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ㆍ 각의(覺義)

通達無我法者 2008. 3. 24. 11:37

 

ㆍ 각의(覺義)

은정희 역주/일지사/자료입력:도규희

 

 

【논(論)】
각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심체(心體)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니, 망념을 여읜 상(相)이란 허공계(虛空界)와 같아서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며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본각의 뜻이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離念相者, 等虛空界, 無所不?, 法界一相, 卽是如來平等法身. 依此法身說名本覺. 何以故. 本覺義者, 對始覺義說. 以始覺者, 卽同本覺. 始覺義者, 依本覺故而有不覺, 依不覺故說有始覺.〕

【소(疏)】
대략 풀이하는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본각이요 뒤에는 시각이다. 본각을 밝히는 중에도 두 구절이 있으니, 먼저는 본각의 체를 밝혔고 뒤에서는 본각의 뜻을 풀이하였다.
처음 중에 ‘심체가 망념을 여의었다’고 한 것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하며, 이는 불각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허공계와 같다’는 것은, 다만 어두움이 없을 뿐 아니라 지혜의 광명이 법계에 두루 비쳐 평등하여 둘이 없는 것이다. 이는 아래 글에서 ‘대지혜(大智慧)의 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두루 비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는 말과 같다. ‘어째서인가’이하는 두 번째로 뜻을 풀이한 것이니, 이는 시각에 대하여 본각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본각을 뜻을 밝혀 마친다.
〔略中亦二. 先本. 後始. 明本覺中, 亦有二句. 先明本覺體. 後釋本覺義. 初中言心體離念者, 謂離妄念. 顯無不覺也. 等虛空界者, 非唯無間, 有慧光明?照法界平等無二. 如下文云. 有大智慧光明義故. ?照法界義故. 何以故下, 第二釋義. 是對始覺釋本覺義. 明本覺竟.〕

다음은 시각을 풀이하였으니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또한 본각을 상대하여 불각이 일어나는 뜻을 나타냈고, 뒤에서는 불각에 대하여 시각의 뜻을 풀이하였다. 이 중의 대의는 시각이 불각을 기다리고 불각이 본각을 기다리며 본각이 시각을 기다리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서로 기다리는 것이라면 自性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다면 각(覺)이 있지 않을 것이요, 각이 있지 않은 것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이다. 상대하여 이루어진다면 각이 없지 않을 것이요, 각이 없지 않기 때문에 ‘각(覺)’이라 말하는 것이지 자성이 있어서 ‘각(覺)’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각(二覺)을 대략 밝힘을 마친다.
〔次釋始覺, 於中有二. 先顯亦對本覺不覺起義. 後對不覺釋始覺義. 此中大意, 欲明始覺待於不覺. 不覺待於本覺. 本覺待於始覺. 旣互相待, 則無自性. 無自性者, 則非有覺, 由互相待. 相待而成, 則非無覺. 非無覺故, 說名爲覺. 非有自性名爲覺也. 略明二覺竟在於前.〕

【별기(別記)】
각의 뜻이라 하는 것은 곧 두 가지가 있으니, 본각과 시각을 말한다. 본각이란 이 심성(心性)이 불각상(不覺相)을 여읜 것을 말하니, 이 각조(覺照)의 성질을 본각일 하는 것이다. 이는 아래 글에서 ‘이른바 자체에 큰 지혜광명의 뜻이 있다’고 한 것과 같다. 시각이란 바로 이 심체(心體)가 무명의 연을 따라 움직여서 망념을 일으키지만, 본각의 훈습의 힘에 의하여 차츰 각의 작용이 있으며 구경(究竟)에 가서는 다시 본각과 같아지는 것이니, 이를 시각이라 말하는 것이다.
〔別記- 言覺義者, 卽有二種. 謂本覺, 始覺. 言本覺者, 謂此心性離不覺相, 是覺照性, 名爲本覺. 如下文云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 言始覺者. 卽此心體隨無明緣. 動作妄念. 而以本覺熏習力故, 稍有覺用, 乃至究竟, 還同本覺. 是名始覺.〕

불각의 뜻을 말하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근본불각이며, 둘째는 지말불각(枝末不覺)이다. 근본불각이란 아라야식내의 근본무명을 불각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아래의 글에서 ‘아라야식에 의하여 무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 불각하여 일어나......’라고 한 말과 같기 때문이다. 지말불각이라 하는 것은 무명에서 일어난 일체의 염법을 모두 불각이라 이름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아래의 글에서 ‘일체의 염법이 모두 불각상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과 같다. 만약 식상(識相)의 차별로 근본이 지말과 다름을 간별하는 문에 의한다면 아라야식 중에 오직 본각과 본불각이 있을 뿐이며, 만약 식체(識體)가 없어 지말을 포괄하여 근본에 돌아가게 하는 문에 의한다면 저 시각과 및 지말불각도 또한 아라야식 내의 뜻이다. 그리하여 위에서 ‘이 아라야식에 두 뜻이 있다’고 한 것은 이와 같은 두 종류의 뜻을 통틀어 다 포함한 것이며, 따라서 아래에서 해석하는 중에 본각과 시각의 두 각과 두 불각의 뜻을 모두 든 것이다.
〔言不覺義, 亦有二種. 一者根本不覺. 二者枝末不覺. 根本不覺者, 謂黎耶識內根本無明, 名爲不覺. 如下文云依阿黎耶識說有無明不覺而起故. 言枝末不覺者, 謂無明所起一切染法, 皆名不覺. 如下文云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 若依識相差別簡本異末義門, 則黎耶識中唯有本覺及本不覺. 若就識體無二?末歸本義門, 則彼始覺枝末不覺亦是黎耶識內之義. 故上云此識有二義者, 通含如是二種之意. 故下釋中通擧本始二覺及二不覺義也.〕

묻기를,
“심체가 다만 불각이 없기 때문에 본각이라 해야 하는 가, 심체에 각조의 작용이 있음을 본각이라 이름해야 하는가? 만약 다만 불각이 없음을 본각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또한 각조가 없을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이는 불각일 것이고, 만약 각조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본각이라 하는 것이라면 이 覺이 번뇌를 끊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번뇌를 끊지 못했다면 각조의 작용이 없는 것이요, 만약 번뇌를 끊음이 있다면 범부가 없을 것이다.”
〔問. 爲當心體只無不覺, 故名本覺. 爲當心體有覺照用, 名爲本覺. 若言只無不覺名本覺者, 可亦無覺照故是不覺. 若言有覺照故名本覺者, 未知此覺爲斷惑不. 若不斷惑. 則無照用. 如其有斷. 則無凡夫.〕

답하기를,
“비단 어두움(불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명조(明照 즉 각조)의 작용도 있는 것이니, 이 각조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또한 번뇌를 끊음도 있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만약 먼저 미혹했다가 뒤에 깨닫는 것을 각이라고 하는 입장에 선다면 시각에 각이 있는 것이지 본각 중엔 각이 없을 것이다. 만약 본래 미혹하지 않음을 각이라 하는 입장에 선다면 본각은 각이고 시각은 각이 아닐 것이다. 번뇌를 끊는 뜻도 또한 이와 같아서, 앞서는 번뇌가 있었으나 뒤에 번뇌가 없어진 것을 끊음이라 한다면 시각은 끊음이 있고 본각은 끊음이 없으며, 본래부터 번뇌를 여읜 것을 끊음이라 한다면 본각은 끊은 것이고 시각은 끊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뜻에 의한다면 본래 끊었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없는 것이니, 이는 아래의 글에서 ‘일체의 중생이 본래 열반ㆍ보리의 법에 상주(常住)하여 들어가 있다’고 한 말과 같다. 그러나 본각이 있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없다고 말하지만, 시각이 아직 있지 않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잘못이 없는 것이다. 만약 네가 본각이 있기 때문에 본래 범부가 없다고 말한다면 끝내 시각이 없을 것이니, 무슨 시각작용을 할 범부가 있겠는가? 그 범부도 또한 끝내 시각이 없다면 본각이 없는 것이니, 무슨 본각에 의하여 범부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본각이 있기 때문에 본래 불각이 없고, 불각이 없기 때문에 끝내 시각이 없는 것이며, 시각이 없기 때문에 본래 본각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본각이 없음에 이른 것은 그 비롯됨이 본각이 있기 때문이요, 본각이 있는 것은 시각이 있기 때문이며 시각이 있는 것은 불각이 있기 때문이며 불각이 있는 것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이다. 이는 위의 글에서 ‘본각의 뜻이란 시각의 뜻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다.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므로 불각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한다’라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이 전전(展轉)하여 서로 의지하니, 바로 모든 법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있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님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答. 非但無闇. 亦有明照. 以有照故, 亦有斷惑. 此義云何. 若就先眠後覺名爲覺者, 始覺有覺, 本覺中無. 若論本來不眠名爲覺者, 本覺始覺, 始覺則非覺. 斷義亦爾. 先有後無名爲斷者, 始覺有斷, 本覺無斷. 本來離惑名爲斷者, 本覺是斷, 始覺非斷. 若依是義, 本來斷故, 本來無凡. 如下文云一切衆生本來常住入於涅槃菩提之法. 緣雖曰有本覺故本來無凡. 而未有始覺故本來有凡. 是故無過. 若汝言由有本覺本來無凡, 則終無始覺望何有凡者. 他亦終無始覺則無本覺, 依何本覺以說無凡. 當知由有本覺故本無不覺. 無不覺故終無始覺. 無始覺故本無本覺. 至於無本覺者源由有本覺. 有本覺者由有始覺. 有始覺者由有不覺. 有不覺者由依本覺. 如下文云. 本覺義者對始覺義說. 以始覺者卽同本覺. 始覺義者, 依本覺故而有不覺, 依不覺故說有始覺. 當知如是展轉相依, 卽顯諸法非無而非有, 非有而非無也.〕

