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禪門正路에 나타난 如來禪의 특성

通達無我法者 2008. 5. 3. 19:44

 

 

 

禪門正路에 나타난 如來禪의 특성
The Characteristics of 'Yeorae-Seon' in the Seonmun-jeongno
김 원 영 (Kim Won-young)   성철선사상연구원 운영위원   
ssnim@chollian.net
  
 
목     차
1. 서 언     2. '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난 如來禪(여래선)의 특징
       2_1.여래선과 三解脫觀(삼해탈관)   2_2.여래선과 止觀(지관)   2_3.여래선과 十地說(십지설)
3. [禪門正路;선문정로]에 나타난 여래선의 특징    3_1.여래선과 조사선
       3_2.여래선과 화두 참구   3_3.여래선과 三關 透過(삼관 투과)   3_4.여래선과 無生法忍(무생법인)
4. 결 론

 

1. 서 언


禪門正路(선문정로)는 견성과 성불에 대한 바른 견해를 제시하기 위하여 선 수행과 관련되는 여러 가지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은 頓悟(돈오)이다. 즉 구경의 깨침이란 실제 체험으로서 無心(무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돈오하기 위한 수행방법으로서 화두를 참구하는 如來禪(여래선)을 주장하고 있다.
여래선은 화두와의 관련에서만 주장되는 것이 아니고 이론적으로 아는 것을 중시하는 頓悟漸修說(돈오점수설)에서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견해를 종합할 필요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선문정로]에서 비판하고 있는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을 비롯하여, 선종이 성립되기 이전에 성립한 원효스님의 金剛三昧經論(금강삼매경론)을 통해 이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금강삼매경]은 초기 선종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서,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이 [선문정로]와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선문정로]의 주장에 대해 보완이 될 수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상의 여러 주장들 이외에 [선문정로]에서 주장하는 여래선과 조사선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선문정로]에서 강조하고 있는 화두 참구를 大乘止觀(대승지관)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모든 정안종사들이 여래선의 수행과정에서 통과하는 寤寐一如(오매일여)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三關(삼관)의 특성을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리하여 여래선은 수행상에서 因位(인위)만이 아니라 果位(과위)인 究竟(구경), 佛地(불지)의 無生法忍(무생법인)까지를 말하는 것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금강삼매경론'에 나타난 여래선의 특징

   2.1. 여래선과 三解脫觀(삼해탈관)
{금강삼매경}에서는 여래선을 三解脫(삼해탈)과 관련하여 설하고 있는데, 원효는  삼해탈은 곧 三慧(삼혜)라고 하면서 聞思修 三慧(문사수 삼혜)는 人空(인공)과 法空(법공)을 관하는 大乘觀(대승관)이라고 한다. 삼혜를 해탈이라 하는 것은, 人(인)과 法(법)이 空(공)함을 관함으로써 二執(이집)과 現行(현행)의 二縛(이박)을 伏離(복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여래선은 大乘空觀(대승공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여래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삼해탈에 대해 셋을 남겨 두고(存三;존삼) 하나를 지킴(守一;수일)으로써 여래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므로, 이에 대한 經文(경문)을 중심으로 원효의 해석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력보살:
범부 중생은 어떤 법으로 統御(통어)하여야 (여래장의) 實際(실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
셋을 남겨 두고 하나를 지킴으로써 여래선에 들게 한다.
대력보살:
어떤 것이 셋을 남겨 둠이고, 하나를 지킴이며, 여래선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부처님:
셋을 남겨 둠이란 삼해탈을 남겨 둠이며, 하나를 지킴이란 一心의 如(여)를 지킴이며, 여래선에 들어감이란 理觀(이관)하는 心(심)의 如(여)가 이런 지위에 들어감이니 곧 實際(실제)에 들어감이다.
대력보살:
삼해탈법은 어떤 것이며, 이관삼매는 어떤 법으로 들어갑니까?
부처님:
삼해탈이란 虛空解脫(허공해탈)·金剛解脫(금강해탈)·般若解脫(반야해탈)이다. 理觀(이관)하는 心(심)이란 心(심)이 如理(여리)하게 淨(정)하여 可否心(가부심)이 없는 것이다.
대력보살:
어떤 것이 用(용)을 남겨 둠이며, 어떤 것이 그것을 觀(관)함입니까?
부처님:
心事(심사)가 둘이 아님을 用(용)을 남겨 둠이라 한다. 한 모양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에 得失(득실)이 없으며,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지위에 淨心(정심)이 흘러들어가니 그것을 觀(관)함이라고 한다.

먼저 삼해탈관에 대한 원효의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聞慧(문혜) 또는 第一解脫(제일해탈) 혹은 初解脫(초해탈)이란 안으로 色相(색상)이 있고 밖으로 色(색) 등을 관하는 것이다. 즉 안으로 色·受·想·行·識(색·수·상·행·식) 등 五陰法相(오음법상)이 남아 있어서 我空(아공)을 관하는 것으로 이들이 衆生空(중생공)임을 관한다. 즉 중생공임을 듣고(聞;문), 이 들음에 의하여 信(신)과 解(혜)가 일어나게 되므로 이것을 문혜라 한다.

이 空(공)은 문혜로써 얻어지기 때문에 들어가기 쉽다. 문혜로써 얻는다 함은 內假(내가)와 外假(외가)의 二相(이상)이 모두 不可得(불가득)이기 때문이며, 다만 듣고서 信(신)할 뿐이다. 또한 밖으로 色(색) 등을 없애지 않으면서 안으로 空(공)을 관하는 것이 허공이 색상을 없애지 않음과 비슷하므로 이것을 허공해탈이라 한다.
思慧(사혜) 또는 第二解脫(제이해탈)이라 함은 안으로 색상이 없고 밖으로 색 등을 관하는 것이다. 즉 안으로 색 등 오음법상을 없애고, 밖으로 一切山河(일체산하) 등이 공함을 관함으로써 욕계의 제법이 공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이 공은 난해하며 사혜의 소관이기 때문에 사혜라 한다. 안의 오음법과 밖의 일체법이 불가득이기 때문이다.
사혜로써 내외 제법을 추구하고 析破(석파)함이 마치 金剛(금강)이 모든 色法(색법)을 파괴함과 흡사하므로 이것을 금강해탈이라 한다.
修慧(수혜) 또는 第三解脫(제삼해탈)은 팔해탈관 중 나머지의 六解脫(육해탈)이니 이것은 모두 수혜이다. 욕계는 물론이고 上 2계인 색계와 무색계에서 일체법이 공임을 관하기 때문이다. 이 수혜의 六觀(육관)은 모두 삼매인 定(정)에 의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총칭하여 반야해탈이라 한다.
수혜에서 일어나는 육관 중에서도 특히 세 번째의 것이 중시되어 제삼해탈은 淨解脫(정해탈) 身作證(신작증) 具足住解脫(구족주해탈)이라 부른다. 색계오음이 光潔寂靜(광결적정)하여 모두를 공이라 관하므로 정해탈이라 하고 自內所證(자내소증)이므로 신작증이라 한다. 이때 身(신)이라 함은 意身(의신)을 가리키며, 작증이라 함은 智(지)로써 번뇌를 끊고 證(증)을 일으키거나 혹은 內色想(내색상)을 伏(복)하기 때문이다.
색계오음이 공함을 구족한 것이 제삼해탈이다. 이와 같은 삼해탈에 있어서 聞慧(문혜)와 思慧(사혜)에서 慧(혜)라 함은 思察尋思(사찰심사)하고 簡擇(간택)함을 말한다. 사혜의 단계에서도 三昧 定(삼매 정)의 관을 닦지만 思察分別(사찰분별)함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수혜는 삼매인 定(정)에서 이루어지므로 수혜의 육관에서는 모두 定慧不二(정혜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행 단계와 관련해서 그 특색을 보면, 먼저 셋을 남겨 둠이라 함은 삼해탈관의 세력이 남아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 관의 처음 시작은 十信位(십신위)이며 用(용)이 남아 있기 시작하는 것은 十住位(십주위)이다. 용이 남아 있다 함은,
만약 훌륭한 용을 얻지 못하면 靜心(정심)에서는 공을 관하지만 涉事(섭사)하면 失念(실념)하여 我(아)와 我所(아소)를 取(취)하고 違順(위순)의 경계에 집착하므로 心(심)과 事(사)가 서로 다르게 된다. 또한 하나를 지킴이라 함은 一心(일심)의 如(여), 즉 一心法(일심법) 中(중) 心眞如門(심진여문)을 지킴을 말한다. 入觀時(입관시)에는 고요히 一如之境(일여지경)을 지키고 出觀時(출관시)에도 一味之心(일미지심)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를 지킴이라 한다. 이 관의 시작은 十行位(십행위)에서이다.

