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가. 널리 풀이함 / ㄱ) 심생멸(心生滅)

通達無我法者 2008. 3. 24. 11:34

 

ㄱ) 심생멸(心生滅)

은정희 역주/일지사/자료입력:도규희

 

 

【논(論)】
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명과 더불어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용하여 아라야식(阿黎耶識)이라고 하는 것이다.
〔心生滅者, 依如來藏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 與生滅和合, 非一非異. 名爲阿黎耶識.〕

【소(疏)】
처음 중에 세 구절이 있으니, 첫째는 체를 나타냈고, 둘째는 모양을 분별하였으며, 셋째는 이름을 세웠다. 처음 중에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다’고 한 것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여래장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무명의 바람이 움직임에 의하여 생멸을 일으키므로 생멸이 여래장에 의지한다고 말한 것이다.
〔初中三句. 一者標體, 二者辯相, 三者立名. 初中言依如來藏故有生滅沁者. 自性淸淨心, 名爲如來藏. 因無明風動作生滅, 故說生滅依如來藏.〕

【별기(別記)】
그러나 불생멸심이 생멸심과 더불어 심체(心體)가 둘이 아니며 다만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마음을 취하여 둘(불생멸심과 생멸심)이 되는 것이므로, 이를 ‘(여래장에) 의하여’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마치 움직이지 아니하는 바닷물이 바람에 불리어 움직이는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니, 동(動)ㆍ정(靜)은 다르지만 바닷물의 체는 하나이므로, 정수(靜水)에 의하여 동수(動水)가 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 중의 도리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別記-然不生滅心與生滅心, 心體無二. 但將二義取心爲二以說依耳. 如不動水, 爲風所吹而作動水. 動靜水異, 水體是一. 而得說言依靜水故有其動水. 當如此中道理亦爾.〕

【소(疏)】
이는 《사권 능가경》에서 이르기를,
“여래장이 무시악습(無始惡習)에 훈습된 것을 식장(識藏)이라 이름한다.”고 하고, 또, “찰나(刹那)란 한 것은 식장(識藏)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如四券經言, 如來藏爲無始惡習所熏, 名爲識藏. 又言刹那名爲識藏故.〕

【별기(別記)】
이 기신론에서 생멸심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식장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소의(所依)인 여래장과 능의(能依)인 생멸심을 통틀어 취하여, 합해서 심생멸문을 삼기 때문에, ‘심생멸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여래장을 버리고 생멸심을 취하여 생멸문을 삼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래 글에서 ‘ 이 아라야식에 두 가지 뜻(각(覺))과 불각(不覺)이 있다’고 한 것과 같으니, 두 가지 뜻이 모두 생멸문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別記-當知此云有生滅心, 正謂識藏. 今通取所依如來藏與能依生滅心. 合爲心生滅心. 故言心生滅者依如來藏故有生滅心. 非棄如來藏而取生滅心爲生滅門也. 如下文云此識有二種義. 故知二義皆在生滅門也.〕

【소(疏)】
‘이른바’ 아래는 두 번째로 모양을 분별하는 것이다. 불생불멸이란 위에서의 여래장을 말하며, 이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움직여서 생멸을 일으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을 ‘더불어 화합한다’고 이름하니, 이는 아래의 글에서 ‘마치 큰 바닷물이 바람에 의하여 물결이 일어나지만 물의 모양과 바람의 모양이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함과 같다’고 하고 내지 널리 설한 것과 같다. 이 중에서 바닷물의 움직임은 풍상(風相)이요, 움직일 때의 젖어 있는 것은 수상(水相)이다. 바닷물전체가 움직이므로 바닷물이 풍상을 여의지 않았고, 움직이는 것마다 젖어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는 물결이 수상을 여의지 않는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생멸하지 않는 마음 전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이 생멸상을 여의지 않고, 생멸의 상이 영묘한 알음알이(神解)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생멸이 심상(心相)을 여의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더불어 화합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所謂以下, 第二辯相. 不生不滅者, 是上如來藏. 不生滅心動作生滅, 不相捨離, 名如和合. 如下文言, 如大海水因風波動, 水相風相不相捨離. 乃至廣說. 此中水之動是風相, 動之?是水相. 水擧體動, 故水不離風相. 無動非?, 不離水相. 心亦如是. 不生滅心擧體動, 故心不離生滅相. 生滅之相莫非神解, 故生滅不離心相. 如是不相離, 故名與和合.〕

