는 趙州의 無字 公案.

대혜가 주장한 간화선은 각자의 煩惱妄念(不覺)을 조주의 無字公案이라는 방편을 참구(始覺)하여 근원적인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도록 하는 참선수행을 말한다.

즉 煩惱妄念과 生死輪廻의 고통에서 벗어난 근원적인 본래심의 세계(還歸本處)로 되돌아가 涅槃寂靜의 경지를 체득하게 하는 참선 수행인 것이다.

즉 무자 공안을 방편으로 스스로 苦에서 해탈하는 자각의 종교인 것이다.

그래서 간화선은 조주의 無字 公案을 유일한 공안으로 참구하게 하는 수행인 것이다.

대혜가 제시한 간화선의 유일한 話頭(公案)는 조주의 無字 화두뿐이다.

수많은 공안 가운데 특히 조주 무자 공안을 찾아내어 참구하도록 한 것이 대혜에 의해 大成된 간화선의 역사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즉 「대혜어록」제24권 [示妙明居士]에 다음과 같이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도록 주장하고 있다.

生(번뇌 망념이 일어남)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死(일어난 번뇌 망념이 없어짐)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을 의심하여 잊지 않으면

즉 이것은 生死가 交加하는 것이다.

生死가 交加하는 곳에 이 話頭를 看하도록 하라.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질문하니,

조주스님이 "無" 라고 말한 화두를.
(「大正藏」 47권 911 쪽 上 )

대혜가 간화선을 주장하면서 제시한 화두는 조주의 무자 화두가 유일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대혜의 어록과 「大慧書」 등에 일관되어 주장하고 있으며,

「人天寶鑑」[秦國夫人 法眞비구니]장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법진 비구니가 어느날 謙선사에게 질문했다.

"徑山大慧선사는 평소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습니까?"

스님께선 오직 사람들에게 [狗子無佛性]의 無字 話頭만을 들어 참구하도록 합니다.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그 곳에는 발을 붙여도 안되고, 이리 저리 헤아려서도 안됩니다.

오직 " 狗子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조주스님이 " 無 "라고 한 그 말만을 들으라고 합니다.

오직 이렇게 학인들을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續藏經」148권 70, d )

대혜의 간화선의 특징은 조주의 무자 화두(공안) 만을 유일한 공안으로 참구하며 참선공부 하도록 

하고 있는 점이다.

「大慧書」나 「대혜어록」등에서는 다른 庭前栢樹子나 麻三斤 그 밖의 공안도 제시하고 있지만,

이러한 공안은 선문답의 의미를 참구하여 정법안목을 구족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화두인 것이다.

대혜의 간화선을 계승하여 체계화시킨 無門慧開의 「無門關」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성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사실 간화선의 근본은 조주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며,

간화선의 수행에서 본래심을 조고해보는 도구(방편)로서 조주 무자 공안을 능가하는 체계적인 공안은 없다.

趙州 無字 화두를 看하여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도록 하는 宋代의 간화선은 五祖法演( ?~1104)의

법문에서 최초로 제기되었으며,

大慧宗에 의해 간화선으로 대성되었고,

無門慧開(1183~1260)의 「無門關」에서 수행체계가 완성되었다.

대혜의 公案禪에 대한 주장을 「大慧書」 등을 통해서 살펴보자.

대혜는 한결같이 趙州의 無字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을 주장하고 있는데,

「大慧書」[答汪內翰]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만, 어떤 스님이 趙州에게 묻기를 '狗子(개)도 佛性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趙州스님은 [없다(無)]라고 대답한 공안을 참구하시오.

부디 쓸데없는 사량분별의 마음을 [無] 위에 옮겨 놓고서 시험삼아 사량해 보시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량을 초월한 곳에서 (生死의 분별심인) 一念이 打破 된다면

그것이 三世에 통달하는 것입니다.
(「大正藏」47권 928.下 )

「大慧書」[答榮侍郞]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직 이렇게 되지 않으면 먼저 세간의 번뇌를 思量하는 마음을

思量이 닿지않는 곳으로 돌려서 시험삼아 사량해 보시오.