묻기를,
“이 본각성이 통틀어 염정(染淨)의 인성(因性)이 되어야 하는가, 다만 모든 정법(淨法)의 본성이기만 해야 하는가? 만약 다만 정법의 인(因)이라고만 말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능가경》에서 ‘여래장은 선(善)ㆍ불선(不善)의 인(因)이라’하고 내지 널리 설명하였으니, 만약 통틀어 염정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무슨 까닭으로 ‘성공덕(性功德)을 구족한다’고만 말하고, ‘성염환(性染患)을 구족한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하기를,
“이 이(理)는 통틀어 염정과 함께 성(性)이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오직 성공덕을 구족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이(理)가 정성(淨性)을 여의었기 때문에 연을 따라 모든 염법을 일으킬 수 있으며, 또 염성(染性)을 여의었기 때문에 연을 따라 모든 정법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염정법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통틀어 본성이 되는 것이며, 염정성을 여의었기 때문에 오직 성공덕이 되는 것이니, 어째서 염정성을 여의게 되어야만 모든 공덕을 이루게 되는가? 염정성을 집착하는 것은 모두 망상이기 때문이다.”
〔問. 此本覺性. 爲當通爲染淨因性. 爲當但是諸淨法性. 若言但是淨法因者, 何故經云如來之蔣是善不善因, 乃至廣說. 若通作染淨者, 何故唯說具足性功德, 不說具足性染患也. 答. 此理通與染淨作性. 是故唯說具性功德. 是義云何. 以理離淨性, 故能隨緣作諸染法. 又離染性, 故能隨緣作諸淨法. 以能作染淨法. 由離染淨性, 故唯是性功德. 何以得離染淨性乃成諸功德, 取著染淨性皆是妄想故.〕

【소(疏)】
△이 아래는 두 번째 본각과 시각의 두 각을 널리 풀이하였으니, 이 중에 먼저는 시각을 풀이하였고 뒤에서는 본각을 널리 풀었다. 처음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으로 ‘만(滿)’과 ‘불만(不滿)’의 뜻을 나타냈고, 둘째는 따로 시각의 차별을 풀이하였고, 셋째는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전체적으로 밝혔다.
〔△此下第二廣釋二覺. 於中先釋始覺. 後廣本覺. 初中有三. 一者總標滿不滿義. 二者別解始覺差別. 三者總明不異本覺.〕

【논(論)】
또 심원(心源)을 깨달았기 때문에 究竟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며, 심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닌 것이다.
〔又以覺心源故, 名究竟覺. 不覺心源故, 非究竟覺.〕

【소(疏)】
전체적으로 표시하는 중에 ‘심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이라고 이름한다’고 한 것은 불지(佛地)에 있는 것이요, ‘심원을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구경각이 아니다’라는 것은 금강유정(金剛喩定)이하이다.
〔總標中言覺心源故名究竟覺者, 在於佛地. 不覺心源故非究竟覺者, 金剛已還也.〕

【논(論)】
이 뜻이 무엇인가? 범부 정도의 사람은 먼저의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두l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 악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는 또한 각(覺)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바로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이승(二乘)의 관지(觀智) 와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 정도의 사람은 생각의 이상(異相)을 깨달아 생각에 이상이 없으니, 이는 추분별집착상(?分別執着相)을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 등 정도의 사람은 생각의 주상(住相)을 깨달아 생각에 주상이 없으니, 이는 분별추념상(分別?念相)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한다. 보살지가 다한 정도의 사람은 방편을 만족시켜서 일념이 상응하고 마음의 처음 일어나는 상(相)을 깨달아 마음에 초상(初相)이 없으니, 이는 미세념(微細念)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하니, 이를 구경각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무념을 볼 수 있다면 곧 불지레 향함이 된다’고 말하였다.
〔此義云何. 如凡夫人覺知前念起惡故, 能止後念令其不起. 雖復名覺, 卽是不覺故. 如二乘觀智, 初發意菩薩等, 覺於念異, 念無異相. 以捨?分別執著相故, 名相似覺. 如法身菩薩等, 覺於念住, 念無住相, 以離分別?念相故, 名隨分覺. 如菩薩地盡, 滿足方便, 一念相應覺心初起, 心無初相, 以遠離微細念故, 得見心性, 心卽常住, 名究竟覺. 是故修多羅說, 若有衆生能觀無念者, 則爲向佛智故.〕

【소(疏)】
다음 따로 풀이하는 중에 사상(四相)에 의하여 설명하였으니, 이 중에서 먼저 사상(四相)을 밝히고, 다음에 글을 풀이하겠다.
묻기를,
“이 중에 사상이 동시에 있다고 해야 하는가, 전후의 순서가 있다고 해야 하는가? 이는 어째서 의심하는 것인가? 만약 동시라고 한다면, 반대로 〈기신론〉에서는 사상이 깨달을 때엔 차별됨을 말하였고, 만약 전후의 순서가 있는 것이라면, 반대로 아래에서 사상이 동시에 있다고 말하였다.”
어떤 이의 설은, 이는 살바다종(薩婆多宗)의 사상(四相)에 의하여 사상의 체는 동시이지만 사상의 용(用)은 전후라 하니, 작용이 전후이기 때문에 깨달을 때에 차별을 지으며 본체는 동시이므로 동시에 있는 것이라 한다고 하였다. 어떤 이의 설은 성실종(成實宗)의 전후사상(前後四相: 사상에 전후의 차별이 있음)에 의하면서도 동시에 있다고 하였으니, 본각에서 사상을 바라본다면 사상의 전후차별이 없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동시에 있다고 한 것이요, 따라서 사상이 모두 자립(自立)함이 없다고 하였다. 어떤 이의 설은 이것은 대승비밀사상(大乘秘密四相)이니, 사상을 깨달을 때에는 전후가 심천(深淺)이 있으나 깨달은 사상은 동시에 있다고 하였다. 이 뜻이 무엇인가? 저 심성(心性)이 본래 생멸상을 여의었으나 무명이 있어서 자기의 심성을 모르는 것이며, 심성을 어김에 의하여 적정(寂靜)을 여의기 때문에 동념(動念)의 사상을 일으켜 내는 것이니, 사상은 무명과 화합하는 힘에 의하여 심체(心體)로 하여금 생주이멸(生住異滅)케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소승(小乘)의 논의 중에 ‘마음이 미래에 있을 때에 아직 생멸을 하지 않다가 업력(業力)에 의하여 사상을 끌어서 심법(心法)으로 하여금, 생부이멸하게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대승의 사상도 또한 번뇌에 의하여 요동하게 되어 생사에 왕래함을 중생이라 이름한다‘고 한 말과 같으며, 이 기신론 아래의 글에서‘자성청정심이 무명풍(無明風)에 의하여 움직인다’라고 한 말도 바로 이를 이르는 것이다.
〔差別解中. 初四相說. 此中先明四相, 緣後消文. 問. 此中四相, 爲當同時, 爲是前後, 此何所疑. 若同時那. 論說四相覺時差別. 若前後那, 何言四相俱時而有. 惑有說者, 此依薩婆多宗四相. 四體同時. 四用前後. 用前後故, 覺時差別. 體同時故, 名俱時而有. 惑有說者, 是依成實前後四相. 而言俱時而有者. 以本覺望四相, 則無四相前後差別. 故言俱時而有, 皆無自立. 惑有說者, 此是大乘秘密四相. 覺四相時, 前後淺深. 所覺四相, 俱時而有. 是義云何. 夫心性本來離生滅相. 而有無明迷自心性. 由違心性離於寂靜. 故能生起動念四相. 四相無明和合力故, 能令心法生住異滅. 大乘四相當知亦爾. 如經云, 卽此法身, 爲諸煩惱之所漂動, 往來生死, 名爲衆生. 此論下文云自性淸淨心因無明風動, 正謂此也.〕

