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1. 인연분(因緣分)

通達無我法者 2008. 3. 24. 11:17

 

1. 인연분(因緣分)

은정희 역주/일지사/자료입력:도규희

 

 

【논】
설명함에 다섯 가지 구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요,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요, 넷째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요, 다섯째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다.
〔說有五分, 云何爲五. 一者因緣分. 二者立義分. 三者解釋分. 四者修行信心分. 五者勸修利益分.〕

【소】
제 이는 수를 들어 장(章)을 여는 것이다. ‘다섯 가지 구분이 있다’는 것은 장수(章數)를 든 것이요, ‘무엇이(云何)’이하는 그 장의 이름을 열거한 것이다. ‘인연분’이란, 까닭 없이 논단(論端)을 지은 것이 아니니 지혜로운 자(마명을 말함)의 지은 바를 먼저 마땅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입의분’이란, 인연이 이미 진술되었으면 마땅히 바른 뜻을 세워야 하는 것이니, 만약 간략히 세우지 아니하면 이 논의 핵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석분’이란 이미 핵심을 간략하게 세웠으면 다음에는 마땅히 널리 설명해야 할 것이니, 만일 펼쳐서 해석하지 않으면 옳은 이치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행신심분’이란, 해석에 의하여 믿음을 일으켰으면 반드시 나아가 닦아야 할 것이니, 알기만 하고 실행함이 없으면 논의 의도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권수이익분’이란, 신심을 수행하는 법문(法門)을 나타냈지만 신근(信根)이 박약한 사람은 즐겨 수행에 나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익 됨을 들어서 반드시 닦아야 함을 권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권수이익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第二擧數開章. 有五分者. 是擧章數. 云何以下, 列其章名. 因緣分者, 非無所以, 而造論端. 智者所謂, 先應須知故. 立義分者, 因緣旣陳, 宣立定義. 若不略立, 不知宗要故. 解釋分者, 立宗旣略, 次應廣辯. 若不開釋, 義理難解故. 修行信心分者, 依釋起信, 必應進修. 有解無行, 不合論意故. 勸修利益分者, 雖示修行信心法門, 薄善根者不肯造修. 故擧利益, 勸必應修. 故言勸修利益分也.〕

【소】
△이 아래는 세 번째로 장(章)에 의하여 따로 해석하는 것이니, 곧 다섯으로 나누어진다.
△처음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장의 이름을 말하였고, 다음에는 인연을 나타내었다.
〔△此下第三依章別解, 卽爲五分. △初中有二. 先牒章名次顯因緣.〕

【논】
처음은 인연분을 설하다.
〔初說因緣分.〕

【소】
△인연을 나타내는 중에 두 가지의 문답이 있으니, 첫째는 곧바로 나타내었고 둘째는 의심을 제거하였다.
〔△顯因緣中, 有二問答. 一者直顯. 二者遣疑.〕

【논】
묻기를
“어떤 인연이 있어 이 논을 지었는가?” 대답하기를, “이 인연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인연의 총상(總相)이니,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여의고 궁극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세속의 명리(名利)와 공경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다. 둘째는 여래의 근본의 뜻을 해석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여 틀리지 않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법을 감당하여 신심을 퇴전(退轉)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는 선근이 미세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을 수행하여 익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섯째는 방편(方便)을 보여서 악업장(惡業障)을 없애서 그 마음을 잘 호위하고,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멀리 여의어 사악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는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을 수습함을 보이어 범부(凡夫)와 이승(二乘)의 마음의 허물을 대치(對治)하기 위해서이다. 일곱째는 염불(念佛)에 전일(專一)하는 방편을 나타내어 부처님 앞에 왕생(往生)하여 반드시 절대로 신심을 퇴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덟째는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논을 지은 것이다.
〔問曰, 有何因緣而造此論. 答曰, 是因緣有八種. 云何爲八. 一者因緣總相. 所謂爲令衆生離一切苦, 得究竟樂, 非求世間名利恭敬故. 二者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 令諸衆生正解不謬故. 三者爲令善根成熟衆生, 於摩訶衍法堪任不退信故. 四者爲令善根微少衆生修習信心故. 五者爲示方便消惡業障, 善護其心, 遠離癡慢, 出邪網故. 六者爲示修習止觀, 對治凡夫二乘心過故. 七者爲示專念方便, 生於佛前, 必定不退信心故. 八者爲示利益勸修行故. 有如是等因緣, 所以造論.〕