어떤 곳이 思量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가?

어떤 스님이 趙州에게 狗子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자,

趙州는 없다(無 )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 [無]라는 한 자를 만약 당신이 어떤 技倆이 있으면 잘 按排해서 조절해 보시오.

計較 분별해 보시오.

그리고 思量하고 분별하고, 안배(조절)해서 無字를 처치할 수가 없고

다만 가슴속에서 고민하다 心中이 괴로움을 느낄 때야말로 정말 이것이 좋은 시절이 된 것입니다.

제 8識도 계속해서 작용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自覺했을 때 내던져 버려서는 안됩니다.

단지 이 無字 위에서 화두를 들고 공부하도록 하시오.

工夫에 工夫를 거듭할 때 生處에 스스로 익어가고 익은 곳에서 스스로 홀로 살아나게 됩니다.
(「大正藏」47권 939. 中 )

대혜가 無字公案을 참구하도록 하는 것은 生死心인 일체의 사량분별을 끊고 思量이 미치지 못하는 그 곳에서 근원적인 자기의 자각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선수행의 방편으로 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대혜의 看話禪은 生死를 타파하고 불안의 疑心을 끊는 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大慧書」[答陳少卿]에 다음의 일단을 살펴보자.

원하건대 당신은 오로지 疑情이 깨어지지 않은 그 곳을 향해서 참구하도록 하시오.

行住坐臥에 정신을 느슨히 풀어놓아서는 안됩니다.

어떤 스님이 趙州에게 '狗子도 佛性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趙州는 [없다(無)라고 대답했습니다.

조주의 無야 말로 생사의 번뇌를 타파하고 불안의 의심을 끊는 (지혜) 칼인 것입니다.

이 칼자루는 다만 각자의 손에 있습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손을 쓰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이 손을 써서 타파하고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大正藏」47권 923. 上 )

대혜는 일체의 분별심과 차별심을 억누르고 조주의 無字 화두를 참구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조주의 無字 公案은 知見會解를 때려 부수는 무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無字公案을 참구하는 대혜의 간화선은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최선의 참선수행의 방법이며,

이러한 공안 참구로서 일체의 思量 分別이 일어나지 않은 근원적인 자기의 本來心을

깨닫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간화선의 공안은 자기의 본래심인 불성을 照顧해 보는 道具인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대혜는 간화선의 참구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이 간화선의 禪病에 떨어지기 쉬운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즉 [이 無를 깨달으려고 하면 有無의 상대적인 의식을 일으켜서도 안되며,

도리로서 알려고 해서도 안되며,

의식으로 사량해서 판단해서도 안되며,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동자를 굴리는 곳에 머물러서도 안되며,

말하는 그 곳에 생활을 삼아서도 안되며,

無事 그 가운데 머물러서도 안된다.

제시한 공안에 대해서 바로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문자 가운데서 그 증거를 찾으려 해서도 안된다.] 라고 하는 공안 참구의 주의 사항이다.

고려시대의 공안선을 도입하여 고려불교 선종의 새로운 선불교 실천을 주장한 普照知訥은

「看話決疑論」을 저술하여 이것을 看話十病으로 규정하고 간화선 수행자들을 주의시키고 있다.

지눌이 「간화결의론」에서 看話禪病의 근거로 의용한 것이 「大慧書」인데,

그 가운데서 [答張舍人狀元]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의시키고 있다.

情識이 타파되지 않으면 心中의 불길이 타게 된다.

이러한 때 오로지 疑問으로하는 화두를 들고 공부하시오.

예를 들면 어떤 스님이 趙州에게 '狗子도 佛性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조주가 [없다(無 )]라고 대답한

이 無를 한결같이 들고 참구하도록 하시오.

왼쪽으로 갖고 와도 안되고 오른쪽으로 갖고 와도 안됩니다.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려서도 안됩니다.

공안을 제기한 그 곳을 향해서 납득해서도 안됩니다.