이리하여 "만약 삼해탈관을 修(수)함이 淳熟(순숙)하면 (입관시;入觀時에는 물론이고) 出觀(출관)하여 涉事(섭사)하여도 觀勢(관세)가 남아 있으므로 我(아)와 他(타)의 相(상)을 취하지 않고, 好惡(호악)의 경계에 집착하지 않으며, 入(입)과 出(출)을 함께 잊어버리고 心(심)과 事(사)가 둘이 아니다. 이리하여 입관해서는 寂照行(적조행)을 하고 출관해서는 化物行(화물행)을 하지만, 入(입)과 出(출)에서 중도를 잃지 않으므로 입과 출이 둘이 아니다"라고 한다.
관을 행함에 "입과 출이 둘이 아니다" 함은 動(동)과 寂(적)에 있어서 "動(동)이면서 常寂(상적)이고, 또한 寂(적)이면서 恒動(항동)하여 動(동)과 寂(적)에 출입이 없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動靜(동정)이 一如(일여)한 경지이다. 그러므로 여래선은 동정일여한 상태에서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경지는 수행 계위상 보살 초지 이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여래선이라 함은 초지 이상에서의 선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는 "그것을 관함"에서는 두 가지 관을 설명하고 있는데, "한 모양에도 머물지 않는다" 함은 二諦觀(이제관)이기 때문이며, "마음에 득실이 없다" 함은 平等觀(평등관)이기 때문이다. 이 두 종류의 方便觀(방편관)에 의하여 초지의 法流水(법류수) 중에 나아가므로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지위에 淨心()이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本業經(본업경)}에 의하면 "從假入空(종가입공)을 이제관이라 하고 從空入假(종공입가)를 평등관이라 하는데, 이 두 관은 方便道(방편도)이다. 이 두 공관에 의하여 中道第一義諦觀(중도제일의제관)에 들어가서 雙照二諦(쌍조이제)하며 心心(심심)이 寂滅(적멸)하여 초지의 법류수 가운데에 나아간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제관이라 함은 遣俗觀眞(견속관진)함이니 곧 正體智(정체지)의 方便(방편) 작용이고, 평등관이라 함은 融眞觀俗(융진관속)함이니 곧 後得智(후득지)의 방편 작용으로서, 俗(속)을 幻(환)과 같이 관하여 득실을 취하지 않으며 適(적)도 없고 莫(막)도 없으므로 평등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두 종류의 방편관 중에서 앞서 말한 삼해탈관은 이제관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금강삼매경론})에서는 다만 처음과 나중의 두 관만 널리 설한다. 중간의 관은 미루어 알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래선에 들어간다는 것은 방편관으로서의 이제관인 삼해탈관을 통하여 초지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을 正觀(정관)이라 한다. 地前位(지전위)에서의 觀(관)이 相似觀(상사관)이라면 이것은 眞觀(진관)이고 正覺(정각)이며, 또한 중도제일의제관이라 한다.
 
   2.2. 여래선과 止觀(지관)
다시 삼해탈관과 止觀(지관)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원효의 이론은 一心二門(일심이문)에 근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守一(수일)은 일심법 중 心眞如門(심진여문)을 지킴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眞如門(진여문)에 의한 것이므로 그 근거에 있어서는 修習止行(수습지행)과 같다.
또한 存三(존삼)은 일심법 중 心生滅門(심생멸문)에 의한다고 할 수 있다.
[금강삼매경론]에서는 存三(존삼)이 심생멸문에 의한다고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守一心如者 一心法中 有二種門 今先守其 心眞如門(수일심여자 일심법중 유이종문 금선수기 심진여문)"이라 하고서 '一心法中 有二種門(일심법중 유이종문)'인데 '今先(금선)'하여 守一(수일)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존삼은 심생멸문에 의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근거에 있어서는 修習觀行(수습관행)과 같다. 이와 같이 존삼과 수일에 의하여 여래선에 들어간다고 하므로 여래선은 지관으로 말하자면 止觀俱行(지관구행)임을 말한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은 보살지의 地上位()이다.
 
   2.3. 여래선과 十地說(십지설)
止觀行(지관행)은 地前(지전)에서는 正觀(정관)에 隨順(수순)하지만 地上(지상)에서는 雙運(쌍운)하게 되는데, 십지설에서 주장하듯이 차례대로 나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원효는 십지에 있어서 그 地(지)를 각각으로 구분하지 않고 다만 大地(대지), 一地(일지) 혹은 一不一地(일불일지)라 하여 초지 즉 십지라고 한다.
왜냐하면 초지에 들어감으로써 일시에 十重法界(십중법계)에 頓入(돈입)하기 때문이며 또한 初門(초문)에 들어감으로써 곧바로 遍滿(편만)하기 때문이다. 앞의 삼해탈관 등 2종 방편관에 의하여 마음을 깨끗이 하고 이로 인하여 一不一地(일불일지)인 초지의 법류수 중에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여래선에 들어감으로써 초지 즉 십지라 하여 이를 구별하지 않지만, 초지 이전의 관은 방편관이라 하고 초지 이후의 관은 정관이라 하여 구분하고 있다.
地上位(지상위)에 있어서 원효는 특히 제8지에 주목하고 있다. 제8지에 있어서는 功用(공용)과 無功用(무공용)의 차이가 있어서 그 이전에는 有加行(유가행) 有功用(유공용)으로 이루어지지만 8지 이상에서는 無加行(무가행) 無功用(무공용)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한다.
또한 이런 단계를 번뇌를 끊는 것과 관련하여 살펴보면, 근본번뇌인 無明住地煩惱(무명주지번뇌)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에는 等覺(등각)에서 妙覺(묘각)에 頓入(돈입)할 때에 모든 번뇌가 끊어지지만, 종자의 상속에 의하는 경우에는 각 단계마다 번뇌는 끊어진다.
 