【소】
처음 물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답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과 가각 해석하는 것, 그리고 나중에 다시 총결(總結)하는 것이다. 두 번째, 각각 풀이하는 것의 여덟 가지 인연 가운데 맨 처음의 하나는 총상인(總相因)이며, 뒤의 일곱은 별상인(別相因)이다.
〔初問可見. 答中有三, 總標, 別釋, 後還總結. 第二別解, 八因緣中, 初一是總相因, 後七是別相因.〕

처음 총상이라고 말한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로 대체로 보살이 행하는 것은 항상 중생들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다만 이러한 논을 지은 인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총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는 이 인(因)이 입의분의 글에 대하여 연(緣)이 되는 것이긴 하지만, 저 입의분은 전체적으로 해석분 등의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이 인(因)도 저 해석분의 연(緣)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 의하여 총상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일체의 고통을 여읜다(離一切苦)’라고 말한 것은 분단생사(分段生死)와 변역생사(變易生死)에서의 일체의 고통을 뜻하며, ‘구경락(究竟樂)’이란 무상보리 대열반락(無上菩提大涅槃樂)을 말한다. ‘세간의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후세에 인간과 천상의 부귀와 즐거움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요, ‘명리와 공경’이란 현재의 헛되고 거짓된 일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初言總相, 有其二義. 一者凡諸菩薩有所爲作, 每爲衆生離苦得樂, 非獨在此造論因緣. 故曰總相. 二者此因雖望立義分文作緣, 然彼立義分, 總爲解釋分等作本, 此因亦通爲彼作緣. 依是義故, 亦解總相, 言離一切苦者, 分段變易一切苦也. 究竟樂者, 無上菩提大涅槃樂也. 非求世間者, 不望後世人天當樂也. 名利恭敬者, 不求現在虛僞之事也.〕

이 아래 일곱 가지는 별인(別人)이니, 오직 이 기신론만을 위하여 인(因)이 되는 것이며, 아래 해석분의 일곱 군데에 대하여 별연(別緣)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因)은 해석분 안에 있는 세 문단 중에 두 문단의 인연이 되는 것이니, 현시정의(顯示正義:바른 뜻을 나타냄)와 대치사집(對治邪執:잘못된 집착을 다스림)을 말한다.
현시정의 가운데 말하기를, ‘일심법(一心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이 두 가지 문이 모두 각각 일체의 모든 법을 총괄한다.’ 고 하였으니, 이것이 여래가 설한 일체 법문의 근본 뜻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일심이문(一心二門)안에는 하나의 법이나 한 뜻이라도 포섭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여래의 근본 뜻을 해석하기 위함’이라고 말한 것이다. 저 두 번째 문단의 대치사집이란 곧 중생으로 하여금 인(人)ㆍ법(法)의 두 가지 그릇된 집착을 버리게 하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여 틀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此下七種是其別因, 唯爲此論而作因故, 望下七處作別緣故. 第二因者, 解釋分內有三段中, 爲二段而作因緣, 謂顯示正義, 對治邪執. 顯示正義之中說云, 依一體法有二種門, 是二種門皆名總攝一切諸法. 當知卽是如來所說一切法門之根本義. 以是一心二門之內, 無一法義而所不攝故. 故言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也. 彼第二段對治邪執者, 卽令衆生捨離人法二種謬執. 故言爲令衆生正解不謬故也.〕

세 번째의 인(因)은 해석분 안의 세 번째 문단의 글에 대하여 인연이 되는 것이다. 자 글에서 발취도상(發趣道相:도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상)을 분별함은 이근자(利根者)로 하여금 결정적으로 발심케 하여 대도(大道)에 나아가 불퇴위(不退位)를 감당하여 그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선근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ㆍㆍㆍㆍㆍㆍ,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第三因者, 爲解釋分內第三段文而作因緣. 彼文分別發趣道相, 令利根者決定發心進趣大道, 堪任任於不退位故. 故言爲令善根乃至不退信故.〕

네 번째의 인(因)은 아래의 수행신심분의 처음 네 가지 신심과 및 네 가지 수행의 글에 대하여 인연이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신심을 수행하여 익히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第四因者, 爲下修行信心分初四種信心及四修行之文而作因緣. 故言爲令修習信心故也.〕