【별기(別記)】
심(心)의 생멸은 무명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생멸의 마음은 본각(本覺)에서 이루어져 두 가지 체가 없으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에 화합이 되는 것이다.
〔別記云. 心之生滅, 依無明成, 生滅之心, 從本覺成. 而無二體, 不相捨離. 故爲和合.〕

【소(疏)】
이는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생멸과 화합하는 것이지 생멸이 생멸하지 않는 마음과 화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란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그 전체가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생멸하지 않는)이 생멸과 다르지 않은 것이요, 늘 불생불멸을 잃지 않기 때문에 생멸이 그 불생멸심과 같지 않은 것이다. 또 만약 같은 것이라면 생멸식상이 다 없어질 때에 심신(心神)의 체도 또한 따라서 없어지게 되나 이는 단변(斷邊)에 떨어질 것이고, 만약 다른 것이라면 무명(無明)의 바람에 의하여 훈습되어 움직일 때에 정심(靜心)의 체가 연(緣)을 따르지 않게 되니 이는 상변(常邊)에 떨어질 것이다. 이 두변을 여의었기 때문에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이다.
〔此是不生滅心與生滅和合, 非謂生滅與不生滅和合也. 非一非異者, 不生滅心擧體而動, 故心與生滅非異. 而?不失不生滅性, 故生滅與心非一. 又若是一者, 生滅識相滅盡之時, 心神之體亦應隨滅, 墮於斷邊. 若是異者, 依無明風熏動之時, 靜心之體不應隨緣, 卽墮相邊, 離此二邊, 故非一非異.〕

【별기(別記)】
두 가지 뜻이 있지만 심체(心體)가 둘이 없으니, 여기서는 두 가지 뜻(覺과 不覺)이 합해져서 둘이 아닌 심체(心體)를 아라야식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別記云. 雖有二義, 心體無二. 此合二義不二之心, 名爲黎耶識也.〕

【소(疏)】
이것은 《사권능가경》에서 이르기를,
“비유하자면 흙덩이와 티끌이 다른 것도 아니요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닌 것과 같으니, 금과 장엄구(금으로 장식한 물건)도 이와 같다. 만약 흙덩이와 티끌이 다른 것이라면 흙덩이는 저 티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나. 실로 저 티끌로 이루진 것이므로 다른 것이 아니고, 만약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흙덩이와 티끌이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전식(전식)과 장식(藏識)의 진상(眞相)이 만약 다르다면 장식은 인(因)이 아닐 것이고, 만약 다르지 않다면 전식이 없어질 때 장식도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자진상(自眞相)은 실로 없어지지 않은 것이므로 자진상식(自眞相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만 업상(業相)이 없어지는 것이다.” 라고 한 것과 같다.
이제 이 《기신론》의 저자가 바로《능가경》의 저 글을 풀이하였기 때문에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이 중에서 업식(業識)이란 무명의 힘에 의하여 불각심(不覺心)이 움직이기 때문에 업식(業識)이라 이름하며, 또 동심(動心)에 의하여 굴러서 능견(能見)을 이루기 때문에 전식(轉識)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아라야식 자리에 있다.
〔如四券經云, 譬如泥團微塵, 非異非不異. 金莊嚴具亦如是. 若泥團微塵異者, 非彼所成, 而實彼成, 是故非異. 若不異者, 泥團微塵應無差別. 如是轉識藏識眞相若異者, 藏識非因. 若不異者, 轉識滅, 藏識亦應滅, 異者眞相實不滅. 是故非自眞相識滅, 但業相滅. 今此論主正釋彼文, 故言非一非異. 此中業識者. 因無明亦不覺心動, 故名業識. 又依動心轉成能見, 故名轉識. 此二皆在黎耶識位.〕