                     3. {禪門正路}에 나타난 여래선의 특징

   3.1. 여래선과 조사선
여래선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는 곳은 {능가경}인데, 여기에서는 禪(선)을 4종으로 분류하면서 여래선을 가장 높은 지위의 선이라고 한다. 이후 여래선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아마도 荷澤神會(하택신회)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북종선을 淸淨禪(청정선)이라고 하고 이에 대응하는 남종선을 여래선이라고 했다. {역대법보기}에서 전하는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神會和尙(신회화상)은 매월 법회를 갖고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였는데, 淸淨禪(청정선)은 부정하고 如來禪(여래선)을 주장하며 知見(지견)을 내세웠다.

여기에서 청정선이라 함은 看心看淨(간심간정)하는 漸敎(점교)의 禪(선)을 말하는데 이것은 부정하고(破;파), 여래선이라 함은 여래장의 본성이 공적함을 돈오하여 여래의 법신을 얻는 것이니 이것은 긍정하였다(立;입). 또한 無住心(무주심)의 空寂(공적)한 體(체) 위에 이 智(지)의 作用(작용)으로서 스스로 알고 증득하고 보는 知見(지견)을 돈오라고 하여 강조하고 있다.
하택의 知(지)를 중시하는 이런 사상은 후에 華嚴家(화엄가)인 규봉 종밀을 거쳐 고려의 보조 지눌스님에게로 이어졌는데,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에 대하여 {선문정로}에서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圭峯(규봉)이 先悟後修(선오후수)의 뜻을 總判(총판)하여 말하였다. 此性(차성)이 원래로 번뇌가 없으며 無漏(무루)한 智性(지성)이 본연히 구족하여 불타와 더불어 차이가 없음을 頓悟(돈오)하여 이를 의지하여 修習(수습)하는 사람은 이를 最上乘禪(최상승선)이라 하며 如來淸淨禪(여래청정선)이라 명칭한다. (중략) 達摩門下(달마문하)에서 展轉(전전)하여 대대로 相傳(상전)하는 것이 곧 이 선이라 하였다. 그런즉 頓悟(돈오)와 漸修(점수)의 二義(이의)는 乘車(승차)의 二輪(이륜)과 같아서 한 개도 없어서는 안 된다.

* 達磨正傳(달마정전)의 禪門巨匠(선문거장)들은 如出一口(여출일구)로 無心無念(무심무념)인 究竟覺(구경각)의 圓證(원증)으로써 頓悟(돈오)와 見性(견성)이라 하였으며, 十地 等覺(십지 등각)을 초월하여 미세망념이 滅盡(멸진)한 佛地(불지)의 無生法忍(무생법인)을 正悟(정오)라 如來淸淨禪(여래청정선)이라 하였다. 객진번뇌가 여전히 다름이 없는 解悟(해오)로써 達磨相傳(달마상전)의 禪宗(선종)이라 함은 선종을 모욕하는 일대망언이다.

여기 {修心訣(수심결)}에 대한 評釋(평석)에서는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는데, 하나는 규봉의 돈오점수설을 달마 정전의 여래청정선이라고 한 점과, 또 하나는 달마선의 선종이 解悟(해오)를 견성이라고 한 점이다. 다시 말하면 {수심결}에서 말하듯이 달마선 즉 여래선이란 해오인 견성 즉 돈오에 근거하여 점수를 수행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여래선에 대한 보조스님의 이런 잘못된 견해는 규봉스님을 이은 것이며, 또한 규봉의 이와 같은 이해는 하택의 견해를 계승하고 있으므로 하택과 육조와의 견해 차이에서 이 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택에게 있어서는 아는 것이 강조되었지만, 혜능의 조사선에 있어서는 여래장의 自性(자성)인 空寂性(공적성)은 반드시 색성향미촉법에 住著(주저)하지 않음을 통과하여야만 이 여여한 空寂心(공적심)인 般若心(반야심)[淸淨心(청정심), 無念心(무념심)]이 드러난다고 한다.
신회에 있어서는 공적심을 아는 것(知;지)에 근거하여 수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에서는 "이 한 자 知字(지자)가 모든 오묘함을 다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혜능에게 있어서는 아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며, 또한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모든 外境(외경)에 집착하지 않는 한 과정을 통과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선문정로}에서는 신회와 혜능 간의 이런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반으로 昭昭靈靈(소소영영)한 靈臺(영대)의 智性(지성)이 있어서 능히 보며 능히 듣고 五蘊(오온)의 身田(신전) 속에서 主宰(주재)를 짓나니 이렇게 하여 善知識(선지식)이라 한다면 크게 사람을 속임이다. 만약에 昭昭靈靈(소소영영)을 認得(인득)하여 너의 진실을 삼는다면  갑睡(갑수)할 時(시)에는 어째서 昭昭靈靈(소소영영)이 없어지는가. 만일 갑睡(갑수)할 때에 없으면 이것은 도적을 誤認(오인)하여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으니 이는 生死(생사)의 근본이며 妄想(망상)의 緣起(연기)이다.

'昭昭靈靈(소소영영)한 靈臺(영대)'에 스스로 아는 知의 성품이 있고 그 작용에 의하여 보고 들을 수 있는데, 靈臺(영대)에 이 작용이 있음을 아는 것으로써 깨친 선지식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한다. 이것은 바로 앞서 신회의 견해를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昭昭靈靈(소소영영)함을 진실한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으로서 생사의 근본이며 망상의 연기라 하고, 이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도적을 오인하여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여 부인하고 있다.
또한 "아무리 크게 깨치고 또한 지견이 高明(고명)한 것 같아도 실제 경계에 있어서 숙면할 때에 암흑이면 이는 망상의 변동이요 實悟(실오)는 아니다"고 하여, 지견으로 아는 것은 절대로 부정하고 있고 반드시 熟眠一如(숙면일여)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진정한 깨침이라고 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색성향미촉법의 外境(외경)에 住着(주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숙면일여를 통과해야 함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여래선과 조사선에 대한 구별이나 우열을 논하는 경우, 그 시작은 仰山(앙산)스님의 법문에 근거하고 있다. 즉 앙산이 香嚴(향엄)에게 말하기를 "여래선은 곧 사형께서 알았음을 인정하나 조사선은 꿈에도 못 보았습니다"고 한 것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피상적으로 보아서 臨濟三句(임제삼구)와 관련하여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월하다고 한다.
그러나 [선문정로]에서는 임제삼구는 그 우열을 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사선과 여래선에 있어서도 이 둘은 같은 것으로서 우열을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여래선이 곧 조사선임을 주장한다.

