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① 먼저 뜻을 풀이함 / A. 법장문(法章門)을 해석함

通達無我法者 2008. 3. 24. 11:29

 

A. 법장문(法章門)을 해석함

은정희 역주/일지사/자료입력:도규희

 

 

【논(論)】
현시정의(顯示正義). 일심법(一心法)에 의하여 두 가지 문(門)이 있으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니, 이 두 가지 문이 모두 각각 일체의 법을 총괄하고 있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이 두 문이 서오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 顯示正義者. 依一心法有二種門. 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 是二種門皆各總攝一切法. 此義云何. 以是二門不相離故.〕

【소】
처음 중에 ‘일심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는 것은, 능가경(楞伽經)에서 “적멸(寂滅)이라는 것은 일심(一心)이라 이름하며, 일심이란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 《기신론》에서 심진여문(心眞如門)이라고 한 것은 곧 저《능가경》의 ‘적멸이라는 것은 일심이라 이름한다’함을 해석한 것이며, 심생멸문(心生滅門)이란 《능가경》중의 ‘일심이란 여래장을 이름한다’고 한 것을 해석한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법은 생(生)함도 없고 멸(滅)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寂靜)하여 오직 일심일 뿐인데, 이러한 것을 심진여문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적멸이란 일심(一心)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이다. 또 이 일심의 체(體)가 본각(本覺)이지만 무명(無明)에 따라서 움직여 생멸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생멸문에서 여래의 본성이 숨어 있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는 《능가경》에서 말하기를,
“여래장이란 선(善)과 악(惡)의 원인으로서 일체의 취생(趣生)을 두루 잘 일으켜 만든다. 비유하자면 환술사(伎兒)가 여러 가지 취(趣)를 변화시켜 나타내는 것과 같다.” 고 한 것과 같다. 이러한 뜻이 생멸문에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일심이란 여래장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는 일심의 생멸문을 나타낸 것으로, 아래 글에서 ‘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멸심있으며ㆍㆍㆍㆍㆍㆍ’라고 하고, 이어 ‘이 식(識)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각(覺)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니 다만 생멸심만을 취해서 생멸문울 삼는 것이 아니라, 생멸자체(生滅自體)와 및 생멸상(生滅相)을 통틀어 취하여 모두 생멸문 안에 둔다는 뜻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두 문이 이러한 데 어떻게 일심이 되는가? 염정(染淨)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어, 진망(眞妄)의 이문(二門)이 다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 이름하며, 이 둘이 없는 곳이 모든 법 중의 실체인지라 허공과 같지 아니하여 본성이 스스로 신해(信解:영묘하게 이해함)하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이름함을 말한 것이다.
〔初中言依一心法有二種門者, 如經本言, 寂滅者名爲一心, 一心者名如來藏. 此言心眞如門者, 卽釋彼經寂滅者名爲一心也. 心生滅門者, 是釋經中一心者名如來藏也. 所以然者. 以一切法無生無滅, 本來寂靜, 唯是一心, 如是名爲心眞如門. 故言寂滅者名爲一心. 又此一心體是本覺, 而隨無明勤作生滅. 故於此門如來之性隱而不顯, 名如來藏. 如經言如來藏者是善不善因, 能?與造一切趣生, 譬如伎兒變現諸趣. 如是等義在生滅門. 故言一心者名如來藏, 是顯一心之生滅門. 如下文言, 心生滅者, 依如來藏故有生滅心. 乃至此識有二種義, 一者覺義, 二者不覺義. 當知非但取生滅心爲生滅門. 通取生滅自體及生滅相, 皆在生滅門內義也. 二門如是, 何爲一心. 謂染淨諸法其性無二, 眞妄二門不得有異. 故名爲一. 此無二處諸法中實, 不同虛空, 性者信解, 故名爲心.〕