【별기(別記)】
아라야식 내에 생멸하는 견상을 전식이라 이름하고 이 중에 체를 장식이라 이름한다.
〔別記云, 黎耶識內生滅見相, 名爲轉識. 於中體, 名爲藏識.〕

【소(疏)】
이것은 《십권능가경》에서 “여래장이 바로 아라야식이니 칠식(七識)과 함께 나는 것을 전멸상(轉滅相)이라 한다”는 말과 같다. e라서 전상(전상)이 아라야식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진상(自眞相)이란 《십권능가경》에서 “중진(中眞)을 자상(自相)이라 이름한다”하였으니 본각심이 허망한 연(緣)에 의뢰하지 않고 본성이 스스로 신해(神解)함을 자진상이라 하는 것이며, 이는 불일의문에 의하여 말한 것이다. 또 무명의 바람에 따라서 생멸을 일으킬 때 신해(神解)한 성질이 본심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또한 자진상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니, 이는 불이의문에 의하여 말한 것이다.
〔如十券經言, 如來藏卽阿黎耶識. 共七識生, 名轉滅相. 故知轉相在黎耶識. 自眞相者, 十券經云, 中眞名自相. 本覺之心, 不籍妄緣, 性自神解, 名自眞相. 是約不一義門說也. 又隨無明風作生滅時, 神解之性與本不異, 故亦得名爲自眞相. 是依不異義門說也.〕

【별기(別記)】
자진(自眞)이란 이름은 불생멸에만 치우치게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別記云, 當知自眞名, 不偏在不生滅〕

【소(疏)】
이 중에 자세한 것은 별기에서 말한 것과 같다.
〔於中委悉, 如別記說也〕

【별기(別記)】
묻기를,
“《유가론》등과 같은 데에서는 아라야식이 이숙식(異熟識)으로서 한결같이 생멸만 한다고 말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 《기신론》에서는 이 아라야식이 불생멸과 생멸의 두 가지 뜻을 갖추어 함유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답하기를,
“각각 설명하는 바가 있어서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이 미세한 마음에 대략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만약 업번뇌(嶪煩惱)에 의하여 감응되는 뜻으로 본다면 무를 조작하여 유가 되게 하므로 한결같이 생멸하기만 할 것이며, 만약 根本無明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뜻으로 논한다면 정(靜)을 훈습하여 동(動)하게 하는 것이므로 동정(動靜)이 일체가 될 것이다. 저 《유가론》에서 논한 것들은 《해심밀경》에 의하여 일(一)이거나 상(常)이라고 하는 견해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업번뇌에 감응되는 뜻의 문에 의하기 때문에 이 아라야식이 한결같이 생멸하기만 하여 심왕ㆍ 심소법(心王心所法)이 차별되어 전변(轉變)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 이 《기신론》에서는 《능가경》에 의하여 진과 속을 별체로 보는 집착을 다스리기 위하여, 무명에 의하여 동하여지는 뜻의 문에 의하기 때문에 불생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무명에 의하여 움직여진 상도 바로 저 업번뇌에 의하여 감응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 뜻(불생불멸과 생멸심)이 다르지만 아라야식의 체는 둘이 없는 것이다.”
〔別記問- 如瑜伽論等, 說阿黎耶識, 是異熟識, 一向生滅. 何故此論乃說此識具合二義. 答, 名有所述, 不相違背. 何者. 此微細心略有二義. 若其爲業煩惱所感義邊, 辨無令有, 一向生滅. 若論根本無明所動義邊, 熏靜令動, 動靜一體. 彼所論等, 依深密經, 爲除是一是床之見, 約業煩惱所感義門, 故說此識一向生滅, 心心數法差別而轉. 今此論者, 依楞伽經, 爲治眞俗別體之執, 就其無明所動義門, 故說不生滅與生滅和合不異. 然此無明所動之相, 亦卽爲彼業惑所感. 故二意雖異, 識體無二也.〕

