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맥론(血脈論)-달마대사 설-1
삼계(三界)가 혼탁하게 일어나서 동일하게 일심(一心)으로 돌아가니 앞의 부처님과 뒤의 부처님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시어 문자(文字)를 세우지 않으셨다.
묻기를, [만약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서 마음을 삼아야 합니까?]
답하길, [그대가 나에게 묻는 그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며, 내가 그대에게 답하는 이것이 곧 나의 마음이다. 내게 만약 마음이 없다면 무엇으로 인하여 그대에게 답한 줄 알 것이며, 그대에게 만약 마음이 없으면 무엇으로 인하여 나에게 묻는 줄 알겠는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다. 시작 없는 광대한 겁으로부터 이어져 온 내지 시행하고 운동하는 모든 시간과 모든 처소(處所)가 다 그대의 본래 마음이며, 모두 그대의 본래 부처이니, 곧 마음이 이 부처라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이 마음을 제외하고서는 결국 다른 부처를 얻을 수 없으며, 이 마음을 여읜 밖에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을 찾는 것은 옳을 것이 없다. 자기의 본래 성품은 진실해서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며, 법(法)이 곧 마음이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마음이 바로 보리(菩提)이며 자기의 마음이 바로 열반이니, 만약 마음 밖에서 부처와 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옳은 곳이 없으니, 부처와 보리가 다 어느 곳에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을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허공은 다만 이름만 있고 또한 모양이 없어서 취하려해도 취할 수 없고, 버리려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허공을 잡으려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이니, 이 마음을 제외한 밖에 부처를 찾아도 마침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는 바로 자기의 마음으로 지어 얻는 것이거늘 무엇으로 인하여 이 마음을 여읜 밖에서 부처를 찾을 것인가! 앞의 부처님과 뒤의 부처님이 다만 그 마음을 말한 것이니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다. 마음 밖에 부처가 없으며 부처 밖에 마음이 없으니, 마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말한다면 부처는 어느 곳에 있으며 마음 밖에 이미 부처가 없는데 어떻게 부처라는 소견이 일어나겠는가? 번갈아 서로 광혹( 惑)해서 능히 본심을 깨달을 수 없고 다른 무정물(無情物)에 포섭(包攝)되어서 자유가 없다. 만약 또 믿지 못한다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어서 이익이 없다. 부처에게는 허물이 없거늘 중생이 전도(顚倒)되어 깨닫지 못해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만약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인 줄 안다면 마땅히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 부처는 부처를 제도하는 것이 아니므로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이 밖에 부처라는 것은 다 이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또한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예배할 수 없으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염(念)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는 경을 봉송하지 않으며 부처는 계(戒)를 지키지 않으며 부처는 계(戒)를 범하지 않고 부처는 (계를) 지키고 범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선과 악을 짓지 않는다.
만약 부처를 찾고자하면 반드시 이 성품을 보아야 만이 곧 부처이다.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면 염불(念佛)하고 송경(誦經)하며 재(齋)를 지키고 계(戒)를 지켜도 또한 이익이 없다. 염불(念佛)은 인과를 얻고 송경(誦經)은 총명(聰明)을 얻으며 지계(持戒)는 생천(生天)을 얻고 보시는 복덕의 과보를 얻으나 부처를 찾는 것은 결국 얻을 수 없다.
만약 자기를 밝게 알지 못하거든 반드시 선지식을 참례(參禮)하여 애오라지 생사의 근본을 달성할지니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면 곧 선지식(善知識)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비록 설하여 십이부경(十二部經)을 얻는다 할지라도 또한 나고 죽음을 면하지 못하고 삼계(三界)에 윤회하여 고통을 받되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이다.