그러나 이미 둘이 없는데 어떻게 ‘일(一)’이 될 수 있는가? ‘일(一)’도 있는바가 없는데 무엇을 ‘심(心)’이라 말하는가? 이러한 도리는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는 것이니 무엇이라고 지목할지를 모르겠으나, 억지로 이름 붙여 일심(一心)이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이 모두 각기 일체법을 총괄한다’고 한 것은, 위의 입의분 중에서 ‘이 마음이 바로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괄한다’고 함을 해석한 것이니, 위에서는 바로 ‘마음이 일체법을 포괄함’을 밝혔으나, 이제 이 해석분 중에서는 ‘두 문이 모두 각기 총괄함’을 나타내었다. ‘이 두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두 문이 각기 총괄하는 뜻을 해석한 것이니, 이는 진여문은 염정(染淨)의 통상(通相)이며 통상 밖에 별다른 염정이 없기 때문에 염정의 모든 법을 총섭할 수 있음과, 생멸문은 각기 염정을 나타내어 염정의 법이 모두 포함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또한 일체의 모든 법을 총섭 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통(通)상과 별(別)상이 다르긴 하나 다같이 부정할 것이 없기 때문에 ‘두 문이 서로 여이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총괄적으로 뜻을 해석함을 마치다.
〔然皆無有二, 何得有一. 一無所有, 就誰曰心. 如是道理, 離言絶慮. 不知何以目之. 强號爲一心也. 言是二種門皆各總攝一切法者. 釋上立中是心卽攝一切世間出世間法. 上直明心攝一切法. 今此釋中顯其二門皆各總攝. 言以是二門不相離故者, 是釋二門各總攝義. 欲明眞如門者染淨通相, 通相之外無別染淨. 故得總攝染淨諸法. 生滅門者別顯染淨, 染淨之法無所不該. 故亦總攝一切諸法. 通別雖殊, 齊無所遣. 故言二門不相離也. 總釋義竟.〕

【별기(別記)】
진여문은 모든 법의 통상(通相 )이며, 통상 밖에 다른 제법(諸法)이 없어서 모든 법이 다 통상에 의하여 포괄된다. 이는 미진(微塵)이 질그릇의 통상이며, 통상 밖에 다른 질그릇이 없어서, 질그릇이 모두 미진에 의하여 포섭되는 것처럼, 진여문도 이와 같은 것이다. 생멸문이란 바로 이 진여가 선과 악의 인(因)인지라 연(緣)과 화합하여 모든 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사실 모든 법을 만들어 내지만 이 법들이 항상 진성(眞性)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이 생멸문에서도 진여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미진의 성질이 모여서 질그릇을 이루지만 항상 미진의 성상(性相)을 잃지 않기 때문에 질그릇의 문(門)이 바로 미진을 포괄하는 것처럼 생멸문도 이와 같은 것이다. 가령 두 문이 비록 체(體)가 다르지 않더라도 두 문이 서로 어긋나서 상통하지 않는다면 곧 진여문 중에서는 이(理)는 포괄하지만 사(事)는 포괄하지 않아야 하며, 생멸문 중에선 사(事)는 포괄하지만 이(理)는 포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 두 문이 서로 융통하여 한계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 각각 일체의 이(理)ㆍ사(事)의 모든 법을 통성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別記 - 眞如門是諸法通相, 通相外無別諸法, 諸法皆爲通相所攝. 如微塵是瓦器通相, 通相外無別瓦器, 瓦器皆爲微塵所攝. 眞如門亦如是. 生滅門者, 卽此眞如是善不善因, 與緣和合變作諸法. 雖實變作諸法, 而?不壞眞性. 故於此門亦攝眞如. 如微塵性聚成瓦器, 而常不失微塵性相. 故瓦器門卽攝微塵. 生滅門亦如是. 設使二門雖無別體, 二門相乘不相通者, 則應眞如門中攝理而不攝事, 生滅門中攝事理不攝理. 而今二門互相融通, 際限無分. 是故皆各通攝一切理事諸法. 故言二門不相離故.〕

묻기를, “만약 이 두 문이 각기 이(理)와 사(事)를 포괄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진여문 중에서는 다만 대승의 체(體)만 보이고 생멸문 중에서는 통틀어 자체(自體)ㆍ상(相)ㆍ용(用)을 다 보이는가?”
〔問. 若此二門各攝理事. 何故眞如門中但示摩訶衍體, 生滅門中通示自體相用.〕

답하기를, “포괄의 뜻과 보이는 뜻이 다르니, 어떻게 다른가? 진여문은 상(相)을 없앰으로써 이(理)를 나타냈으니, 상을 없앴으나 아주 제거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상을 포괄 할 수 있는 것이요, 상을 없애어서 두지 않기 때문에 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생멸문에서는 이(理)를 잡고서 사(事)를 이루었으니, 이(理)를 잡아서 파괴하지 않으므로 이(理)를 포괄 할 수 있는 것이요, 이(理)를 잡아서 없애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체(體)를 보이는 것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우선 설명한 것이 같지는 않지만, 통틀어 논하자면 두 뜻(포괄의 뜻과 보이는 뜻)이 또한 같다. 그러므로 진여문 중에도 또한 사상(事相)을 마땅히 보여야 할 것이나 생략하였기 때문에 설명하지 않았을 뿐이다.”
〔答. 攝義是義異, 何者. 眞如門是泯相以顯理. 泯相不除, 故得?相. 泯相不在, 故非是相. 生滅門者攝理以成事. 攝理不壞. 得攝理. 攬(?)理不泯, 故亦示體. 依此義故, 且說不同. 通而論之, 二義亦齊. 是故眞如門中亦應示於事相. 略故不說耳.〕