玄妙한 領解를 해서도 안됩니다.

有나 無로 추측해서도 안됩니다.

眞無의 無라고하는 臆測을 해서도 안됩니다.

無事 그 자체 가운데 안주해서도 안됩니다.

擊石火閃電光處를 향해서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곧바로 마음의 작용이 없이 마음의 行處가 없을 때 空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해서도 안됩니다.

이렇게 참구할 때 좋은 공부가 됩니다.

곧바로 쥐가 소의 뿔속에 들어가 進退할 수 없을 때,

곧바로 미혹함과 전도망상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大正藏」47권 941. 中 )

또 「大慧書」[答宗直閣]에도 다음과 같이 看話禪病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시키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因緣에 應할 경우 다시 한번 차별의 境界에 만났다고 느낄 때에는

다만 그 差別의 장소에 대하여 狗子無佛性의 話頭를 들고 參究(看)하시오.

번뇌를 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情塵의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됩니다.

差別의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됩니다.

佛法의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됩니다.

오로지 狗子無佛性의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시오.

오로지 이 無字 하나만 들고서, 깨달음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만약에 깨달음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으면,

境界도 차별하고,

佛法도 차별하고,

情塵도 차별하고,

狗子無佛性話頭도 차별하고,

中斷하는 경우에도 차별하고,

중단하지 않을 경우에도 차별하고,

情塵에 惑亂되어 身心이 安樂하지 않은 경우도 차별하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 차별해서 잘 아는 것도 차별하게 된다.

이러한 病弊를 없애고저 한다면,오로지 無字를 참구하도록 하시오.
(「大正藏」
47권 933. 中 )

대혜는 간화선의 수행에서 일어나기 쉬운 여러 가지 禪病을 지적하고 이러한 일체의 차별심,

분별심이 일어나는 그 곳에 無字공안을 들어 참구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특히 看話禪에서 공안참구 목적을 대혜는 「?山警策」의 [以悟爲則] 즉 깨달음을 원칙으로 한다는

말을 여러 곳에 인용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간화선의 목적처럼 看做하기 쉽게 되었다.

그래서 묵조선에서 간화선을 비판하기를 [깨달음을 기다리는 待悟禪]이라고 지적하면서 비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혜가 看話禪의 수행에서 禪病에 떨어지기 쉬운 여러 개의 항목을 열거한 가운데 몇 차례나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주의주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주체적인 無字 공안의 참구는 앞에서 대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不可思量底의 思量인 것이다.

즉 不可思量인 그 곳에 無字 공안을 들고 參究하는 것이기에 여기에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개입하거나 존재할 틈이 없는 것이다.

즉 待悟의 마음을 부정하고 開悟를 기대하는 마음을 일체 끊는 것이 無字公案을 들고 참구하는 것이다.

또한 待悟의 마음뿐만 아니라 문자나 이치로 無字 公案을 이해하려는 마음,

有無의 상대적인 차별심이나 일체의 사량 분별심이 無字 공안을 들고 참구하는 순간 일시에

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는 이 無字야 말로 [生死의 煩惱妄念을 타파하고 일체의 疑心을 끊는 지혜의 칼]

이라고하며,

[일체의 나쁜 知見會解를 쳐부수는 무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는 無字 公案을 참구하는 간화선의 수행 의미를 「大慧書」[答湯丞相]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만 언제라도 마음을 텅 비워서 일상생활의 할 일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고,

경계를 만나거나 인연을 만나면 때때로 무자 화두를 들고 참구하시오.

빨리 어떤 효과를 구해서는 안됩니다.

무상의 도리를 연마하고 궁구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법칙(기준)으로 합니다.

(硏窮至理 .以悟爲則)

그러나 제일 먼저 마음 속으로 깨달음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대하면 기대하는 마음에 道를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게 되어,

급히 서두르면 급히 서두를수록 지체(遲滯)되고 맙니다.

