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本地風光(본지풍광)과 臨濟禪風(임제선풍)

通達無我法者 2008. 5. 3. 19:31

 

 

 

退翁 性徹大禪師의 生涯와 思想 (퇴옹 성철대선사의 생애와 사상)
本地風光(본지풍광)과 臨濟禪風(임제선풍)
 ("Pon-Ji-Pung-Kwang" & Its relation to Imchae-son)
辛 奎 卓 (Shin, Gyoo Tag)   논평·105 / 답변·109
 
 
 
 
           목     차          | (1/3) | (2/3) | (3/3) |
       1. 머리말     2. 임제선풍   1) 황벽선의 정신   2) 임제선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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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본지풍광의 선사상     1) 본지풍광의 구성     2) 본지풍광의 사상
           (2-1) 옛 조사들의 언구를 의심하여 실답게 참구하여 확철대오할 것을 강조
           (2-2) 남의 언구에 매이지 않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중시
           ▽ 세번째 페이지 (3/3) ↘       :   △ 두번째 페이지 (2/3) ↖
           (2-2)중간>다음은 '뜰 앞의 잣나무'~   (2-3) 무심사상의 선양
       4. 맺음말     ◑ 중요 참고문헌
          本地風光(본지풍광)과 臨濟禪風(임제선풍)에 대한 논평     ◑ 논평의 답변
 
 

    1. 머리말

 

性徹(성철)스님(1912∼1993)의 사상을 전해 주는 문헌으로는 本地風光(본지풍광) (1982년) 말고도 [한국불교의 법맥](1976년), 禪門正路(선문정로) (1981년)를 비롯하여 10여 종의 禪書(선서)들이 있다. 이 책 중에는 붓을 들고 직접 쓴 것도 있고 지혜 있는 상좌들이 채록한 것도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려고 하는 본지풍광은 성철선사의 상좌인 圓澤(원택)스님이 편집 발행한 것이다. 이 책은 1967년에서부터 1981년 사이에 행한 상당법어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1968년(총17칙)과, 1970년(총18칙)의 법어가 중심이다.

내용면에서 보면 당나라 때의 조사스님들의 話頭(화두)나 公案(공안)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 공안이나 염송의 출전은 [선문염송]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형식적인 면에서 보면 [설두송고]나 [벽암록]의 체제와 닮았지만, 그렇다고 이 송고형식을 단순하게 모방한 것은 아니다.
벽암록의 [평창]부분은 공안을 설명하거나 강의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본지풍광의 경우는 설명조보다는 학인들이 자신의 본면목을 드러낼 수 있도록 긴장감 있고 밀도있는 언어로 계속 추궁하고 있다. 한편, 선에 대한 성철스님의 입장은 [단경지침]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육조스님의 돈오돈수 사상의 선양에서 잘 드러난다.
즉 육조를 중심으로 하는 조계선의 흐름 속에서 성철선도 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본 논문에서도 당나라 시대의 조계선풍을 계승하는 여러 선사들의 이야기를 병렬적으로 소개하면서 성철선의 특징을 밝히려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조계선풍을 온전하게 전수한 황벽스님과 임제스님의 선풍을 정리하고, 그 맥락 속에서 본지풍광의 사상을 밝혀보기로 한다.
 
                    2. 임제선풍

 

임제선풍은 그 근원이 물론 육조단경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의 스승인 황벽선사에서부터 그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들의 선풍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을 [전심법요]와 [임제록]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전심법요와 임제록의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당나라 중엽의 불교 상황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이 무렵은 극락정토 왕생을 위한 갖가지 기도가 유행했던 때이다. 여러 왕생담도 이 때 만들어지고, 사원에서는 무슨 때면 齊(제)를 지내고, 귀족들은 이 재에 참석하여 行道(행도)를 돈다. 이런 행도의 모습은 [通典(통전)], [唐六典(당육전)], [唐律疏議(당율소의)] 등에도 여기저기 실려 있다.

그런가 하면 열두 대문을 상징한 종이를 접어놓고 염불을 하며, 그것을 가르고 극락으로 왕생하는 과정을 승려들이 신명나게 연출한다. 齋者(재자)는 감동하고 새전은 쏟아진다. 이런 신앙 형태는 명나라로 이어져 우리나라 굿판(장례 후의 자리걷이)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임금이 사는 내전에도 법당을 짓고 영험있는 스님을 모셔 밤낮 기도가 끊이질 않는다. 그러다가 이 기간 중에 변방의 적군이 물러갔다는 파발이라도 전해오면 임금이 비단을 하사하는 등 대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서쪽 하늘에 별똥이 떨어져도 기도를 올린다.

양자강 강가에는 수륙재가 철마다 열리고, 울긋불긋 幡(번)이 펄럭이고 스님들의 가사 색깔은 휘황찬란하다. 838년부터 약 10여 년에 걸쳐 당나라로 구법 여행한 일본의 승려 圓仁(원인)은 당시의 이런 풍습을 소상하게 전한다.

入唐求法禮行記(입당구법예행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당시 사원의 행사와 신양형태의 연구에는 물론 어법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한글 번역도(신복룡 번역 · 주해, 정신세계사, 1991년) 있어 아쉬운 대로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수행의 절차와 도량을 장식하는 일은 또 어떠한가? 당나라 때 만들어진 능엄경에도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또 당대에 찬술되었다고 하는 원각경의 첫머리에는 여래의 삼매 속에 淨士가 나타난다. 당시의 정토신앙이 원각경에 반영된 셈이다.

규봉 종밀은 [원각경대소초] 현담에서 이 정토를 '法性淨士'라고 해석하지만, 이것은 당시 민중 내지는 민속 경전으로 등장한 원각경을 현학적으로 사변화한 것이다. 서역에서 만들어진 경전이 그 지방의 풍속을 담고 있듯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경전에는 당시 중국의 풍물이 암암리에 배어 있다.
그때 유행하던 수행법은 천태계통의 문헌에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천태스님의 釋禪波羅蜜次第法門(석선파라밀차제법문) (大正藏(대정장), 권46)이 유명했다. 이런 천태의 수행법은 규봉스님에게 이어져 圓覺經道場修證儀(원각경도장수증의) (卍字續藏經(만자속장경) 128책)로 정착된다. 절차와 作法(작법)이 자세하다 못해 지나치게 복잡하다.

  

1) 황벽선의 정신

 

위와 같은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 바로 황벽선이다. [전심법요]에서 황벽스님은 당시의 세태를 단호하게 지적한다. "요즈음 도를 닦는 이들은 제마음을 깨치려하지 않는다. 마음에 모두 간직되어 있건만(부족하다고 여겨 모자라는 것을 보태려고) 마음을 낸다. 그리하여 형상화된 단계적 절차를 밟아 수행한다. 이것은 악법이며 깨닫는 길이 아니다."
이 전심법요는 당시 최고의 지식관료 裵休「배휴; 791∼864, 이 생몰연대는 吉川忠夫氏(길천충부씨)의 說(설)에 따름」에 의하여 정리된 것으로, 그는 질문자로서의 예리함은 물론 기록자로서의 섬세한 필체도 겸비했다.
당시 최대의 관심사였던 '점차적으로 수행을 쌓아서 깨달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놓고 주고 받은 대화를 보자. 상공 배휴가 질문하고 황벽선사가 대답한다.

 "스님, 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상공께서는 도가 무엇이라 생각하시길래 수행하려 하십니까?"
 "여러 지방의 큰스님들께서 모두들 참선하여 도를 배운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왜입니까?"
 "그것은 근기가 낮은 사람을 지도하느라고 그런 겁니다. 그 말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참선해서 도를 배우는 것이 모두 근기가 낮은 사람을 지도하느라고 한 말이라면, 근기가 뛰어난 사람을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가르침[法]을 말합니까?"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라면 어찌 남에게 그것(法)을 구하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실체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자기 자신의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가르침[法]이 별도로 있다고 인정하겠습니까? 경전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르침이라고 하는 그 가르침이 어찌 모양이 있겠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시면 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구하려 하지 않으면 마음의 수고가 줄어들지요."
"그렇다면 모두 부정하는 것이니

 

㉢(결국 道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누가 그것(道)이 없다고 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길래 상공께서는 구하려 하십니까?"
"선사께서는 조금 전에 그것을 구하려 하지 말라고 하시고서, 왜 이제와서는 그것(道)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까?"