옛적에 선성비구(善星比丘)가 있어서 지송(持誦)하여 십이부경을 얻었어도 오히려 스스로 윤회를 면치 못하였으니, 연유는 불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성(善星)도 이미 이와 같았거늘 요즘 사람들은 몇 권(三五本)의 경론(經論)을 강설해서 불법이라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만약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한갓 문서를 외워도 아무 쓸 곳이 없다. 만약 부처를 찾으려면 곧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할 것이니 성품이 곧 이 부처요 부처가 곧 자재(自在)한 사람이며 일 없고 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면 종일토록 아득(茫茫)하여 밖을 향해 치달아 구하여도 부처를 찾는 것은 원래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한 물건도 얻을 수 없으나 만약 아직 알지 못했다면 또한 반드시 선지식을 참례해서 간절히 반드시 애써 구해서 마음으로 하여금 알도록 해야 한다. 나고 죽는 일이 크니 헛되이 지내지 말라. 자기를 속이는 것은 이익이 없는 것이다. 비록 진귀한 보배가 산처럼 있고 권속이 항하(恒河)의 모래와 같을지라도 눈을 떠야 곧 볼 것이거니와 눈을 감으면 도리어 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알라. 유위(有爲)의 법은 몽환(夢幻) 등과 같은 것이다.
만약 빨리 스승을 찾지 못하면 헛되게 일생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부처의 성품은 스스로 존재하나 만약 스승으로 인하지 않으면 결국에 밝게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스승으로 인하여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만인들 중에 드문 것이다. 만약 자기가 인연에 회합하여 성인의 뜻을 얻으면 곧 애써 선지식을 참례할 것이 없으니 이는 곧 나면서 아는 뛰어난 배움이다.
만약 아직 깨달아 알지 못하였거든 반드시 부지런히 애써 참학(參學)할지니 교(敎)로 인해서 바야흐로 깨달을 수 있다. 만약 스스로 분명히 깨달으면 배우지 않아도 또한 얻을 것이니 미혹한 사람과는 같지 않다. 희고 검은 것을 분별할 수 없고 망령된 말로 부처님의 조칙(條勅)을 선설(宣說)한다고 하면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고 불법을 망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의 무리는 불법을 설하는 것이 비가 내리듯 할지라도 모두 이것은 마군(魔軍)의 말이요 곧 부처님의 설법이 아니며 스승이 바로 마왕이요 제자가 바로 마왕의 백성이거늘 미혹한 사람은 다른 지휘를 따라서 깨닫지 못하고 생사의 바다에 떨어진다.
다만 이것은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망령되게 이것이 부처라고 일컬으면 이러한 등의 중생은 바로 큰 죄인이다. 다른 일체 중생을 속여서 마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만약 견성하지 못하면 십이부경의 가르침을 설한다 할지라도 다 이것은 마구니의 설이며 마가(魔家)의 권속이지 불가의 제자가 아니니, 이미 검고 흰 것을 가리지 못하니 무엇을 의지하여 생사를 면할 것인가! 만약 견성하면 곧 부처요 견성하지 못하면 곧 중생이다.
만약 중생의 성품을 여의고 달리 불성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부처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곧 중생의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다. 성품 이외에 부처는 없는 것이요 부처가 곧 성품이니, 이 성품을 제한 밖에 부처를 얻을 수 없으며 부처 밖에 성품을 얻을 수 없다.]
묻기를,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고 염불이나 송경(誦經)하며 보시하고 계를 지키며 정진해서 널리 복리를 일으키면 성불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하길, [성불할 수 없다.]
또 묻기를, [어찌하여 성불할 수 없습니까?]
답하길, [약간의 법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것은 유위법(有爲法)이며, 인과이며, 과보를 받는 것이며, 윤회법(輪廻法)이다. 생사를 면치 못한 것이니, 어느 때에 불도를 이루겠는가? 성불(成佛)은 반드시 성품을 보는 것이니, 만약 견성(見性)하지 못하면 인과(因果) 등의 말은 외도(外道) 가르침이니, 만약 깨닫고자 한다면 외도의 법을 익히지 말아야 한다. 부처는 바로 업이 없는 사람이며 인과(因果)가 없는 사람이다. 다만 조그만 법이라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다 이것은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니 무엇을 의지하여 이루겠는가? 다만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능력과 하나의 견해와 하나의 소견에라도 머물러 집착함이 있다면 부처는 도무지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는 가지고 범함이 없고 마음의 본성이 본래 텅 비었으며, 또한 더럽고 깨끗한 제법이 아니다. 닦고 증득함이 없으며 인과도 없으며 부처는 계를 갖지 않으며 부처는 선을 닦지도 않으며 부처는 악을 짓지도 않으며 부처는 정진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게으르지도 않으니 부처는 이렇게 작위가 없는 사람이다. 다만 마음의 견해(知見)에 머물러 집착이 있다면 부처는 곧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는 바로 부처가 아니니 부처라는 견해를 짓지 말라. 만약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본심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고 모든 시간 속에 짓고 지음이 없는 생각을 헤아린다면 이는 큰 죄인이며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무기공(無記空) 속에 떨어져 혼미하여 술 취한 사람 같아서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못한다.