오직( 조주 無字) 話頭를 들고 참구하시오.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그 곳에 곧바로 生死의 번뇌심이 끊어지니

이곳이 즉 자기의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아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에 이를 수가 있다면,

자연히 옛사람의 여러 가지 방편법문을 알아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저절로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大正藏」47권 941. 下 )

대혜는 無자 공안을 들고 참구하는 그 곳이 다름아닌 生死의 번뇌심이 끊어진 歸家穩坐之處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大慧書」[答李寶文]에서도 [歸家穩坐底路頭]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즉 선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본래심인 집에 되돌아가서 일체의 근심걱정과 불안(苦 )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安心立命의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수행상의 구조는 불교를 비롯하여 동양정신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집(家)을 중심으로 가정생활과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을 영위한

동양인들의 정신적인 안식처가 집인 것이기에,

밖에 외출했다가 집으로 되돌아옴은 일체의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十牛圖」에서도 소를 찾아 나갔다가 소를 찾아 소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騎牛歸家]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동양종교의 본질을 숲의 종교로 파악하여 논하고 있는데,

여기서 숲의 종교의 구조를 장황하게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집(家)과 숲(자연,農土)과의 구조적인 관계에서 살아가는 동양인의 사고에서

歸家穩坐가 선불교의 安心立命處로 이루어진 정신만을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처럼, 대혜는 조주의 無字公案을 참구하는 看話禪을 개발하여 근원적인 인간의 佛性을 깨닫고

개발하여 安心立命處를 얻도록 하는 송대의 새로운 선수행론을 제시한 것이다.

고려시대 대혜의「書狀」에 의거하여 새로운 간화선을 도입한 普照知訥(1158--1210)은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을 주장하면서「看話決疑論」을 저술하였고,

그의 제자 慧諶(1178--1234) 역시「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학인들이 조주 무자화두를 올바르게 참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저술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 太古普愚. 鏡虛. 滿空선사도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법을 설하고 있다.

최근에 입적하신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선사도 모두 무자공안을 참구하는 방법을

小艶의 詩를 들어서 제시하고 있다.

小艶의 詩는 조주의 무자공안을 참구하는 방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간화선의 수행구조에 많이 응용되고 있으며,

五祖法演선사가 소염의 시를 陳提邢에게 설하는 말을 창밖에서 듣고 원오극근선사가 깨달음을 체득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면 小艶의 詩가 公案禪(看話禪)의 參究에 어떻게 응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유명한 [小艶의 詩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一段風光畵難成 :
저 큰 저 댁의 우아한 풍경,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어라 !

洞房深處陳愁情 :
지금 저 깊숙한 여인의 방에서 사랑에 괴로워하는 여인이 있네.

頻呼小玉元無事 :
그녀는 자주 소옥아! 소옥아! 라고 시녀의 이름을 부르지만 원래 그에게 시킬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只要檀郞認得聲 :
사실 그녀의 속셈은 소옥아! 라고 부르는 자기의 목소리를 밖에 있는 낭군이 알아듣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보통 선종에서는 이상의 [小艶의 詩 ] 가운데 뒤의 두 구절만을 주로 인용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앞의 두 구절은 잘 사용하지 않고 있어 생소한 느낌이 든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小玉이는 唐代 楊貴妃의 侍女 이름이다.

楊貴妃는 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낭군(안록산)에게 자기의 존재와 현재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서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暗號로 侍女인 小玉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시녀 소옥이의 이름을 아무리 부른다고 해서 그 누가 의심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양귀비가 시녀 소옥이의 이름을 부르면 지금 玄宗은 돌아가고 자기는 지금 혼자 있다는,