如來禪(여래선)과 祖師禪(조사선)이 어찌 兩種(양종)이 있으리요. 암含不決(암함불결)하여 각각 조白(조백)을 妄分(망분)하여 특히 종지에 乖背(괴배)함을 未免(미면)하는도다.

원오스님은 이처럼 여래선과 조사선이 두 가지가 아니며 그 우열이 없음을 단언하고 있다. 그리고 中峰(중봉)스님도 달마스님이 전한 선이란 여래의 圓極心宗(원극심종)이라 하였고, 또한 여래선과 조사선을 나누는 것은 흡사 하나의 손을 두고 손바닥과 주먹으로 다르다고 구분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達磨(달마)가 멀리 西天二十七代(서천이십칠대)의 조사들을 계승하여 여래의 圓極(원극)한 心宗(심종)으로써 禪(선)을 삼았느니라.

如來禪(여래선)과 祖師禪(조사선)이여 一手(일수)를 掌(장)과 拳(권)으로 兩分(양분)함과 같도다. (중략) 照破(조파)하여 生死(생사)가 皆空(개공)한 明眼(명안)을 구비하지 못하면 어찌 仰望(앙망)하여 龍天(용천)이 부끄럽지 않으리요.

그러나 간혹 佛祖(불조)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여래선과 조사선을 양분하여 그 우열과 深淺(심천)을 妄論(망론)하는 할眼衲僧(할안납승)이 왕왕 있으므로 원오는 "특히 종지에 乖背(괴배)함을 未免(미면)한다"라고 꾸짖었으며, 또한 중봉은 "烏焉(오언)을 馬字(마자)로 誤寫(오사)함은 지금도 다 그렇고 黃葉(황엽)을 眞金(진금)으로 誤認(오인)함은 예도 또한 그렇다"고 통탄하였으니, 이처럼 正傳巨匠(정전거장)들은 如出一口(여출일구)로 여래선 즉 조사선임을 명시하였다.
다시 말하면 여래선이란 여래장의 究竟(구경)에 들어가는 것으로서 "如來心(여래심)을 領得(영득)하여 如來意(여래의)를 明見(명견)하고 如來色相(여래색상)을 正見(정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래선을 그 후에 조사들이 서로 전하였으므로 조사선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서, 삽三祖師(삽삼조사)들이 여래선을 계승하였다 함은 正眼宗師(정안종사)들의 定論(정론)이다. 따라서 조사선 즉 여래선임은 당연한 귀결이며, 그 내용에 있어서는 깊고 얕음이나 우열이 없는 것이다.
한편 앙산과 향엄의 문답에 보이는 조사선과 여래선에 대한 내용은 "이는 法門擧揚(법문거양)으로서 禪家(선가)의 回互時節(회호시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앙산과 현사의 대화에서 여래선과 조사선의 우열을 논한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신기한 기틀인 如來心(여래심)의 大用(대용)을 말한 것으로서 오직 정안종사만이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3.2. 여래선과 화두 참구
{선문정로}에서는 수행방법으로서 화두 참구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래선이 원래부터 화두 참구를 그 수행방법의 특질로 하는 것은 아니다. 화두가 널리 행하기 이전인 원오스님 시기에 이미 여래선과 조사선이 같은 것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는 여래선이 반드시 화두 참구를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화두라 하는 것은 조사스님들의 인연 설화 가운데서 極則處(극칙처)에 도달한 機緣(기연) 또는 言句(언구) 혹은 부처님의 인연 설화를 공부인이 참구하는 명제로 삼은 것을 말한다.
화두의 본질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공안(話頭;화두)은 佛祖(불조)의 大寂光三昧中(대적광삼매중)의 玄機大用(현기대용)이다"고 한다. 즉 화두라는 것은 최후의 조사 관문에 도달한 金剛正眼(금강정안)의 玄機大用(현기대용)이므로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뜻은 암호밀령인 것이다.
따라서 공안은 수행자가 통과해야 하는 일종의 시험이며, 그 관문을 통과해야만 인가를 받을 수 있으므로, 공안은 조사들이 설치해 놓은 관문 즉 祖師關(조사관)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화두 참구가 자성을 깨치기까지는 하나의 방편인 止觀行(지관행)이므로, 화두라는 것이 소극적으로는 의식 집중의 구심점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분별 집착과 惡知惡覺(악지악각)을 쳐부수는 무기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때에는 화두도 역시 하나의 망상이며 깨친 다음에는 버려야 하는 '강 건넌 다음의 뗏목'인 것이다.
화두 참구가 다른 수행법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금강삼매경론}은 여래장에 들어가는 觀法(관법)을 세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隨事取行(수사취행), 隨識取行(수식취행), 隨如取行(수여취행)이다. 여기에서 取(취)라 함은 能取所取(능취소취)의 분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攝行(섭행)함이 心(심)에 소속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먼저 수사취행이란 37道品行(도품행)인 止觀法(지관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4諦(제)와 12因緣法(인연법) 등을 관하는 것이다. 수식취행이라 함은 일체 중생은 一心(일심)의 所作(소작)이라는 唯識道理(유식도리)를 관하는 것이다.
수여취행이라 함은 일체법이 모두 평등하므로 평등한 一如(일여)에 따라서 六度行(육도행)을 행하는 것으로 일체개공의 공관을 관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볼 때 화두 참구는 萬法唯識(만법유식)의 唯識觀法(유식관법)도 아니며 또한 일체개공의 대승공관도 아니다. 화두라 하는 것은 조사스님들의 극칙처에 도달한 기연 또는 언구 혹은 부처님의 인연 설화를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수사취행인 지관법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眞覺國師(진각국사)는 "간화선의 한 문이 가장 지름길이니 止觀(지관)과 定慧(정혜)가 저절로 그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한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견성의 가장 지름길이라고 하면서 화두 가운데에 定(정)과 慧(혜)가 함께 갖추어 있고 止(지)와 觀(관)이 함께 있다고 한다. 곧 화두 참구는 止觀雙修(지관쌍수)이고 定慧不二(정혜불이)라는 것이다.
止(지)는 定(정)과 통하고 觀(관)은 慧(혜)와 통하는 것으로서, 慧(혜)라 함은 관찰하고 간택함을 말하고 定(정)이라 함은 審正思察(심정사찰) 즉 不沈不浮(불침불부)한 一境(일경)에 住(주)하는 것을 말한다. 화두 참구에 있어서는 오직 화두라는 一境(일경)만을 대상으로 하여 慧(혜)의 작용과 定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이것은 정혜불이라고 하며 또한 지관쌍수라고 한다. 따라서 견성 성불하는 데에는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이라고 한다.
화두 참구에서는 처음으로 화두를 들기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바로 정혜불이가 이루어지는데, 그 定(정)의 상태 (혹은 慧의 상태)에 깊고 얕은 차이가 있어서 뒤에서 보듯이 이른바 三分段(삼분단) 혹은 三關(삼관)이 설정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초관·중관·末後牢關(말후뇌관)의 三關(삼관)은 선정의 상태가 계속 이어지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말후뇌관을 타파하면 定과 慧(혜)가 等等(등등)하여 견성이고 성불이다.

