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선종의 초조 보리달마(菩提達摩)
금정산인 운정
확연무성이라니요?
선사들은 무애의 춤을 춘다. 선사들의 춤은 만물 조화의 춤이며,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춤이며, 우주의 심미적 연속성을 몸으로 사루는 역동적인 춤이다. 또한 선사의 춤은 우주적 차원의 진화를 확산하려는 춤이요, 고저장단을 불태워 없애는 열린 세계의 춤이다. 옥리(屋裏)를 조명하여 궁극적 실체를 증명하는 춤이며, 생사를 뒤바꿔 놓지 않고 초연히 뛰어났으되 거대하거나 야단스럽지 않으며, 무엇에 얽매임이 아니되 안으로는 매우 심미적이며, 번뇌와 열반을 벗어났으되 번뇌와 열반인 춤사위를 연출한다. 그래서 선사의 춤은 안이면서 밖이요, 밖이면서 안임을 증명한다.
확연무성이라니요?
초기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에 대한 여항(閭巷)의 인식은 참으로 다양하다. 텍스트에 따라 달마대사에 대한 기록이 약간씩 다르다. 어떤 이는 실존의 인물처럼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지만, 어떤 이는 실존 인물이 아닌 것처럼 신비롭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달마대사의 언행을 기술하고자 텍스트를 선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문헌학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불교계이고보면 달마의 전기를 작성하고자 할 때 텍스트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달마대사에 관한 기록은 <능가사자기>와 <전법보기(傳法寶記)>,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전법보기>에서는 달마를 초기선종(初期禪宗)의 초조로 기록했으나, 정각(淨覺)이 저술한 <능가사자기>에서는 선종의 초조는 누가바드라로 기록되어 있다. 정각은 삼장법사 달마를 누가바드라 삼장의 후계자로 기술했기 때문에 <능가사자기>를 저본으로 한 달마대사의 기록은 한층 명료해진다.
달마는 남인도 대바라문국 국왕의 셋째 왕자로서 고도한 지성을 가졌으며 판단력이 우수하여 무엇을 듣더라도 능히 그 의미를 해석했다. 달마의 소원은 대승(大乘)에 있었다.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성인(聖人)의 전통을 이어받아 더욱 고양시켰으며, 마음을 적정(寂靜) 속에 묻는 동시에 세상의 모든 일을 꿰뚫어 봄은 물론 내외의 학문을 밝혀 그 덕망이 세상 사람을 뛰어 넘었다.
중국에 들어와 선가(禪家)의 초조(初祖)가 된 달마대사는 반야다라존자(般若多羅尊者)의 수제자로서 선수행(禪修行)에 주력했던 인물이다. 인도를 떠나기 전 수없이 반복되는 우기(雨期)를 이용해서 선(禪)에 주력했으며, 이미 탁월한 선지를 증득하여 스승인 반야다라존자로부터 촉망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세존 하 28조가 된다. 그렇지만 525년 인도의 벵골만을 떠나 3년 뒤에 중국 양(梁)나라에 도착한 후 9년 동안의 면벽 끝에 중국에서 선종(禪宗)을 열었기 때문에 동토(東土) 의 초조라고 일컫는다.
달마가 인도를 떠나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에 건너온 경위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달마가 왜 동진(東進)을 계획했는지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어떻든 달마가 벵골만을 떠나 인도차이나반도를 경유하여 중국의 양나라에 당도한 해는 527년으로 기록된다.
1세기 경에 북방을 통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불도징(佛圖澄)과 그의 제자들이 교학을 일으켰기 때문에 달마가 양나라에 왔을 때는 격의불교(格義佛敎)로 일컫는 중국불교는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불심이 그윽했던 양 무제는 많은 절을 짓고 경전을 번역하기도 했다.