전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러하나, 이 중에서 분별한다면 사상 안에 가가 차별이 있으니, 생삼(生三), 주사(住四), 이륙(異六), 멸칠(滅七)을 말한다. 생상(生相)이 셋이라는 것은, 첫째 업상(業相)을 말하니, 무명에 의하여 불각의 망념이 움직여 비록 생멸이 있지만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니, 이는 마치 오지 않은 생상이 장차 곧 작용하려는 때에 이른 것과 같다. 둘째는 전상(轉相)이니, 동념(動念)에 의하여 다음에 능견(能見)을 이루는 것을 말함이니, 이는 마치 아직 오지 않은 생상이 막 작용하는 때에 이른 것과 같다. 셋째는 현상(現相)이니, 능견에 의하여 경상(境相)을 나타내는 것을 이름하니, 이는 마치 아직 오지 않은 생상이 현재시(現在時)에 이른 것과 같다. 무명이 이 삼상(三相)과 화합하여 일심의 체를 움직여 전상(轉相)을 따라 현상(現相)에 이르는 것이, 마치 소승의 미래장심(未來蔣心)이 그 생상을 따라서 진전하여 현재에 이른 것과 같으며, 이제 대승 중에서 여래장심(如來藏心)이 생상을 따라 현재에 이르는 것 또한 그 뜻이 이와 같다. 이 셋은 모두 아라야식 자리에서 가지는 차별이며, 이 중에 자세하게 다 말하는 것은 아래 문장에서 하겠다. 이를 매우 깊은 세 가지 생상이라 이름한다.
〔總說隨緣. 於中分別者. 四相之內名有差別. 謂生三, 住四, 異六, 滅七. 生相三者. 一名業相. 謂由無明不覺念動. 雖有起滅, 見相未分. 猶如未來生相將至正用之時. 二者轉相. 謂依動念轉成能見. 如未來生至正用時. 三者現相. 謂依能見現於境相. 如未來生至現在時. 無明與此三相和合, 動一心體隨轉至現. 猶如小乘未來藏心, 隨共生相轉至現在. 今大乘中如來藏心隨生至現, 義亦如是. 此三皆是阿黎耶識位所有差別. 於中委悉, 下文當說. 是名甚深三種生相.〕

주상(住相)이 넷이라 함은, 이 무명이 생상과 화합함에 의하여 주상을 내는 마음에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네 가지의 주상을 일으켜 내는 것이니, 이른바 아치(我癡)와 아견(我見)과 아애(我愛)와 아만(我慢)이다. 이러한 네 가지 생상에 의하여 능상(能相)인 심체(心體)를 일으켜, 주상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 안으로 반연하여 머물게 하기 때문에 주상이라 이름하며, 이 넷은 모두 제 칠 식의 자리에 있다.
〔住相四者. 由此無明與生和合, 迷所生心無我我所, 故能生起四種住相. 所謂我癡我見我愛我慢. 如是四種依生相起能相心體. 令至住位內緣而住, 故名住相. 此四皆在第七識位.〕

이상(異相)이 여섯이라 함은, 무명이 저 주상과 화합하여 계탁(計度)하는 바의 아(我)ㆍ아소(我所)가 공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의 이상(異相)을 일으키니, 이른바 탐(貪)ㆍ진(瞋)ㆍ치(癡)ㆍ견(見)이다. 이는 〈신론(新論)〉에서 “번뇌의 자성이 오직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한 말과 같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무명이 이 여섯 가지와 화합하여 능상인 주심(住心)을 이상(異相)의 자리에 이르게 하여 밖으로 향하여 반연케 하기 때문에 이상이라 이름하니, 이 여섯은 생기식(生起識)의 자리에 있다.
〔異相六者. 無明與彼住相和合, 不覺所計我我所空, 由是能起六種異相. 所謂貪瞋癡慢疑見. 如新論云, 煩惱自性唯有六種, 此之謂也. 無明如此六種和合, 能相住心令至異位外向攀緣, 故名異相. 此六在於生起識位.〕

멸상(滅相)이 일곱이라 함은 무명이 이상(異相)과 화합하여, 바깥 경계는 위(違)ㆍ순(順)의 성격을 떠난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일곱 가지의 멸상을 일으키니, 이른바 신(身)ㆍ구(口) 일곱 가지의 악업이다. 이러한 악업이 이심(異心)을 없애어 악취(惡趣)에 떨어지게 하기 때문에 멸상이라 이름하며, 이는 마치 소승의 멸상이 현재심을 없애어 과거에 들어가게 함과 같으니 대승의 멸상도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滅相七者. 無明如此異相和合, 不覺外塵違順性離, 由此發起七種滅相. 所謂身口七支惡業. 如是惡業, 能滅異心令隨惡趣, 故名滅相. 猶如小乘滅相, 滅現在心. 令入過去. 大乘滅相當知亦爾.〕

이리하여 사상(四相)의 일어남은 일심이 유전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다 근본무명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승만경》에서 “무명주지(無明住地)가 그 힘이 가장 크다”고 하고, 이 《기신론》에서 “무명의 힘이 일체의 염법을 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말과 같다. 또 소상(所相)의 심은 일심에서 오는 것이며, 능상의 상은 무명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일어난 상이 그것이 이르는 곳에 따라서 그 작용에 차별이 있어서 경계의 별상을 취하는 것을 수법(數法)이라 이름하니, 이는 참으로 그 근본무명이 평등성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 소상의 심이 이르는 곳마다 총괄하는 주인이 되어 경계의 통상(通相)을 요달함을 심왕(心王)이라 말하니, 그 본래의 일심이 모든 법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변론(中邊論)에서 “오직 경계만을 아는 것을 심이라 하고, 차별하는 것을 심법이라 한다”고 하고, 장행(長行)에서 이를 해석하여 “만약 경계의 통상을 요달한다면 이를 심이라 하며, 경계의 별상을 취하는 것을 심법이라 한다”고 한 말과 같다. 《유가론》중에도 이 설과 똑같다. 이리하여 모든 외도들이 흔히 심왕을 재주(宰主)니 짓는 자니 받는 자니라고 계탁하는데 이는 그것(심왕)이 자성이 없이 연을 따라 유전하는 것임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由是義故. 四相生起, 一心流轉. 一切皆因根本無明. 如經言無明住地其力最大. 此論云當知無明力能生一切染法也. 又所相之心, 一心而來. 能相之相, 無明所起. 所起之相, 隨其所至, 其用有差別. 取塵別相, 名爲數法. 良由其根本無明違平等性故也. 其所相心, 隨所至處, 每作總主. 丁塵通相, 說名心王. 由其本一心是諸法之總源故也. 如中邊論云. 唯塵智名心. 差別名心法. 長行釋云. 若了塵通相名心. 取塵別相名爲心法. 瑜伽論中亦同是說. 以是義故. 諸外道等多於心王計爲宰主作者受者. 由不能知其無自性隨緣流轉故也.〕

이 사상(四相)을 총괄하여 일념이라 하며, 이 일념ㆍ 사상에 의하여 사위(四位)의 단계적인 강하를 밝혔다. 이는 본래 무명불각의 힘에 의하여 생상(生相) 등 여러 가지 몽념(夢念)을 일으켜 그 심원을 움직여 점차로 멸상에 이르며, 오래토록 삼계(三界)에 잠들어 육취(六趣)에 유전하다가, 이제 본각의 불사의훈(不思議熏)에 의하여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찾는 마음을 일으켜 점점 본원으로 향하여 비로소 멸상과 내지 생상을 쉬고 환하게 크게 깨달아 자심(自心)이 본래 동요한 바가 없음을 깨닫고, 이제는 고요한 바도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일여(一如)의 자리에 머물게 됨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니, 이는 《금광명경》에서 말한 꿈에 하수(河水)를 건너는 비유와도 같은 것이다. 이 중에서 널리 설명한 대의도 이와 같다.
〔總此四相名爲一念. 約此一念四相, 以明四位溪降. 欲明本依無明不覺之力. 起生相等種種夢念, 動其心源, 轉至滅相. 長眠三界, 流轉六趣. 今因本覺不思義熏, 起厭樂心. 漸向本源, 始息滅相乃至生相. 明然大悟, 覺了自心本無所動. 今無所靜. 本來平等, 住一如牀. 如經所說夢度河喩. 此中應廣說大意如是.〕

다음은 그 글을 해석하는 것이니, 사상에 의하여 사위를 분별하는 것이며, 사위 중에 각각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능각인(能覺人: 깨닫는 사람)이요, 둘째는 소각상(所覺相 :깨달아진 모양)이요, 넷째는 깨달음의 이익이요, 넷째는 깨달음의 분제(分齊:범위)이다. 처음의 위(位) 중에 ‘범부 정도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능각인이니, 위치가 십신(十信))에 있다. ‘앞의 생각에서 악이 일어남을 알았다’는 것은 소각상을 나타냄이니, 아직 십신에 들어가기 전에는 신(身)ㆍ구(口)의 일곱 가지 악업을 갖추어 일으켰다가 이제 신위(信位)에 들어가서는 일곱 가지 악업이 실로 나쁜 것임을 잘 알게 되기 때문에 ‘앞의 생각에서 악이 일어남을 알았다’고 말한 것이며, 이는 멸상을 깨달은 뜻을 밝힌 것이다. ‘뒤의 생각을 그쳐서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것은 각의 이익이니, 앞에서는 불각으로 인하여 일곱 가지 악념을 일으켰다가 이제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멸상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각(覺)이라 이름을 붙였으나 바로 불각이다’라고 한 것은 각의 분제를 밝힌 것이니, 멸상이 실로 나쁜 것임을 알았지만 오히려 멸상이 꿈이라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次消其文. 約於四相以別四位. 四位之中覺各四義. 一能覺人. 二所覺相. 三覺利益. 四覺分齊. 初位中言如凡夫人者, 是能覺人, 位在十信也. 覺知前念起惡者, 顯所覺相. 未入十信之前, 具起七支惡業. 今入信位, 能知七支實爲不善. 故言覺知前念起惡. 此明覺於滅相義也. 能止後念令不起者, 始覺利益. 前由不覺, 起七支惡念. 今旣覺故, 能止滅相也. 言雖復名覺卽是不覺者, 明覺分齊. 雖知滅相實是不善, 而猶未覺滅相是夢也.〕