또한 화두 참구는 처음부터 정혜불이로써 추구해 가지만 다른 隨事取行(수사취행)에서는 定(정)과 慧(혜)가 각각으로 수행하다가 地上(지상)에서 雙修(쌍수))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화두를 活句(활구)라고 할 때, 화두를 제외한 여타의 모든 언구 심지어 4제와 12인연법 등은 모두 死句(사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禪門(선문)에서는 圓頓(원돈)과 信解(신해)를 추구하는 것은 사구라 하여 이를 배제한다. 뿐만 아니라 疑團(의단) 없이 집중만 하는 화두 참구도 사구라고 한다. 이는 慧(혜)는 없고 오직 止(지)인 定(정)만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원효는 앞의 三行(삼행) 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기를, "수사취행은 不住生死門(부주생사문)하고 수식취행은 不住涅槃門(부주열반문)하며 수여취행은 一切皆空(일체개공)으로서 생사와 열반에 平等無二(평등무이)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수여취행을 하면서도 항상 隨事行(수사행)과 隨識行(수식행)을 하므로 寂滅(적멸)에 住(주)하면서도 空相(공상)을 취하지 않으며, 또한 수사행과 수식행을 하면서도 항상 수여취행의 平等行(평등행)을 하므로 여래장에 들어간다고 한다. 한편 화두는 그 기연으로 보면 世諦法(세제법)이므로 수사취행에 속하며, 그 본질에서 보면 일체개공인 수여취행의 玄機大用(현기대용)이다.
따라서 화두 참구는 적멸에 머물면서 인연법의 생멸을 관하는 것이며, 또한 인연법의 생멸을 관하면서도 적멸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滅卽生(멸즉생)이나 不住生(불주생)이며 生卽滅(생즉멸)이나 不守滅(불수멸)이다. 그러므로 생과 멸이 不二(불이)하고 動(동)과 寂(적)이 無別(무별)하여 動卽寂(동즉적)이어서 動寂一如(동적일여)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태가 三關(삼관)을 투과하여 실천될 때에 구경각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선문정로]는 화두 참구에 있어서 정안종사의 역할을 아주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숙면일여의 假無心(가무심)에서 이것을 지적하고 경책하여 활로를 지시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정안종사뿐이기 때문이다. 삼관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함에 있어서는 정안의 지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이 점은 법맥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점은 성철스님이 평소에도 화두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에 화두를 받은 스님에게서 그 지도를 받게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화두 공부에 대한 지도는 수행자가 신뢰하는 종사에게서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3.3. 여래선과 三關透過 (삼관투과)
{선문정로}에서 정안종사들은 모두 寤寐一如(오매일여)의 경지를 투과하여 비로소 正眼(정안)을 얻었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처럼 여래선에서 구경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매일여를 포함하여 세 단계의 관문 혹은 삼관이 있다.
삼관이라 함은 初關(초관), 重關(중관), 末後牢關(말후뇌관)의 세 관문을 가리키는 것인데,
{선문정로}에서 삼관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에서는 이것을 주장하고 있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성철스님은 점수를 격렬히 배척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이 점수를 말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오해도 있었다.
먼저 삼관을 말한 부분을 살펴보자.

日間 浩浩(일간 호호)히 분주할 때에 一如(일여)하느냐. 답하되 一如(일여)합니다. 夢中(몽중)에도 一如(일여)하느냐. 一如(일여)합니다. 또 묻되 정히 熟眠(숙면)할 때에는 주인공이 何處(하처)에 있느냐. 여기에서는 언어로써도 가히 대답할 수 없으며 이치로도 가히 伸說(신설)할 수 없었다.

먼저 일상에서 지극히 분주할 때에도 화두 참구가 일여한가 하는 것이다. 觀(관)에 들어서 고요히 앉아 있을 때에 화두 참구가 순일하게 되는 것과 같이 매우 분주하게 오가면서도 화두 참구가 그처럼 순일하여 차이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즉 動(동)과 靜(정)에서 일여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처음의 관문 즉 초관이다.
다음은 낮 동안 의식이 깨어 있을 때에 화두 참구가 일여하게 되듯이 밤에 잠잘 때 꿈속에서도 화두 참구가 일여한가 하는 것이다. 즉 몽중에도 일여한가 하는 것으로, 이것이 두 번째 관문 즉 중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이 아주 깊이 들어서 꿈도 없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화두 참구가 이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즉 숙면 중에도 일여한가 하는 것으로, 이것이 세 번째 관문이다. 이 세 단계를 두고 각각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라 하는데, 이 세 단계를 지나서 더 나아가야 구경인 여래선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먼저 몽중일여와 관련한 오매일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오매일여는 寤寐恒一(오매항일)이라고도 하는데, 이에는 몽중에서의 오매일여와 숙면에서의 오매일여 두 경계가 있다. 이 둘은 諸識(제식)과 十地說(십지설) 등과의 관계에서 볼 때 확연히 구별된다.