묻기를, 두 문이 같지 아니한 뜻은 이미 알았지만, 두 분이 포괄한 이(理)ㆍ사(事)는 또한 진여문이나 생멸문에 따라 차별의 뜻이 있는가 없는가 모르겠다.”
〔問. 二門不同, 其義已是. 末知二門所攝理事, 亦有隨門差別義不.〕

말하기를, “진여ㆍ생멸 두 문에 따라 분별함에 있어서도 역시 같지 않음이 있으니 어떤 것인가? 진여문 중에서 포괄한 事法 은 分別性이니 모든 법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아니하여 본래 寂靜하지만 단지 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며, 심생멸문에서 설명한 事法은 依他性이니 모든 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생멸이 있음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분별성과 의타성이 다시 같지는 않지만 또한 다르지도 아니하니 어째서인가? 인연으로 생긴 생멸하는 모든 법이 망념을 여의고서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분별성이 의타성과 다르지 아니하며, 또한 이는 생멸문에 있는 것이다. 또 인연으로 나는 것은 자성(自性)ㆍ타성(他性) 및 공성(共性)을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의타성은 분별성과 다르지 않으며, 또한 이는 진여문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분별ㆍ의타의 두 性은 다시 다르지는 않지만 또한 같은 것은 아니니, 어째서인가? 분별성법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없지 않은 것도 아니요, 의타성법은 비록 다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없지 않은 것이니, 이러므로 두 분별ㆍ의타성이 또한 雜亂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섭론(攝論)》에서 삼성(三性)이 서로 의지하는 것을 설명하여 ‘다르지도 않으며 다르지 않지도 아니하니, 마땅히 이처럼 말해야 한다’ 고 한 것과 같다. 만약 이 삼성(三性)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뜻을 잘 이해한다면 백가(百家)의 쟁론(諍論)을 화합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答. 隨門分別. 何者. 眞如門中所攝事法, 是分別性. 以說諸法不生不滅本來寂靜, 但依妄念而有差別故. 心生滅門所說事法, 是依他性. 以說諸法因緣和合有生滅故. 緣此二性雖復非一, 而亦不異. 何以故. 因緣所生生滅諸法, 不離妄念而有差別. 故分別性不異依也, 亦在生滅門也. 又因緣之生, 自他及共皆不可得. 故依他姓不異分別, 亦在眞如門也. 如是二性雖復不異, 而亦非一. 何以故. 分別性法本來非有亦非不無, 依他性法雖復非有而亦不無. 是故二性亦不雜亂. 如攝論說, 三性相望, 不異亦不異, 應如是說. 若能解此三性不一不異義者, 百家之爭論無所不和也.〕

진여ㆍ생멸 두 문이 포함한 이(理)가 같지 않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진여문 중에서 말한 이(理)는 진여라고는 말하나 또한 그 실체는 얻을 수 없으며, 그렇지만 또한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가 세상에 있거나 없거나 간에 성상(性相)은 항상 머물러 있어서 변이(變異)함이 없어 파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진여문 중에서 진여(眞如)니 실제(實際)니 하는 등의 이름을 임시로 세운 것이니, 이는 〈대품(大品)〉등 여러 반야경(般若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생멸문내에서 포괄한 이(理)는 다시 이(理)의 체(體)가 생멸상을 떠났지만 또한 상주(常住)하는 성질을 지키지 아니하고, 무명의 연(緣)을 따라서 생사에 유전(流轉)하는 것이다. 이는 실로 물든 것이지만, 그러나 자성(自性)은 청정하므로 이 생멸문 중에서 불성(佛性)이니 본각(本覺)이니 하는 등의 이름을 임시로 세운 것이니, 이는 〈열반경〉이나 〈화엄경〉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二門所攝理不同者. 眞如門中所說理者, 雖曰眞如, 亦不可得, 而亦非無. 有佛無佛, 性相常住, 無有變異, 不可破壞. 於此門中, 假立眞如實際等名. 如大品等諸般若經所說. 生滅門內所攝理者, 雖復理體離生滅相, 而亦不守常住之性. 隨無明然流轉生死. 雖實爲所染, 而自性淸淨. 於此門中, 假立佛性本覺等名. 如涅槃華嚴經等所說.〕

