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 그것의 나타남 또한 한이 없다. 그대의 눈으로 형태를 보고 그대의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와 혀로 냄새 맡고 맛보며 모든 방식으로 느낄지라도 그것은 모두 그대의 무심이다. 매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대의 무심이다.
하지만 달마의 어록을 편찬한 제자는 이 무심을 계속 마음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과 무심은 완전히 별개다. 그것은 차원이 다르며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마음에 해당되는 것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언어이다. 그것은 무심으로 들어갈 수 없다. 생각을 초월한 침묵에 이를 수 없다. 마음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모든 생각은 언어의 형태 속에 들어 있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으며, 그래서 그는 깨어 있다."고 했다. 여래의 모습에 대해서 이해 못하고서, 다시 말해서 깨달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각 종교들은 사소한 것으로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자이나교도들은 석가모니 부처를 깨달은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간단한 이유로 그렇게 한다. 그 이유는 마하비라는 모든 옷을 벗었지만 석가모니 부처는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하비라는 벌거벗고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깨달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 학자들에게는 같은 이유로 해서 마하비라는 깨달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아무도 다양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동차 생산라인에서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차들은 모두 같은 모양이다. 한 시간에 60대씩 만들어지는 포드 자동차에서 그대가 각각을 구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부처는 기계가 아니다. 기계는 같을 수 있다. 하지만 부처는 같을 수 없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조차 모두 틀린데, 어찌해서 부처가 같을 수 있겠는가? 이 자리에 5천 명이 앉아 있지만 어느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이 있는가? 쌍둥이조차도 서로 다르지 않은가? 그들의 부모는 그들을 완전히 구별한다. 그리고 시간은 좀 걸리지만 그들의 친구들도 나중에는 구별할 수 있다. 그리고 부처는 쌍둥이도 아니다. 그리스도도 자신의 향기를 갖고 있고 마하비라에게도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모든 부처는 자신의 독특한 빛과 향기가 있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이 세상의 모든 부처들의 인상을 그대에게 심어주고 싶다. 시대가 다르고 종족이 다른 부처들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바르게 이해되어져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비록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성을 갖고 있지만 사실 같은 영역에 속해 있다. 그들의 내면이 일치하고 있기에 그들은 모두 하나인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라, 이 세상 어디를 가도 깨달은 부처는 모두가 등에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말이다. 아니면 모든 부처가 마하비라처럼 벌거벗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정말로 지루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다.
마하비라는 그 나름대로 완벽하다. 그는 자신만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깨달은 사람들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 세상은 한가지 종류의 꽃으로만 장식될 수 없다. 모든 종류의 꽃이 각기 제 나름대로의 향기를 갖고 있을 때 존재계는 풍부해진다.
여래의 여러 가지 모습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어떻게 변하든지 마음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마음의 각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어떤 특정한 형상도 갖지 않으며 그 깨어 있음에도 한계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래의 모습은 끝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래의 깨어 있음이다."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된 육체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에 따라서 좌우된다. 그러나 진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한다. 여래의 진신은 결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하는 육체 안에는 내면의 존재가 들어 있다. 그것은 그대 의식의 몸이며 각성된 불꽃의 몸체이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경전에 이르기를 "사람은 항상 자신 속에 부처의 본성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마하가섭 역시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달마가 가장 강조한 점이다.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듯이 그대 내면에도 같은 공간이 들어 있다. 그 공간은 바로 무심의 공간이다 .거기에 잠재되어 있던 불성이 그대만의 고유한 꽃을 피운다. 내면에 있어서 만큼은 아무도 가난하거나 부유하지 않다. 거기에는 빈부의 차가 없다. 그대는 항상 그것을 갖고 있으며 그대가 부처가 되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그대의 무심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성, 깨달음, 깨어 있음, 해탈, 모크샤, 니르바나, 이 모든 말들은 같은 뜻을 갖고 있다. 그대가 깨닫는 순간 첫 번째로 나오는 행동은 그대 자신에 대해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두 번째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 속에서 그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는 매우 피곤에 지쳐 있다. 