묻기를,
“심체(心體)가 상주하고 심상(心相)은 생멸하지만, 체와 상이 떨어지지 아니하여 합해서 일식(一識)이 된다고 해야 되는가. 심체는 상주하기도 하고 또한 곧 심체는 생멸하기도 한다고 해야 되는가?”
답하기를,
“만일 뜻을 체득한 사람이라면 두 뜻을 모두 인정할 것이니, 어째서인가? 만약 그 상주를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체라 하고, 그 무상(無常)을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을 상(相)이라 하는 것이니, 체는 상(常)이요 상(相)은 무상(無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멸이라고 하는 것은 생(生)이 아닌 생이요 멸(滅)이 아닌 멸이므로 생멸이라 이름하며, 이는 심(心)의 생(生)이며 심의 멸이기 때문에 생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심체가 생멸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닷물이 움직이는 것을 물결이라 이름하지만, 끝내 이 물결의 움직임이 바닷물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다. 이 중의 도리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설사 심체는 움직이지 않으나 다만 무명상(無明相)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범부(凡夫)를 전변시켜 성인을 이루는 이치가 없을 것이니, 그것은 무명상은 한결같이 멸하기만 하고 심체는 본래 범부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問, 爲當心體常住, 心相生滅, 體相不離合爲一識. 爲當心體常住, 亦卽心體生滅耶. 答, 若得意者, 二義俱許. 何者. 若論其常住, 不隨他成, 曰體. 論其無常, 隨他生滅, 曰相. 得言體常, 相是無常. 然言生滅者, 非生之生非滅之滅, 故名生滅. 是心之生心之滅, 故乃名生滅. 故得言心體生滅. 如以水之動名爲波. 終不可說是動非水之動. 當知此中道理亦爾. 說使心體不動但無明相動者, 則無轉凡成聖之理. 以無明相一向滅故, 心體本來不作凡故. 〕

힐난하기를,
“만약 심체(心體)가 생멸한다면 진심(眞心)이 다 없어질 것이니, 왜냐하면 생멸할 때에는 상주(常住)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만일 심체는 본래 고요한 것이나 연(緣)을 따라 움직인다면 생사(生死)가 시작이 있을 것이니, 이는 큰 잘못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고요한 때에는 생사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마음이 연을 따라 변하여 생멸을 일으킨다고 한다면 또한 일심(一心)이 연을 따라 변하여 다심(多心)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힐난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뜻이 성립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답하기를,
“ 이 뜻이 방해됨이 없으니 이제 뒤의 것으로부터 답을 할 것이다.
마치 상심(常心)이 무명의 연을 따라서 변하여 무상심(無常心)을 일으키지만, 그 상성(常性)은 항상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함과 같으니, 이처럼 일심(一心)이 무명의 연을 따라 변하여 많은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그 일심(一心)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는 것이다. 이는 《열반경》에서 한 가지 맛의 약이 그 옮겨 가는 곳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름이 있으나, 이 약의 참된 맛은 산에 머물러 있다‘고 한 것과 같으니,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또 본래 고요한 것이 연을 따라 움직인다고 하지만 생사에 시작이 있다는 과오는 없으니, 이와 같이 전전(展轉)하는 동정(動靜)이 모두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논(論)에서 ‘앞서는 과보(果報)였던 것이 뒤에서는 도리어 원인을 이루어서 항상 전전하는 인과(因果)가 다시 시작이 없기 때문’이라 한 것과 같으니, 이 중의 도리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심체(心體)가 생멸하지만 항상 심체는 상주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이른바 심체가 둘도 아니면서 하나도 아닌 성질이며, 동정(動靜)이 같지도 않으면서 다른 것도 없는 성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바닷물이 상속문(相續門)에 의하여 곧 유동함이 있고, 생멸문에 의하더라도 항상 움직이지 않음과 같으니, 항상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요, 이른바 건너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중의 도리도 그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정한 세 가지 힐난이 해결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難曰. 若使心體生滅, 則眞心有盡, 以生滅時無常住故. 又若心體本靜而隨緣動, 則生死有始. 是爲大過, 以本靜時無生死故. 又若心隨緣變作生滅, 亦可一心隨緣變作多心. 是三難不能得離, 故知此義不可立也. 解云. 此義無妨. 今從後而答. 如說常心隨無明緣變作無常之心, 而其常性?自不變. 如是一心隨無明緣變作多衆生心, 而其一心常自無二. 如涅槃經云, 一味之藥, 隨其流處有種種異, 是藥眞味停留在山, 正謂此也. 又雖曰本靜隨緣而動, 而無生死有始之過. 以如是展轉動靜皆無始故. 如論說云, 先是果報. 後反成因. 而?展轉因果, 皆無始故. 當知此中道理亦爾. 又雖心體生滅, 而?心體常住, 以不一不異故. 所謂心體不二而無一性. 動靜非一而無異性. 故如水依相續門則有流動, 依生滅門而?不動. 以不常不斷故. 所謂不度亦不滅故. 當知此中道理亦爾. 是故所設三難無不消也.〕