양나라에 당도한 달마는 군사(軍師)의 안내를 받아 무제(武帝)와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무제는 아주 독특한 인물이었다. 평소에 붉은 가사를 수하고 다니면서 불교의 홍포에 주력했다. 양무제는 불교 경전의 내용에도 해박했으며 각처에 절을 짓고 불사를 장려하여 불교의 중흥에 기여하는 바가 대단했다.
무제는 달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사는 진제제일의(眞諦弟一義)에 대하여 내게 말해 줄 수 있는가?”
무제의 질문은 어려운 것이었다. 진제(眞諦)를 말하기도 어려운 데 제일의(弟一義)를 말하라는 것은 더욱 어려운 질문이었다.
진제는 형태를 갖춘 어떤 물질적 외형이 아니다. 인간의 정신에 내재하는 추상적이며 의미론적인 명제에 속한다. 따라서 언설을 빌어 무엇이라고 언표를 내놓는 순간에 천길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수 있다. 진제를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의 의미는 왜곡될 수 있고 희석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진제는 언어 밖의 소식이기 때문에 언어에 담아서 그 의미를 국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달마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제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밖에는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확연무성이라니요? 부처님의 성스러움일지라도 그것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성이라는 것은 본래 오온(五蘊)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난 빈 자리에서 돋아난 영감(inspiration)같은 특성을 지니기 때문에 성(聖)의 실체를 확연하게 간파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무제는 다시 물었다.
“오온을 모두 불태워 버린다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대왕께서 진제를 물으실 때는 이미 오온을 여의고 난 빈 터전에 서 계시지 않았습니까?”
“.........”
무제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모두 불태워 버리지 않으면 진제를 만나기 어렵다는 달마대사의 의중을 살피지 못했음일까?
무제는 달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색수상행식을 모두 불태워 버린 자리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색수상행식에 의한 놀음놀이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놀음놀이에서 벗어나 진정한 의미의 세계와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오온을 모두 불태워 버려야 한다는 것이 달마의 주장이었다. 오온을 불태워 버린 후 마음을 열어 놓지 않으면 제일의는 물론이요 진제마저도 마음에 머물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함이었다.
무제는 달마와 나눈 대화에서 두 사람 사이의 관점이 여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결국 무제는 달마를 떠나 홍의를 펄럭이며 멀어져 갔다.
달마는 무제와 헤어진 다음 진로를 북으로 정했다. 단신으로 북진하여 소림산 토굴에 몸을 의탁한 달마는 스승인 반야다라존자의 충고를 가슴에 새기면서 사물에 대한 설명을 할 때 논리적 체계를 버리고 심미적 질서로의 전환에 주력했다. 가슴에 담아두었던 논리적 체계를 하나 둘 소각해 나가면서 갖가지로 분화되기 이전의 전일적 세계로 복귀하고자 노력했다. 자연적으로 입을 열어서 설명하려는 태도를 잊게 됨과 동시에 벽관(壁觀)에 주력할 수 있었다.
벽관에 전력한 달마는 9년이 지나서야 오온을 통한 일체의 앎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우주의 분화되지 않은 연속성을 직관했다. 뿐만 아니라 만물에 내재하는 만물조화의 생명적 창발성을 일원상(一圓相)에 담아냈다.
이입사행(理入四行)
달마는 자연의 만물이 지닌 생명적 창발성을 직관하고 난 다음에서야 소림굴에서 해방되어 전도에 나섰다.
달마에게는 혜가(慧可), 도육(道育), 총지(聰持)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고매한 뜻과 자질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올바른 법사의 정신을 익히도록 지도했다. 달마는 능가주의와 반야주의에 근거하는 이념과 사고체계를 구축했으며,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도 그가 정립한 원리적 방법과 실천적 방법에 따라서 철저하게 지도했다.
달마의 전도 활동은 교학적 체계를 갖춘 중국불교와는 전혀 다른 면에서 출발하여 서서히 날개를 저으면서 중원으로 비상하기 시작했다. 달마의 전도는 논리적 질서에 의존하지 않고 심미적 질서에 의존했기 때문에 언어와 문자를 모두 불태워 버리고 직관적 인식에 의존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일관할 수 있었다.