자기의 현재 상황을 전하는 약속이 두 사람 사이에 암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 있는 낭군에게 시녀 소옥이 이름을 불러서 자기의 현재 상황과 자기의 목소리 들려주려고 별 볼일도 없는 시녀 소옥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양귀비의 입 밖에로 엉뚱하게 튀어나온 [소옥아!]라는 소리와 양귀비의 마음 속에 [님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의지]를 간화선의 수행에서는 言語文字와 근원적인 本來心에 비유하고 있다.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할 수없는 낭군에게 안 방 깊숙이 앉아 있는 미인이 창 밖에 있는 낭군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킬 일도 없는 시녀 小玉이의 이름을 하염없이 불러대어 자기의 존재와 현재 상황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즉 趙州의 無字 公案을 參究할때 의심으로 응어리진 話頭를 [無 !]라고 하면서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은 [님을 그리워(의심)]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옥아! 소옥아!(無!)]라고 불러대는 목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 無 ! 無! ] 라고 하는 그 자기의 본래심의 목소리를 자기의 본래심이 알아듣도록(自覺) 하게하는 것은,

소옥아! 라고 부르는 그 소리를 밖에 있는 낭군이 알아 듣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주의 無字 공안을 참구한다고 하는 것은 無字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양귀비가 侍女 小玉이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소옥아! 소옥아!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公案은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 것이다.

즉 자기의 본래심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無字]이다.

本來心의 자기 집 대문에 [無!]라는 기왓조각으로 두드리고 깨달음으로 들어가 安穩하게 앉아 安心立命의 삶을 가꾸는 것이 간화선 수행에서 공안을 참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無!]라는 그 法音의 소리를 듣는 또렷한 자각이 자기를 본래심(깨달음)의 경지에서 지혜로운 살림살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철저한 자각을 통해서 자기 변혁과 頓悟의 전환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의미없는 無字공안을 [無 ! ,無!]라고 소리만 아무리 반복한다고 할지라도 자각이 없는 행위는 자기를 깨달음으로 전환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본래심의 자각이 없는 선수행은 멍청한 범부의 일상생활이 되는 것이며,

沒自覺은 無記에 떨어지고 空虛에 타락된 엉터리 수행이 된다.

대혜가 이러한 선 수행자를 [黑山鬼窟]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배척하며,

또 [혼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魂不散底死人)] 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傳燈錄」제14권 雲巖曇晟장에 [잠시라도 있지 않으면 죽은 사람과 같다.(暫時不在 如同死人)]

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임제가 [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주장한 것은 자각적인 無位眞人의 지혜작용을 강조한 것이다. 


이뭣고? 화두의 문제점.

그런데 요즘 한국불교에서는 [이뭣고?]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고 한다.

이뭣고? 라는 화두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주장되어 한국 선원의 수행자들이 많이 참구하는 화두가 되었는지 잘 알 수가 없으나,

간화선의 수행에서 볼 때 이뭣고? 화두는 올바른 간화선의 수행을 할 수 있는 화두라고 할 수가 없다.

이뭣고? 라고 의심을 하는 것이 화두라고 한다면 이것은 간화선의 올바른 수행구조와 정신을 잘 모르는 말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의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각자의 깨달음으로 전환하도록 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간화선의 의심은 본래심의 전환을 이루기 위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문제제기만 하고 본래심의 자각적인 깨달음으로 전향하는 자각이 없다면 영원히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의심으로 이루어진 분별망념의 시간만 지속될 뿐이다.

또한 의심을 참구해서는 안된다.

이뭣고? 의심을 일으키고 의심을 참구한다는 것은 깨달음으로 전향하는 본래심의 참구가 될 수 없고, 본래심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연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원오극근선사가 화두를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敲門瓦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본래심의 자기 집으로 되돌아 가야지] 라는 문제제기만 으로는 본래심의 대문을 두드릴 수 있는 기왓조각이 없으며,

깨달음의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조주의 무자화두의 경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부처님은「열반경」등에서 일체 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스님은 왜 개한테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라는 의심(문제제기)을 일으켜서,

[無 ! ]라는 마음의 목소리를 참구하여 마음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자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無! 라고하는 각자의 마음의 목소리는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과 같은 것이며,

無 !라고 하는 각자의 마음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자각하는 것은 본래심을 깨닫는 것으로 본래심의 집에 들어가 安心立命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의 無字 화두는 일체의 知見解會(알음알이)와 分別心, 疑心, 번뇌 망념을 끊는 지혜의 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많은 선승들의 설법집에는 [화두 드는법]이라는 법문에 조주의 무자화두 참구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無字에 대하여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없다.