【소(疏)】
세 번째는 이름을 세운 것이니, ‘아라야식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불생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므로 이를 모두 아라야식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름을 번역하고 뜻을 풀이한 것은 《능가경종요(楞伽經宗要)》중에서 말한 것과 같다. 체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밝힘을 앞에서 마치다.
〔第三立名. 名爲阿黎耶識者. 不生滅與生滅和合, 非一非異, 故總名爲阿黎耶識. ?名釋義, 是如楞伽宗要中說. 就體總明竟在於前.〕

【논(論)】
이 식(識)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일체법을 포괄하며, 일체법을 낼 수 있는 것이다.
〔此識有二種義. 能攝一切法, 生一切法.〕

【소(疏)】
처음 중에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일체법을 포괄하여 일체법을 낼수 있다’고 하였으니, 포괄 할 수 있다는 뜻은 앞에서 널리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위에서는 진여ㆍ생멸 두 문이 각각 일체법을 포괄한다고 하였고, 이제 여기서는 하나의 식(識)이 두 뜻을 함유하기 때문에 이 하나의 식이 일체법을 포괄한다고 밝히고, 두 뜻이 각각 일체법을 포괄한다고 하지는 않았으니, 왜냐하면 이 두 뜻은 오직 생멸문내에서만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와 같은 두 뜻이 각각 일체법을 포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위의 두 문(門)에서는 다만 ‘섭의(攝)’만을 말하였으니, 왜냐하면 진여문에는 ‘생의(生義)’가 없기 때문이며, 이제는 이 식에서 또한 ‘생의’를 말하였으니, 생멸문 중에는 ‘생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불각의(不覺義)가 본각(本覺)을 훈습하기 때문에 모든 염법(染法)을 내며, 또 분각이 불각을 훈습하기 때문에 모든 정법(淨法)을 내는 것이니, 이 두 뜻에 의하여 일체법을 다 내기 때문에. ‘식에 두 가지 뜻이 있어 일체법을 낸다’고 한 것이며, 이 문장은 re 아래에 ‘네 가지 훈습이 있다’이하의 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일심(一心)의 뜻은 넓어서 이문(二門)을 총괄하며, 이 식(識)의 뜻은 좋아서 생멸문에 있음을 알아야 하며, 이 식의 두 가지 뜻이 이미 한 쪽의 문에 있기 때문에, 문은 넓고 뜻(義)은 좁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능가경을 인용하여 뜻을 풀이한 것은 별가와 같다.
〔初中言此識有二種義能攝一切法生一切法者, 能攝之義如前廣說. 然上說二門各攝一切. 今此明一識合有二義. 故此一識能攝一切. 不言二義各攝一切. 以次二義唯在生滅門內說故. 如是二義不能各攝一切法故. 又上二門但說攝義. 以眞如門無能生義故. 今於此識亦說生義. 生滅門中有能生義故. 此義云何. 由不覺義熏本覺故生諸染法. 又由本覺熏不覺故生諸淨法. 依此二義通生一切. 故言識有二義生一切法. 此文卽起下有四種熏習以下文也. 當知一心義寬, 總攝二門. 此識義狹, 在生滅門. 此識二義旣在一門. 故知門寬而義狹也. 引經釋義如別記也.〕