만약 지음이 없는 법을 수행하려면 먼저 반드시 견성한 연후에 반연된 생각을 쉴지니 만약 성품을 보지 못하고 불도를 이루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어떤 사람이 인과가 없다고 해서 분주하게 악업을 짓고 망령되게 본래 텅 비었다고 말하면서 악을 지어도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무간지옥과 흑암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벗어날 기약이 없으리니, 만약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견해를 내지 않으리라.]
묻기를, [이미 이렇듯 시행한 운동과 모든 시간이 다 본래의 마음이라면 몸(色身)이 무너지(無常)는 때에 어찌하여 본래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답하길, [본심(本心)이 항상 앞에 나타나건만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이다.]
묻기를, [마음이 이미 나타나 있다면 무슨 까닭에 보지 못합니까?]
답하길, [그대가 일찍이 꿈꾸어 본적이 있는가?]
답하길, [일찍이 꿈꾸어 본적이 있습니다.]
묻기를, [그대가 꿈꾸었을 때에 그것이 그대의 본래 몸이었던가?]
답하길, [본래의 몸이었습니다.]
또 묻기를, [그대의 언어와 행위와 운동이 그대와 다른가? 다르지 않는가?]
답하길, [다르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이렇듯 다르지 않다면 곧 이 몸이 바로 그대의 본래의 법신(法身)이며 곧 이 법신이 바로 그대의 본래의 마음이니, 이 마음이 시작 없는 광대한 겁으로부터 지금과 같이 더불어 다르지 않아서 일찍이 나고 죽은 적이 없으니,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아니하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아니하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또한 옳고 그름도 없으며, 또한 남자와 여자의 형상도 없으며, 또한 승속(僧俗)과 늙음과 젊음도 없으며, 또한 성인도 없고 범부도 없으며, 또한 부처도 없고 또한 중생도 없으며, 또한 닦고 증득할 것도 없으며, 또한 인과도 없으며, 또한 근력도 없으며, 또한 형상도 없다. 마치 허공과 같아서 취하려 해도 취할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니, 산과 강 석벽이 장애할 수 없으며, 나오고 빠지며 가고 옴에 신통을 자유롭게 하여 오온(五蘊)의 산을 꿰뚫고 생사의 강을 건너나니, 온갖 업이 이 법신을 구박하려해도 구박할 수 없다. 이 마음은 미묘하여 보기 어려운 것이며, 이 마음은 물질의 형상과 같지 않으며,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사람들이 다 보고자 저 광명 속에서 손을 흔들고 발을 움직이는 것이 항하의 모래와 같건마는 접근하여 물어보면 모두 말할 수 없어서 마치 나무 조각의 사람과 흡사하나니, 모두 이것이 자기가 수용하여 사용한 것인데 무엇으로 인하여 알지 못하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이 다 미혹한 사람이다. 이로 인하여 업을 지어서 생사의 강에 떨어져 벗어나고자 하나 도리어 빠진다"하셨으니, 다만 본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생이 만약 미혹하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인하여 묻는 그 가운데에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는가? 자기가 손을 흔들고 발을 움직이는 것을 무엇으로 인하여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알라 성인의 말씀은 그릇됨이 없다. 미혹한 사람은 스스로 알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알라 이 마음은 밝히기 어렵다. 오직 부처님 한 분만이 능히 이 마음을 알 수 있을 뿐이요, 나머지 인간과 하늘 및 중생 등은 다 밝게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니, 만일 지혜로 이 마음을 밝게 깨달으면 바야흐로 법성(法性)이라 부르며, 또한 해탈이라고도 한다. 생사가 구박하지 못하며 일체법도 달리 구박할 수 없으니, 이것을 대자재왕여래(大自在王如來)라 하며, 또한 부사의(不思議)라 하고, 또한 성인의 본체라 하며, 또한 장생불사(長生不死)라 하고, 위대한 선인(仙人)이라고 하나니, 이름은 비록 같지 않으나 본체는 곧 하나이다.