㉣"만약 (道를) 구하려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됐습니다. 누가 정승더러 (도가 없다고) 부정하시라고 했습니까? (예를 들면) 정승께서는 지금 제 앞에서 허공을 보십니다. 그런데 어찌 이 허공을 없다고 하겠습니까?"
"(스님, 그러면) 이 가르침은 허공과 같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허공이 언제 정승에게 같으니 다르니 말하기나 했습니까? 제가 잠시 허공을 (예로) 들어서 설명을 드렸더니, 상공께서는 대뜸 여기에 알음알이를 내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 애초부터 이런말 저런말 하시지 마셔서) 제가 알음알이를 내지 않도록 하셔야 될 게 아닙니까?"
"저는 결코 상공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 요컨대 저 知解(지해)라는 것은 알음알이에 속하므로 알음알이가 생기면 지혜가 가려지는 법입니다."
"(선사께서 아까부터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에 알음알이를 내지 않으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만일 알음알이를 내지 않으면 누가 이러쿵 저러쿵 말했겠습니까?"

이상의 대화는 조계의 선풍을 계승한 황벽의 선풍을 명쾌하게 드러낸 부분이다. 그러나 기존의 번역에서는 이 명쾌성을 제대로 살려주지 못했다. 그래서 대화의 논점과 직결되는 부분 중에서 번역에 문제가 있는 부분만을 검토해 본다.

 

㉠의 원문은 "若是上根人, 何處更就人覓他, 自己尙不可得, 何況更別有法當情(약시상근인, 하처경취인멱타, 자기상부가득, 하황경별유법당정)"이다.
'他'는 앞에 나온 道를 지칭하는 지시대명사이다. 또 '別有法當情(별유법당정)'에서의 '情'은 마음의 작용으로 넓은 의미의 인식활동이다. 직역하면 '인식작용의 대상이 되는 법이 별도로 있다'이다.

㉡의 원문은 "若與마則, 省心力(약여마칙, 성심력)"이다.
'與마'는 문어체의 '如此(여차)'와 동의로써, 당대의 속어이다. '省心力(성심력)'은 '省力'으로도 쓰는 말로 '수고하다[費力(비력)]'의 상대어이다({백련불교논집} 2집, 183쪽 참조).

㉢의 원문은 "如是則渾成斷絶, 不可是無也(여시칙혼성단절, 불가시무야)"이다.
'不可是∼也'는 의문문이다. 굳이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하면 "가히 이는 ∼가 아닌가?"이다.

㉣의 원문은 "若不覓, 便休(약불멱, 편휴)"이다.
'便休(편휴)'는 '족하다', '됐다'이다. 無心하면 됐지 그 밖에 다른 수행 따위는 첨가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의 원문은 "應是不與人生解耶(응시불여인생해야)"인데, '應是不∼'는 '절대로 ∼하지 말라'는 강한 부정이고, '人'은 배휴를 가리킨다. 이 말은 괜히 허공이 어떠니 저떠니 말을 해 가지고 왜 남(배휴)을 헷갈리게 했느냐는 불평이다. 그럴 바에야 애초 허공 얘기를 꺼내지 말 것이지!

㉥의 원문은 "若不生精, 阿誰道是(약불생정, 아수도시)"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阿誰道是'이다. 이것을 "누가 옳다고 말하겠는가?"라고 번역하는 분도 있는데, 만약에 이렇게 읽으면 "만약 알음알이를 내지 않으면, 옳다고 말할 사람 아무도 없다"는 뜻이 된다.
즉 "알음알이를 내지 않으면 틀린다"가 된다. 이것은 황벽선의 내용과는 상반된다. 여기서의 '是'는 '옳다'는 뜻이 아니고, 지시대명사로서 이제까지 한 대화의 전부를 받는다. 황벽스님의 대답은 마음 밖에서 도를 구하지 말고 無心하라는 말로 일관된다.

頓悟頓修(돈오돈수)로 표현하기도 하는 이 돈오무심 사상은 唐代(당대) 선의 근본 흐름이다.
마음 그 자체에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외면적인 수행의 절차를 거쳐 도를 깨치려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황벽선사는 전심법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육도만행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이것은 단계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단계적으로 깨쳐서 된 부처는 애초부터 없다.",
"제마음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단박에 깨달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수행해야 할 것도 없으면 이것이 최고의 도이며 진짜 부처이다." 황벽선사의 이 돈오무심 사상은 신수대사를 제쳐놓고 혜능행자가 5조 홍인스님의 의발을 전수한 이유를 설명하는 곳에서도 잘 드러난다.

  

2) 임제선의 정신

 

이상과 같은 황벽의 돈오무심 사상은 그의 제자 임제에게 전승되어 독특한 가풍을 이룬다. 임제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제록]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먼저 그 책이 어떻게 지금에 전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祖堂集(조당집)에 따르면 임제스님은 당나라 咸通 7년(함통; 866년)에 입적했고 자세한 이야기는 '기록'에 따로 있다고 한다. 거기에서 말하는 '기록'은 아마도 임제스님의 제자 삼성 혜연스님이 편집한 필사본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 뒤 송나라 초기에 필사본이 목판으로 인쇄되었고, 이 책을 대본으로 북송초 宣和 2년(선화;1120) 원각 종연스님이 重刊(중간)한다. 사람들은 이 책을 '선화본'이라 한다. 임제록은 시대를 거치면서 후학들에 의해서 보완되고 다듬어져 약간씩 성장변화하다가 '선화본'에서 일단 정착되고, 그것이 일본으로 들어가 출판되고 나서는 더 이상 손을 타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에 있던 '선화본'은 계속 성장하여 [고존숙어록], [종문통요집], [연등회요], [오등회원]을 거치면서 약간씩 달라진다. 그러나 '선화본'도 볼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일본의 '유통본'이 임제스님의 본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전한다.

그래서 번역자와 연구자들은 이것을 대본으로 임제스님의 사상을 연구한다.
임제록도 다른 문헌과 마찬가지로 시대 사조의 흐름과 함께 성장변화한다. 그래서 사상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원형에 가까운 문헌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데 이때 제일 먼저 손이 가는 책이 [조당집]이다. 거기에 보면 '無位眞人(무위진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종경록], [경덕전등록], 유통본 [임제록], 그리고 그 이후에 편집된 전등서 등에도 있다. 그러나 표현은 약간씩 다르다. 임제스님은 언젠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하노니 여러분의 몸 속에 무위진인이 있어, 뚜렷이 드러나 털끝만큼도 빈틈이 없건만 왜 모르느냐?"
그 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무위진인입니까?"
임제스님은 그를 때리면서 말했다.   "무위진인이라고? 이 무슨 똥 같은 소리냐!"

'無位(무위)'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어떠한 가치로도 평가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다. 임제스님은 이런 참 사람이 자기자신 속에 있는데 왜 그것을 모르고 밖에서 찾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위진인'을 내면화시키거나 절대화·초월화시켜서는 안 된다. 초월화된 실재를 상정하는 순간 임제스님의 의도와는 멀어진다.

'무위진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임제스님은 순간적으로 '아차!'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위진인'이라는 말이 상대방에게 초월화된 실재로 들릴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임제스님은 "무위진인이라고? 이 무슨 똥 같은 소리냐!"라고 얼른 발뺌을 한다.
오해될 여지가 있는 '無位眞人(무위진인)'이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고, 그 대신 '無依道人(무의도인)'이란 말을 즐겨 쓴다. 이 말은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수행인'이라는 뜻으로,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청중을 가리킨다.

바로 이 '무의도인'인 여러분이야말로 부처님의 어머니이므로, 이런 자기자신을 신뢰하라는 것이 임제록의 전반적인 논조이자 임제선풍의 골수이다. 임제록의 다음 이야기를 보자.

"그대들이 부처님을 알고자 하는가? 바로 그대, 내 앞에서 설법을 듣고 있는 그대이다. 학인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다른 데서 구하려고 하는구나."