달마가 정립한 원리적 방법을 이입(理入)이라 했으며, 실천적 방법을 사행(四行)이라 정했다.
달마가 정립한 이입은 경전의 대의를 이해함으로써 그 뜻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범부와 성인을 막론한 일체 생물은 평등한 진리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비본래적 망상에 사로잡혀 그 본질적인 내용을 현상계에 실천하지 못할 따름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망상(제멋대로의 마음)을 떨쳐버리고 본래의 진실로 회귀하여 심신을 벽처럼 안정된 상태로 유지하며, 자타의 거리와 차별을 두지 않고, 범성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한 자리에 꿋꿋하게 대하여 움직이지 않고, 일체의 언설에 현혹됨이 없이 침묵 속에서 진리와 혼연일체가 되어, 의식이 활동하지 않는 적요 속에서 안심입명을 얻는다면 다시 말할 나위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원리적인 도달 방법 즉 이입(理入)이라 한다.
사행은 이른바 네 가지의 실천이며, 그 밖의 많은 실천은 모두 이 네 가지 방법에 포함된다고 본다. 네 가지 실천의 첫째는 전생의 실수나 원한에 보답하는 실천(報怨行)이며, 둘째는 인연에 맡기는 실천(隨緣行)이며, 셋째는 물질을 바라지 않는 실천(無所求行)이며, 넷째는 도리에 맞도록 살아가는 실천(稱法行)을 말함이다.
보원행(報怨行)은 모든 것을 감수하고 참으면서 자기에게 끼쳐져오는 모든 고통을 거부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전세의 과보로 생각하면서 흔연하게 받아들임을 일컫는다. 시작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머리는 버리고 지말을 좇아 많은 헤맴(방황)의 세계에 휩쓸려 다니며 원한이나 증오의 마음을 일으키고, 한없이 남과 대립하며 손해를 끼쳐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절대로 남을 원망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으며 흔쾌하게 모든 원(怨)에 보답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그에 적합한 행동을 실천하는 것을 이름이다.
수연행(隨緣行)은 모든 생물은 자아가 없이 인연에 의하여 좌우되므로 고락이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며, 어느 것이나 연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고 행동하는 것을 이름이다. 고요한 수면에 바람이 불어와 파도를 일으키면 모든 질서가 무너지는 것처럼 자기의 모든 것도 인연이 깨어지면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의연하게 삶을 이끌고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명예나 보답이 자기의 것이 된다 해도 그것이 전생의 숙명적 원인이 가져온 결과로 믿고 지금은 잠시 나의 것이 되었지만 인연이 끊어지면 다시 무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다지 기뻐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세간적 성공이나 실패는 모두 인연에 맡겨버리고 자신의 마음 자체는 아무런 증감이 없이 기쁜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무거운 침묵 속에 진리와 합일되기만을 희망한다. 그러므로 인연에 맡기는 실천을 권고하는 것이다.
무소구행(無所求行)은 물질을 바라지 않는 실행을 말한다. 진리를 못 보는 사람은 물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탐욕을 일으키기 때문에 아무 것에 대해서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일으킨다. 그러나 진리를 생각하고 지혜에 눈을 뜬 사람은 진실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오직 진실을 키우려는 의지를 일으키기 때문에 헛된 욕망에 의지하여 물질을 소유하려는 생각을 억누른다. 자기의 마음을 헛된 욕망으로 들뜨게 하지 않으며, 자기의 몸도 자연의 흐름에 맡겨 억지로 건사하고자 하지 않는다. 진리와 지혜와 진실을 억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자기 마음이 진리와 지혜와 진실을 지향하게 되어져서 물질에 눈을 줄 겨를이 없게 된다.
