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혈맥론(血脈論)-2. 그대 자신 속으로 순례를 떠나라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15:23

 

 

 

그대 자신 속으로 순례를 떠나라

깨달음, 혹은 불성을 실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그것은 쉬운 일이기도 하다. 그대가 그것을 찾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무한히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저 앉아서 고요히 자신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어느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 그대는 부처가 된다. 그때 그대는 깨달은 자가 된다. 그대가 깨달은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존재가 바로 깨달음 자체이다. 그것은 가장 간단하고 자연스런 본성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본성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살면서 빛을 보지도 못한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리만큼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장님에게 빛을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깨달은 스승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내 경험을 설명하려는 나의 노력은 장님에게 안경을 파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많은 스승들이 그저 침묵 속에서 살다 갔다. 그들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깨달음을, 그 향기와 그 기쁨과 그 아름다움을, 말을 통해서 도저히 전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 말이다. 그 경험을 말로 전달하는 순간 그것의 본질은 죽어 버린다. 그리고 껍데기만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심 때문에 몇몇 깨달은 사람은 그대에게 깨달음을 전해주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삶이란 그대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무한 그 이상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어떤 깨달은 사람도 글자를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말은 온기를 갖고 있지만 글은 완전히 식어 버린 것이라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말속에는 스승의 현존이 들어 있지만, 문자 속에는 스승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승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에게 간접적이라도 전달되는 뭔가가 들어 있다. 스승의 현존이, 스승의 축복이, 스승의 은총이 거기에 들어 있다. 스승의 눈동자와 그대를 부르는 그의 가슴의 고동이, 그대 자신 속으로 떠나는 여행에의 권유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문자 속에는 이 모든 것들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모든 깨달은 사람들이 한 글자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깨달은 사람에 대한 모든 문학 작품이 사실은 제자들의 기록일 뿐이다. 그 제자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그냥 적어 놓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제자는 스승을 사랑한다. 스승에게 깊이 빠져 있다. 하지만 그는 스승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스승의 마술에 걸려 있지만 그 비밀을 결코 알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한 스승의 비밀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는 스승이 떠나고 난 후에도 스승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 말들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순금 같은 것이다. 그래서 제자는 적어도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뭔가가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이해력은 매우 부족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해한 것들을 글로 남긴다. 그때 스승이 말한 것은 많은 부분이 누락된다. 그리고 제자가 스승의 말을 들을 때 이미 많은 것들이 빠져나간다. 제자는 자신의 언어로 글을 쓰고, 그것은 또 다른 언어로 번역된다. 이제 그것은 원래 목소리의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달마는 중국어로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모국어가 아니었다. 그는 인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존재의 핵심에 대한 경험은 모국어로도 표현하기 쉽지 않다. 그대 가슴의 고동을, 그대 존재의 축복을 말로 표현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달마는 중국어로 말을 했다. 중국어는 그리 간단한 언어가 아니다. 외국의 학자가 그 언어를 완숙하게 배우려면 삼십 년은 걸린다. 그 언어에는 알파벳도 없다. 그것의 글자는 상형문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힘든 문자인 것이다.

하지만 달마는 그 어려운 중국어를 3년만에 익혔다. 그리고 그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중국어로 말했다. 이제 그 말들은 또 그대들에게 영어로 말해지고 있다. 그래서 그대들은 내가 이 경전을 인용할 때마다 달마의 본래 뜻을 반대로 알아들을 소지가 다분하다. 예를 들면 'Mind'란 단어에 대해서 살펴보자.

영어에서 마음을 나타내는 말인 'Mind'는 생각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말은 'Mind'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영어에는 생각의 흐름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적절한 단어가 없다. 그것을 표현하려면 'No Mind'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나 달마의 가르침 전체가 이 'Mind'를 넘어서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산스크리트어나 팔리(Pali)어에는 그것에 대한 표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치타(chitta)'이다. 그것은 생각의 흐름을 초월하는 의식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영어의 'Mind'에 해당하는 말은 '마누스(Manus)'라는 말이 따로 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명상에 대해서 학자처럼 공부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것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대가 불교의 경전에서 'Mind'란 말을 발견하면 그것은 'No Mind'로 이해해야 한다. 영어에서는 사실 'No Mind(無心)'란 단어가 없다. 그래서 거기에서 오해가 싹틀 소지가 있다. 그대가 이 어록을 볼 때 'Mind'란 단어가 나오면 'No Mind'란 뜻으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는 완전히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자, 그럼 어록으로 돌아가자. 달마의 선어록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삼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으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번역자는 마음(Mind)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마음은 초월해야 할 그 무엇이다. 그 마음이 병이다. 명상은 그 마음을 초월하려는 행위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Mind) 대신에 '무심(No Mind)'으로 그것을 이해한다. 그것이 올바른 번역이다. 그래서 경전을 번역하는 역경가는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명상을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삼계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마음으로 돌아온다. 삼계가 무엇인가? 그 삼계는 마음과 정신이다. 그것이 불교에서는 각각 욕계, 색계, 무색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 삼계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투리야(turiay)이다. 영어에는 이런 단어가 없다. 그것은 무심(No Mind)으로 번역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사념의 파도도 없는 침묵의 세계이다. 시간도 사라지고 공간도 사라진 세계, 오직 순수한 의식만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 의식은 일반적으로 대상에 의존하는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홀로 빛나며 홀로 존재하는 깨어 있음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이 여기로 돌아온다. 그래서 명상을 이해하는 번역가들은 '시타'라는 말을 무심으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이 말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했다. 이 말은 사실 터무니없는 말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말에 대단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 말의 본래 뜻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 말을 올바르게 표현한다면 이렇게 고쳐야 한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들은 무심에서 무심으로, 침묵에서 침묵으로, 현재에서 현재로 진리를 전했다. 침묵에서 침묵으로 전해지는 진리는 당연히 어떤 정의나 설명도 덧붙일 수 없다."

정의나 설명은 마음의 차원이다. 그대가 마음을 초월하는 순간, 그대는 모든 정의나 설명을 초월한다. 그때 제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진리를 말로 정의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엇을 마음에 전했다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모른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묻는 사람의 마음은 벌써 혼란 속에 빠져 있다. 그래서 스승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대는 묻는다. 그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나는 대답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그것은 질문자에게는 납득이 가는 대답이다. 하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틀린 대답이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설사 그가 말을 사용할지라도 그것은 듣는 이를 침묵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진정한 전달은 단절 속에서 일어난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그 순간에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전이되는 소립자의 도약이 있다. 그것은 하나의 마술이며 연금술이다.

만일 내게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대 역시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물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묻는 것이 바로 그대의 마음이다. 시작도 없는 아득한 세월을 통해서 그대로 하여금 뭔가를 행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존재하게 한 그것이 바로 그대의 진짜 마음이다. 그것이 그대의 진짜 부처이다.

이제 제자는 완전히 혼란 속에 빠졌다. 물론 누구든지 그런 상황 속에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명상이 하나의 초월이며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한 그 누구도 그 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이기에 마음이 작용하는 한 그 자리에 이를 수 없다.

그 자리가 그대의 진짜 모습이다. 그대의 깨달음이며 불성이다. 그대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침묵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부처의 행동이다. 참된 침묵이란 말없음이 아니다. 참된 침묵은 그대의 마음을 초월한 자리이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의 분별이, 선과 악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거기에서 나온 것은 바로 그대의 본질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움이지 그대의 노력이 아니다. 미리 계획된 행동이나 생각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본성이 자발적으로 흘러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