【별기(別記)】
묻기를,
“위에서는 일심(一心)에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하고, 여기서는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하니, 저 심(心)과 이 식(識)이 무슨 차별이 있는가?”
답하기를,
“위에서는 이체(理體)에 나아가 일심(一心)이라 이름하였으니, 일심의 체가 절상(絶相)과 수연(隨緣)의 두 가지 뜻의 문을 포함하기 때문에 일심에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십권능가경》에서 ‘적멸(寂滅)한 것은 일심이라 이름하고, 일심이란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과 같으니, 뜻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제 여기서 식(識)이란, 다만 일심의 수연문(隨緣門)내에 이(理)ㆍ사(事)가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신려(神慮)인 점에서 일식(一識 )이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 아라야식의 체가 각(覺)과 불각(不覺)의 두 뜻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리하여 심(心)은 넓고 식(識)은 좁은 것이니 심이 이문(二門)내의 식을 포한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문(門)은 넓고 뜻(각의와 불각의)은 좁으니 생멸문이 두 뜻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권능가경》에서 ‘(생멸을) 여의지는 않았으나 그 체는 잔변하지 않음을 여래장식장이라 이름하며, 칠식(七識)은 유전하여 멸하지 아니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저 식장이 경계(境界)를 반연함에 의하여 모든 식(즉 칠종식)이 생기기 때문이니, 이는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의 수행경계가 아닌 거시다’라고 하고, 《십권능가경》에서 ‘여래장식(如來藏識)은 아라야식 중에 있지 아니한 것이니, 이러므로 일곱 가지의 식은 생(生)과 멸(滅)이 있지만 여래장식은 생멸하지 아니한다. 어째서인가? 저 일곱 가지 식은 (장식이) 모든 경계를 염관(생각함)에 의하여 생기기 때문이며, 이 같은 칠 식의 경계는 모든 성문, 벽지불 및 외도(外道)의 수행자들이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別記 問. 上言一心有二種門, 今云此識有二種義. 彼心此識, 有何差別. 解云. 上就二體, 名爲一心. 體含 絶相隨緣二義門. 故言一心有二種門. 如經本言. 寂滅者名爲一心. 一心者名如來藏. 義如上說. 今此中識者, 但就一心隨緣門內, 理事無二, 唯一神慮, 名爲一識. 體含覺與不覺二義. 故言此識有二種義. 是故心寬識狹. 以心含二門識故. 又門寬義狹. 以生滅門含二義故. 如四卷經云. 不離不轉名如來藏識藏. 七識流轉不滅. 所以者何. 彼因攀緣諸識生故. 非聲聞緣覺修行境界. 十券經云. 如來藏識不在阿黎耶識中. 是故七種識有生有滅. 如來藏識不生不滅. 何以故. 彼七種識依諸境界念觀而生. 此七識境界, 一切聲聞?支佛外道修行者不能覺知.〕