다섯 번째 인(因)은 아래의 네 번째의 수행 끝부분에 ‘다시 만약 사람이 신심을 닦았으나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기 때문에ㆍㆍㆍㆍㆍㆍ’라고 한 아래에 장애를 제거하는 법을 설명한 다섯 줄 가량의 글에 대하여 인연이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방편을 보여 악업장(惡業障)을 없애고ㆍㆍㆍㆍㆍㆍ, 사악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第五因者, 爲下第四修行末云, 復次若人雖修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惡業障以下, 說除障法五行許文而作因緣. 故言爲示方便消惡業障乃至出邪網故.〕

여섯 번째 인(因)은, 저곳에서 이르기를 ‘어떻게 지관(止觀)을 수행하는가’ 이하에서 ‘지관을 갖추지 않으면 보리(菩提)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한 데까지의 세 장쯤의 글에 대하여 인연이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지관(止觀)을 수행하여 익혀서ㆍㆍㆍㆍㆍㆍ, 마음의 허물을 대치(對治)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第六因者, 爲彼云何修行止觀以下, 乃至止觀不具則無能人菩提之道, 三紙許文而作因緣. 故言修習止觀乃至心過故.〕

일곱 번째 인(因)은 저 수행신심분 끝 부분에 ‘다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ㆍㆍㆍㆍㆍㆍ’이하로부터 정토(淨土)에 나기를 권하는 여덟 줄 가량의 글에 대하여 인연이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염불에 전일(專一)한 방편을 보여 부처님 앞에 나서ㆍㆍㆍㆍㆍㆍ’등이라고 말한 것이다.
〔第七因者, 爲彼修行信心分末云, 復次衆生初學是法以下, 勸生淨土入行許文而作因緣. 故言爲示專念方便生於佛前等也.〕

여덟 번째 인(因)은 저 제 오의 권수이익분의 글에 대하여 인연이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다음에 ‘이러한 여러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기신론을 지었다’고 말한 것은 세 번째 총결이다. 인연을 바로 나타냄을 앞에서 마쳤다.
〔第八因者, 爲彼第五勸修利益分文而作因緣. 故言爲示利益勸修行故. 次言有如是等因緣所以結論者, 第三總結也. 直顯因緣竟在於前.〕

【논】
묻기를, “경 가운데 이러한 법이 갖추어 있는데, 어찌하여 거듭 설명해야 하는가?”
답하기를, “경 가운데에도 이러한 법이 있긴 하나 중생의 근기와 행동이 같지 않으며, 받아서 이해하는 연(緣)도 다르다. 이른바 여래가 세상에 계실 적에는 중생의 근기가 예리하고 설법하는 사람도 색(色)ㆍ심(心)의 업이 수승하여 원음(圓音)으로 한 번 연설하매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하므로 논을 필요로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여래가 돌아가신 후에는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널리 듣고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적게 듣고 많이 아는 이가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자심력(自心力)이 없어서 광론(廣論)에 의하여 이해하게 되는 사람도 있으며, 또한 어떤 중생은 다시 광론의 글이 많음을 번거롭게 여겨 마음으로 총지(摠持)와 같이 글의 분량이 적으면서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그런 것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한없는 뜻을 총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논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問曰. 脩多羅中具有此法, 何須重說. 答曰, 脩多羅中雖有此法. 以衆生根行不等, 受解緣別. 所謂如來在世, 衆生利根. 能說之人色心業勝. 圓音一演, 異類等解, 則不須論. 若如來滅後, 或有衆生 能以自力廣聞 而取解者, 或有衆生 亦以自力少聞 而多解者. 或有衆生無自心力, 因於廣論 而得解者, 亦有衆生 復以廣論文多爲煩, 心樂總持少文 而攝多義能取解者 .如是此論,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 應說此論.〕

【소】
두 번째 의심을 제거하는 것에 물음과 답이 있다. 물음 중에 ‘경 가운데 이 법이 갖추어져 있다’고 말한 것은 앞서 여덟 가지 인연에 의하여 설한 법을 이름이니, 이는 입의분에서 세운 법과 의(義)와 내지 권수분(勸修分)에서 보인 이익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여러 법을 경 가운데 갖추어 설하였으니, 이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거늘, 이제 다시 이 논을 지어서 저러한 법을 거듭 설하는 것은 어찌 명예와 이익 등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어찌하여 거듭 설명해야 되는가’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의심하는 마음을 들어서 질문을 한 것이다.
〔第二遣疑, 有問有答. 問中言經中具有此法者, 謂依前八因所說之法, 如立義分所立法義, 乃至勸修分中所示利益, 如是等諸法, 經中具說, 皆爲衆生離苦得樂. 而今更造此論中說彼法者, 豈非爲求名利等耶. 以之故言何須衆說. 是擧疑情而作問也.〕