성인께서 갖가지로 분별하여 밝혔으나 다 자기의 마음을 여의지 않았으니, 마음의 헤아림이 광대해서 응용함이 무궁(無窮)하다. 눈에 응해서는 빛을 보고, 귀에 응해서는 소리를 들으며, 코에 응해서는 냄새를 맡고, 혀에 응해서는 맛을 알며, 더 나아가서는 시행한 운동이 다 자기의 마음이다. 모든 시간 가운데 다만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것이 곧 자기의 마음에 있으니,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여래의 색신(色身)은 다함이 없다." 하였으며 지혜도 또한 다시 그러하다.
색이 다함이 없는 것이 바로 자기의 마음이니, 심식(心識)이 잘 능히 일체를 분별하며 나아가 시행하고 운용함이 다 지혜이니, 마음이 형상이 없듯이 지혜도 또한 다함이 없으므로 여래의 색신(色身)이 다함이 없다 하니 지혜도 또한 다시 그러하다. 사대색신(四大色身)이 곧 번뇌이니, 색신은 곧 생멸(生滅)이 있으나 법신(法身)은 영원하여 머물러도 머무는 바가 없나니, 여래의 법신은 영원하여 변화(變異)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시기를, "중생에게는 마땅히 불성이 본래부터 있었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하시니, 가섭(迦葉)은 다만 본성을 깨달았을 뿐이다. 본성이 곧 마음이며 마음이 곧 본성이니, 곧 이것이 동일한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다. 앞에 깨달은 부처와 뒤에 깨달은 부처는 다만 이 마음을 전한 것이요, 이 마음을 제외한 밖에 부처는 얻을 수 없는 것이거늘 뒤바뀐(顚倒) 중생은 자기의 마음이 바로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해 치달아 구해 하루종일 분주(忙忙)하게 염불(念佛)하고 예불(禮佛)하나니 부처는 어느 곳에 있는가? 마땅히 이와 같은 등의 견해를 짓지 말라. 다만 자기 마음을 알면 마음 밖에 다시 다른 부처가 없는 것이다.
경에 이르시기를, "무릇 있는 바 모든 형상은 모두 이 허망한 것이다."라고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있는 바 처소에 곧 부처가 계시다고 한다." 하시니,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마땅히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예배하지 말라. 다만 이 부처와 보살의 형상이 있어서 홀연히 앞에 나타나더라도 절대 애써 예경(禮敬)하지 말라. 나의 마음이 공적(空寂)해서 본래 이러한 형상이 없으니, 만일 형상을 취하면 곧 마(魔)에게 포섭(包攝)되어 모두 삿된 길(邪道)에 떨어지리라. 만약 마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 허깨비인줄 알면 곧 애써 예배하지 말라. 예배라는 것은 아는 것이 안이요, 안다는 것은 예배하는 것이 아니니, 예배하면 마에 포섭되리라. 학인(學人)이 알지 못할까 두려워한 까닭으로 이렇게 분별하는 것이다. 제불여래(諸佛如來)의 본래 형상의 바탕에는 도무지 이러한 형상이 없으니, 절대로 반드시 명시야 한다. 다만 기이한 경계가 나타나거든 절대 애써 캐내려 하지말고, 또한 두려움을 내지도 말며 의혹을 내지도 말라. 우리 마음은 본래 청정하거늘 어느 곳에 이러한 형상이 있겠는가? 나아가서 하늘·용·야차·귀신과 제석·범천왕의 형상 등도 또한 애써 마음으로 공경하고 소중하다는 마음을 내지 말며, 또한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 마음은 본래 공적(空寂)한 것이다. 모든 형상이 다 망상이니 다만 상(相)을 취하지 말라. 만약 부처라는 견해와 법이라는 견해와 부처와 보살 등의 형상을 일으켜서 공경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내면 스스로 중생이라는 계위 속에 떨어지리니, 만약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다만 모든 상(相)을 취하지 않으면 얻을 것이요 다시 다른 말은 없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시기를, "무릇 있는 바 상(相)이 다 이 허망한 것이다."라고 하시니, 도무지 결정된 실체가 없다. 허깨비는 결정된 형상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무상(無常)한 법이다. 다만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저 성스러운 뜻에 부합되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일체 형상을 여의는 것이 곧 모든 부처이다."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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