그래서 그대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셔야 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는 그대가 수많은 세월 동안 찾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 세상 밖에서 찾아왔다. 결국 찾는 대상은 그대 자신이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을 발견하면 그대는 그저 놀라움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대는 항상 깨달음의 상태 속에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 사실을 그대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그대가 자신의 주머니 속에 다이아몬드를 넣어 놓고서는 그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온 것과 같다. 그대가 그것을 발견하는 날, 그대는 삶이 그대와 게임을 하고 있는 하나의 우스개라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대는 다음의 이야기를 되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달마는 선의 창시자가 아니다. 선의 진짜 창시자는 마하가섭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다. 사실 그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토록 우아한 사람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가 어떻게 해서 선의 창시자가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바이샬리에 수다스(Sudas)라는 가난한 구두장이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집 가까이에 있는 연못에서 제철이 아닌데도 연꽃이 피어난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매우 행복했다. 무척 비싼 가격에 그것을 팔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연꽃이었다. 그는 그 연꽃을 가지고 그 도시에 사는 가장 큰 부잣집으로 갔다. 그 집에 당도할 때쯤 그는 황금마차가 그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마차에는 그 부자가 타고 있었다. 마차에 탄 그 부자는 마하가섭이 들고 있는 연꽃을 보고 마차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는 수다스에 말했다.
"그대는 그 아름다운 연꽃을 나에게 팔지 않겠는가?"
그러자 수다스는 얼마를 불러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장자께서는 얼마나 돈을 주시겠습니까?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부자가 말했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석가모니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분은 지금 마을 어귀에 있는 망고나무 밑에서 설법을 하고 계신다. 나는 그분의 발아래 이 희귀한 연꽃을 바치고 싶다. 아마 그분은 제철이 아닌 때 핀 이 연꽃을 보고 놀라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금화 오백 냥을 주겠다."
수다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런 돈은 상상도 못해 본 액수였던 것이다. 마침 그때 왕이 지나가다가 그 장면을 보고 수다스에게 말했다. "그 부자가 돈을 얼마나 부르더라도 내가 그 네 배를 그대에게 주겠으니 그 연꽃은 그에게 팔지 말라."
수다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황금 오백 냥도 어마어마한데 그것의 네 배를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금화 이천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다스는 왕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그토록 이 연꽃을 가지고 싶어하십니까?" 그 말을 듣고 있던 부자는 질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왕보다 더 부자였다.
그래서 부자는 수다스에게 말했다. "그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지금 서로 경쟁이 붙었다. 나는 왕이 부르는 금액에 다시 네 배를 주겠다."
그리하여 경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네 배, 네 배, 계속 네 배씩 그 연꽃의 가격은 올라갔다. 수다스는 숫자가 천문학적으로 올라가자 그만 가격을 셀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왕과 부자의 대화에 갑자기 끼어 들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나는 연꽃을 팔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 다 망연자실해졌다. 그리고 둘 다 똑같이 말했다.
"뭐가 문제인가? 그대는 더 많은 돈을 원하는가?"
수다스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이 연꽃이 얼마가 값비싼 것인지는 몰라도 두 분께서 서로 석가모니 부처님께 이 연꽃을 바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그분을 잘 모르지만 이제 그분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두 분께서 서로 이 연꽃을 가지려고 싸우시니 나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내가 직접 이 연꽃을 그분에게 바치겠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그분은 크게 놀라실 것입니다."
그는 무척 가난했지만 엄청난 돈을 거절했다. 수다스는 석가모니 부처를 찾아갔다.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왕과 부자가 그 이야기를 석가모니 부처에게 먼저 하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는 그 구두장이에게 놀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어떤 가격에도 그 연꽃을 팔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갖고 있는 모든 보물들을 다 주고서라도 그 연꽃을 사려고 했는데 그는 거절했습니다."
그때 수다스가 석가모니 부처 앞에 와서 절을 하고, 그의 발을 만지면서 연꽃을 바쳤다.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다.
"수다스여, 그대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다. 나는 돈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그런 돈을 줄 수가 없다."
그러자 수다스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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