“
욕구가 있는 한 모두가 괴롭다. 물질을 구하지 않는다면 마음은 언제나 편안하다”는 말이 있다. 진리와 지혜와 진실을 따라서 마음이 흘러가도록 한다면 자연적으로 모든 행위는 진리를 좇아가는 실천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진리를 좇아가게 한다면 자연적으로 물질이 돌아오지만, 마음이 물질을 좇아가게 한다면 고통과 좌절이 따라 온다.
칭법행(稱法行)은 도리에 맞게 살아가는 실천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도리란, 세상 만물의 본질이 청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우주 만물의 실상이 갖춘 법을 말한다. 세상 만물의 본질이 청정하다는 것은 파도가 일어나기 이전의 호수를 보면 알 수 있다. 바람이 일지 않는 호수의 수면은 그야말로 청정하다.
그렇지만 바람이 불어와 파도를 거칠게 일으키면 수면 깊은 곳의 오물이 솟구쳐 오른다. 고요한 호수는 진여와 같으나 바람에 따라 일어나는 파도는 세상 만물과 같다. 그러나 일어난 바람만 잦아들면 이내 고요한 진여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만물의 본질은 청정무구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만물의 법을 바라보며 법에 따라서 사는 삶을 칭법행이라 한다.
만물은 인(因:불성)과 연(緣:자연에 내재하는 만물조화의 창조적 율동)의 작용에 의해서 나타난 일시적 존재일 뿐이다. 그와 같은 결과물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것이 현상이다. 따라서 인과 연이 흩어지게 되면 만물은 다시 본래의 그 자리, 즉 하나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라 한다.
모든 존재는 무에서 출발하여 유로 나갔다가 다시 또 무로 되돌아온다고 보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만물은 윤회(輪廻)를 반복한다고 말한다. 윤회를 계속하는 만물을 멀리서 바라보면 불래불거(不來不去)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법은 생물로서의 실체가 없다. 생물로서의 더러움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지혜를 갖춘 사람은 이와 같은 불교의 법을 굳게 믿고 법에 따라 삶을 영위해 나간다. 이것이 곧 법에 따라서 사는 삶이다.
그대로를 직관하라
오온에 의존한 언어와 논리체계를 불태워 버리고, 이(理)와 행(行)의 병립을 통해서 얻어낸 달마의 법은 신실용주의적 활용 능력의 증대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달마가 계발한 직관적 인식이야말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신실용주의적 창(槍)임에 틀림없다. 달마의 창에 의해서 생명의 창발성은 비로소 드높은 가치로 인식되며, 죽은 부처보다는 살아서 숨을 쉬는 부처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게 된다. 살아서 숨을 쉬는 산부처가 바로 조사(祖師)인 것이다. 그로부터 조사에 의한 불교가 중국 내륙을 뒤흔들게 된다.
달마가 마련한 <신실용주의적 창>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한 인물이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이다. 달마의 창을 높이 들고 수많은 논사들이 체계화한 중국불교의 논리적 질서를 무 자르듯 베어낸 인물이 바로 마조이기 때문이다.
달마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는 통로를 새로 개설했다. 논리적 질서로부터 심미적 질서로 변화를 가져왔다. 논리를 가지고 사는 수많은 논사들을 설득하여 말없는 선사들로 바꾸었다. 인간의 삶의 궁극적 근원을 명료하게 제시했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직관개념, 직관인식, 직관능력을 계발하여 삶에 긴요한 가장 실용적인 힘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달마가 제창한 심미적 질서에 의해서 당조의 찬란한 정신문화가 꽃피어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달마대사야말로 대단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불교의 선가에 “심미적 질서”라는 새로운 인식체계를 정립시킨 달마대사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지 않고, 지나치리만큼 신비적인 인물로 묘사하여 오히려 달마대사의 진가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빚고 있음은 대단히 애석한 일이다.