이 두 가지 그리 똑같이 이 아라야식의 생멸하지 않는 뜻을 밝힌 것이니, 왜인가? 경계의 바람에 의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장식(藏識)의 바다 중에 칠식(七識)의 파도가 전진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칠 식은 생멸이 있는 것이며, 한편 여래장이란 바로 장식이니, 장식이 칠 식의 파도를 여의지는 않았지만 그 체는 칠 식의 파도로 전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래장은 생멸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밝히기 위하여, ‘칠 식의 파도를 여의지는 않았지만 그 체는 전변하지 않은 것을 여래장식등이라 이름한다’고 말하였다.
《십권능가경》의 의도는, 칠 식은 파도이지 바다가 아닌지라 파도의 모양은 아라야식 바다 중에 있기 때문에 생멸이 있고, 여래장이란 바다이지 파도가 아니므로 (생멸하는) 아라야식 바다 중에 있지 않기 때문에 생멸이 없는 것이니, 이를 밝히기 위하여 여래장은 아라야식 중에 있지 않다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칠 식은 생멸이 있지만 여래장은 바로(불생멸의)아라야식이기 때문에 ‘(생멸하는 아라야식에)있지 않다’고 말하였다. 만약 여래장이 생멸하는 아라야식 중에 있지 않다면 바로 아래에서 ‘이러므로 팔종식(八種識)은 생멸이 있지만......’이라고 말해야 할 터인데, 어째서 다만 ‘이러므로 칠종식은 생멸이 있지만......’이라고만 말했는가? 이것은 이 《사권능가경》과 《십권능가경》의 글이 본래의 산스크리트 문의 원본은 같지만 다만 번역자가 다르기 때문에 말이 다르게 된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此之二門, 同名此識不生滅義. 何者. 欲明境界風所動故, 蔣海中七識浪轉. 是故七識有生有滅. 如來藏者, 卽是蔣識. 雖不離轉, 而體不轉. 故如來藏不生不滅. 故言不離不轉名如來藏識等. 十券意者, 欲明七識是浪非海, 相在黎耶識海中. 故有生滅. 如來藏者是海是浪, 不在阿黎耶識海中, 故無生滅. 故言如來藏不在阿黎耶識中. 是故七識有生有滅等. 以如來藏卽是阿黎耶識, 故言不在. 若使如來藏不在生滅黎耶識中者, 卽應何云是故八種識有生有滅. 何故但言是故七識有生有滅. 何故但言是故七識有生滅耶. 當知此二經文其本是一. 但?譯者異, 故致使語有不同耳〕

또 《사권능가경》에서 “아라야식을 여래장이라고 이름하니, 무명, 칠식과 함께 하지만 무상(無常)의 허물을 여의어 자성(自性)이 청정한 것이요, 나머지 칠 식은 생각생각마다 유전(流轉)하여 생멸법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말은 앞서와 같이 아라야의 본각(本覺)ㆍ불생멸의 뜻을 밝힌 것이다. 또 《사권능가경》에서 “찰나(刹那)란 식장이라 이름한다”고 하고 《십권능가경》에서 “여래장ㆍ아라야식이 칠종식과 함께 생하니 이를 전멸상(轉滅相)이라 한다”고 한 말들은 아라야의 생멸ㆍ불각(不覺)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서 이제 기신론의 저자가 저 《능가경》의 종요(宗要)를 총괄하였기 때문에 이 아라야식에 두 가지의 뜻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又四券經云. 阿黎耶識名如來藏. 而與無明七識共俱. 離無常過. 自性淸淨. 如七識者, 念念不在, 是生滅法. 如是等文, 同明黎耶本覺不生滅義. 又四券經云. 刹那者名爲識藏. 十券云. 如來藏阿黎耶識, 共七種識生, 名轉滅相. 如是等文, 是顯黎耶生滅不覺之義. 此今論主總括彼經始終之意, 故言道此識有二種義也.〕

【논(論)】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각(覺)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
〔云何爲二. 一者覺義. 二者不覺義.〕

【소(疏)】
두 번째 널리 해석하는 중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처음에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라는 것은 수를 물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고, 다음에 ‘각의 뜻과 불각의 뜻’이라고 한 것은 수에 의하여 이름을 열거한 것이다. ‘......라고 말한 것(所言)’이하는 세 번째로 하나씩 따로 풀이한 것이니, 앞서는 각의 뜻을 풀이하고 뒤에서는 불각을 풀이하였다. 각(覺)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간략히 하고 뒤에는 넓게 풀었다.
〔第二廣中有三. 初言云何爲二者, 問數發起. 次言覺義不覺義者, 依數列名. 所言以下, 第三別解. 先釋覺義. 後解不覺. 覺中有二. 先略. 後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