먼저 몽중 위의 오매일여는 제6의식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설법 기타에 아무리 능한 것 같아도 수면시에 캄캄하면 이는 전혀 제6의식 중의 사량분별인 知解邪見(지해사견)이요 實悟(실오)가 아니다"고 한다. 또한 이 몽중일여는 敎家(교가)인 화엄 7지에 해당하며, 이 제7지의 無想定(무상정)에서는 序重妄想(추중망상)이 습伏(습복)되므로 몽중에서도 화두가 여여하여 어떤 장애도 받지 않는다.
숙면 위에서의 오매일여는 다시 제8 아뢰야식의 微細妄想(미세망상)에 住着(주착)하는 8지 이상의 自在菩薩位(자재보살위)와 이 미세망상까지도 완전히 떠난 佛地(불지)에서의 眞如恒一(진여항일)로 나누어진다. 자재보살과 여래는 오직 멸진정의 一位(일위)만 남아 있지만 자재보살은 제8의 無記無心(무기무심)에서 일여하고 여래는 진여의 구경무심에서 일여하므로 진정한 일여는 불지의 구경무심뿐이다.
또한 제7지와 제8지와의 구별에 있어서 제7지까지는 加行(가행)이 있고 功用(공용)이 있지만 제8지 이상에서는 무가행, 무공용의 무심지에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阿賴耶(아뢰야)가 남아 있어 미세하게 流住(유주)하는 假無心(가무심)이니, 이 미세를 永斷(영단)하고 대원경지를 實證(실증)하여야 眞無心(진무심)이며 正眼(정안)이다.
다시 말하면 몽중일여인 무상정에서는 제6의식의 추중망상이 떨어지는데, 이것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제7지 보살의 位(위)이다. 그리고 숙면일여인 멸진정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화엄 제8지 이상인 자재보살 위에서는 제8 아뢰야의 미세망상이 남아서 작용하고 있으나, 불지에서는 이 미세망상까지도 완전히 떠나서 구경에 무심하다.
그리고 {선문정로}는 말후뇌관이라고 할 수 있는 자재보살위에서의 숙면일여 상태에 대해 상세하게 설하고 있다.
앞에서 오매일여에 대한 설명에서 보았듯이, 숙면일여에서는 추중망상인 제6 의식은 멸진하고 제8 아뢰야의 무기가 남아 있는 상태인데, 이것을 또는 大死(대사)라고 한다. 왜냐하면 一念不生(일념불생)하고 前後際斷(전후제단)하여 자기의 渾身(혼신)을 전연 망각하며 세간사가 있음을 보지 못하며 또한 세간의 塵勞(진로)가 그를 매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大死(대사)한 사람은 불법도리가 전연 없어서 玄妙得失(현묘득실)과 是非長短(시비장단)이 쉬어 버리므로 옛사람들은 이것을 '평지상의 死人(사인)'이라고 하거나 '見地(견지)가 淨潔(정결)하지 못하다'고 하거나 '命根(명근)이 단절되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이 상태는 생철을 두드려서 만든 사람과 같아서 혹 기특한 경계를 만나거나 혹은 惡境界(악경계)를 만나도 그의 면전에 있어서는 전연 몽중과 흡사하여 자기의 육근이 있는 것도 모르며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는 "外境(외경)과 諸心(제심)을 寂然息滅(적연식멸)하여 장벽이나 목석과 같은 무심경계"라고 한다.
또한 여기에서는 오직 화두삼매에 들어가 있으므로 "(밖으로) 사물을 抵觸(저촉)하여도 (화두가) 散去(산거)하지 않고 (안으로) 蕩蕩(탕탕)히 亡失(망실)되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이 도리는 흡사히 개가 끓는 기름냄비를 봄과 같아서 핥으려고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하나 버릴 수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一念不生(일념불생)하고 前後際斷(전후제단)한 勝妙境界(승묘경계)도 正悟(정오)가 아니므로 이 死地(사지)인 승묘경계의 大死(대사)한 상태에서 한번 뒤집어서 다시 大活(대활)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말후뇌관인 승묘경계의 깊은 삼매에 들어가서 "비록 動相(동상)이 不生(불생)하나 도리어 淨裸裸處(정나라처)에 坐在(좌재)하게 되면 이것은 견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서, 이것은 正知見(정지견)을 장애하며" 道眼(도안)을 障却(장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러한 경계에 도달하였어도 오직 轉身(전신)하는 대활로가 있어야 한다. 즉 숙면일여의 승묘경계는 깊은 선정의 상태이긴 하지만 그 선정의 淨裸裸處(정나라처)에 住着(주착)하여서는 아직 禪想(선상)이 남아 있으므로 이 淨裸裸(정나라)한 곳에서 다시 벗어나야 함을 말한다. 뒤에서 보듯이 不動(부동)이긴 하지만 아직 不禪(불선)이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단계가 말후뇌관으로 구경각은 이 단계를 지나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후뇌관인 숙면일여한 경지는 팔지 이상에서 등각까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十地等覺(십지등각)의 大死深坑(대사심갱)에서 忽然大活(홀연대활)하여야 梨耶(이야)의 無記(무기)까지 永滅(영멸)한 眞大死(진대사)이니 바야흐로 선문의 本分種草(본분종초)가 된다"고 하여 십지와 등각까지를 '大死(대사)의 深坑(심갱)'에 포함시키고 있으나 앞의 몽중일여와 관련해 볼 때 8지 이상으로 한정해야 한다. 그리고 선문에서 정안종사들은 누구나 다 이러한 오매일여의 玄關(현관)을 투과하지 않은 바가 없고, 또한 8지 이상인 숙면일여 이후에서 개오하였으므로 그 悟(오)는 究竟覺(구경각)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또한 "8식의 과臼(과구)를 타파하고 무명의 窟穴(굴혈)을 頓飜(돈번)하면 一超(일초)하여서 佛地(불지)에 直入(직입)하여 다시는 남은 법이 없나니 이는 上上利根(상상이근)의 실증한 바이다. (중략) 眞(진)을 알지 못함은 다만 종전의 識神(식신)을 오인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량겁래의 생사근본이어늘 우치한 인간은 불러서 本來身(본래신)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一關(일관)을 투과하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고 한다.
제8식을 自我(자아)인 本來身(본래신)이라고 오인하여 이에 집착하지만 마지막 관문을 투과함으로써 佛地(불지)에 直入(직입)하게 되고 다시는 이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직 최후의 굳센 관문인 말후뇌관을 부수어 확철히 크게 깨쳐야만 비로소 옛사람의 입각처를 알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微細賴耶(미세뢰야)를 透脫(투탈)하여 말후뇌관을 타파하면 구경무심인 無上涅槃(무상열반)이 現前(현전)하여 大死大活(대사대활)하고 常寂常照(상적상조)하여 明暗(명암)이 雙雙(쌍쌍)이요 定慧(정혜)가 等等(등등)하니 즉 견성이며 성불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선문정로}에서는 삼관 중에서 중관과 말후뇌관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초관에 대해서는 거의 설하고 있지 않다. 이 점은 앞에서 보았듯이 {금강삼매경론}에서 삼해탈관의 수행에서 초지에서 동정일여가 된다고 하므로 초관은 보살 초지에서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3.4. 여래선과 無生法忍(무생법인)
{선문정로}는 제5 無生法忍章(무생법인장)에서 무생법인과 관련하여 여래선에 대해 자세하게 설하고 있다.

內心(내심)과 外境(외경)을 了亡(요망)하여 妄想(망상)이 生起(생기)하지 않으니 이것이 곧 무생법인이니 본래부터 있는 것을 지금 갖는 것이다. 修道(수도)와 坐禪(좌선)을 假借(가차)할 것 없이 修治(수치)하지도 않고 生起(생기)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여래의 淸淨禪(청정선)이다.

무생법인에서의 선이 곧 여래청정선이라 하므로, 먼저 무생법인에 대해 살펴보자.

무생법인이란 내심과 외경을 요망하여 망상이 생기하지 않음이니 밖으로는 소취의 경계가 멸하여 남아 있지 않고, 안으로는 능취의 識(식)이 생겨나지 않음이다. 만약 意言分別(의언분별)로써 법의 무생을 관하여 散亂心(산란심)을 攝守(섭수)하여 무생의 경계에 머무는 것을 두고서 무생법인이라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무생의 경계에 머무는 그것은 바로 분별의 마음이 生(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 무생인이라 함은 心(심)이 무생의 경계에 住(주)함이 없음이며 또한 모든 분별을 떠남이다. 空境(공경)에 住(주)하는 能住心(능주심)이 없는 것이므로 生滅俱滅(생멸구멸)이라 한다. 그러나 이 滅(멸)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고 본래의 空(공)함에 證會(증회)한 것이므로 이 空寂(공적)은 能所平等(능소평등)하다. 따라서 "본래부터 있는 것을 지금 갖는 것이다"라고 한다. 즉 여래 청정자성을 본래 갖추고 있음(本有;본유)을 비로소 자각함(始覺;시각)으로써 처음으로 갖추게 되는 것(始有;시유)이다.