이제 이 기신론에서 인용 서술한 《능가경》등에서는 이 진여ㆍ생멸 두 문을 통하여 그 종체(宗體)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뜻도 다름이 없으니, 생멸을 떠났지만 상주성(常住性) 또한 얻을 수 없으며, 연(緣)을 따른다고 말했으나 항상 요동하지 아니하여 생멸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 의하여 진여문 중에서는 다만 진여니 실제니 하는 임시로 세운 이름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실상(實相)을 말하며 실재를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법을 건립한다고 말하고, 생멸문 중에서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무명의 바람에 의하여 움직이므로 물들지 않았지만 물들었으며 물들었지만 물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今論所述楞伽經等, 通以二門爲其宗體. 然此二義亦無有異. 以雖離生滅, 而常住性亦不可得. 雖曰隨緣. 而?不動, 離生滅性故. 以是義故. 眞如門中, 但說不壞假名而說實相, 不動實際建立諸法, 生滅門中, 乃說自性淸淨心因無明風動, 不染而染, 染而不染.〕

묻기를, “진여문 중에서는 오직 공(空)의 뜻만 말하고 생멸문 내에서는 불공(不空)의 뜻을 설하였으니, 이와 같지 아니한가?”
〔問眞如門中說有空義. 生滅門內說不空義. 爲不如是耶. 〕

답하기를, “대충 서로 배대(配對)해 본다면 이러한 뜻이 없지는 않다. 그러므로 위의 입의분의 진여상중에서는 다만 대승의 체를 잘 나타낸다고 말했고, 생멸문 중에서는 또한 대승의 상(相)ㆍ용(用)을 나타낸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말하자면 이와 같지 않음이 그러므로 아애의 논의 글에서는 진여ㆍ생멸 두 문이 다 불공(不空)의 뜻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答. 一往相配, 不無是義. 故上立義分眞如相中但說能示摩訶衍體. 生滅門中亦說顯示大乘相用. 就實而言, 則不如是. 故下論文二門皆說不空義.〕

묻기를, “만약 생멸문 안에 공(空)ㆍ불공(不空)의 두 가지 뜻이 다 있다는 것이라면 불공의 뜻은 연(緣)을 따라 생멸을 짓는 뜻이 있지마는, 공의 뜻은 무(無)인 것이니 어떻게 연(緣)을 따라 유(有)를 짓는 뜻이 되겠는가?”
〔問. 若生滅門內二義俱有者, 其不空義何有隨緣作生滅義, 空義是無, 何有隨緣而作有義.〕

답하기를, “두 가지 뜻이 같아서 다르다고 말할 수 없으니, 공(空)의 뜻에 의하여서도 유(有)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왜인가? 만일 공이 반드시 공일뿐이라면 마땅히 유를 지을 수 없지만, 이 공도 또한 공이므로 유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空)이 공(空)하다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법성(法性)의 공함이 있으니, 이 공도 또한 공하여 유(有)와 공(空) 모두(그 실체를)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공이 공한 것은 진여문에 있으니, 이는 《대품경》에서 ‘일체법이 공하고 이 공한 것도 또한 공하므로 이를 공공(空空)이라 이름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둘째는 마치 유(有)가 유(有)의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 될 수 있는 것과 같으니, 이를 이름하여 공이라 하는 것이며, 이러한 공은 공성(空性)이 없기 때문에 유를 지을 수 있으니 이를 공공(空空)이라 이름하는 것이요, 이러한 공공은 생멸문에 있다. 이는 열반경에서 ‘유와 무를 공공이라 이름하고, 시와 비를 공공이라 이름하니, 이러한 공공은 십주보살도 털끝 정도의 조금밖에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라고 말한 것과 같다. 두 문의 차별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위에서부터 위의 총체적으로 세운 법을 해석하여 마치다.
〔答. 二義是一, 不可說異. 而約空義亦得作有. 何者. 若空定是空, 應不能作有. 而是空亦空, 故得作有. 然此空空亦有二義. 一者, 有法性空, 是空亦空. 有之如空, 皆不可得. 如是空空, 有眞如門. 如大品經云, 一切法空, 此空亦空, 是名空空 二者猶如有無有性, 故得爲空, 是名曰空. 如是空無空性, 故得作有, 是名空空. 如是空空, 在生滅門. 如涅槃經云, 是有是無, 是名空空. 是是是非, 是名空空. 如是空空. 十住菩薩尙得少分如毫釐許, 何?餘人. 二門差別, 應如是知. 上來釋上總立法竟.〕