일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달마의 주장은 능가주의와 반야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존재와 세계를 인간의 논리적 질서를 활용하여 체계화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달마의 주장이다. 논리적 변용을 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직관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라고 하는 그것 자체가 인간이 마련한 인식구조를 초월한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름대로의 양상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나타난 존재자에게는 논리체계를 통해서 설명할 수 없는, 다시 말하면, 인간이 구성한 논리적 질서를 가지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요소들이 함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과 이 공간
“떠 있는 구름은 하늘의 바탕을 오염시키지 못하지만 하늘을 흐리게 할 수 있다. 잠시 하늘을 흐리게 하는 오온(五蘊)의 구름만 걷어낸다면 밝은 하늘은 스스로 그 모습이 밝아진다.”
달마는 인간이 구성한 논리적 질서라는 것은 다섯 가지 요소로 겹쳐진 구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천명했다. 지혜의 폭풍이 다가오는 순간, 가상적인 다섯 가지 요소에 의해서 체계를 갖추고 있던 구름(인간이 논리적 질서에 의해 정립한 삶의 세계의 구조와 운행원리)은 한 순간에 흩어지게 된다고 했다. 지혜는 순일하지만 오온에 의한 구름은 그 근본 자체가 부실하기 때문이라고 갈파했다.
달마대사가 오온을 척결하고자 깊은 사유에 들었다는 것은 세계와 존재를 인식하는 기존의 논리체계를 혁파하고 능가주의와 반야주의에 의한 색다른 인식체계를 정립하려 했음을 감지하게 된다. 달마가 마련한 색다른 인식구조는 지금 이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부처를 과거의 공간과 시간에 존재했던 부처보다 우위에 정립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달마가 제시한 능가주의와 실용주의는 선종이 세계와 존재를 어떤 관점에서 인식하며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체계를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초(端楚)를 열어 놓고 있다. 달마대사가 능가주의와 실용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오늘의 선가에서 세계와 존재를 어떤 관점에서 인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근접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달마는 이미 한 차례 죽은 부처를 존귀하게 여기는 관점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것은 양무제와의 만남에서 확연하게 나타났다. 진제를 묻는 무제에게 분명하게 언급했다. 참으로 바람직한 부처는 이미 한 차례 만들어진 부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과 이 공간에서 만들어져 나가는 과정에 있다고.
만들어져 나가고 있는 '과정의 부처'는 불확실성으로 있기 때문에 확연하게 드러난 요소가 명확하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달마가 언급한 “과정의 부처”는 과정철학과 유사한 점이 많다.
양무제는 달마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양무제가 지니고 있었던 인식구조는 이미 한 차례 만들어진 죽은 부처와 연관된 이론체계에 멈추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무제와 대화를 연장하지 못한 달마는 곧바로 북으로 발길을 옮겨 위나라의 숭고산(嵩高山)으로 들어갔다. 숭고산에 몸을 묻은 달마는 9년간의 벽관을 끝낸 다음에서야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교도하기 시작했다. 6년 동안 같은 논리로 사람들을 대하자 여러 곳으로부터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는 벽관을 끝낸 다음 많은 학자들에게 사유수에 관한 새로운 메시지를 전할 즈음 위나라 보리유지 삼장과 광통율사가 독이 섞인 음식을 달마에게 보낸 기록이 있다. 대사는 그 음식을 먹은 뒤에 큰 그릇을 대령한 후 수 십 마리의 뱀을 토해냈다는 기록까지 보인다. 보리유지 삼장은 독을 넣은 음식을 다섯 차례나 더 보냈다. 독극물에 의한 괴롭힘이 다섯 차례나 반복된 셈이다.
어느 날, 달마는 수제자인 혜가를 불러 놓고 한 벌의 가사를 내리면서 말했다. 그 가사는 인도의 반야다라존자가 달마에게 내린 것이었다.
“나는 이 가사 때문에 독극물을 먹게 되었다. 그대도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제6대까지 가게 되면 법을 전승하는 자는 그 목숨이 실에 매달린 것처럼 위태롭게 된다.”