답 가운데 세 부분이 있으니, 대략 답한 것과 널리 해석한 것, 그리고 세 번째 간략하게 답을 맺은 것이다. 답 중에서 ‘경 가운데 이러한 법이 있기는 하다’고 말한 것은 저 묻는 말을 인정하는 것이고, ‘중생의 근행이 같지 않아서 받아서 이해하는 연(緣)도 다르다’는 것은 그 의심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경과 논에서 설한 법이 서로 다르지는 않으나, 받아 이해하는 사람의 근행(根行)이 같지 않기 때문에, 혹은 경에만 의지하고 논에는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잇고, 혹은 논에만 의지하고 경에는 의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리하여 후자(즉 논에만 의지하는 사람)를 위하여 반드시 논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답의 뜻은 이상과 같다.
〔答中有三, 略答, 廣釋, 第三略結答, 答中言 多羅中雖有此法者, 與彼問辭也. 根行不等受解緣別者, 其疑情也. 經論所說雖無別法, 而受解者根行不同. 惑有依經不受論者, 惑有依論不受經者. 故爲彼人必須造論. 答意如是.〕

다음은 널리 밝힘이니,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부처님이 세상에 있을 때에 說法者와 청법자(聽法者)가 모두 수승함을 밝혔고, 뒤에서는 여래가 돌아가신 뒤에 중생의 근기가 받아 이해하는 연(縯)이 일정하지 않음을 나타내었다.
〔次則廣顯, 於中有二. 先明佛在世時說聽俱勝. 後顯如來滅後根緣參差.〕

처음에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에는 중생의 근기가 예리하다’고 말한 것은 듣는 사람이 수승함을 밝힌 것이고, ‘설하는 사람의 색(色)ㆍ심(心)의 업이 수승하다’ 는 것은 설하는 사람의 수승함을 나타낸 것이다. ‘원음으로 한번 연설한다’는 것은 설하는 사람의 수승함을 이룬 것이고,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한다’는 것은 법을 듣는 사람의 수승함을 이룬 것이며, ‘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설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수승하다는 뜻을 결론 맺은 것이다.
〔初中言如來在世衆生利根者, 明聽人勝. 能說之人色心業勝者, 顯說者勝. 圓音一演者, 成說者勝. 異類等解者, 成聽人勝. 則不須論者, 結俱勝義.〕

여기에서 ‘원음(圓音)’이라 말함은 곧 일음(一音)이니, 일음과 원음은 그 뜻이 어떠한가? 옛부터 여러 논사(論師)의 설한 것이 같지 아니하니 어떤 논사는 설하기를, “여러 부처는 오직 제일의신(第一義身)이니, 영원히 만상(萬像)을 끊어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으나, 다만 중생의 근기를 따라 한량없는 형체와 소리를 현현(顯現)하신다. 이는 마치 빈 골짜기에 소리가 없으나 부름을 따라 메아리가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러니 부처의 편에서 말한다면 소리가 없는 것이니 곧 하나이지만, 중생의 근기를 가지고 논한다면 여러 가지의 소리니 곧 하나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무슨 뜻으로 일음(一音)이니 원음이니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같은 때 같은 모임에서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그 근성에 따라서 각각 일음을 얻고 다른 소리는 듣지 아니하여 착란(錯亂)되지 아니하니, 이처럼 음의 기특(奇特)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음(一音)이라고 이른 것이다. 음이 시방(十方)에 두루 하여 근기가 성숙한 정도에 따라 듣지 못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원음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허공처럼 두루 가득 차 별다른 운곡(韻曲)이 없는 것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경에서 이르기를, ‘그 무리들의 음에 따라 중생에게 널리 일러준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此言圓音則是一音. 一音圓音, 其義云何. 昔來諸師說者不同. 有師說云. 諸佛唯是第一義身, 永絶萬像, 無形無聲. 直隨機現無量色聲. 猶如空谷無聲, 隨呼發響. 然則就佛言之, 無音是一. 約機論之, 衆音非一. 何意說言一音圓音者. 良由一時一會異類等解. 隨其根性各得一音, 不聞餘聲, 不亂不錯, 顯是音奇特, 故名一音. 言?十方隨機熟虛無所不 , 故名圓音. 非謂如空?滿無別韻曲. 如經言隨機類音普告衆生, 斯之謂也.〕