 

밑줄 친 부분의 원문은 "祗니面前聽法底是(지니면전청법저시)"이다. 이것을 "그대의 앞에서 법을 듣고 있는 그놈이다"라고 읽어서는 안 된다. "그대의"가 아니라 "그대가"라고 읽어야 한다. 현실에 있는 이 몸뚱이를 제쳐두고 초월적인 '그놈'을 상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주체를 내면화시키거나 절대화시키는 순간 임제록의 사상과는 멀어진다.
중국어의 어법으로 보아도 이 점은 분명하다. '祗니(지니)'에서의 '祗(지)'는 '니(니)'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是 '와 뜻은 같지만 그것보다 ' '를 더 강하게 부각시킨다. '是니(시니)'의 경우 '是'는 언제나 주격이 되는 체언 앞에 놓여 이것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렇게 자기 신뢰를 일깨워주는 사상은 다음의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수행자들이여, 바로 그대, 내 앞에서 움직이는 그 자체는 우리의 조상인 부처님과 다를 게 없건만 그대는 믿지 못하고 밖에서 부처님을 찾는구나. 아서라."
"道流, 是니目前用底, 與祖佛不別, 祗니不信, 便向外求, 莫錯."
"도류, 시니목전용저, 여조불부별, 지니불신, 편향외구, 막착"

위에서의 '믿는다'는 말은 자기자신이 부처와 다름이 없는 사실을 믿으라는 말이다. 신흥종교의 '믿습니다'는 아니다. 임제록에는 '信不及(신불급)' 또는 '自信不及'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때의 '信'의 대상은 '자기' 내지는 '옛사람의 말씀'이다. 이 말은 주자어류에도 많이 나오는데 그때의 경우도 같은 의미이다.

임제선풍의 특징으로 이상의 자기 신뢰 외에 하나를 더 드나면, 적절한 언어의 구사를 들 수 있다. 후세에 전해지기를 임제한 '할' 덕산의 '방'이란 말이 있듯이, 임제스님 하면 고함지르는 것을 연상한다. 그렇지만 임제스님의 말투는 아주 용의주도하다.
'山僧見處(산승견처)'라는 말만해도 그렇다. '산승'에서의 '山'은 자신을 낮추는 겸양이다. 이것은 자기 처를 '山妻(산처)'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우리말로는 "제 생각으로는", "제가 보기에는"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山僧今日見處, 與祖佛不別."  (산승금일견처, 여조불불별)

위의 문장을 지금 유통되는 번역에서는 "지금의 내 경계는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다"로 읽어왔다. 이것은 임제스님의 말투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과도 안 맞는다. 윗 구절은 참 부처와 도를 묻는 상대에 대한 대답이다.

"제가 보는 바로는 (부처와 도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그대는) 우리들의 조상인 부처님[祖佛(조불)]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습니다"라는 말이다. 임제선풍은 적절한 언어 사용으로 이름 높다. 시인의 언어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다른 말로 대신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말을 매우 조심한다. 다음의 문장에서도 그 모습을 역력히 볼 수 있다.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참마음이란 몹시 어렵고 부처님의 말씀은 아주 깊다. 그러나 꽤 상당한 정도까지 알 수 있다."
"道流, 是情大難, 佛法幽玄, 解得可可地."-도류, 시정대난, 불법유현, 해득가가지

임제스님은 자신이 불법을 100퍼센트 알았노라는 식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불법이 어렵지만 80내지 90퍼센트는 알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解得可可地(해득가가지)'를 기존의 해석처럼 "알고나면 쉬운 일이다"라고 읽어서는 안 된다. '可可地'는 '상당히', '꽤'라는 의미의 부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오독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중국어의 어법에 대한 이해 문제 보다는 선사하면 으레 모두를 싹 부정하고 '콱 내지른다'는 고정 관념 탓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遮詮(차전)만이 선의 진수라는 잘못된 생각은 선서 해석을 그르친다. 나아가 선사상을 모호하게 한다. {임제록}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독자들은 어떻게 읽으실까?

"師言下大悟云, 元來黃壁佛法無多子."(사언하대오운, 원래황벽불법무다자)

이 말에는 사연이 있다. 임제는 황벽스님이 주지하는 절에서 오랫동안 살았는데, 한 번도 수행에 대해 질문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고참스님이 한번 가서 물어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임제는 무엇을 물어야할지 몰랐다. 고참스님이 시킨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일러주십시오"라고 청한다.

임제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스님은 매질을 한다. 또 가서 묻고 또 묻고 이러기를 세 번 거듭했지만 그때마다 맞고 돌아온다. 임제는 자신의 못남을 탓하고 떠나려고 하직 인사를 하자 황벽선사는 대우스님을 추천한다. 대우스님한테 가서 여기에 오게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하소연한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대우스님은 호통을 친다.
"황벽스님이 그토록 노파심이 간절하게 지도했건만,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냐?"
이 말 끝에 임제스님은 완전히 깨닫고 내 뱉는 말이 "黃檗佛法無多子(황벽불법무다자)"이다. 이 임제선사의 '黃檗佛法無多子'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큰스님들이라면 한 번씩은 법거량을 한다. 일본 임제종의 종정을 지낸 朝比奈宗源(조비내종원) 큰스님은 "황벽스님의 불법이 원래 별거 아니었군"이라고 읽고, 또는 "알고 보니 고양이 똥만도 못하군"이라고 평창을 하는 경우도 있다.

어림없는 소리이다. 임제선은 결코 오만 방자하지 않다. '無多子'에 대한 자세한 고증은 [선과 문학­구도의 기쁨­][入失義高(입실의고) 著, 신규탁 옮김, 장경각, 1993]에 미루고, 이 말을 번역하면 이렇다.

"(아하!) 황벽스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너저분한 것이 아니었구나(분명했구나)."

 

서옹 종정스님이 경도에 오셔서 "일본의 임제선은 임제선이 아니라 너무나 타락했다. 頓悟頓修(돈오돈수)의 참뜻을 터득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임제록 (서옹연의, 동서문화사)의 발문에 실린 김지견 박사의 회고에서]이 그저 남의 일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러면 임제선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답은 너무나 명확하다 못해 간단하다. 頓悟無心이다. "얻으면 탁 얻는 것이지, 세월을 거듭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得者便得, 不歷時節(득자편득, 불력시절)]"라는 임제록의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같은 曲(곡)이라도 연주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지듯이, 많은 선사들이 돈오무심곡을 연주하지만 백이면 백 모두 다르다. 임제선의 가락은 뭐니뭐니해도 현실에 딱 붙은 마음씀씀이다. 이 마음은 현실의 배후에서 우리를 조정하는 근원적인 존재는 아니다.

가수 남진 씨가 "해저문 부둣가에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을, 갈매기도 내마음 같아 ···"라고 노래한 현실에서 울고 웃는 바로 이 현실의 마음이다. 선사상은 일반명제로 되는 순간 그 본질과는 멀어진다.
구체적인 순간순간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꿈을 꾸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제마음은 버려두고 외형적인 단계를 설정하여 점차적으로 수행하여 도를 깨치려는 수행자들에게 임제선사는 {임제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수행하는 여러분, 제가 보는 바로는, 보신불·화신불의 머리를 싹 베어야 합니다. 십지의 수행을 성취해도 노예와 같고, 등각과 묘각의 지위에 올라도 수갑에 묶인 사람이고 ···."
"道流, 取山僧見處, 座斷報化佛頭. 十地滿心, 猶如客作兒, 等妙二覺, 擔架鎖漢, ···."
"도류, 취산승견처, 좌단보화불두. 십지만심, 유여객작아, 등묘이각, 담가쇄한,

'取山僧見處(취산승견처)'는 문장이 불안정하다. 이 말만으로는 임제스님이 자기의 수행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으로 잘못 읽혀질 염려가 있다. 그러나 [조당집]에는 '欲得山僧見處(욕득산승견처)'라고 문장이 안정되어 있다. 즉 "제가 보는 바를 이해하려면, 보신불·화신불의 머리를 싹 베어야 합니다"이다.

위에서 말한 '제가 보는 바'란, 앞에서 한 말인 "밖으로 구하려는 마음만 쉬면 여러분들은 (우리 사문들의) 조상이신 부처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처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입니다"라는 임제스님의 설법이다.