虛無다.

이와같이 이리 저리 두갈래로 분별하지 말고,

能所가 끊어지고 상대도 없이 다만 홑으로 "어째서 無라고 했는고 ?" 하고만 생각해라.

조주스님이 무라고 하신 뜻을 바로 보아야 생사해탈을 하는 법이다.

무자화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無라는 말을 천착하지 말고,

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조주화상의 [板齒生毛]라는 화두도 이와같은 방법으로 의심을 참구하도록 설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조주의 無字公案을 "어째서 無라고 했는고?"

"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의 의지를 참구하라" 고,

이렇게 화두를 의심으로 참구도록 한다면 대혜종고가 제시하고 있는 간화선의 올바른 실천수행이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간화선에서 無字話頭를 참구하는 방법은 五祖法演선사가 제시한 小艶의 詩를 통해서 잘 이해할 수가 있다.

또한 많은 선사들의 설법에는 [萬法歸一 一歸何處]나 [庭前栢樹子], [麻三斤], [板齒生毛] 등의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러한 공안 역시 조주 無字 공안처럼 본래심을 깨닫도록 참구하는 공안이 아니라 正法의 眼目을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공안(화두)인 것이다.


4. 간화선의 공안공부 - 看經과 看話.

간화선에서 정법의 안목을 體得하는 公案은 일체의 경전과 어록이며,
학인들의 正法眼目을 체득하게하는 교육이 선지식의 語錄提唱과 上堂 示衆, 小參法門 등이다.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서 제시한 진실된 佛法을 배우고 익혀서 각자가 붓다와 똑같은 지혜와 인격을 구족하기 위해,

 수행하고 또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이타행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붓다가 밝힌 불법은 45년간 중생교화의 설법을 기록한 대소승 경전에 모두 밝혀 놓고 있다.

깊은 삼매를 통해서 체득한 연기의 법칙이나 因緣法, 三法印과 四聖諦 八正道, 六波羅蜜, 三學 등의 실천정신도 모두 대소승 경전에 전부 제시되고 있다.

불교는 붓다의 교설을 배우고 익히고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이러한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여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정신을 경전과 어록등을 통해서 看經 看話를 학습하여 본인이 각자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도록 새로운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간화선이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의 참된 의미는 이러한 경전과 조사들이 깨달음을 체득한 선례(判例)인 공안을 공부하고 看(참구)하여 각자가 깨달음을 이룸과 동시에 정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의 眼目(後得智)을 체득하도록 하는 수행인 것이다.

경전과 어록 등에서 수많은 정법의 안목을 체득한 事例와 判例(公案)를 공부하여 스스로 간접체험을 체득하고 자신이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는 공부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매사가 선각자들의 체험과 깨달음으로 제시한 생활의 지혜를 배우고 익혀서 우리들 각자의 실생활에 지혜롭게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의 운전을 배우고 익혀서 생활에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이나,

컴퓨터, 전화기, 복사기 등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 체득한 後得智로서 생활의 지혜를 구족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간접경험과 직접경험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이 세상의 많은 일을 직접체험을 통하여 많은 지혜를 체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체험을 통하여 체득한 지혜야 말로 완전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상한 존재이고 시간과 공간의 한정을 벗어나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직접 체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스승과 부모 등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가르침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배우고 익혀서 자기의

직업이나 생활이 지혜로운 삶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불교의 경전이나 어록을 배우고 익히는 것도 이러한 성현의 체험적인 지혜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

자신이 간접체험으로 많은 後得智를 체득하여 지혜로운 삶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숲속(사바세계)에서 迷兒가 되었을 때 그 숲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중생의 괴로움(苦) 번뇌 망념(숲속 : 사바세계)에서 자신이 자각을 통하여 스스로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수행하고 자각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지혜의 이정표가 경전과 어록의 말씀이며 공안인 것이다.

잠시 이러한 입장에서 공안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례를 통해서 살펴 보기로 하자.

