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진여론(眞如論)-5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19:16

 

 

 

"당신께서 친히 이것을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이 왕국 전체보다 더 큰 것이며, 부자의 모든 보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지만 괜찮습니다. 내 생계는 내가 충분히 꾸려갈 수 있습니다. 나는 부자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 일이 몇 백년이고 기억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하는 한 이 수다스 역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친히 받아만 주십시오."

부처는 손으로 연꽃을 받았다. 그때는 아침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아침 설법을 들으려고 모여 있었다. 부처는 단지 연꽃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서 한 시간이나 지났지만 그는 연꽃을 들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저 연꽃은 아마도 신통력이 있는 꽃인가 보다. 부처님은 연꽃만 보고 계시지 않은가?"

그때 마하가섭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그전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경전에 나와 있다. 석가모니 부처는 그를 불러서 그 연꽃을 전해 주면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연꽃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향기와 빛을, 나의 침묵을 그대에게 전하노라. 이제 나의 법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니 이 연꽃은 그것의 상징이다."

이것이 선의 시작이다.
사람들은 마하가섭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리는 거기에 있었고,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꽃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저 부처님의 발을 만졌을 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로 되돌아와서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경전에는 마하가섭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그대들은 나의 스승님께 가서 물어 보라. 그가 살아 계시는 한 나는 어떤 대답도 할 권리가 없다."

그때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하나의 시작이다. 내 모든 경험들은 이제부터 말없는 가운데 전해질 것이다. 그것을 전해 받는 사람은 완전히 수용적으로 되어야 한다. 마하가섭은 그의 미소로써 자신의 수용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대들은 왜 그가 웃었는지 알지 못한다. 바로 그때 그는 한 사람의 부처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의 상징으로 그에게 연꽃을 주었다. 나는 그가 깨달았음을 인정한다."

바로 이 사람 마하가섭이 선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마하가섭과 석가모니 부처와의 그런 관계에서부터 선이라는 큰 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달마는 너무나 뛰어나서 거의 선의 창시자처럼 되어 버렸다. 마하가섭 이후로 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는 말해질 수 없는 말을 너무나 정확하게 말했다. 그는 그대로 하여금 그대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일러 주었다. 그대 자신의 본성을 일깨워 준 것이다.

마하가섭도 오직 자신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아무것도 전해 받은 것이 없다. 스승은 제자에게 마지막 인정 외에는 그 무엇도 해줄 것이 없다. 제자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그대는 단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모든 명상이 바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방법인 것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을 들여다보면 스승은 그대를 인정해 줄 것이다.

또 경에 일렀으되 "형상을 가진 모든 것은 환상이다."라고 했다. 또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라고 했다.

그대는 거기에 있다. 거기에는 그대 외에 다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거기에 부처가 있다. 왜냐하면 그대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지 둘러볼 필요가 전혀 없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음(무심)이 부처이다. 그러니 부처로 하여금 부처를 예배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부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예배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 가르침은 매우 추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부처이다. 잠들어 있든 깨어 있든 말이다. 거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잠들어 있는 사람도 곧 깨어날 것이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예배하겠는가? 그래서 부처의 가르침에는 예배나 기도 의식이 들어 있지 않다.

부처나 보살이 그대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더라도 그대는 그를 숭배할 필요가 없다. 달마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사실 그가 하는 말은 어떤 말이라도 그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그대는 그의 말을 오해하지 않으려면 정말 깨어 있어야 한다. 그의 말은 이해하기보다는 오해하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가 '숭배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할 때에는 그것이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존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경은 하나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처를 예배할 의무는 그대에게 없다. 하지만 그대의 존재 전체가 그렇게 느낄 뿐이다. 아무런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도 그대는 부처를 그저 존경하게 된다. 부처는 그대의 미래를 나타내 주기 때문에 그대는 깊은 감사를 느끼는 것이다. 그는 그대의 미래를 생각나게 해주는 존재이다. 그는 그대가 가야 할 목표를 나타내 준다. 그래서 존경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존경에 대한 감정이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마하가섭조차도 석가모니 부처의 발을 만졌다. 그것은 무슨 의무 사항이 아니다. 달마조차도 매일 부처 앞에 고개를 숙여 절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죽은 지 천 년이 지났지만 말이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니란자나(Niranjana) 강둑의 작은 마을 붓다가야(Bodhgaya)는 중국에서 보면 서쪽이 된다. 달마는 매일 서쪽을 향해 절을 한 것이다.