그러므로 10信, 10地, 등각, 묘각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 부처가 된다는 점차적인 생각은 사람을 얽어매는 형틀이라는 것이다. 육조스님을 스승으로 받드는 선가에서는 기도라든가 단계적인 절차와 외면적인 행법은 도를 깨닫는 방법과 거리가 멀다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부처가 된 경우는 없다고 마조·백장·황벽·임제선사들은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육조대사의 가르침이라고 표방하여 제마음을 깨치라고 간절하게 부촉하신다. 이것은 당대 남종선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육조스님의 정신을 이어답는다고 자처하면서 漸修(점수)를 주장하면 자기모순이다. 오히려 남종선에 국한하지 말고, 범위를 넓혀 불교라는 차원에서 점수를 논하는 편이 정당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육조의 법손임을 자처하면서 점수를 주장하는 규봉스님이나 보조스님의초기 사상은 당나라 시대의 남종선을 '주체적으로 해석한 것'이거나 아니면 '오해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 스님들이 당시의 사상사적 사실에 거슬리면서까지 점수론을 주장한 의도를 분명히 하고, 이 스님들의 내적 사상체계 내지는 그 당시 사상사 위에서 이 주장의 의의를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돈점논의'는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역사학 방면의 연구성과는 면밀한 자료 분석으로 당시의 시대사조 속에서 보조스님의 사상을 성공적으로 부각시킨 반면, 불교학·철학 방면의 논의는 '보조사상 그 자체'와 그것을 바라보는 '연구자의 생각'을 뒤섞어 결과적으로는 주관적 선언에 그치고 말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3. [본지풍광]의 선사상

  

1) 본지풍광의 구성

{본지풍광}의 서지적인 내용을 먼저 말해두고자 한다. 이 책은 1982년 12월 불광출판부의 발행으로 圓澤(원택스님)을 엮은이로, 제목을 [性徹禪師法語集(성철선사법어집)­山이 물 위로 간다] 本地風光(본지풍광)로 첫 선을 보였다. 이 책은 菊判(국판)으로 본문 514쪽, 색인 23쪽, 법계도 3쪽으로 되어 있다.

그 뒤 이 책은 다시 백련선서간행회에서 [성철스님 법어집] 2집3권에 편입하여 本地風光 (성철, 장경각, 1990년)으로 또다시 간행하기도 했다. 이 둘은 판형은 물론 내용도 동일하다. 다만 초판에서는 '엮은이 圓澤'으로 되어 있었으나, '성철스님 법어집'에서는 '발행인 여무의'로 바뀐 점은 서로 다르다.

이렇게 바뀐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엮은이 圓澤'이 온당하다고 하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책을 읽어 본 이들은 알겠지만, 본문에 성철스님의 동작 등(예를 들면 '良久(양구)', '便下座(편하좌)' 등의 지문)을 표기한 부분이 나오므로 성철스님 자신이 쓴 것이 아니고, 성철스님의 설법을 들은 사람이 필록했고, 그것을 원택스님이 편집 발행한 것 같다.

한편 이 책이 '어록'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성철스님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앞뒤가 맞는다. 선어록은 모두 설법을 들었던 제자들이 들었던 내용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본지풍광]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설법을 한 당사자[성철스님]가 시자[원택스님]가 모아서 출판한 책을 생전에 확인한 점이다.

이 점은 [돈오입도요문]과 같다. 따라서 본지풍광은 그 어떤 선어록보다도 당사자의 생각과 어투를 여실히 문자로 기록 정착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지풍광을 통하여 성철스님의 선사상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필록자의 선사상도 이 어록에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더 시간을 갖고 보다 면밀하게 검토해야만 할 과제 중의 하나이다. 다만 현단계에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본지풍광 속에는 성철스님의 선사상과 성철스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사상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책의 이름으로 쓰인 '本地風光(본지풍광)'의 뜻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본지풍광'이라는 용어는 '본래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本來面目(본래면목)'과 더불어 송대 이후의 선서에 많이 쓰인다. 그 예로 우리는 [벽암록] 37 (백련선서간행회, 201∼202쪽)을 들 수 있다.

어떤 스님이 황룡 회당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금강경] 4구게입니까?"
"(4구게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네 자신의) 질문이 벌써 잘못 되었는데도 모르는군."
설두스님은 이 경전의 핵심을 들어 말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간직하려 한다면 (그 간직할 것은) 바로 여러분의 本地風光이며 本來面目이다."

조사의 법령에 따라서 시행한다면 本地風光과 本來面目도 세 동강이 내야 하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12분교가 어떻다는 둥 꾸며댈 필요가 없다. '이 자리'는 설령 만 가지로 헤아린다 해도 관계가 없다.

이곳 말고도 [벽암록]에는 '本地風光'이라는 말이 많이 보인다. 이 용어가 선의 용어로 정착된 것은 송대이지만, 누구나 간직한 본래의 모습을 강조하는 선 정신은 그 연원이 육조단경에서도 보이고, 특히 [임제록]에서 '自己'라는 용어를 통해서 선명히 대두된다. 뿐만 아니라 이 '本地'라는 말은 禪에서만이 아니라 敎에서도 쓰고 있다.
즉, 천태 지자스님의 '本迹說(본적설)'이 그것이다. 천태스님은 법화경 28품을 반으로 나누어 전반부를 '迹門(적문)', 후반부를 '本門(본문)'에 각각 배당시켜 석가모니의 一大事因緣(일대사인연)의 본래의 모습은 '本門'에서 완전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久遠實成(구원실성)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이 本佛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지풍광]이라는 서명을 통하여 이 책의 전반에 깔려있는 사상이 '본래의 모습'을 중요시 여기고 있음을 암시받을 수 있다.

 

다음은 이 책의 구성을 보기로 한다. 이 책은 크게 '上堂法語(상당법어) (91則)'와 '落혜法語(낙혜법어)'(9則) 둘로 나뉘어 모두 100칙으로 편집되어 있다. 여기에서 '100'이라는 숫자로 이 책을 엮은 것은 아마도 碧巖錄(벽암록)이나 從容錄(종용록)의 100則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 점은 각 법문의 구성으로 볼 때에도 가능성 짙은 추측이다. 그 한 예로 본지풍광 第5則, [普(보)]化賊賊(화적적)의 구조를 보자.

 

(1) 옛 조사들의 이야기를 인용하기에 앞서 성철스님 자신이 한 緖言 부분 ;
"三世諸佛∼攪亂門庭 (삼세제불∼교난문정)" (이 부분을 앞으로 [起]라고 표기)
** 위의 문장 사이의 '良久云(양구운)'은 엮은이가 성철스님이 다음 말을 하기 위하여 잠시 동안 묵묵히 있는 모습을 기록한 것임.
(2) 옛 조사들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부분 ; "一日∼便出去" (일일∼편출거)
(3) 위의 (2)에 대한 성철스님의 평가 부분 ; "師云, 不是 家不聚頭" (사운, 불시 가불취두)
(4) 위의 (2)에 대한 옛 스님의 頌을 인용한 부분 ; "海印信頌日∼滿堂馨香鐵樹花" (해인신송일∼만당형향철수화)
(5) 위의 頌 (4)에 대한 성철스님의 평가 부분 ; "師云, ∼西舍暗坐(사운, ∼서사암좌)" (이상의 (2)∼(5)를 앞으로 [本文]로 표기)
(6) 이상의 전체에 대한 성철스님의 結語 부분 ; "大衆∼戴角出荒草(대중∼대각출황초)" (이 부분을 앞으로 [結(결)]로 표기한다)
(7) 성철스님이 법문을 마치고 법좌에서 내려오는 모양을 엮은이인 원택스님이 기록한 부분 ; "喝一喝, 逐下座" (갈일갈, 축하좌)

 

이 [普化賊賊(보화적적)] 공안은 [선문염송] 第512則에서도 나오는 것으로 그 구성은 [雪寶頌古百則(설보송고백칙)]이나 碧巖錄(벽암록) (100則)과 유사하다. 91則의 '상당법어' 뒤에 '낙혜법어' 9則을 넣어 '100則'으로 맞춘 것은 엮은이가 雪寶頌古百則이나 碧巖錄 (100則)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낙혜'라는 말은 '이삭줍기'의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엮은이가 이렇게 100으로 맞춘 데에는 위에서 보았듯이 '상당법어' 자체의 구조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2) 본지풍광의 사상

 

[본지풍광]에 담긴 선사상을 분석하기 전에 선과 언어 및 문헌의 관계를 바라보는 기존의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자세한 고증은 필자의 [중국선서의 번역을 위한 문헌학적 접근](백련불교논집 제1집)으로 대신한다. 다만 여기서는 그 결론만을 말하면 언어와 문헌으로 禪旨(선지)를 오늘의 말로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해 두고 싶다.