▶公案工夫의 事例

「坐禪儀」에 선수행의 기본이 되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일단이 있다.

一切善惡,都莫思量.
일체의 선과 악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분별하지 말라.

念起卽覺 覺之卽失,
妄念이 일어나면 망념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하라.
妄念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하면 妄念은 없어진다.

久久忘緣,自成一片.
자연히 나와 경계가 하나가 된다.

此坐禪之要術也.
이것이 좌선수행의 요술인 것이다.

선수행을 통해서 [선악을 어떻게 사량하지 말아야 하는가?]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모른다면 이 공안의 의미를 체득할 수가 없고 정법의 안목을 얻을 수가 없다.

善惡, 凡聖, 美醜 등, 일체의 상대적인 분별심, 차별심, 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초월하여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한 실천방법을 이 공안에서 제시하고 있다.

〈문제점〉
선악의 차별심을 털어버리려고 해서도 안된다. --- 拂塵看淨(北宗禪)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放棄. 放下着) 不可. --- 無記. 沒自覺. 自己喪失.黑山鬼窟의 살림.

번뇌의 망념속에 살면서 그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른채 멍청하게 살고 있음.

〈해결방법〉
자신이 善惡, 凡聖 등의 차별, 분별, 번뇌  妄念 속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의 자각. --- 念起卽覺

善惡, 凡聖 등의 차별, 분별의 번뇌망념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일체 번뇌 망념은 없어지고(覺之卽失) 근원적인 본래심(佛性)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번뇌망념의 자각을 통해, 각자 본래심으로 되돌아 갔을 때,

善惡을 모두 함께 사량하지 않고 번뇌 妄念을 초월하여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 할 수있다.

善惡, 凡聖 등의 상대적인 차별심,

분별심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않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사량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인 각자 본래심으로 되돌아 가는 것뿐이다.

還歸本處. 歸家穩坐. 安身立命處.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 가는 길(이정표 : 경전, 어록, 공안)과 구체적인 방법(수행과 실천방법)을 모르고는 깨달음을 체득 할 수가 없다.

善惡, 凡聖 등의 차별, 분별심, 번뇌망념의 자각을 통해서 중생심에서,

각자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一念相應하여 단번에 되돌아가는 것을 頓悟, 혹은 頓悟見性이라고 한다.



5. 맺는말

이상 간화선의 수행을 본래심을 자각하는 조주 무자 공안참구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공안공부로 나누어서 살펴 보았다.

이러한 간화선의 수행구조를 전통적인 선수행의 입장에서 止觀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止 (samadhi) : 寂止 ,寂滅, 無念으로 일체 번뇌 妄念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의 寂靜으로 되돌아가는 것.

즉 眞如門에 들어가는 것.

根本無分別智를 얻는 要因이 된다.

煩惱妄念에서 본래심의 涅槃 寂靜의 세계로.

간화선에서는 趙州의 無字를 참구하는 수행.

始覺이 本覺에 合致도록 함.

禪 

觀 ( vipasyna) : 慧 ,正見. 觀念修習하는 것으로 法相을 관찰하는 진리나 진실, 제 법을 관찰하는 지혜. 즉 生滅門에 들어가는 지헤로서 後得智를 얻는 요인이 된다.

간화선에서는 看經, 看話의 公案工夫로서 정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체득하도록 하며,

불법의 사상적인 深化와 다양한 方便智와 생활의 지혜(後得智)를 구족하게 하는 수행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선수행은 止와 觀이 나누어서 이루어 질 수 없으며

止觀이 하나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간화선 수행은 조주의 無字 공안 참구는 각자의 본래심을 체득하고,

일체의 사량분별과 괴로움(苦)에서 해탈할 수 있는 수행을 이룸과 동시에,

看經과 看話의 공안공부를 통해서 正法의 眼目을 구족하여,

正法眼藏을 구비한 수행자가 되어야 佛祖의 慧命을 繼承할 수가 있고,

또한 다양한 후득지와 방편지로서 중생제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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