두 번째의 위(位)중에 ‘이승의 관지(觀智)와 초발의보살 정도의 사람들’이라 한 것은 십해(十解)이상의 삼현보살(三賢菩薩)이며 십해의 초심을 발심주(發心住)라 한다. 이 발심주의 사람을 들어서 겸하여 후위(後位)까지 취하므로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이라 말한 것이니 이는 능각인을 밝혔다. ‘생각의 이상(이상)을 깨달았다’는 것은 소각상을 밝힌 것이니, 앞서 말한 여섯 가지의 이상(異相)과 같으며 이는 내의를 분멸하여 아(我)와 아소(我所)라고 계탁하는 것이다. 이 삼승인(三乘人)은 아(我)가 없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생각의 이상을 깨달았다고 한 것이다. 이는 소상(所相)인 심체가 무명에 잠든바 되어 異相을 꿈꾸어서 모든 번뇌를 일으키다가 이제 점차 지혜와 상응하여 이상의 꿈으로부터 조금 깨닫게 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생각에 이상(異相)이 없다’는 것은 각의 이익이니, 이미 이상의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저 여섯 가지 이상이 영구이 없어진 것이며 그러므로 생각에 이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추분별집착상(?分別執着相)을 버렸기 때문에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각의 분제이니, 역경계와 순경계를 분별하여 탐ㆍ진 등을 일으킴을 추분별집착상이라 이름하며, 이러한 추(?)한 집착상을 버리긴 했으나 아직 무분별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므로 상사각이라 하는 것이다.
〔第二位中言如二乘觀智初發意菩薩等者, 十解以上三賢菩薩. 十解初心, 名發心住. 擧此初人, 兼取後位, 故言初發意菩薩等. 是明能覺人也. 覺於念異者, 明所覺相. 如前所說六種異相. 分別內外計我我所. 此三僧人了知無我, 以之故言覺於念異. 欲明所相心體無明所眠. 夢於異相, 起諸煩惱. 而今漸與智慧相應. 後異相夢而得微覺也. 念無異相者, 是覺利益. 旣能覺於異相之夢. 故彼六種異相永滅. 以之故言念無異相也. 捨?分別執着相故 名相似覺者, 是覺分齊. 分別違順起貪瞋等, 名?分別執着相. 雖捨如是?執着相. 而猶未得無分別覺, 故名相似覺也.〕
세 번째의 위중에 ‘법신보살(法身菩薩) 등’이라 한 것은 초지(初地)이상 십지(十地)의 보살이니, 이는 능각인이다. ‘생각의 주상(住相)을 깨달았다’는 것은, 주상 중에서는 마음 밖에 경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인(人)ㆍ법(法)을 고집하여 안으로 반연하여 머물렀으나, 법신보살이 되어서는 이공(二空)을 통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소상의 심체가 이미 이상(異相)을 깨달았으나 아직도 주상의 꿈에 잠들어 있다가, 이제 무분별지와 상응하여 주상의 꿈으로부터 깨닫게 되었음을 밝히려 하기 때문에 ‘생각의 주상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니, 이는 소각상이다. ‘생각에 주상이 없다’는 것은 네 가지 주상이 없어져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 이는 각의 이익이다. ‘분별추념상을 떠났다’는 것은, 인(因)ㆍ아(我)의 집착을 분별이라 할 것이니, 앞서의 이상(異相)의 추분별과 구별하기 위하여 ‘추(?)’라 이름하지 않은 것이며, 법아집(法我執)을 추념이라 하였으니, 뒤에 생상의 미세념과 다르기 때문에 추념이라 한 것이다. 비록 이미 무분별각을 얻었지만 아직도 생상의 꿈에 잠들어 있기 때문에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하니, 이는 각의 분제(分齊)이다.
〔第三位中法身菩薩等者, 初地以上十地菩薩, 是能覺人也. 覺於念住者. 住相之中. 雖不能計心外有塵. 而執人法內緣而住. 法身菩薩通達二空. 欲明所相心體前覺異相, 而猶眠於住相之夢. 今與無分別智相應. 從住相夢而得覺悟. 故言覺於念住. 是所覺相也. 念無住相者, 四種住相滅而不起, 是覺利益也. 以離分別?念相者. 人我執, 名分別. 簡前異相之?分別, 故不名?. 法我執, 名爲?念. 異後生相之微細念, 故名?念. 雖復已得無分別覺, 而猶眠於生相之夢, 故名隨分覺. 是覺分齊也.〕
네 번째의 위 중에 ‘보살지가 다한 사람들’이란 무구지(無垢地)를 말하는 것이니, 이는 전체적으로 든 것이다. 아래 두 구절은 따로 이도(二道)를 밝혔다. ‘방편을 만족하게 했다’는 것은 방편도(方便道)이며, ‘일념이 상응한다’는 것은 무간도(無間道)이다. 이는 《대법론(對法論)》에서 “구경도(究竟道)란 금강유정(金剛喩定)을 말하며, 여기에 두 종류가 있으니 방편도섭(方便道攝)과 무간도섭(無間道攝 )이다”라고 한 말과 같으니, 이는 능각인을 밝힌 것이다.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닫는다’는 것은 소각상을 밝힌 것이니, 마음이 처음 일어난다는 것은 무명에 의하여 생상이 있어 심체를 미혹하여 생각을 움직이게 하다가, 이제 본각을 떠나서는 불각이 없으며 바로 동념(動念)이 정심(靜心)임을 증득하여 알기 때문에,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닫는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방향을 모를 때에는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다가 방향을 알았을 때 서쪽이 곧 동쪽임을 아는 것과 같으니, 이 중에 있는 각의 뜻도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음에 초상(初相)이 없다’는 것은 각의 이익을 밝힌 것이니, 본래 불각에 의하여 마음이 원래 일어 난 것인데. 이제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바가 없으니, 그러므로 마음에 초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앞의 세 가지 자리(三位)중에서는 여읜바가 있기는 하나 그 동념(動念)이 오히려 일어나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에 주상 등이 없다고 말하였고, 이제 구경위(究竟位)에서는 동념이 모두 없어지고 오직 일심만이 있기 때문에 마음에 초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미세념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ㆍㆍㆍㆍㆍㆍ’이하는 각의 분제를 밝힌 것이니 이 중에 두 구절이 있다. 첫째는 바로 각의 분제를 밝혔고, ‘그러므로’이하는 경전을 인용하여 이론이 성립됨을 증명하였다. 업상(業相)의 동하는 생각은 생각 중에 가장 미세하므로 미세념이라 하였으며, 이 상(相)이 모두 없어져서 영구히 남는 바가 없기 때문에 멀리 여의었다고 말하였다. 멀리 여의었을 때가 바로 불지(佛地)에 있는 것이니, 앞의 세 자리에서는 심원(心源)에 아직 이르지 못하여 생상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오히려 무상(無常)하였으나, 이제 이 구경위의 자리에 와서는 무명이 영구히 없어지고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다시는 동념을 일으킴이 없게 되었으므로 ‘심성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한다’고 말하며, 다시 나아갈 바가 없는 것을 구경각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아직 심원에 이르지 못하여 몽념이 다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을 없애려고 피안(彼岸)에 이르기를 바랐으나, 이제는 이미 심성을 보아서 몽상이 다 없어지고 자심이 본래 유전함이 없는 줄 깨달아 이제는 고요히 쉬는 것도 없어지고 항상 스스로 일심이 일여(一如)의 자리에 머무르기 때문에 ‘심성을 보게 되어 마음이 바로 상주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시각(始覺)이 본각과 다르지 아니하므로, 이런 도리에 의하여 구경각이라 이름하니 이는 바로 각의 분제를 밝힌 것이다.
〔第四位?如菩薩盡地者, 謂無垢地. 此是總擧. 下之二句, 別明二道. 滿足方便者, 是方便道. 一念相應者, 是無間道. 如對法論云. 究竟道者, 謂金剛喩定. 此有二種. 謂方便道攝. 無間道攝. 是明能覺人也. 覺心初起者是明所覺相. 心初起者. 依無明有生相, 迷心體令動念. 今?證知離本覺無不覺. 卽動念是靜心. 故言覺心初起. 如迷方時謂東爲西. 悟時乃知西卽是東. 當知此中覺義亦爾也. 心無初相者, 是明覺利益. 本由不覺, 有心元起. 今旣覺故, 心無所起. 故言心無初相. 前三位中雖有所離, 而其動念猶起未盡, 故言念無住相等. 今究竟位, 動念都盡, 唯一心在, 故言心無初相也. 遠離以下, 明覺分齊. 初中二句. 初正明覺分齊, 是故以下, 引經證成. 業相動念, 念中最細, 名微細念. 此相都盡, 永無所餘, 故言遠離. 遠離之時, 正在佛地. 前來三位, 未至心源, 生相未盡, 心猶無常. 今至此位, 無明永盡, 歸一心源, 更無起動, 故言得見心性, 心卽常住. 更無所進, 名究竟覺. 又復未至心源, 夢念未盡, 欲滅此動, 望到彼岸. 而今旣見心性, 夢想都盡, 覺知自心本無流轉, 今無靜息, 常自一心, 住一如牀. 故言得見心性, 心卽常住. 如是始覺不異本覺. 由是道理名究竟覺. 此是正明覺分齊也.〕