 【소(疏)】
△이 아래는 위에서 각각 세운 것을 해석하는 것이다. 따로 두 문을 해석함에 곧 둘로 나누겠다. 진여문 중에서도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처음에는 진여를 해석하고 뒤에는 여(如)의 상(相)을 해석한 것이다. 또 다시 처음은 전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뒤에는 각각 해석한 것이며 또 처음 글을 설명할 수 없음을 밝혔으니 이(理)가 말을 끊었음을 나타냈고, 뒤의 글은 설명할 수 있음을 밝혔으니 말을 끊지 않았음을 나타냈다.
〔△以下釋上別立. 別釋二門, 卽爲二分. 眞如門中, 亦有二意. 初釋眞如, 後釋如相. 又復初是總釋, 後是別解. 又初文明不可說, 顯理絶言. 後文明可得說, 顯不絶言.〕

【별기(別記)】
처음의 글 중에서 말하기를 ‘언설상(言說相)을 여의고 명자상(名字相)을 여의었다’고 하며, 내지 ‘진여란 말에 의하여 말을 보내는 것이다’라고 하고, 뒤의 글 중에서는 ‘언설(言說)로 분별함에 의하여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여실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뒤의 글에서 또한 일체의 분별이 모두 상응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일체의 언설도 또한 상응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異가 말을 여의고 생각을 끊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 처음 글 중에 ‘말에 의하여 말을 보낸다’는 글에 의해서야 그 理 가 말을 끊었음을 나타낼 수 있으니, 이것은 또한 理가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말로써 理가 실로 말을 끊었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면 자종상위(자종상위)의 허물에 떨어질 것이니, 왜냐하면 앞서는 말을 끊었다는 말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理는 실제로 말을 끊었기 때문이요, 만약 말을 끊는다는 말이 또한 끊음을 말한다면 이는 자어상위(자어상위)의 허물에 떨어지는 것이니, 왜냐하면 먼저는 말을 끊었다는 말도 끊어졌다고 하면서 말로써 그 말을 설명하고 잇기 때문이다.
〔別記 -初文中言離言說相離名字相, 乃至言眞如者因言遣言. 後文中言依言說分別有二種義,
謂如實空如實不空. 然後文亦說一切分別皆不相應, 當知一切言說亦不相應. 此卽顯理離言絶慮. 又初文中要依因言遣言之言, 乃得顯其理之絶言, 此亦顯理不離言說相. 若言得說理實絶言者, 則墮自宗相違過, 先以絶言之言不絶而理實絶言故. 若使絶言之言亦言絶者, 則墮自語相違過, 先以絶言之言亦絶而言得說言故.〕

【소(疏)】
묻기를, “이(理)는 실제로 말한다면 말을 끊은 것인가, 끊지 않은 것인가?” 만약 말을 끊지 않은 것이라면 정체지(正體智)는 말을 끊은 것이므로 곧 이에 어긋나며, 만약 실로 말을 끊은 것이라면 후득지(後得智)는 말을 지니므로 곧 이에 거슬리는 것이다. 또 만약 말을 끊지 않은 것이라면 기신론의 초단(初段)의 글이 바로 부질없는 말이 되며, 만약 실로 말을 끊은 것이라면 기신론의 후단(後段)의 글이 한갓 헛된 설명이 될 것이니 이는 마치 허공을 금은(金銀) 등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問. 理實而言, 爲絶爲不絶. 若不絶言者, 正體離言, 卽爲於理. 若實絶言, 後智帶言, 卽倒於理. 又若不絶, 卽初段論文斯爲漫語. 若實絶?, 則後段論文徒爲虛說. 如說虛空爲金銀等.〕

답하기를, “이러므로 이(理)는 말을 끊은 것이 아니며 끊지 않은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며, 이런 뜻에 의하므로 이(理)는 말을 끊기도 하며 말을 끊지 않기도 하는 것이니, 이렇다면 저 질문이 합당하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다.”
〔解云. 是故當知, 理非絶言, 非不絶言. 以是義故. 理亦絶言, 亦不言絶, 是則彼難無所不當.〕

【별기(別記)】
이와 같은 말들이 합당치 않은 바가 없기 때문에 합당한 바가 없으며, 합당한 바가 없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진여문 중에서의 끊음과 끊지 않음의 뜻을 이미 이같이 말하였고, 생멸문 중에서도 이 설명과 같다.
우선 방론(傍論)을 그치고 본론으로 돌아가 해석하겠다.
〔別記-如是等言, 無所不當, 故無所當. 由無所當, 故無所不當也. 眞如門中絶不絶義旣如是說. 生滅門中亦同此說. 且止傍論釋本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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