그러면 성철스님이 남긴 문헌을 검토 분석하면 스님의 생각을 알 수 있을까 ? 더구나 남의 말을 많이 인용한 [본지풍광]과 같은 책의 경우 어디까지가 스승의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남의 생각인가를 구분할 수 있을까 ? 대답을 먼저 말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엿장수 맘대로 ···'라는 말을 쓰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이 말을 내 나름대로 풀어보면, 엿 바꿔 먹기 위해 고물을 가져온 꼬마에게 엿을 얼마나 줄까는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것일 게다. '엿장수 맘대로'는 '아무런 기준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라는 의미로도 쓰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엿장수'의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보면 멋대로 엿을 주는 것 같지만, 엿장수가 엿을 주는 데는 반드시 엿장수의 기준이 있다. 가져온 고물의 시가를 매기는 엿장수의 안목이 그 뒷면에 들어 있다.

하다못해 고물을 들고 온 꼬마가 어여쁜 과부의 아들일 때, 마음을 그 어미에 두고 꼬마에게 엿을 많이 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엿장수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멋대로 엿을 팔다가는 밑천을 다 까먹어 더 이상 엿장수 짓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성철스님의 어떤 마음으로 이른바 엿의 크기를 정했을까 ?
본래대로 말하면 성철스님은 중국과 우리나라 과거 스님들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는데, 첫째 그것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 둘째 왜 자신의 깨달음을 직접 말하지 않고 남의 말을 인용했을까?
먼저 두 번째의 질문에 대해 답해보자. 본지풍광처럼 남의 말을 모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는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정착되었던 전통적인 저술 방식의 하나이다. 중국은 그만 두고라도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

고려 혜심(1178∼1234) 스님의 [선문염송]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책은 중국의 역대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기연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을 편집한 혜심스님의 사상을 보조 지눌스님과 연결짓는 이도 있지만,
[선문염송]을 편집하는 과정에 결과적으로 나타난 혜심스님의 사상은, 남종선의 돈오무심과 밀접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혜심스님은 頓悟無心(돈오무심)과 관련된 일화를 중심적으로 채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태고 보우스님과 함께 당시 임제선풍을 드날리던 백운(1298∼1365) 스님의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이책은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鑄字本(주자본)으로 출판되었고, 뒤에 목판본으로도 출판되었다.
주자본은 하권의 일부만 전하지만, 목판본은 온전하게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경덕전등록]과 [오등회원] 등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추려서 모아놓은 것이다. 편자인 백운스님의 생각은 표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무엇을 선택했는가를 통해서 역으로 백운스님의 안목을 알 수 있다.

성철스님의 본지풍광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많은 선사들의 어록 중에서 누구의 어느 말을 선택하여 모아놓는가를 통해 우리는 그 편자의 사상을 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첫째의 질문인 성철스님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중국의 선서를 발췌 요약했을까 ? 이에 대해서는 크게 다음의 세 조목을 들 수 있다.

  

(1) 옛 조사들의 언구를 의심하여 실답게 참구하여 확철대오할 것을 강조.

이 점은 본지풍광 전체에 흐르는 사상이다. 이 책에서는 역대 조사들이 남긴 話頭(화두)와 公案(공안)을 많이 인용하며 이것들을 끊임없이 의심하여 實參(실참)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57칙의 趙州大死(조주대사)도 그런 예 중의 하나이다. 이 칙은 크게 [起(기)], [本文], [結(결)] 3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起]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성철선사의 말이고, 다음 [본문]은 投子와 趙州(조주)와의 문답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雪竇(설두)스님 등의 頌이 붙어있다. 이 [본문] 부분은 선문염송 277칙에서 인용한 것이다. 끝으로 세 번째는 [結]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성철스님 자신의 말이다.
따라서 본지풍광 57칙에서 성철스님의 생각이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起]와 [結] 부분이다. [起]에서 강조되는 것은 '不疑言句 是爲大病(불의언구 시위대병)'이다. 그리고 [結]에서 강조되는 것은 '參須實參(참수실참)'과 '悟須實悟(오수실오)'이다.

 

이런 사상은 본지풍광의 제1칙 [德山托鉢(덕산탁발)]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기에서 성철스님은 평하기를, "이 공안은 짐독이나 비상과 같아서 이렇거나 저렇거나 상신실명할 것이니, 부질없는 알음알이로 조사의 뜻을 묻어버리지 말라. ··· 오직 최후의 굳센 관문을 부수어 확철히 크게 깨쳐야만 비로소 옛 사람의 입각처를 알게 될 것이다 (본지풍광 14쪽)"라고 한다.
이렇게 '확철대오'를 강조하는 말은 제7칙 [洞山供眞(동산공진)]에서도 나온다. "여기에서 확철히 깨쳐 남음이 없으면 오늘 영산의 본래면목을 밝게 알 뿐만 아니라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모든 조사의 本來面目도 모두 알게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다시 둘째의 가시덤불이 있다 (본지풍광 45쪽)."

실참하지 않고 그냥 부처나 조사의 말을 무반성적으로 접수하는 것에 대한 비판은 역대 조사들의 공통된 입장이고 성철선사도 이런 맥락에 서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속에서 반조되지 않는 일체의 언구를 배척한다. "말을 따르는 자는 죽고 글귀에 머무는 자는 迷하다 (본지풍광 89쪽)"고 단호하게 거부한다.

다음의 일화를 보기로 하자.

"師示衆云, 納僧家直須坐斷報化佛頭始得. 問, 坐斷報化佛頭, 是什마人. 師云, 非니境界."
"사시중운, 납승가직수좌단보화불두시득. 문, 좌단보화불두, 시십마인. 사운, 비니경계

이 문장을 흔히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스님께서 대중에 말씀하셨다.
"남자라면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에 눌러앉아야 한다."
한 스님이 물었다.
"보신불과 화신불의 머리에 그대로 눌러앉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대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坐斷(좌단)'을 '눌러앉다'라고 번역한 셈이다. 이것은 아마도 駒澤大學(구택대학)에서 편찬한 [선학대사전]을 그대로 신용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그러면 '坐斷'이란 무슨 뜻인가?
'坐斷'은 당나라의 선사들의 어록에 많이 나타나는 용어로 '斷'은 강조를 나타내는 조어이다. '塞斷(새단)'의 '斷'과 마찬가지 용법이다. 그러니 결국 의미는 '坐'에 있다. 그러면 '坐'란 무슨 뜻인가? [경적찬길]에서는 [釋名(석명)]에서 용례를 수집하여 '挫' 즉 '깨트리다' '꺾다'는 의미라고 한다.
한편 당나라 시대에 쓰인 문헌에서는 '挫斷(좌단)'이 많이 쓰이는 것으로 보아 '坐'와 '挫'는 통용되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坐斷(좌단)'은 '깨트리다', '꺾다', '부수다'는 뜻이다. 또 원문의 '報化佛頭(보화불두)'의 '頭'는 그 용법이 오늘날의 白話에도 이어진다.
[中韓辭典](고려대학민족문화연구소편, 1989년)에서도 설명하듯이 '頭'는 명사가 아니라 접미사로써 명사의 뒤에 쓰이거나, 존경의 뜻을 품고 있는 호칭이다. 그러므로 '報化佛頭'는 '보신이나 화신 부처님' 정도의 어미이다.
따라서 위의 문장을 제대로 번역한다면 선을 수행하는 이라면 보신 부처님이나 화신 부처님을 깨부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의 '直須(직수)∼始得(시득)'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숙어이다. 즉 보신과 화신 부처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툭하면 부처가 어떠니 저떠니 깨달음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 당시의 풍조를 그 좋은 말솜씨로 해 붙여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부처나 조사에 얽매이는 것에 대해 비판은 성철선사의 본지풍광 제33칙 [趙州場花(조주장화)]의 "부처는 중생의 원수요, 조사는 보살의 원수라"는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2) 남의 언구에 매이지 않는 자기 자신의 체험을 중시.

 

이 사상은 조계선의 핵심이자 성철선의 특징으로, 본지풍광의 29칙 [趙州喫粥(끽죽)]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조주선사를 성철스님 만큼 많이 인용하는 선사도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29칙의 [結]에 "대중들이여, 말을 찾는 자는 죽고 글귀를 쫓는 자는 잃어버린다. 나아가면 은산철벽이요, 물러서면 만 길의 깊은 구덩이다. ···, 透脫(투탈)한 한마디를 어떻게 말하려는 가?"