【별기(別記)】
묻기를,
“만약 시각이 본각과 같아서 생멸을 여의었다고 말한다면 이 말이 어떻게 통할 것인가? 《섭론(攝論)》에서는 ‘본(본각)은 이미 상주하지만, 말(시각)이 본을 의지해서 상속하여 항상 있다’고 하고 내지 널리 설명한 것과 같다.”
답하기를,
“두 뜻(기신론과 섭론)이 다르므로 이치가 서로 어긋나지 아니하니, 왜인가? 이 《기신론》논주의 뜻은, 본래 불각에 의하여 정심을 동요시키지만 이제 불각을 그쳐서 다시 본래의 고요함에 돌아가게 됨을 나타내려 했기 때문에 ‘상주(常住)’라고 하였으며, 저 《섭론》의 뜻은, 법신은 본래 상주하여 움직이지 않지만 저 법신에 의하여 복(福)ㆍ혜(慧)의 두 가지 행동을 일으켜 만덕(萬德)의 과보를 감득할 수 있게 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니, 이미 인연에 의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생멸을 여의지 않으며 그러므로 ‘상속(相續)’이라 말한 것이다. 뜻을 갖추어서 설명하자면 비로소 만덕을 이루는 것에는 두 뜻을 갖추어야 한다. 앞의 뜻(기신론의 뜻)에 의하므로 상주하며 뒤의 뜻(섭론의 뜻)에 의하므로 생멸하는 것이니 생멸과 상주가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생각이 미혹하여 삼세(三世)를 두루 하지만 일념(一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하나하나의 털구멍이 모두 시방에 두루 함과 같으니, 비록 시방에 두루 하지 한 털구멍도 더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부처와 부처가 이처럼 장애가 없는 것이니, 어찌 그 사이에 치우치게 집착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이는 《화엄경》의 게송에서 ‘모니(牟尼)가 삼세를 초월하셨으나 상호(相好)는 구족하시네, 무소주에 머무르시어 법계가 다 청청하네. 인연 때문에 법이 생기고 인연 때문에 법이 없어지네. 이와 같이 여래를 볼 줄 알면 구경에 치혹(癡惑)을 멀리 여의리’라고 한 것과 같다. 이제 두 논주가 각각 하나의 뜻을 서술하였으니 어찌 서로 방해됨이 있겠는가?”
〔別記-問. 若言始覺同於本覺離生滅者, 此說云何通. 如攝論云. 本旣常住. 未依於本, 相續?在. 乃至廣說. 答. 二意異故. 理不相違. 何者. 此論主意, 欲顯本由不覺動於靜心, 今息不覺還歸本靜, 故成常住. 彼攝論意, 欲明法身本來常住不動. 依彼法身起福慧二行, 能感萬德報果. 旣爲因緣所起, 是故不離生滅. 故說相續. 其義而說. 始成萬德, 要其二義. 依前義故常住. 依後義故生滅. 生滅常住不相妨? . 以一一念迷?三世不過一念故. 如似一一毛孔皆?十方. 雖?十方不增毛孔. 佛佛如是無障無?. 豈容便執於其問哉. 如華嚴經偈云. 牟尼離三世. 相好悉具足. 住於無所住. 法界悉淸淨. 因緣故法生. 因緣故法滅. 如是觀如來. 究竟離癡惑. 今二論主, 各述一義, 有何相妨耶.〕

인용하여 증명하는 중에 ‘무념(無念)을 잘 볼 수 있다면 불지(佛智)에 향함이 된다’라고 한 것은 인지(因地)에 있을 때에 비록 미세념은 아직 여의지 못했으나 무념의 도리를 잘 보는 것이니, 이 잘 보는 것이 불지(佛地)에 향함이 된다고 하는 것이며, 이로써 불지에는 망념이 없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는 인(因)을 들어 과(果)를 중명한 것이다. 만일 인과(因果)를 통틀어 설명한 글을 인용하여 증명한다면, 《금고경(金鼓經)》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 수 있다. 즉, “모든 복도(伏道)에 의하여 기사심(起事心)이 멸하고, 법단도(法斷道)에 의하여 근본에 의지하는 마음(依根本心)이 멸하며, 승발도(勝拔道)에 의하여 근본심(根本心)이 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복도라는 것은 삼십심(三十心)을 말하며, 가사심이 멸한다는 것은 《기신론》중의 추분별집착상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 바로 이상(異相)이 멸하는 것이다. 법단도는 법신의 자리에 있는 것이며, 근본에 의지하는 마음이 멸한다는 것은 이 《기신론》중의 분별추념상을 버린다는 말과 같으니 이는 주상(住相)이 멸하는 것이다. 승발도란 금강유정이며 근본심이 다 없어진다는 것은 기신론 중의 미세념을 멀리 여읜다는 말과 같으니 이는 생상(生相)이 다 없어진 것을 말한다. 이상으로 시각(始覺)의 차별을 하나씩 밝혔다.
〔引證中, 言能觀無念者則爲向佛智故者. 在因地時, 雖未離念, 而能觀於無念道理. 說此能觀爲向佛地. 以是證知佛地無念. 此是擧因而證果也, 若引通說因果文證者. 金鼓經言. 依諸伏 道起事心滅. 依法斷道依根本心滅. 依勝拔道根本心盡. 此言諸伏道者, 謂三十心. 起事心滅者, 猶此論中捨?分別執着相, 卽是異相滅也. 法斷道者, 在法身位. 依根本心滅者, 猶此中說捨分別?念相, 卽是住相滅也. 勝拔道者, 金剛喩正. 根本心盡者, 猶此中說遠離微細念, 是謂生相盡也. 上來別明始覺差別.〕

【논(論)】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알 만한 초상(初相)이 없는 것이며, 그런데도 초상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무념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일체 중생을 깨달았다고 이름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염념이 상속하여 아직 망념을 떠나 본적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망념이 없게 되면 심상의 생주이멸을 알게 되니 무념과 같아지기 때문이며 실로 시각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니, 왜냐하면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서 모두 자립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각(覺)과 같기 때문이다.
〔又心起者,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 卽謂無念. 是故一切衆生不名爲覺. 以從本來念念相續, 未曾離念, 故說無始無明. 若得無念者, 則知心相生住異滅. 以無念等故. 而實無有始覺之異. 以四相俱時而有. 皆無自立, 本來平等, 同一覺故.〕