대사는 혜가에게 전법의 증거로 가사를 전한 다음 대담하게 독극물을 마시고 숨을 거두었다. 대사는 평소에 자기의 나이는 150세라고 했기 때문에 달마대사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다. 대사의 유해는 낙주(洛州) 웅이산(熊耳山) 기슭에 매장되었다.
위나라 외교관으로서 인도에 나가 있던 송운(宋雲)이 본국으로 돌아오던 도중 파미르 고원에서 달마대사를 만났다. 대사는 짚신 한 짝을 들고 있었다. 송운이 대사를 보고 인사를 했다.
“대사는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이제 내 나라로 돌아가는 길이요. 당신네 나라의 황제도 오늘 사망했소.”
“대사의 법은 누구에게 전하셨나요?”
“나는 지금 돌아가지만 앞으로 40년이 지난 다음에 한 사람의 중국 승려가 나타날 것이오. 이 얼마나 좋은 일이겠소.”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은
두비(杜朏)가 기술한 <전법보기(傳法寶記)>는 동위 숭산 소림사의 석보리달마를 선종의 초조로 기록했다. <전법보기>에 따르면, 석보리달마는 위대한 바라문족 출신으로 남인도 국왕의 제3왕자로서 예민한 정신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위대한 진리의 보배를 이어받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성스러운 지혜를 깨닫고 수많은 사람들을 지혜로 이끌고자 노력한 달마는 중국인들을 위하여 바다를 건너 숭산으로 왔노라고 기록했다.
그 당시에 달마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으며 오직 도육과 혜가가 남몰래 마음속으로 진실을 알고자 했으므로 달마는 성심으로 그들에게 가르침을 내렸다. 6년 동안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도육과 혜가는 그로부터 완전한 대각을 성취하고자 고심했다.
위대한 스승은 조용히 혜가에게 물었다.
“그대는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겠는가?”
혜가는 자기의 팔을 자름으로서 진정한 성의를 표시했다. 달마는 친히 방편으로서 혜가를 지도하여 단번에 그 마음을 이법(理法)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는 다시 또 5년 동안 능가경에 의한 전거를 연구하여 혜가에게 전수하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나라의 수행자에게는 능가경이 가장 적합하다.”
배우는 학자 가운데 아직 진실을 잡지 못한 사람에게는 몇 번이나 능가경을 주면서 말했다.
“장래를 위하여 무기(방법)로 삼으라”
달마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은 날로 늘어났다. 이름 높은 승려들은 달마를 질투했다. 이들은 달마의 음식에 독극물을 풀었다. 위대한 스승은 그 낌새를 알아챘으면서도 그대로 음식을 들었다. 그러나 독극물은 달마를 해치지 못했다. 음식에 독을 타는 일이 반복되자 대사는 혜가에게 말했다.
“나는 법을 위하여 이 나라에 왔는데, 이미 그것을 그대에게 전했다. 앞으로 더 이상 여기에 머문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쯤에서 본국으로 돌아가야겠다.”
대사는 제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종지(宗旨)의 오의(奧義)를 밝힌 다음 독이 섞인 음식을 먹었다. 입멸의 본보기를 보여준 셈이다. 후일에 이르러, 이를 전승하려는 선사들이 입멸 시에 진실의 종지를 남기게 되는 일이 습관화 되었다. 그것이 오늘의 열반송이다.
달마는 혜가에게 법을 전수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以指標月 其指所以在月
以言喩道 其言所以在道
顧言而不顧其道 非知道也
昧指而不昧其月 非識月也
所以至人常妙悟於言象之表 而獨得于形骸之外.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은 그 손가락의 뜻이 달에 있고
말로써 도를 표현하는 것은 그 말이 도에 있기 때문이다.
말만을 귀담아 듣고 도를 돌아보지 않으면 도를 안다고 할 수 없고
손가락만을 바라보고 달을 보지 않으면 달을 알지 못한다.
지극한 도를 아는 사람은 항상 언어 밖의 소식을 묘하게 깨닫고
형상 이전의 실재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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