위의 [結]은 "바리때를 씻어라"는 화두에 대해 세간에서 상투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비판은 선문염송 제427칙의 대혜종고스님의 송에서도 보인다.
즉 "지금 제방에서 눈먼 한무리들이 흔히 다 바리때를 씻는 法門으로 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성철선사는 "將錯就錯(장착취착), 叩氷求火(고빙구화: 점점 더 잘못을 더해 가는군. 얼음을 마찰시켜 불을 얻으려는 군 ; 필자 번역)"라고 착어를 하고 있다.

이것은 조사들의 옛 기연을 상투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비판은 본지풍광에 일관되는 사상으로 이 역시 조계선풍의 큰 갈래 중의 하나이다. 그 예를 보기로 하자.
'口脣皮禪(구순피선) 또는 口頭禪(구두선)'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趙州(조주; 778∼897)스님은 말을 참 잘 하신다. 그러나 기존의 번역이 이 말 잘하는 조주스님의 레토릭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교훈적이고 모법답안으로 선을 설명하지만 조주스님은 그런 것은 딱 질색이다. 조주록 [선림고경총서 18]의 다음 대회를 보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道입니까?"   "담너머에 있다."
"그것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무슨 도를 물었느냐?"
"大道 말입니다."   "큰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

도가 무슨 특별한 것인 양 잔뜩 기대를 걸고 큰스님에게 묻는 이 객승의 모습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러나 조주는 평상심이 도리는 상투적인 말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자신의 언어로 밀도 있게 표현하고 주체적으로 언어를 사용한다. 不立不字(불립문자)라고 하여 언어의 뒤편으로 숨는 일은 하지 않는다.

 

조주스님이 언젠가는 손을 오므리며 말씀하셨다.
"나는 이것을 주먹이라고 부르는데, 여러분은 뭐라고 부르는가?"
한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어찌 외적인 현상[境]을 가지고 사람을 지도합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하셨다.
"나는 외적인 현상으로 남을 지도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외적인 현상으로 그대를 지도하면 그대를 (외적인 현상 속에 완전히) 매몰시킬 것이다."
그 스님이 말했다.   "그럼 이 손은 무엇입니까?"   조주스님은 작별인사를 하였다.

나는 이것을 주먹이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너는 너의 언어로 이것에 이름을 붙여보라는 것이다. 그것에 자기의 언어로 이름을 붙임으로써 비로소 완전히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그는 수행자마다 각자 스스로 주체적으로 체험할 것과 그 체험을 자신의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할 것을 요구한다.

덕산스님의 棒(봉)에 비견하여 조주스님의 선은 口脣皮禪(구순피선) 또는 口頭禪이라 평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조주스님의 無字 공안은 종문 제1의 공안처럼 보편화되어 있다. 이 공안에 대해 결론을 먼저 말하면 이 무자 공안은 조주선의 이해에 커다란 방해물이다.

조주 이외의 후세 사람들이 무자 공안과 조주선을 결부시킨 것으로 여기에는 이것을 공안으로 정착시킨 송대 사람들의 책임이 제일 크다. '유'보다는 '무'를 강조하고, 긍정적인 표현보다는 부정적인 표현에 가치를 두는 이들의 편견이 낳은 잘못된 결과이다. 조주선은 결코 무자로 대변될 수 없다.
송대의 선은 당대의 선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돈오무심'으로 일관되던 당대의 선사상이 송대로 내려와서는 '무심'이 아니라 '유심'으로 전도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 냄새가 너무나도 풀풀 풍긴다.

걸핏하면 '도', '깨달음', '열반', '불법' 등을 들먹인다. 자취를 떨어버리지 못하는 한 불교에서 가장 금물로 여기는 고정된 틀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는 禪이 되기에 앞서 불교가 되지 못한다. 그러면 조주선이 무자 화두로 대변되게 된 유래를 알아보자.

 

어떤 수행자가 물었다. "개에게도 부자가 가지고 있는 성품이 잠재되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없다."   그 수행자는 다시 물었다.
"위로는 부처님으로부터 저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개에게 없다고 하십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개에게 업식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_조주록 (선림고경총서18) 71쪽­

이상의 대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전반부는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이야기이고, 후반부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대답한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송대에 들어서 조주선을 운운하는 이들은 전반부만을 즐겨 인용하고, 후반부는 아예 거론하지도 않는다.
여기에 '무'를 중히 여기고 '유'를 가볍게 보려는 잘못된 생각이 끼어드는 것이다. 이런 편파적인 생각 때문에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조주스님의 다음의 이야기는 안중에도 안 들어온다.

한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집집마다 문 앞은 장안으로 통한다."_조주록 (선림고경총서18) 131쪽­

즉, 모든 길은 다 서울가는 길로 이어지듯이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개에게 불성이 '있다'는 대답과 '없다'는 대답이 짝이 되어 뒷날 [종용록] 제18칙에 정착된다.

어떤 승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있다."
승이 다시 물었다.   "불성이 있는데 왜 축생으로 태어났습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그가 알면서도 일부러 범했기 때문이다."_종용록 (선림고경총서32) 117∼118쪽­

즉 개의 불성에 대해 조주는 '有'라고 대답한 적도 있고, '無'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無'만을 편파적으로 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 [주역]이나 [노자]의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無'에 대한 생각이 중국에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런 문화적인 흐름 속에서 '有'보다 '無'를 좋아하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이렇게 '無'를 좋아하는 이들에 의하면 조주스님이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한 말이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인 듯하여 거기에 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주스님의 '무'를 '동양적인 무'이니 '절대적인 무'이니 말들 한다.

그러나 '절대'라는 관념이 고개를 드는 순간 조주선과는 멀어진다. 조주스님이 일평생 일관되게 부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절대'라는 관념이다. 이런 '절대'를 고집한다면 조주스님의 표현을 빌면 '반드시 그대를 들러붙게 할 곳이 있다[大有著니處在(대유저니처재)]'라는 말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동양적'이라는 말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애매모호한 말도 드물 것이다.
없으면 없는 것이지 '동양적인 없음'이 따로 있고 '서양적인 없음'이 따로 있는가 ?

조주스님은 이런 느슨하고 어정쩡한 표현은 쓰지 않는다. 성철스님의 경우도 말할 것도 없다. 스님은 '유'와 '무'를 둘 다 모두 인용한다. 이런 성철스님의 안목은 본지풍광 제56칙, [百丈野狐(백장야호)]에서 잘 드러난다.

 

다음은 '뜰 앞의 잣나무' 이야기를 보자.

조주스님이 상당법문을 하는데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달마스님이 중국에 오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이다."
"큰스님, 그런 대상세계를 가지고 대답하시지 마세요."
"나는 그대에게 대상을 가지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달마스님이 중국에 오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또 한 곳은
어떤 사람이 물었다. "저의 참 나[自己]는 누구입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가 보이는가?" _조주록 (선림고경총서18)­

이 이야기에 대해 벽암록 45칙을 비롯하여 예로부터 많은 논평들이 있다.
그러나 이 말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른다. 단지 조주스님이 살던 이 河北(하북) 지방의 지명에 '栢(백)'자가 많이 쓰이는 걸로 보아 잣나무숲이 많다는 것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은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에 대해 대만의 吳經態(오경태)씨는 "도란 뜰 앞의 잣나무에 있다는 것이다"고 [선학의 향연] (조영록 · 정인재 역, 동국역경원, 1980년)에서 해설한다. 그리고 자기라면 "저 하늘에 나는 매"라고 대답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걸핏하면 노 · 장을 들먹여 선서의 대화를 해석한다. 이 부분도 아마도 [장자]에 나오는 동곽자와의 대화에서 '도는 똥 속에 있다'는 구절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러면 조주선의 핵심은 무엇인가 ? 집착의 타파이다. 그 집착이 깨달음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기자신일 수도 있다. 조주록의 다음 구절이 이것을 대변해준다.

 

"師示衆云, 佛之一字, 吾不喜聞. 問, 和尙還爲人也無. 師云, 佛佛."
"사시중운, 불지일자, 오불희문. 문, 화상환위인야무. 사운, 불불
조주스님이 대중설법에서 "부처 불자를 나는 듣기조차 싫다"고 하자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수행자들을 지도하십니까?" 그러자 스님은 "부처, 부처" 하였다.