【소(疏)】
세 번째는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전체적으로 밝혔으니, 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구경각상(究竟覺相)을 거듭 밝혔고, 둘째는 바로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밝혔다. 처음 중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바로 구경상(究竟相)을 나타냈고, 둘째는 각이 아닌 것을 들어서 각인 것을 나타냈으며, 셋째는 경계에 대하여 지만(智滿)을 널리 나타내었다.
처음 중에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이라 함은 위에서의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을 나타낸 것이지, 깨달았을 때에 초상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알만한 초상이 없다고 말한 것인데 그러면서도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상을 깨달았다고 한 것은 마치 방향을 알았을 때에 서쪽이 동쪽인 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여래가 마음을 깨달았을 때에 처음의 동상(動相)이 바로 본래 고요한 것인 줄 아는 것이기 때문에 ‘곧 무념을 말한다’고 한 것이다. ‘이러므로 ......’이하는 각이 아닌 것을 들어서 각인 것을 나타낸 것이니, 앞서 말한 것처럼 망념이 없는 것이 바로 각이므로 망념이 있는 것은 각이라 이름할 수 없다. 이것은 곧 금강심(金剛心)이하의 일체 중생이 아직 무시무명(無始無明)의 망념을 여의지 못한 것이며, 그런 뜻에서 각이라고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는 사상의 꿈의 차별에 대하기 때문에 점차 깨닫는 것(漸覺)이라 말하지만 이제는 무명의 잠이 차이가 없는 점에 의하여 불각이라 말하니, 이는 《인왕경(仁王經)》에서 “처음 복인(伏忍)으로부터 정삼매(頂三昧)에 이르기까지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비추는 것은 견(見)이라 이름하지 못하니 이른바 견이란 살바야(薩婆若)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약 망념이 없게 되면......’의 이하는 경계를 대하여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니, 만약 심원(心源)에 이르러 무념을 얻으면 곧 일체 중생은 일심이 동요하여 사상으로 차별된 것임을 두루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곧 심상의 생주이멸을 안다’고 하였다. 다음에 ‘무념과 같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위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 중에 의심을 두어 말하기를 ‘부처는 무념을 얻고 중생은 망념이 있어, 유ㆍ무가 현격하게 구별되는데, 어떻게 무념이 유념을 알 수 있느냐?’하니, 이러한 의심을 짓기 때문에 이 의심을 제거하여 ‘중생의 유념이 본래 무념이니, 무념을 얻어서 저것과 평등하게 된 것이다’라고 하니 그러므로 무념과 같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이미 무념과 평등하게 되었기 때문에 모든 생각의 사상을 두루 알게 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이 아래는 두 번째 바로 차별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비로소 망념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하나 실은 사상이 본래 일어남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니 무슨 불각을 기다려 시각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실로 시각(始覺)의 차이가 없다’고 하였으며, 아래는 이 뜻을 해석한 것이다.
〔第三總明始覺不異本覺. 此中有二. 一者重明究竟覺相. 二者正明不異本覺. 初中有三. 一者直顯究竟相. 二者擧非覺顯是覺. 三者對境廣顯智滿. 初中言又心起者者. 牒上覺心初起之言. 非謂覺時知有初相. 故言無有初相可知. 而說覺心初起相者. 如覺方時知西是東. 如是如來覺心之時, 知初動相卽本來靜, 是故說言卽謂無念也. 是故以下, 擧非顯是. 如前所說無念是覺. 是故有念不得名覺. 是卽金剛心以還一切衆生未離無始無明之念. 依是義故不得名覺. 然前對四相之夢差別, 故說漸覺. 今約無明之眠無異, 故說不覺. 如仁王經言. 始從伏忍至頂三昧, 照第一義諦, 不明爲見. 所謂見者, 是薩婆若故. 若得以下, 對境顯智. 若至心原得於無念, 卽能?知一切衆生一心動轉四相差別. 故言卽知心相生住異滅. 次言以無念等故者, 釋成上義. 此中有疑云. 佛得無念. 衆生有念. 有無隔別. 云何無念能知有念. 作知是疑. 故遺之云. 衆生有念本來無念. 得無念如彼平等. 故言以無念等故. 是明旣得平等無念, 故能?知諸念四相也. 此下第二正明無異. 雖曰始得無念之覺. 而覺四相本來無起. 待何不覺而有始覺. 故言實無始覺之異. 下釋此義.〕

【별기(別記)】
사상의 일어남이 뜻으로는 전후가 있으나 본래부터 때를 같이하여 서로 의지하는 것이다.
〔別記云. 以四相生起, 義有前後, 而從本已來, 同時相依.〕

【소(疏)】
사상이 동시에 있으니 이는 일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일심을 떠난 밖에는 따로 자체가 없기 때문에 ‘동시에 있어서 모두 자립함이 없다’고 하였다. 모두 다 자립함이 없기 때문에 본래 평등하여 본각과 똑 같은 것이다.
〔四相俱有爲心所成. 離一心外無別自體. 故言俱時而有皆無自立. 皆無自立, 故本來平等, 同一本覺也.〕

【별기(別記)】
마치 바닷물의 움직임을 파도라고 말하지만 파도는 자체가 없기 때문에 파도의 움직임은 없는 것이고, 바닷물은 자체가 있으므로 바닷물의 움직임이 있는 것과 같이, 마음과 사상도 그 뜻이 또한 이와 같다. 이런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권능가경》에서 “대혜(大慧)야, 칠 식은 유전하지 않아서 고락(苦樂)을 받지 않으니 열반의 인(因)이 아니나, 여래장이란 고락을 받기를 인과 더불어 함께 하여 생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한다”고 말하고, 또 《부인경(夫人經:승만경을 말함)》에서 “이 육식(六識)과 심법지(心法智)의 이 칠법(七法)이 찰나 동안도 머무르지 않아서 여러 고통을 심지 않으니,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이란 전제(前際)가 없으며,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법이며, 모든 고통을 심으며,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고 또 “생사란 이 두 법이 바로 여래장이니, 세간에서 쓰는 말에 따라 사(死)가 있고 생(生)이 있는 것이지 여래장에 생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이 두 경이 똑같이 여래자이 생사에 유전하나 생사의 근본이 자체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자체가 없기 때문에 따로 유전함이 없으며, 상(相)이 이미 유전함이 없다면, 체(體)가 무엇을 인하여 움직이겠는가? 그러므로 여래장에 생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이러한 뜻에 의하므로 사상이 오직 일심이며, 불각이 바로 본각과 같은 것이니, 그러므로 본래 평등하여 각과 똑같다고 말한 것이다.
〔別記-猶如海水之動, 說名爲波. 波無自體, 故無波之動. 水有自體, 故有水之動. 心與四相?亦如是. 爲顯是義, 故四卷經云. 大慧. 七識不流轉, 不受苦樂, 非涅槃因. 如來藏者, 受苦樂, 與因俱, 若生若滅. 又夫人經云, 於此六識及心法智, 此七法刹那不住, 不種衆苦, 不得厭苦樂求涅槃. 世尊. 如來藏者, 無前際, 不起不滅法, 種諸苦, 得厭苦樂求涅槃. 又云, 生死者, 此二法身如來藏, 世間言說故有死有生. 生死根本無自體. 無自體故無別流轉. 相旣無轉. 體何由動. 故言非如來藏有生有死. 由是義故. 四相唯是一心. 不覺卽同本覺. 故言本來平等同一覺也.〕

대승기신론 소ㆍ별기( 권 3 )

△이 아래는 본각을 널리 풀었으니 이중에 둘이 있다. 먼저 수염본각(隨染本覺)을 밝혔고 뒤에 선정본각(性淨本覺)을 나타냈다.
〔以下廣本覺. 於中有二. 先明隨染本覺. 後顯性淨本覺.〕

【논(論)】
또한 본각이 염을 따라 분별하여 두 가지의 상(相)을 내지만, 저 본각과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정상(智淨相)이고, 둘째는 불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이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기 때문에 화합식상(和合識相)을 깨뜨리고 상속심상(相續心相)을 없애어 법신을 현현(顯現)하여 지혜가 맑고 깨끗하게 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모든 심식(心識)의 상이 다 무명이니, 무명의 상이 본각의 성질을 여의지 않아서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파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에 의하여 물결이 움직일 때, 물의 모양과 바람의 모양이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바람이 그쳐서 없어지면 움직이는 모양(곧 물결)은 곧 없어지나 물의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도 무명의 바람에 의하여 움직일 때 마음과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하는 것이 곧 없어지나 지혜의 본성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불사의업상이란 것은 지혜가 맑아짐에 의하여 모든 뛰어난 경계를 짓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復次本覺隨染分別, 生二種相, 與彼本覺不相捨離. 云何爲二. 一者智淨相. 二者不思議業相. 智淨相者. 謂依法力熏習, 如實修行, 滿足方便故. 破和合識相. 滅相續心相. 顯現法身, 智淳淨故. 此義云何. 以一切心識之相, 皆是無明. 無明之相, 不離覺性. 非可壞. 非不可壞. 如大海水, 因風波動. 水相風相不相捨離. 而水非動性. 若風止滅, 動相則滅, 濕性不壞故. 如是衆生自性淸淨心, 因無明風動. 心與無明俱無形相, 不相捨離. 而心非動性. 若無明滅, 相續則滅, 智性不壞故. 不思議業相者, 以依智淨相, 能作一切勝妙境界. 所謂無量功德之相, 常無斷絶. 隨衆生根, 自然相應, 種種而現. 得利益故.〕

