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마음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마음은 모두 무심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어록을 인용할 때마다 이제부터 그것을 무심으로 고쳐 부르겠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는 그대는 다른 어떤 부처도 찾을 수 없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 깨달음이나 열반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연의 조건에서 벗어난 그대 본성의 실체가 바로 무심에 의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그대의 무심이 바로 열반이다. 내가 마음을 무심으로 바꿀 때 달마 역시 전적으로 찬성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 역시 동의할 것이다. 한번 깨달음을 일별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동의할 것이다.
부처나 깨달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허공을 움켜쥐려고 하는 것과 같다. 허공은 이름만 있을 뿐 어떤 모양도 없다. 그것은 그대가 잡거나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무심을 벗어나서 그대는 결코 부처를 볼 수 없다. 부처는 그대의 무심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무심과 부처는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가엾은 제자는 그것을 모두 마음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말이다.
왜 이 마음을 벗어나서 부처를 보려고 하는가?
과거와 미래의 부처들이 바로 이 무심에 대해서 말했다. 이 무심이 부처라고, 그리고 부처가 무심이라고 말이다. 무심을 벗어나서는 부처가 없고 부처를 벗어나서 무심도 없다. 만일 그대가 무심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같은 실수가 이 어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어록은 달마의 선어록이라고 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어록이 달마의 선어록이라고 받아들여진 지는 거의 14세기경이다. 그 이유는 달마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것을 글로 옮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머지 보통 사람들은 그저 경전을 읽을 뿐이었다. 그들은 경전을 통해서 지식만 쌓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은 무지로 가려져 있다. 그들은 빛에 대해서 토론하기 시작했지만, 모두 장님인 채로 토론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래서 달마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무심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심이 아니라 마음을 벗어난 곳에 부처가 있다. 그것은 생각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 바보 같은 제자는 마음을 벗어난 곳에는 부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무심과 부처가 동의어가 아니라, 마음과 부처를 동의어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명상을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이미 부처이며 더 이상 명상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그대는 또 다른 마음을 찾고 있지 않은가?
그대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모든 사념의 파도로부터, 감정과 분위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런 것들이 그대의 마음을 이루고 있다. 그런 것들을 초월해서 하나의 지켜봄이 있다. 한 사람의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 '지켜보는 자'가 바로 부처다. 나는 이 불쌍한 제자를 딱하게 생각한다. 비록 그는 인류에 대해서 많은 봉사를 했지만 말이다. 그는 달마의 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달마의 선어록을 편찬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어록의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달마와 같은 경지에 있는 사람이면 그의 어록을 바로 잡을 수 있다. 그것은 아무 문제도 없다. 하지만 그 제자는 자신의 생각대로 달마의 선어록을 만들었다.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어쨌든 그는 달마의 말을 또 인용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그대가 자신을 속이는 한 결코 그대의 진짜 무심을 알 수 없다. 그대가 생명도 없는 모양에 얽매이는 한 그대는 자유를 누릴 수가 없다.
무엇이 그대의 자유를 구속하는가? 그대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감옥이다. 물론 보통의 감옥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종류가 다를 뿐이지 마음은 모두 감옥이다. 힌두교는 하나의 감옥이다. 이슬람교 역시 종류만 달랐지 그대의 자유를 구속하는 입장에서는 똑같은 감옥이다. 기독교도 감옥이고 그 밖의 모든 종교도 그대를 자유롭게 하지 않는 한 건물만 달랐지 감옥임에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감옥에서 저 감옥으로 옮겨 다닌다. '혹시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하는 기대를 갖고서 말이다. 기독교인이 힌두교도로 변할 수 있다. 힌두교도가 불교도로 될 수도 있다. 불교도 역시 이슬람교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감옥의 건물만 바꿀 뿐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입력되어진 프로그램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입력된 프로그램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프로그램도 다시는 입력시키지 않아야 한다. 바로 이러한 행위가 명상이다. 지금 나는 명상을 과학적 용어로 바꾸어 표현했을 뿐이다. 그대의 마음에서 입력된 프로그램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대 마음의 석판에 새겨진 모든 지식들을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대 마음의 석판에 새겨진 모든 지식들을 깨끗이 지워버린다면, 그때 무심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 순간 그대 속에서 부처가 탄생하게 된다.
만약 그대가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대 자신을 계속 속여라. 그것은 부처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무심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무심 밖에서 부처를 찾지 않을 것이다.
각성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이른 사람들이 말하는 가장 큰 망상은 바로 그대 자신 밖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밖에서 존재의 의미와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찾고 있다. 마음은 항상 밖을 내다보려고 한다. 이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 마음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과학 안에서, 사업 안에서, 경제 안에서, 그대 바깥의 모든 것 속에서 완전히 잘 꾸려 나간다. 그런 것들 속에서 마음은 완전히 올바른 수단이다.
그러나 그대 내면은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이다. 그대가 내면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떠나야 한다. 그대는 마음을 떠나 될 수 있는 한 그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그대가 마음의 관찰자가 될 때, 마음을 그대 외부의 어떤 사물로서 지켜볼 그때가 바로 그대가 고향집에 돌아온 순간이다.
부처는 부처를 구원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달마가 한 말임에 틀림없다. 이 말 속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내용이 너무 엄청나서 가엾은 제자들의 이해 능력이 미칠 수 없었다. 달마의 어록을 쓴 후세의 제자도 그것을 단지 받아 적었을 뿐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달마는 이 말을 여러 번 반복했을 것이다. 이 말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아무도 그대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는 자신이 구세주라고 말했다.
그대가 예수와 달마를 비교한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목자이고 너희는 양이다. 너희가 길을 잃으면 나는 너희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대단한 자비심으로 들릴 것이다. 예수는 굉장한 사랑과 동정심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왜 인류가 구원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불쌍한 친구는 헛되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불쌍하게 만든 사람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인들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항상 당황스럽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렸다는 말을 계속하면서도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는다. 나는 한 설교가에게 다정스레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이름은 스탠리 존이었는데 기독교 선교사로서 매우 철학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가 사는 고장에 그가 올 때마다 나는 항상 그의 말을 들으러 갔다. 하루는 그가 계속해서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말했다.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나는 기독교인도 아니다. 그리고 사실 교회에 어떤 방해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당신은 무의미한 말을 계속하고 있다. 당신은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렸다고 말하지만, 나는 구원받은 사람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예수는 자신조차도 구원할 수 없었다."
인도 밖에서 생겨난 종교, 특히 기독교나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는 모두 구세주에 대한 사상을 갖고 있다. 인도에서는 네 가지 종교가 생겨났다. 그것은 힌두교, 시크교, 자이나교, 불교이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누구를 구원한다는 생각이 없다. 나 역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한다.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는 생각은 내가 너보다 더 뛰어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특별하며, 신의 독생자이며, 신의 사자이며, 너는 그저 보통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달마는 '부처는 부처를 구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는 그대가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그대 역시 부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대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부처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대를 깨어나게 하는 것이 전부다. 그것은 구원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누구를 깨울 때, 그대는 자신이 그 사람보다 더 거룩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그대가 인류를 위해서 대단한 봉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잠들어 있는 가엾은 한 친구를 깨우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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