 

툭 하면 부처가 어떠니 도가 어떠니 하는 고정된 틀을 조주선사는 용납하지 않는다.
조주록의 여러 곳에 남방의 선풍을 비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은 설봉교단에서 친절하고 자세하게 학인들을 지도하고 불법 내지는 도를 운운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당나라 시대, 그러니까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에 걸쳐 중국선은 크게 둘로 나뉘어진다.

"북쪽에는 조주선사가 있고 남쪽에는 설봉선사(822∼908)가 있다"는 [운문광록]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이들은 서로를 의식해가면서 개성있는 선풍을 일구어간다. 남방의 선풍에 대해 [조주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떤 스님이 설봉스님 처소에서 왔다. 스님께서 말씀하였다.
"상좌시여, 여기에 머물지 마십시오. 제가 있는 여기는 그저 피난하는 곳일 정도입니다. 불법은 모두 남방에 있습니다."   "불법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네가 아무리 설봉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외골수일 뿐이다."
"저쪽은 어떻습니까?"   "너는 어젯밤 왜 자리에 오줌을 쌌느냐?"
"깨치고 난 뒤에는 어떻습니까?"   "어! 똥까지 쌌군."

 

남방에 있는 선승들 선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불법이나 깨달음에 얽매여 목숨을 잃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래서 조주록에서 조주스님은 "형제여! 남쪽에서 오는 사람은 짐을 내려주고, 북쪽에서 오는 사람은 짐을 더 실어주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와 함께 비판하는 것이 '向上(향상)'이다. '향상'이란 무엇을 향해서 그것을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佛向上(불향상)'이란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매진하는'이라는 뜻이 아니라 '부처의 경지를 초월하는'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향상'마저도 뛰어넘으라고 조주는 말한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부처 위로 초월한 사람[佛向上人]은 누구입니까?"
스님께서 선상을 내려와 그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씀하셨다.
"이 놈이 이만큼 크니 세 토막으로 내도 되겠군. 무슨 위니 밑이니 하는가?"

 

이러한 조주의 선풍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대중들이여! 趙州 古佛이 사람을 위하다가 온 몸이 가시덤풀 속에 묻혀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니 누가 구할 사람 있겠는가? (본지풍광 200쪽)"라고 극구 찬양하고 있다.
본지풍광에서 조주스님과 운문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특별히 많이 나오는 것도 性徹禪 이해의 관건이 된다. 즉, 말끝마다 '佛'이나 '佛法' '道'를 운운하여 도리어 거기에 얽매이는 모범생들을 꾸짖는 말이다. 이런 사상은 운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선승이 佛祖를 초월하는 한마디를 말해달라고 하자 운문스님이 대답하기를 "호떡"이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의 행간에 가려진 부분을 읽는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자기자신은 내던져 두고 밖으로 부처나 조사를 찾는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네가 속이 허해서 그러는구나. "호떡 먹고 속 채워 부처니 조사니 하는 헛소리 하지 말아라!" 필자의 이런 해석은 本地風光 49칙 [雲門호餠(운문호병)]에 나타난 성철스님의 해설이 뒷받침 해줄 것이다.

    

(3) 무심사상의 선양

 

우리는 성철 선의 특징 중의 하나로 無心思想을 들 수 있다. [본지풍광]의 제32칙 [雲門屎蹶(운문시궐)]을 보자.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고, 無心이 道이다. 다리 셋인 나귀가 발굽을 놀리며 나아가니, 호남의 여러 스님들도 그렇다."

여기에서 '다리 셋인 나귀가 발굽을 놀리며 나아가니'는 馬祖스님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無心思想은 馬祖禪(마조선)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무심의 정신은 조계선풍의 핵심으로 그 연원은 깊고 그 전총은 면면히 이어진다.

고려의 백운스님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보아도 그렇고, 조선의 혜심스님의 [선문염송]의 경우도 그렇다. 위의 두 스님들이 중국의 선서를 발췌하는 기준은 無心思想을 제대로 드러내느냐 아니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들 중에는 모두가 무심사상과 연관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심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에서 馬祖스님의 이야기를 어떻게 소개하는지 그 목판

 

본 上卷, 12葉을 보자.

마조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조스님이 대답했다. "네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그 스님이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道란 무엇입니까?"
마조스님이 대답했다. "無心이 바로 도이다."
그 스님이 다시 질문했다. "그러면 道와 부처와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마조스님이 대답했다. "손을 펴는 것이 道라면 손을 오므리는 것이 부처입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고려 백운스님은 중국의 마조스님의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위에서 인용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그 많은 마조스님의 말씀 중에서 이 말을 인용한 뒷면에는 백운스님의 적극적인 선택이 들어있다.

곧, 마조선의 핵심은 無心이라는 백운스님 자신의 선관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무심사상이 곧 백운스님 자신의 입장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백운스님은 '修;수행'과 '道;궁극의 진리'의 관계를 논하는 마조스님의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도란 修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다만 無心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조계선의 전통이요 정통이다.
단 여기서 性徹禪(성철선)과, 마조 백장 황벽으로 이어지는 臨濟禪(임제선)과의 차이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완벽하고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할 것을 강조하는 시대사조의 배경에서 오는 차이를 들 수 있다.

性徹禪과 臨濟禪이 모두 頓悟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점에는 동일하다. 그리고 그 돈오사상은 무심사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동일하다. 그런데 임제선의 경우는 무심보다는 돈오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런 특징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돈황본 육조단경이다. 이 육조단경은 마조교단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최근의 연구에서 이미 밝혀지고 있다. 마조교단이 형성되던 당시에는 북종이라고 불리우는 신수 계통의 선사들에 대한 구별 의식이 있었다. 그 결과 마조교단과 그의 후손들은 돈오사상에 역점을 두며 무심사상을 곁들였다.

그러나 性徹禪의 경우는 돈오무심 사상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무심사상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철스님이 활동하던 20세기 한국불교에서는 남종선이 돈오를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심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규봉스님의 돈오점수사상과 남종선을 돈오점수로 이해한 보조스님에게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즉 규봉스님은 [선원제전집도서], [원각경대소초], [배휴습유문] 등에서 돈오점수를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이 규봉스님이 말하는 돈오점수의 '돈오'를 臨濟禪의 '돈오'와 혼동을 한다. 무심에 대한 性徹禪의 특색은 돈오돈수를 부정하는 규봉스님의 사상과, 규봉스님이 말한 돈오를 臨濟禪의 돈오로 이해한 보조선의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규봉스님은 형이상학적 실재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本源]인 '本覺眞心(본각진심)'의 상주불멸을 상정한다.

그러나 성철스님은 그런 실재를 부정한다. 스님은 無心할 것을 끝까지 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완벽한 깨달음이 못된다는 것이다. 性徹禪의 특징은 철저한 無心思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철선의 특징은 본지풍광 58칙, [向上一路(향상일로)]를 제창하는 곳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向上一路'의 말뜻을 흔히들 '한 단계 위에 있는 길'이라고 한다. 이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이 말은 '끝 없이 초월해가는 길'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런 성철선의 정신은 다음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중들이여, 운문은 덕산조사의 門庭(문정)을 선양하고 풍혈은 임제대사의 가업을 이어받았다. 비록 일언일구가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여, 一機一境(일기일경)이 하늘을 흔들고 움직이나, 먼 뒷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본지풍광 194쪽)

 

일체를 초월한다는 그것에 안주해서는 안 되고 그것마저도 뛰어넘어 끝없이 무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有心했다가는 그것이 도리어 하나의 말뚝이 되어 수행인을 얽어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끝없이 초월하는 것이 성철선의 本地風光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지풍광 82칙, [陳操勘僧(진조감승)]에서 "끊임없이 초월하도록 하는 한 수단은 수천 명의 부처님이라도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向上一機 千佛不然(천불불연)]"고 한 말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우리는 성철선의 특징이 唐代 曹溪禪의 핵심적인 맥락에 서 있음을 살펴 보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조 · 황벽 · 임제스님으로 이어지는 무심 사상과, 육조 혜능을 스승으로 받드는 남종선의 돈오사상이 하나로 어우러져 돈오무심 내지는 돈오돈수로 전개된 것이다.
그리고 이 돈오무심 사상은 임제 계통 뿐만 아니라 당대에는 조주선사 운문선사 등에도 공통으로 나타나는 모습임도 알았다. 그리고 성철스님은 소위 5宗 가풍의 구별없이 [본지풍광]에서 다양하게 그 선사들의 공안을 인용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송대 이후 파벌적 종파의식에 의해 唐代禪(당대선)을 바라보는 선종사관에 대해 새로운 반성의 빛을 던져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宋代(송대)에 고착된 파벌적 종파의식으로 唐代禪을 조명하던 기존의 선종사관을 잠시 보류하고 唐代의 실제 상황에 입각해서 조계선의 본래 정신인 돈오돈수 내지는 돈오무심을 재인식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규봉 종밀이 이해한 불교사상, 그 중에서도 '本覺眞心(본각진심)' 개념을 매개로 하여 교와 선을 하나에 엮은 것은 어디까지나 종밀 자신의 철학적 신념의 표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규봉 종밀의 선교관 그중에서도 돈오점수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한 고려의 보조스님의 선사상은 조계선의 근본인 돈오무심 내지는 돈오돈수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보조스님의 시각으로 조계선을 한정시켜왔던 교계 일부의 견해는 비판 수정되어야 한다.