【소(疏)】
처음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총괄하여 나타내었고, 둘째는 이름을 나열하였으며, 셋째는 상을 분별하였다. 처음 중에 ‘두 가지의 상을 낸다’고 말한 것은,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상이 수동문(隨動門)에 있기 때문에 ‘낸다(生)’라고 말한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성정본각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저것(본각)과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하였다. 두 번째 이름을 나열하는 가운데 ‘지정상(智淨相)’ 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수염본각의 상을 밝힌 것이고, ‘불사의업상’이라는 것은 이 본각이 깨끗함(淨)에 돌아 왔을 때의 업용을 밝힌 것이다. 세 번째 사은 분별하는 가운데 먼저 지정상을 분별하였다. 그 가운데 세 가지가 있으니 법(法)과 유(喩)와 합(合)이다. 법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곧 바로 밝힌 것과 거듭 나나낸 것이다. 처음 중에 ‘법력의 훈습’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법의 내훈(內熏)하는 힘을 이르는 것이니, 이 훈습하는 힘에 의하여 자량(資糧)을 수습하여 지상(地上:십지이상)의 여실한 수행을 내게 되며, 무구지에 이르러 방편을 만족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화합식 내의 생멸상을 깨뜨리고 그것의 불생불멸의 본성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화합식상을 깨뜨리고 법신을 밝히 나타낸다’고 말한 것이다. 이때에 상속심 가운데의 업상ㆍ전상을 없애어 그 수염본각의 마음으로 하여금 드디어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여 맑고 깨끗한 지혜를 이루게 하기 때문에 ‘상속심상을 없애어 지혜가 맑고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 중에 상속식이란 오히려 화합식 내의 생멸하는 마음인데, 다만 법신을 밝히 나타내기 때문에 ‘화합식을 깨뜨린다’고 말하였고 응신(應身)의 깨끗한 지혜를 이루기 때문에 ‘상속심상을 없앤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상속심의 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속심의 상을 없애는 것이니 이는 《십권능가경》에서 “이러므로 대혜야, 모든 식의 자상(自相)은 없어지는 것이니, 자상이 없어진다는 것은 업상(業相)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자상(자상의 체)이 없어진다고 한다면 의도의 단견 희론과 다르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모든 외도들이 말하기를 ‘모든 경계를 여의어서 상속식이 없어지는 것이니 상속식이 없어지고 나면 곧 모든 식이 없어진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약 상속식이 없어지는 것이라면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모든 식이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라고 하고 내지 널리 설명한 것과 같다.
〔初中有三. 一者總標. 二者列名. 三者辨相. 初中言生二種相者, 如是二種相, 在隨動門, 故言生也. 此二不離性淨本覺, 故言與彼不相捨離. 第二列名中, 言智淨相者, 正明隨染本覺之相. 不思議業相者, 明此本覺還淨時業也. 第三辨相中, 先辨智淨相. 於中有三. 法, 喩, 與合. 法中有二. 直明. 重顯. 初中言法力熏習者. 謂眞如法內熏之力. 依此熏力修習資糧. 得發地上如實修行. 至無垢地滿足方便. 由是能破和合識內生滅之相. 顯其不生不滅之性. 故言破和合識相顯現法身. 此時能滅相續心中業相轉相. 令其隨染本覺之心, 遂得歸源, 性淳淨智, 故言滅相續心相智淳淨故. 此中相續識者, 猶是和合識內生滅之心. 但爲顯現法身, 故說破和合識. 爲成應身淨智, 故說滅相續心相. 然不滅相續心. 但滅相續心之相也. 如經說言. 是故大慧諸識自相滅. 自相滅者業相滅. 若自相滅者, 不異外道斷見戱論. 諸外道說, 離諸境界, 相續識滅. 相續識滅已, 卽滅諸識. 大慧. 若相續識滅者, 無始世來諸識應滅. 乃至廣說也.〕

‘이 뜻이 무엇인가’이하는 앞서 말한 ‘멸’과 ‘불멸’의 뜻을 거듭 나타낸 것이다. ‘일체 심식의 상이 모두 무명이다’라는 것을 업식ㆍ전식 등의 모든 식의 상이 무명에 의해 일어난 것인지라 모두 불각임을 이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모두 무명이다’라고 말한 것이며, 이와 같은 모든 식의 불각의 상이 수염본각의 성질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각성(覺性)을 여의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다. 이 무명의 상이 본각의 성질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다르지 않기 때문에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같지 않기 때문에 깨뜨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만일 다르지 않기 때문에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닌 뜻에 의하여 말한다면 무명이 바뀌어 곧 明 이 될 것이며, 만일 같지 않기 때문에 깨뜨릴 수 없는 것이 아닌 뜻에 의하여 말한다면 무명은 없어지더라도 본각의 성질은 깨뜨려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글 가운데에는 같지 않다는 쪽에 의하기 때문에 ‘상속심의 상을 없앤다’라고 말한 것이다. 비유 가운데에서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다’라는 것은, 지금 움직이는 것이 자성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것을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만약 자성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움직이는 상이 없어질 때에 젖는 성질도 따라서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다른 것(바람)을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움직이는 상은 비록 없어지더라도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합(合)중에 ‘무명이 없어진다’라고 말한 것은 본래의 무명이 없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바람이 없어진다’는 비유에 합한 것이고, ‘성속이 곧 없어진다’는 것은 업식 등이 없어지는 것이니 ‘움직이는 상이 없어진다’는 비유에 합한 것이며, ‘지혜의 본성은 깨지지 않는다’는 것은 수염본각의 신해(神解)한 성질을 지성(智性)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은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비유에 합한 것이다. 다음으로 불사의업상을 해석하는 가운데 ‘지혜의 깨끗함에 의한다’는 것은 앞서 수염본각의 마음이 비로소 맑고 깨끗하여짐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시각(始覺)의 지혜이며, 이 지혜의 힘에 의하여 응화신(應化身)을 나타내기 때문에 ‘무량공덕의 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나타난 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끊어짐이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금고경(金鼓經)》에서 “응신이란 것은 무시(無始)로부터 생사가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의 불공(不共)의 법이 섭지(攝持)할 수 있기 때문이며, 중생이 다하지 아니하는지라 업용(業用)도 다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상주한다고 말한다”라고 하며, 《보성론(寶性論)》에서 “무엇이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인가? 해탈을 얻은 것을 말함이니, 번뇌장(煩惱障)과 지장(智障)을 멀리 여의고 장애가 없는 깨끗한 법신을 얻는 것을 자신의 이익을 성취한다고 이름하다. 무엇이 타신(他身)의 이익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미 자신의 이익을 성취하고 나서는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자연히 저 두 종류의 불신(佛身)에 의하여 세간의 자재(自在)한 위력과 행위를 나타내는 것을 타신의 이익을 성취한다고 이름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묻기를, “비로소 자신의 이익을 얻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으면서, 어째서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것을 무시(無始:시초가 없음)라고 말했는가?” 설명하기를, “여래는 일념(一念:한번 생각하는 동안)에 삼세를 두루 응하시니 소응(所應:응하는 대상, 곧 삼세)이 시초가 없기 때문에 능응(能應:응하는 주체, 곧 여래의 지혜)도 곧 시초가 없다. 이는 마치 일념의 원만한 지혜가 한없는 삼세의 경계에 두루 이르는 것과 같으니, 경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지혜도 한이 없고, 한없는 지혜가 나타내는 상이기 때문에 비작도 없게 되며 끝도 없게 되니, 이것은 심식(心識)의 사량(思量)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사의업’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此義云何以下, 重顯前說滅不滅義. 一切心識之相皆是無明者. 謂業識轉識等諸識相, 無明所起, 皆是不覺, 以之故言皆是無明. 如是諸識不覺之相, 不離隨染本覺之性, 以之故言不離覺性. 此無明相, 如本覺性, 非一非異. 非異故非可壞. 而非一故不可壞, 若依非異非可壞義, 說無明轉卽變爲明, 若就非一非不可壞之義, 說無明滅覺性不壞. 今此文中依非一門, 故說滅相續心相也. 喩中言水非動性者, 明今之動非自性動, 但隨他動, 若自性動者, 動相滅時, ?性隨滅. 而隨他動, 故動相雖滅, ?性不壞也. 合中言無明滅者, 本無明滅, 是合風滅也. 相續卽滅者, 業識等滅, 合動相滅也. 智性不壞者, 隨染本覺神解之性名爲智性, 是合?性不壞也. 次釋不思議業相中, 依智淨者, 謂前隨染本覺之心, 始得淳淨, 是始覺智. 依此智力現應化身, 故言無量功德之相. 此所現相, 無始無終, 相續不絶, 故言無斷. 如金鼓經言. 應身者, 從無始生死相續不斷故. 一切諸佛不共之法能攝持故. 衆生不盡, 用亦不盡, 故說常住. 寶性論云. 何者成就自身利益. 謂得解脫, 遠離煩惱障智障, 得無障?淸淨法身. 是名成就自身利益. 何者成就他身利益. 旣得成就自身利益已. 無始世來, 自然依彼二種佛身, 示現世間自在力行. 是名成就他身利益. 問. 始得自利已. 方起利他業. 云何利他說無始耶. 解云. 如來一念, ?應三世. 所應無始故, 能應則無始. 猶如一念圓智, ?達無邊三世之境, 境無邊故, 智亦無邊, 無邊之智所現之相, 故得無始亦能無終. 此非心識思量所測. 是故名爲不思議業也.〕

