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본성론(本性論) 2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17:00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팔리어, 이 세 가지 언어는 과거 이 땅에 살았던 깨달은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이다. 이 언어들은 내면적 경험에 관해서 풍부한 어휘들을 갖고 있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과학적 기술과 연구 그리고 발명과 발견에 대해 많은 용어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그런 말들이 없다. 하지만 내면의 경험에 관한 한 동양의 언어들이 서양 언어보다 절대적으로 풍부하다. 이 세 가지 언어 중에서 산스크리트어는 우파니샤드와 힌두 신비주의자들에 의해서 사용되었고, 프라크리트어는 마하비라와 모든 자이나교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또한 팔리어는 석가모니 부처가 사용한 언어이다.

'선생'을 의미하는 말은 이 세 가지 언어에서 많은 어휘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말들마다 조금씩 다른 맛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영어에는 'teacher'라는 말밖에 없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언어에서 그 어휘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 단어는 '시크샤크(sikshak)'란 말이 있다. 그것은 오직 정보만을 전달해 주는 선생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정보는 정확하다. 그는 마음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두 번째 단어는 '아디야팍(adhyapak)'이다. 그는 경험 속에서 약간 깊이 들어간 사람이다. 단지 정보만 전달해 주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전달해 주는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신적 차원까지는 아니다. 단지 그는 가슴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세 번째 단어는 '우파디야이(upadhyay)'이다. 그는 좀더 깊이 들어간 사람이다. 그의 정보는 살아 있다. 그는 길을 여행하는 자이다. 그러나 아직 목표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챠리아(acharya)'란 말이 있다. 그는 궁극에 이른 사람이다. 그가 전해주는 정보는 그 자신의 경험이다. 그는 완전한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그의 말은 그가 존재하는 것으로 완전히 증명된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오직 'teacher'란 단어밖에 없다. 그리고 이 말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다 쓰인다. 다른 말로 '마스터(master)'란 말이 있지만 그것은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마스터'라는 말을 '아챠리아'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싶다. 그는 마음을 통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아는 사람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전들이 왜곡되지 않았다. 제자들은 달마 같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단순히 받아 적기만 한 것이다. 만일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스승을 찾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밑바닥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스승이라도 그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한 이상은 스승이 아니다.

이런 스승은 스승이 아니다. 그는 단지 선생일 뿐이다. 그는 거의 컴퓨터와 같다. 그는 읽고 공부하고 모든 경전을 마구 머리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의 현존은 그가 아는 것을 전혀 나타내지 못한다. 그의 행동은 그가 논쟁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 그의 말은 그저 마음의 피상적인 표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들은 존재의 깊은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 없이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다. 그러나 참된 스승은 오히려 침묵 없이는 가르칠 수 없다. 만약 그가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침묵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스승은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이다. 선생은 단지 인용한 말들만 전해 준다. 그것은 교육되고 훈련된 마음이다. 하지만 스승은 존재 자체의 변화를 보여 준다. 그가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제자는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눈이 있는 사람은 그의 아름다움을, 그의 축복을, 그의 웃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침묵 속에서조차 많은 것이 전달된다. 그의 침묵은 궁극적인 노래이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도 전 우주가 춤추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그의 존재가 바로 우주의 춤인 것이다. 스승은 선생과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비슷한말도 아니다.

만일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스승을 찾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밑바닥에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찾은 스승이라도 그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한 이상은 스승이 아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만약 그대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스승을 만나야 할 것이다. 그 스승은 자신의 본성을 알기 때문에 그대의 본성 역시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본성은 똑같기 때문이다. 그의 지식과 그의 얇은 그와 그의 제자들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그가 십이연기설을 항상 암송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과 죽음의 바퀴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그리고 그는 해탈의 희망도 없이 삼계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대의 불멸성이나 그대의 영원성이나 전체와 하나되는 일체감을 단지 지식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 지식은 그대의 마음을 말들로 가득 채울 뿐이다. 하지만 그대의 존재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대는 직접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오직 직접적인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간접적인 것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 없는 죽은 말이다.

학자나 판디트(pandit)나 랍비(rabbi)와 같은 대단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삼계에서 당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석가모니 부처는 저승이나 이승이나 지옥이나 삼계 그 어디라도 종류가 다를 뿐 고통은 매한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불교는 가장 차원 높은 종교이다. 천상마저도 궁극의 곳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고통은 여전히 있다. 그 고통은 매우 세련된 고통이다. 하지만 고통스럽다는 점에서 매한가지다. 고통을 전혀 받지 않으려면 사람은 삼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니르바나(nirvana)이며 깨달음이다.

옛날에 선성(善星)비구는 경전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않았기에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신성비구도 이와 같을진대, 오늘날 몇 구절의 경이나 외우고서는 이것이 다르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리석은 바보들이다.

달마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불교 경전을 다 외울 만큼 지식이 많은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는 것은 이 어록을 편집한 제자의 능력으로서는 한계 밖이다. 오직 달마만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지성적인, 에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만이 그렇게 말해도 욕이나 비난이 되지 않는다. 달마 같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말해져야 한다. 그는 예의나 체면과 같은 겉치레를 차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직 무엇이든지 진리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나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나의 경험을 통해서 학식 있는 사람들은 잘 배운 바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대단한 명예를 얻었지만 자신의 의식에 과한 한 보통 사람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단지 앵무새일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앵무새가 그대의 판디트들보다 더 지성적일지도 모른다.

앵무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때는 겨울이었고 한 여인은 밤이 되면 앵무새가 있는 새장 위에 두꺼운 담요를 덮어 주곤 했다. 앵무새가 추위를 탈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낮이면 그 담요를 벗겨 주었다. 어느 날 태양이 떠오르자 그녀는 담요를 벗겼다. 그러자 아무도 노래를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앵무새는 노래를 시작했다. 사실 앵무새가 노래를 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숲 속에 사는 앵무새조차 노래를 한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전달되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그때 그 여인은 남편의 차 소리가 현관 앞에서 멈추는 것을 들었다. 그녀의 남편은 비상 근무를 서는 군인이었다. 그래서 한번씩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녀는 즉시 담요를 덮고는 침대 위로 가서 자는 척했다. 그러자 앵무새가 말했다.
"맙소사! 오늘은 해가 정말 짧군."

그런 말을 아무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앵무새의 지성에서 나온 말이다. 매일 담요는 아침에 벗겨져서 저녁에 씌워졌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했다. 그 날은 낮이 너무 짧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그만한 지성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의 지식이 너무나 방대해서 지성이 일어날 모든 가능성을 완전히 삼켜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반대되는 지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바보들이다. 그 바보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뿐만 아니라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까지 이야기한다. 자신들마저 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광설로 그들의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진실한 삶은 말이 아니라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대는 전생애를 "사랑, 사랑, 사랑"이란 말만 되풀이하면서도 막상 진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대가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 그대는 무척 놀랄 것이다. 그 경험은 너무나 깊은 것이어서 단지 "사랑"이라는 말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사랑의 경험도 이러한데 진리는 어떻겠는가? 진리는 무한하고 영원하다. 그것을 아는 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경험할 때 그대는 경이 속에 빠질 것이다. 모든 말이 아무 쓸데없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