또 혹 어떤 이의 설한 것은, “부처님 편에서 말한다면 실로 형체와 소리가 있으며 그 소리가 원만하여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어서, 도무지 궁음(宮音)과 상음(商音)의 다름도 없거늘 어찌 평성(平聲)과 상성(上聲)의 다름이 있겠는가? 이처럼 다른 곡조가 없기 때문에 일음(一音)이라 이름하며,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에 원음(圓音)이라고 설하는 것이니, 다만 이 원음이 증상연(增上緣)이 되기 때문에 근기의 차별을 따라서 여러 가지 많은 소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마치 보름달이 오직 하나의 원형(圓形)이지만 그릇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 그림자를 나타내는 것과 같으니, 여기서의 도리도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또 〈유마경〉에서 이르기를, ‘부처가 일음으로 법을 연설하실 때에는 중생이 무리에 따라서 각각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惑有說者. 就佛言之, 實有色聲. 其音圓滿, 無所不?, 都無宮商之異, 下有平上之殊. 無異曲故名爲一音, 無不?故說爲圓音. 但由是圓音作增上緣, 隨根差別現衆多聲. 猶如滿月唯一圓形, 隨器差別而現多影. 當知此中道理亦爾. 如經言, 佛以一音演說法, 衆生隨類名得解故.〕

혹 어떤 이의 설한 것은, “여래가 실로 여러 가지 많은 음성이 있어서 일체 중생이 가진 언음(言音)이 여래의 법륜(法輪)의 음성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다만 이 부처의 음성은 장애가 없어서 하나가 곧 일체이며 일체가 곧 하나이다. 일체가 곧 하나이기 때문에 일음이라고 이름하고, 하나가 곧 일체이기 때문에 원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는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중생의 말하는 법을 여래가 한 말로 연설하여 다하여 남음이 없다. 모두 정밀(淨密)한 음을 알아듣게 하고자 하시니, 보살이 이로 인하여 처음 발심하기 때문이다.’ 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이 불음(佛音)은 불가사의하니, 다만 일음(一音)의 말이 곧 일체음(一切音)일 뿐 아니라, 여러 법에도 똑같이 두루 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惑有說者. 如來實有衆多音聲, 一切衆生所有言音, 莫非如來法輪聲攝. 但此佛音無障無?. 一卽一切, 一切卽一, 故名一音. 一卽一切, 故名圓音. 如華嚴經言, 一切衆生言法, 一言演說盡無餘, 悉欲解了淨密音, 菩薩因是初發心故. 又此佛音不可思議. 不但一音言卽一切音. 亦於諸法無不等?.〕

이제 우선 대략 여섯 쌍을 들어 그 똑같고 두루한 모양을 나타낼 것이다. 첫째는 일체 중생과 일체의 법에 똑 같으며, 둘째는 시방의 모든 공간과 삼세(三世)의 모든 시간에 똑 같으며, 셋째는 일체의 응신여래(應身如來)와 일체의 화신제불(化身諸佛)에 똑 같으며, 넷째는 일체법계(一切法界)와 허공계(虛空界)에 똑 같으며, 다섯째는 무애상입계(無?相入界)와 무량출생계(無量出生界)에 똑 같으며, 여섯째는 일체행계(一切行界)와 적정열반계(寂靜涅槃界)에 똑 같다.
〔今且略擧六雙, 顯其等?之相. 一者等於一切衆生及一切法. 二者等於十方諸刹及三世諸劫. 三者等於一切應身如來及一切化身諸佛. 四者等於一切法界及虛空界. 五者等於無?相入界及無量出生界. 六者等於一切行界及寂靜涅槃界.〕