그는 중국 땅에서 지도를 펴곤 했다. 거기서 인도를 찾은 것이었다. 그는 '숭배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면서도 서쪽을 향해 절을 했다. 절을 할 의무는 없다.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하지만 존경심은 저절로 우러나온다. 그리고 그 존경심은 진정한 것이다. 만약 그대가 어떤 의무감에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도 그대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진실에서 나온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의 이 무심은 비어 있으며 어떤 형상도 담고 있지 않다.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마귀이며 그것들은 수행의 길에 자주 나타나는 것들이다.

불교에서는 그대에게 신이나 악마에 대해서 숭배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아니 신이나 악마가 존재한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다. 신이나 악마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신은 악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악마 역시 신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들은 한 가지 일에 참여하는 동반자이다. 그래서 달마가 '마귀'라는 말을 상용할 때는 단지 그것이 어둠이란 뜻이다. 그것은 어둠에 대한 인격화인 것이다. 악마는 한 개체가 아니며 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어둠이며 신성일 뿐 인간처럼 하나의 개체가 아니다. 형상을 나타내는 것은 모두 마귀이며 그것들은 수행의 길에 자주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어둠 속에 살며 어둠의 생명력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깨비에게 무엇하러 예배하겠는가? 그것에 예배하는 자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 자신 속에 부처가 들어 있는데 그대는 그것을 모를 뿐이다. 그러므로 사원이나 회당이나 모스크나 교회에서 예배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어둠에서 나온 행위이다.

그리고 그것에 예배하지 않는 자는 진실로 아는 자이다. 그들은 살아가는 자체가 하나의 예배이다. 그들은 교회나 사원으로 가지 않는다. 그들은 24시간 생활하는 것이 하나의 예배이다. 그들의 삶은 기도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자비심과 감사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모든 동작 하나 하나가 자신들의 깨달음을 드러낸다.

그대의 생각에 이끌려서 그것을 예배하는 것은 마귀의 수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지적하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해서이다. 부처의 본래 면목은 어떤 모습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말을 명심하라. 평상심에서 벗어나서 어떤 기이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고 그대의 무심이 본래 순수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도 말라. 그대의 순수한 무심에 어디 그런 것들이 자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심 속에 비쳐지는 귀신이나 마귀나 거룩한 성자의 형상이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숭배하지도 말라.

그대의 마음에는 오직 환상뿐이다. 크리슈나를 보는 사람도 있고,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도 있다. 또 유령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모든 종류의 환상을 보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그대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깨비이다. 그것들을 숭배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무심은 본래 텅 비어 있다. 모든 형상들은 환상일 뿐이니 그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 오직 이 한 가지는 기억하라. 그대의 기본적인 본성은 절대적인 침묵이다. 거의 그것은 무(無)와 같은 것이며 하나의 정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부처의 본성인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삶 속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으로부터 해탈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끊임없이 돌아가는 생사의 수레바퀴에서, 그리고 그 고통과 번민 속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것은 그대를 영원한 축복, 환희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어록은 그대의 오락 시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의 깨달음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깨달음이란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그것은 이미 그대 안에 있다. 그대는 단지 깨어나기만 하면 된다. 수백만 번의 삶을 그대는 잠든 채로 살아왔다. 얼마나 더 잠을 자기 원하는가? 이제는 깨어날 시간이다. 사실 그대는 잠을 너무 많이 잤다. 이제 그대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의미에서 잠에서 깨어나라.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