이와 같은 청정자성의 本有(본유)함을 了覺(요각)하는 무생법인이 수행상의 어느 지위에서 인정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선문정로]에서는 "여래선을 내용으로 하는 馬祖(마조)의 돈오는 구경무심인 證悟(증오)가 분명하다. 마조뿐만 아니라 달마 직전의 정안종사들은 모두 무생법인을 圓證(원증)한 大聖(대성)들이다"라고 하고 있다. 돈오는 구경무심을 증오하는 것이며 또한 무생법인을 원증하는 것이라고 하므로 구경무심이 무생법인이다. 즉 무생법인위는 究竟位(구경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의 지위에 頓入(돈입)하여 여래의 聖智(성지)를 自證(자증)함을 여래청정선이라 한다"라고 함에 있어서 원문에서 '여래선'이라고 한 것을 평석에서는 '여래청정선'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선문정로]에서는 여래선과 여래청정선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지위에 돈입함을 여래청정선이라고 하므로 여래선은 불지에서의 선을 가리킨다. 이 점은 이 법문에 대한 평석에서 "마조가 말한 여래선은 [능가경]의 究竟佛地(구경불지)를 표현한 것이다"라는 것과 같은 결론이다. 따라서 여래선이 여래청정선이며 무생법인이며 돈오이며 구경무심이다. 즉 여래선이라 함은 구경 불지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여래청정선에 대해서 "修道(수도)와 坐禪(좌선)을 假借(가차)할 것 없으며"와 "修治(수치)하지도 않고 生起(생기)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大抵 學道(대저 학도)하는 자는 우선에 반드시 雜學(잡학)과 諸緣(제연)을 倂却(병각)하고 결정코 一切 不求(일체 불구)하며 一切 不着(일체 불착)하여 甚深 妙法(심심 묘법)을 聽聞(청문)하되 屆耳(계이)함과 흡사하야 瞥然(별연)히 지나치고 다시는 追尋(추심)하지 않나니 이것이 甚深(심심)히 如來禪(여래선)에 得入(득입)함이 되어서 禪想(선상)이 生起(생기)함을 離脫(이탈)함이니라.

不動(부동)하여 不禪(불선)함이 卽是 如來禪(즉시 여래선)이니 禪想(선상)이 生起(생기)함을 離脫(이탈)하니라.

 

[황벽어록]에 의하면 선을 익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모든 外緣(외연)을 쉬어 버려 일체를 구함이 없고 또한 집착함이 없다. 그리고 수행함이 純一(순일)하여 무슨 말을 듣더라도 이에 얽매이지 않게 되어 설사 부처님의 심심미묘법을 듣는다고 해도 마치 바람소리를 듣는 듯하여 이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한다. 즉 모든 시비분별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는 앞서 무생법인의 설명에서 말한 내심과 외경을 요망함과 같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甚深(심심)히 여래선에 得入(득입)함이 되는 것"이며, 이 경지가 되면 선을 한다는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되므로 "禪想(선상)이 生起(생기)함을 離脫(이탈)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禪想(선상)이 생기함까지도 떠나는 것이 여래선이라는 것이다.

 

또한 백장스님의 법문에서도 "여래선이란 不動(부동)하여 不禪(불선)함이며, 禪想(선상)이 생기함을 이탈함이다"라고 한다. 부동이라 함은 밖으로 온갖 생각들이 일어나는 움직임(動;동)을 쉬는 것이며, 불선이라 함은 안으로 모든 시비분별을 쉬어 버려서 모든 생각이 쉬는 것 즉 선을 한다는 생각까지도 떠난 것이다. 앞의 {황벽어록}과 같이 여래선이란 "선을 한다는 생각까지도 모두 떠난 상태"라고 한다.
또한 六祖(육조)스님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도 없고(無生;무생) 멸도 없음(無滅;무멸)이 여래의 청정선이니라.

여기에서 무생무멸이라 함은 생각이 일어남이 없음(無生;무생)이며 또한 일어남이 없으므로 멸함도 없는 것(無滅;무멸)이다. 그러므로 앞의 부동불선과 같은 뜻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무생무멸의 상태는 諸識(제식)과 망상과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다. 망상을 그 상태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누는 경우에 추중망상은 6식 경계이고 미세망상은 8식 경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無生(무생)이란 제6 의식과 제7식의 추중망상은 물론이고 제8 아뢰야식의 미세망상까지를 멸진한 무생을 가리킨다. 따라서 무생무멸이라 함은 구경의 불지이다.

그런데 [금강삼매경]에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음은 다른 사람들도 일찍부터 주목해 왔는데 이에 대한 원효의 해석을 살펴보자.

經(경):禪(선)은 곧 動(동)이나 不動不禪(부동불선)함이 無生禪(무생선)이다. 禪性(선성)은 無生(무생)이어서 生禪相(생선상)을 떠나고 禪性(선성)은 無住(무주)이어서 禪(선)함의 動(동)을 떠난다. (중략)

論(논):禪(선)은 곧 動(동)이라 함은 世間禪(세간선)을 말한다. 散亂(산란)함은 아니지만 境相(경상)을 取(취)하므로 相(상)을 取(취)하는 마음이 生(생)하여 起動(기동)이 生(생)한다. 이런 生(생)하고 動(동)하는 禪(선)을 떠날 수 있어야 理定(이정)에 들어갈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無生禪(무생선)이라 한다.

이런 理定(이정)은 性(성)에 生(생)과 動(동)이 없으므로 禪性(선성)은 無生(무생)이라 한다. 無生(무생)일 뿐만 아니라 또 寂(적)에 住(주)함도 없으므로 禪性(선성)은 無住(무주)라 한다. 만약 生(생)이 있다면 이것은 相(상)이고, 住著(주저)함이 있다면 이것은 動(동)이다. 이제 이것들에 反(반)하므로 따라서 禪(선)의 相(상)이 生(생)함을 떠나고, 禪(선)에 住(주)하는 動(동)을 떠난다.