【논(論)】
다음에 각체상(覺體相:성정본각의 체가 지니는 상)이란 것은 네 가지의 큰 뜻이 있어서 허공과 같으며, 이는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니,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어서 나타낼 만한 법이 없는지라 각조(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훈습경(因熏習鏡)이니, 여실불공(如實不空)을 말한다.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되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아니하며, 잃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아서 일심에 항상 머무르니, 이는 일체법이 곧 진실성이기 때문이며, 또 일체의 염법이 더럽힐 수 없으니 지체(智體)는 움직이지 아니하여 무루(無漏)를 구족하여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니, 불공법이 번뇌애와 지애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의어서 깨끗하고 맑고 밝게 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니, 법출리(法出離)에 의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선근(善根)을 닦도록 하여 (중생의)생각에 따라 나타내기 때문이다.
〔復次覺體相者, 有四種大義, 與虛空等, 猶如淨鏡. 云何爲四. 一者如實空鏡. 遠離一切心境界相. 無法可現. 非覺照義故. 二者因熏習鏡. 謂如實不空.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 不出不入. 不失不壞. 常住一心. 以一切法卽眞實性故. 又一切染法所不能染. 智體不動, 具足無漏, 熏衆生故. 三者法出離鏡. 謂不空法, 出煩惱?, 智?. 離和合相. 淳淨明故. 四者緣熏習鏡. 謂依法出離故, 遍照衆生之心, 令修善根, 隨念示現故.〕

【소(疏)】
다음에는 성정본각의 상을 밝혔으니 그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총괄하여 나타내었고 둘째는 따로 풀이하였다. 처음 중에 ‘허공과 같다’고 말한 것은 두루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마치 맑은 거울과 같다’는 것은 얼룩을 없애어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네 종류의 뜻 가운데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얼룩을 없앤다는 뜻에 의하여 맑은 거울에 비유하였고, 두 번째와 럼?번째는 형상을 나타내는 뜻에 의하여 역시 맑다는 뜻을 둔 것이다. 따로 설명한 중에는 네 가지를 각각 나타냈으니, 이 가운데에 앞의 둘은 인성(因性)에 있고 뒤의 두 가지는 과지(果地)에 있다. 앞의 두 가지는 공(空)과 지(智)를 밝혔으니, 이는 〈열반경〉에서 “불성이라는 것은 제일의공(第一義空)이며, 제일의공을 지혜라고 이른다. 지혜란 공과 불공을 나타내고 공(空)이란 공과 불공을 나타내지 않는다”라고 하고 널리 설명한 것과 같다. 이제 여기서 처음 가운데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었다’고 말한 것은 곧 〈열반경〉의 제일의공을 나타낸 것이고, ‘나타낼 만한 법이 없는지라 각조(覺照)의 뜻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공과 불공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해석한 것이다. 두 번째 중에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은 저 경(열반경)의 ‘지혜란 공과 불공을 나타낸다’고 한 것을 풀이한 것이니, 이는 〈열반경〉에서 “공이라는 것은 일체의 생사이고, 불공이라는 것은 대열반을 이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며, 이 〈기신론〉중에서는 다만 생사의 경계를 나타낸 것이다. 이미 거울에 나타났기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였고, 그러면서도 거울을 더럽히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말한 것이며, 곳에 따라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본각의 양능과 같아서 허공계와 같고, 삼세의 모든 때에 두루 하기 때문에 생각생각의 잃음이 없으며, 또한 멸진하여 파괴됨도 없기 때문에 ‘잃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아서 항상 일심에 머무른다ㆍㆍㆍㆍㆍㆍ’라고 말하였다. 위로부터는 그 맑은 거울의 뜻을 밝혔고 또 ‘일체ㆍㆍㆍㆍㆍㆍ’이하는 인훈습의 뜻을 풀이하였다. 세 번째 중에서 ‘두 가지의 장애에서 벗어나 깨끗하고 맑고 밝게 되었다’고 말한 것은 앞서 말한 인훈습경이 번뇌(번뇌애와 지애)에서 벗어났을 때에 법신이 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네 번째 중에서 ‘법출리에 의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춘다’고 말한 것은, 곧 저 본각이 밝히 나타낼 때에 중생의 근기를 똑같이 비추어 온갖 교화를 나타내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중생의)생각에 따라 나타낸다’고 말한 것이다.
〔次明性淨本覺之相. 於中有二. 一者總標. 二者別解. 初中言與虛空等者, 無所不?故. 猶如淨鏡者, 離垢現影故. 四種義中, 第一第三, 依離垢義以?淨逕. 第二第四, 依現像義亦有淨義也. 別解之中, 別顯四種. 此中前二在於因性. 其後二種在於果地. 前二種者, 明空與智. 如涅槃經言. 佛性者第一義空. 第一義空名爲智慧. 智者見空及與不空. 愚者不見空與不空. 乃至廣說. 今此初中言遠離一切心境界相者, 卽顯彼經第一義空也. 無法可現非覺照義者, 是釋不見空與不空也. 第二中言一切世間境界悉於中現者, 是釋彼經智慧者見空及與不空. 如彼經言. 空者一切生死. 不空者謂大涅槃故. 此中但現生死境界. 旣現於鏡, 故言不出而不染鏡, 故曰不入. 隨所現像, 同本覺量, 等虛空界, ?三世際. 故無念念之失. 亦無滅盡之壞. 故言不失不壞常住一心等也. 上來明其淨鏡之義. 又一切下, 釋因熏習義也. 第三中言出於二?淳淨明者, 是明前說因熏習鏡出纏之時爲法身也. 第四中言依法出離故?照衆生心者, 卽彼本覺顯現之時, 等照物機, 示現萬化, 以之故言隨念示現.〕

이것은 앞에서 말한 불사의업과 어떤 점이 다른가? 저기서는 응신과 시각의 업용을 밝힌 것이고, 여기서는 본각과 법신의 작용을 나타낸 것이니, 하나의 교화를 일으킴에 따라서 이 두 가지 뜻이 있게 되는 것이다. 총괄하여 말하면 그러하지만 그 가운데 분별해 본다면 만일 시각이 일으킨 쪽으로 논하면 연의 상속에 따라서 이익을 얻게 하니, 그 근본인 수염본각은 본래 서로 관련되어 친소가 있기 때문이고, 그 본각이 나타낸 쪽으로 논하면 근기가 성숙된 정도에 따라 널리 이익 되게 하여 (緣의)상속을 가리지 않는 것이니, 그 본래의 성정본각은 일체에 고루 통하여 친소가 없기 때문이다. 각의 뜻을 널리 설명한 것을 마친다.
〔此與前說不思議業有何異者. 彼明應身始覺之業. 此顯本覺法身之用. 隨起一化, 有此二義. 總說雖緣. 於中分別者. 若論始覺所起之門, 隨緣相屬而得利益. 由其根本隨染本覺, 從來相關有親疏故. 論其本覺所顯之門, 普益機熟不簡相屬. 由其本來性淨本覺, 等通一切無親疏故. 廣說義竟. 〕

【별기(別記)】
네 가지의 경(經)가운데 두 번째 인훈습이라는 것은 이 성공덕(性功德)이 바른 인연을 지어서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 염락(染樂: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를 즐겨하는 것)과 및 모든 가행(加行)을 일으켜서 이에 불과(佛果)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인훈습’이라고 말한 것이고, 일체의 모든 법이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에 ‘거울(鏡)’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는 〈화엄경〉에서 “비유하자면 깊고 큰 바다에 보화가 다함이 없어서 그 가운데 중생의 형류상(形類像)을 모두 나타내는 것과 같이, 매우 깊은 인연의 바다에 공덕의 보배가 다함이 없어서 맑고 깨끗한 법신 가운데 어떤 형상이든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바로 이것을 이른 것이다. 네 번째 연훈습이라는 것은 비로소 원지(圓智)를 일으켜서 증상연(增上緣)을 지어 중생의 마음을 훈습하여 염락과 모든 가행을 일으키도록 하여 이에 불과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연훈(緣熏)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이러한 모든 행덕(行德)이 대원경지를 여의지 않으니 이는 저 지혜의 그림자이며, 따라서 ‘거울’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는 《불지경(佛地經)》에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일체 중생의 모든 선법(善法)의 그림자를 일으킨다”고 한 것과 같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의 경(鏡)은 뜻이 드러나니 알 수 있을 것이다.
〔別記-四種鏡中, 第二因熏習者. 此性功德, 能作正因, 熏衆生心能起厭樂, 及諸加行乃至佛果, 言因熏習. 一切諸法悉於中現, 故名爲鏡. 如華嚴云. 譬如深大海. 珍寶不可盡. 於中悉顯現. 衆生形類像. 甚深因緣海. 功德寶無盡. 淸淨法身中. 無像而不現. 正謂此也. 第四緣熏習者. 始起圓智, 作增相緣, 熏衆生心令起厭樂, 及諸加行乃至佛果, 故名緣熏. 此諸行德不離圓智, 是彼智影, 故名爲鏡. 如佛地經說大圓鏡智能起一切衆生諸善法影, 此之謂也. 餘二種鏡, 義顯可知.〕

【소(疏)】
△다음은 불각(不覺)을 해석하였다. 그 가운데 셋이 있으니, 먼저는 근본불각을 설명하였고, 다음은 지말불각을 나타내었으며, 세 번째는 본말의 불각을 총괄하여 맺었다.
〔△此釋不覺, 於中有三. 先明根本不覺. 次顯枝末不覺. 第三總結本末不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