이 뜻은 《화엄경》의 세 가지 무애(無?) 중에서 설한 것과도 같다. 하나하나의 소리마다 이 여섯 쌍과 같으면서도 그 음운(音韻)이 항상 잡란(雜亂)하지 아니하니, 만약 음이 이 여섯 쌍에 두루 미치지 않는 바가 있다면 음이기는 하지만 원(圓)이 아니고, 만약 똑같고 두루 하기 때문에 그 음의 곡조를 잃는다면 원(圓)이긴 하지만 음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곡조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똑같고 두루 미치며, 두루 미침을 변동시키지 않으면서 음운(音韻)이 차별되니, 이런 도리 때문에 비로소 원음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심식(心識)의 사량(思量)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법신(法身)의 자재한 뜻으로써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음의 뜻을 대략 이와 같이 설하였는데, 우선 나머지 논의는 그치고 다시 본문을 해석하겠다.
〔此義如華嚴經三種無?中說. 隨一一聲等此六雙, 而其音韻?不雜亂. 若音於此六雙有所不?, 則音非圓. 若有等?失其音曲, 則圓非音. 然今不壞曲而等?, 不動?而此韻. 由是道理, 方成圓音. 此非心識思量所測. 以是法身自在義故. 一音之義略說如是. 且止餘論還釋本文.〕

이 아래 두 번째에서 부처가 돌아가신 후 중생의 根行이 일정하지 않음을 밝혔으니, 이 중에 따로 네 가지 근성(根性)을 나타내었다. 처음 둘은 경에 의하여 알게 되는 사람이고, 뒤에 둘은 논에 의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사람이다.
〔此下第二明佛滅後根行參差. 於中別出四種根性. 初二依經而得解者. 後二依論方取解者.〕

처음 중에 ‘자력으로 널리 듣고 알게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널리 경을 들음에 의하여 부처의 뜻을 알게 되어 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자력(自力)’이라고 말한 것이다. 두 번째 중에 ‘또한 자력으로 조금 듣고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반드시 여러 경의 글들을 널리 듣지는 않았지만 여러 경의 뜻을 깊이 잘 이해하는 것이며, 역시 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자력’이라 말하였다. 세 번째 중에 ‘자심력이 없다’고 한 것은, 다만 불경에만 의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힘(자심력)이 없다고 말한 것이고, 〈智度論>,〈瑜伽論〉 등의 논에 의해서라야 비로소 불경에서 설한 뜻을 알기 때문에 ‘널리 논을 들음에 의하여 알게 된다’고 말하였다. 네 번째 중에 ‘다시 여러 논의 많은 글을 번거롭게 여긴다’ 고 말한 것은, 비록 이근(利根)이긴 하지만 번거로움을 참지 못하는 것이니, 이런 사람은 오직 글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풍부한 논에 의해서만 불경에서 설한 뜻을 깊이 이해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총지와 같이 글의 분량이 적으면서 많은 뜻을 함의하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잘 이해한다’라고 말하였다. 이 네 가지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지금 이 기신론에서 목표로 하는 바가 아니고, 여기서 목표로 하는 것은 네 번째 사람에 있는 것이다.
〔初中言能以自力廣聞而取解者者, 依廣經聞得解佛意, 而不須論. 故言自力也. 第二中言亦以自力少聞而多解者者, 未必廣聞諸經文言, 而能深解諸經意致, 亦不須論. 故言自力. 第三中言無自心力者, 直依佛經則不能解, 故言無力. 因於智度瑜伽等論, 方解佛經所說意趣, 故言因於廣論得解者. 第四中言復以廣論文多爲煩者, 雖是利根而不忍緊. 此人唯依文約義豊之論, 深解佛經所說之旨. 故言心樂總持少文而攝多義能取解者. 此四中, 前三非今所爲. 今所爲者在第四人也.〕

‘이와 같이(如是)’이하는 세 번째로 답을 맺음이니, ‘이와 같이’라고 말한 것은 앞의 네 가지 사람들은 모두 다든 것이다. ‘ 이 논(此論)’ 이하는 따로 네 번째 사람에 대한 것이니, 반드시 기신론을 지어야만 하는 뜻을 결론지어 밝힌 것이다.
〔如是以下第三結答. 言如是者, 通擧前四種人. 此論以下, 別對第四之人, 結明必應須造論意.〕

지금 이 논이 글은 오직 한 권이지만 널리 모든 경의 뜻을 포괄하기 때문에,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한량없는 뜻을 총체적으로 포괄했다.’ 고 말하였다. 저 네 번째 등급의 간단한 글귀(총지(摠持)를 좋아하는 부류는 이 기신론에 의해야만이 도를 깨우치게 되기 때문에 ‘마땅히 이 논을 설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今此論者, 文唯一卷, 其普攝一切經意. 故言總攝如來廣大心法無邊義故. 彼第四品樂總持類, 要依此論乃得悟道. 以之故言應說此論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