 

이것은 理定(이정)을 밝힌 것으로, 이정을 無生禪(무생선)이라 하여 有生(유생)인 世間禪(세간선)과 대응하여 설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세간선 즉 세간에서 선이라 하는 것은 산란함이 없는 점에서는 禪(선)이고 定(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산란함은 없지만 그 寂相(적상)인 境界相(경계상)을 取(취)하는 것이다. 즉 動(동)을 떠나지만 적상을 취하는 마음이 生(생)하여 起動(기동)이 생한다. 그러나 진정한 선이란 寂(적)의 외경에 대해 적을 취하는 마음을 일으키거나 적에 住(주)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이정 또는 무생선이라 한다. 이 이정인 선은 적정을 취하는 動(동)이 生(생)함이 없으므로 無生(무생)이고, 또한 寂(적)에 住(주)하지도 않으므로 無住(무주)이다. 즉 부동불선이란 산란함이 없으므로 부동이라 하고, 고요함도 없으므로 불선이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앞서 삼관 투과에 대한 해석에서 "삼관 돌파를 강조하는 뜻도 수행계위의 점차를 말하는 데 있기보다는 구경각에 못 미치는 데에서 멈추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즉 不住不禪(부주불선)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不動不禪(부동불선), 是無生禪(시무생선), 離生禪相(이생선상), 離住禪動(이주선동)의 네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이 중 부동불선, 시무생선, 이생선상이라는 구절은 {선문정로}에서의 여래선에 대한 설명, 즉 부동불선, 是如來禪(시여래선), 離生禪想(이생선상)이라는 구절과 관련이 깊은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부동불선인 무생선은 곧 여래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보면 [선문정로]에서 강조하는 삼관 돌파에 대한 이해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삼관 돌파를 강조하는 뜻도 수행계위의 점차를 말하는 데 있기보다는 구경각에 못 미친 데에서 멈추고 마는 것을 경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즉 不住不禪(부주불선)함을 강조한 것이다.
 


                    5. 결 론


이상으로서 [선문정로]에서 말하고 있는 여래선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여래선이라 함은 선 수행을 통하여 여래장의 구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래선을 정안종사인 조사들이 서로 전하였으므로 이를 또한 조사선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여래선과 구별되는 별도의 조사선이란 인정하지 않으며, 仰山(앙산)스님과 香嚴(향엄)스님 간에 오고간 여래선과 조사선에 대한 이야기는 법문 擧量(거량)이라고 한다.
또한 고려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은 하택신회와 규봉스님의 여래선에 대한 견해를 이은 것으로, 이것은 여래장에 대해 아는 것을 중시한 것이어서 육조스님의 주장과 같이 이것의 實證(실증)을 중시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둘째 여래선의 수행 방법으로서 오직 화두 참구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금강삼매경론}의 주장에 의한다면 대승 止觀法(지관법)의 하나로 이해된다. 그리고 다른 止觀行(지관행)과는 구별되게 화두는 참구하는 그 처음부터 定(정)과 慧(혜)가 둘이 아니며, 또한 止(지)와 觀(관)이 雙運(쌍운)하는 특색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법 중에서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定(정) 혹은 慧(혜)는 그 정도에 따라서 처음 화두를 들기 시작하는 데에서부터 구경에 이르기까지 대개 세 단계 즉 動靜(동정), 夢中(몽중), 熟眠(숙면)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선문정로]에서는 숙면에서의 오매일여를 말후뇌관이라고 하며,
특히 강조하여 禪門(선문)의 정안종사로서 이 경지를 투과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이 점이 바로 性徹(성철)스님의 見處(견처)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불교의 역사 속에서 이와 같은 경지를 實證(실증)한 스님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넷째 여래선은 그 선정의 힘이 구경에까지 곧바로 가는 것으로서, 이 구경을 무생법인 혹은 돈오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부동불선하며 또한 禪想(선상)의 일어남도 없으므로 무생선이라고도 하며 수도와 좌선을 하지도 않는다.


다섯째 여래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원효스님은 보살 초지에 들어가서 행하는 선으로 이해하였고, 보조스님은 三賢(삼현)인 十住(십주) 초에서 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성철스님은 화두 참구에 있어서 삼관을 투과하도록 일여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여래선은 그 시작에서부터 구경에 이르도록 일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각각의 주장은 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으나 선종의 입장에서는 성철스님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여래선을 선종의 입장에서 이해할 때에 보살의 수행 덕목인 육바라밀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현실적으로 문제가 된다. 즉 삼관을 투과하여 구경을 얻고자 한다면 그 이전에는 바라밀행을 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오늘의 한국 불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The Characteristics of 'Yeorae-Seon'
in the Seonmun-jeongno
 
 In the Seonmun-jeongno(禪門正路),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 and Sudden Cultivation(頓悟頓修) is recommended as a proper way to attain enlightenment, of which the Yeorae-Seon(Zen transmitted by Tath gatha, 如來禪) is stressed to be practiced. Though the meditation by Koan(公案) originally suggested by Tai-hui(大慧) in Song dynasty, the characteristic of Yeorae-Seon that especially is described in the Seonmun-jeongno also has to be examined since it has been transmitted longtime ago. Here, we also examine the view on the Yeorae-Seon by Song-chol(性徹), Won-hyo(元曉), and Shen-hui(神會) together. Specially the standpoint of Won-hyo look to compromise the one of Song-chol.

In his Commentary on Vajrasamadhi Sutra, Won-hyo alluded that the Yeorae-Seon means the entering into the Tath gatha-garbha, which is accomplished by the Threefold Vision of Unattachedness, or Mahayanic View of Emptiness. Through the learning of the next two steps, that is, the Listening of wisdom or the First Unattachedness and the Thinking on Wisdom or the Second Unattachedness, the Third Unattachedness or Cultivation of Wisdom would be allowed. Cultivation of Wisdom is to be arise from the proper state of meditation, so it should be refered to the Giving Up the Illusive Thinking. From the standpoint of the theory of Ten Bhumis, this can be applied to the First Bhumi. For Won-hyo, Yeorae-Seon denotes the Samadhi that is accomplished at the stage of Boddhisattva's First Bhumi. Because this state is the same with the tranquility and turmoil of everyday routine, from the point of Three Stage, this is the sameness of move-and-stillness.

For Kui-feng(圭峯), Yeorae-Seon is to practice meditation after under- standing on the fact that the nature of Tath gatha-garbha is originally empty and tranquil. This is what is called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 and Gradual Cultivation(頓悟漸修). In this context, the knowledge is more import!ant. Ji-nul(知訥) said that the enlightenment can be attainable in the First Step of Ten Stage, thus it means to say that he enters the Yeorae- Seon. once this stage was called as the Insight into the Nature, the ortho-praxis of Zen Buddhism but, this view is strongly criticized in the Seonmun-jeongno.

By the way, Yeorae-Seon(Zen Buddhism of Tath gatha) and Josa-Seon(Zen Buddhism of Patriarch) have often been involved in the argument about whether the both of them are same or not, which was originally derived from the discussion by Yang-shan(仰山) and Xiang-yan(香嚴). For this discussion Song-chol insists that the dialogue looks superficially to tell the differences between Yeorae-Seon and Josa-Seon, but reflects the equality of them. Song-chol also said that this is the very essence of the Zen.

It is can be said that Yeorae-Seon described in the Seonmun-jeongno would be available from the very beginning of Koan practice to the ultimate state of Mindlessness.

Thus, there are different views on the Yeorae-Seon. First, Ji-nul told that it is accomplished at the First Stage, for Won-hyo it is at the First Bhumi of Boddhisattva, and for Song-chol it is at the Ultimate Enlightenment. However, when it comes to the Utilization of Mindfulness and Concen- tration together, Song-chol would get it to correspond to Koan Pract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