끝으로 본 논문에서는 주어진 제목의 제한 때문에 다루지 못했지만 성철선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성철스님이 교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도 선사상과 유기적으로 비교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삼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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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地風光과 臨濟禪風에 대한 논평       혜남(중앙승가대학 교수)

 

성철 큰스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간에 1년이 지났다. 지난해 큰스님이 떠나신 후 수개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해인사를 찾은 것은 우리 시대를 살고 간 한 사람의 위대한 사상가, 혹은 불교학자를 보낸 아쉬움에서 우러나는 哀悼(애도)의 情(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종교적인 성자를 보내는 儀式(의식), 다시 말해서 선지식이 마지막으로 시현하여 보이는 열반산림법회에 동참하는 의미가 더 컷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을 보낸 1주기를 기하여 종단적 규모의 추모법회 같은 것이 훨씬 격에 어울릴 것이다. 본인은 큰스님께서 해인사 방장스님으로 계실 때 퇴설당, 선열당 등에서 참선하는 척하는 흉내를 내며 큰스님이 깨달은 법을 바로 깨닫기 위하여 노력한 적은 있지만 큰스님의 선사상에 대하여 토론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禪(선)은 개인의 內證(내증)의 법으로서 自悟自得(자오자득)할 뿐으로 물을 마셔본 사람이 물의 맛을 아는 것과 같아서 실제로 그 경계에 도달하지 아니한 사람은 다만 그 사람이 남겨놓은 찌꺼기인 말만 씹고 있을 뿐일 것이다.

선사상을 논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것인데도 불구하고 신규탁 씨의 [本地風光과 임제선풍]은 추상적인 언어를 통하여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는 좀더 보충설명이 있었으면 한다.

첫째 신박사는 육조혜능, 황벽, 임제의 선사상을 돈오무심으로 파악하고 "육조스님의 정신을 이어 받는다고 자처하면서 漸修(점수)를 주장하면 자기모순이다.
오히려 남종선에 국한하지 말고 범위를 넓혀 불교라는 차원에서 점수를 논하는 편이 정당하다고 하겠다"라고 말한 뒤 이어서 "육조의 법손임을 자처하면서 점수를 주장하는 규봉스님이나 보조스님의 초기 사상은 당나라 시대의 남종선을 주체적으로 해석한 것이거나 아니면 오해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 스님들이 당시의 사상사적 사실에 거슬리면서까지 점수론을 주장한 의도를 분명히 하고, 이 스님들의 내적 사상체계 내지는 그 당시 사상사 위에서 이 주장의 의의를 밝혀야 할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주장을 한다면 신씨 자신이 먼저 규봉과 보조 당시의 사상사적인 사실을 좀더 성실하게 규명하여야 했을 것이다.

다음에 본지풍광의 구성에 대하여 신씨는 상당법어 91꼭지 낙해법이 9꼭지 모두 합하여 100꼭지로 나누어져 있는데 100이라는 숫자로 이 책을 엮은 것은 碧巖錄(벽암록)이나 從容錄(종용록)의 100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고 지적하고

이 책 가운데 각 법문의 구성을 7부로 나누어 이상은 雪竇頌古百則(설두송고백칙)이나 碧巖錄 백칙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유사하다는 것은

  1. 성철스님의 서언 부분은 碧巖錄의 垂示(수시)에 해당하고
  2. 옛조사의 禪問答을 인용하는 부분은 양쪽이 거의 같고
  3. 위의 2에 대한 성철스님의 평가부분은 碧巖錄(벽암록)의 착어와 유사하고
  4. 위의 2에 대한 옛 스님의 송을 인용한 것은 설두의 송고와 유사하고
  5. 위의 4에 대한 성철스님의 평가는 원오의 착어와 유사하다.
그러나
  6. 이상의 전체에 대한 성철스님의 결어 부분과
  7.의 성철스님의 법문을 마치고 법좌에서 내려오는 모양을 엮은이인 원택스님이 기록한 부분인 "喝一喝 遂下座(갈일갈 수하좌)"의 부분은 碧巖錄(벽암록)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碧巖錄이 고인의 선문답을 老婆心(노파심)으로서 알기 쉽게 해설한 評唱(평창)부분이 많아 도리어 학인들에게 사량분별을 일으키는 폐단이 많았으며 이 때문에 大慧宗고(대혜종고)는 학인의 사량분별을 제거하기 위하여 스승의 저서인 碧巖錄을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 비하여 本地風光은 이 평창에 해당하는 부분이 거의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학인에게 사량이 미치지 못하게 하는 긴박감을 풀어주지 아니하는 이른바 '상당법'의 정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신씨는 지나치게 碧巖錄(벽암록)과 동질성을 찾는 데 급급한 듯하다. 혹은 엮은이가 碧巖錄을 지나치게 의식하였다면 碧巖錄의 권위와 명성을 의존하여 도리어 성철스님의 중요한 법어와 정신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본지풍광에 수록된 법어 가운데 이른바 상당법어의 경우 시자들이 기록하는 거의 정형구에 가까운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잡고 한참 묵묵한 후에 말씀하셨다' '上堂(상당) 拈柱杖(염주창)하고 良久云(양구운)'의 구가 거의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철스님 생전에 출판된 책임으로 만약에 성철스님이 친히 교정하셨다면 모르겠지만 처음과 끝부분에 스님의 거동을 기록하기로 하였다면 법좌에 오르기 이전의 모습이 좀더 상세하게 기록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평자도 불기 2516~7년의 여름 하안거를 해인사에서 보내었지만 큰 스님이 법좌에 오르실 때는 항시 주장자를 오른쪽 어깨에 의지하여 세워놓고 법문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나의 기억력보다는 직접 편집을 한
원택스님이나 천제스님, 원명스님, 원융스님, 원영스님 등 큰스님의 시자 스님들이 직접 큰스님에게 듣고 확인하였을 터임으로 본지풍광의 어디까지가 큰 스님이 친히 확인하신 곳이고 어디까지가 시자가 기록한 부분인지 혹은 어떤 부분은 傳聞(전문)에 의한 것이 있는지 확실하게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논평의 답변                        신 규 탁

 

먼저 첫 번째의 지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혜남스님의 이 지적은 매우 온당하고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많은 논증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논증은 다음의 기회[ 연세철학 (1995년, 봄 출간예정)]로 미루고 그 줄거리를 말씀드립니다.

규봉종밀은 '本覺眞心'을 테크니칼텀으로 사용해서 선과교를 대비고 있음은 이미 알려진 일입니다. 그런데 규봉의 '本覺眞心'은 형이상학적 실재로서 反佛敎的(반불교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화엄의 法界思想과 선의 본래면목 등을 초월화시켜 그것을 실재로 설정한 점은 전통적인 화엄에서는 물론 禪쪽으로부터의 비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종밀이 [원각경대소초] 현담에서 '緣起(연기)'를 '性起(성기)'로 해석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보조스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지적은 제 논문의 머리말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碧巖錄(벽암록)의 [평창] 부분은 공안을 설명하거나 강의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本地風光의 경우는 설명조보다
학인들이 자신의 본래면목을 드러낼 수 있도록 긴장감 있고 밀도 있는 언어로 계속 추궁하고 있다"가 그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혜남스님과 저도 동감입니다.

세 번째의 지적은 가르쳐주신 대로로써 학술세미나에서는 "원택스님이 필록한"이라 했는데 이번 논문에서는 "원택스님이 편집발행한"으로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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