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그대가 부처나 다르마나 보살을 부러워하고, 그들을 예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직접적인 이해를 얻기 원한다면 어떠한 모양에도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뜻을 이룰 것이다. 나는 그것 외에 다른 어떤 충고도 해줄 수 없다.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면 그대는 부처와 한가지 마음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왜 우리는 부처와 보살을 예배하면 안 됩니까?"
마귀와 귀신들은 모습을 나타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보살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그것들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는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그대의 신앙심을 잘못된 방향으로 쓰지 말라.
부처란 본래 범어(梵語)로서 그대의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반응하고 이해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눈을 깜빡이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그 모든 것이 그대의 의식이다. 그것은 기적과 같다. 그리고 이 본성이 바로 마음이며 그 마음이 부처이다. 그리고 그 부처는 도(道)이다. 도는 바로 선(禪)이다. 선에 대한 설명은 단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릴 뿐, 그대의 본성을 보는 것이 바로 선인 것이다.
만일 그대가 수천 가지 경전을 다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의 설명은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도(道)는 너무나 위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경전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자만이 도를 찾을 수 있다. 그가 한 구절의 경전도 읽어보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부처가 말한 모든 것은 그의 마음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의 몸과 동작과 표현이 본래 텅 빈 것이므로 그대는 말에서 부처를 찾을 수 없다. 도는 본래가 완전하다. 그것은 완전해지는 과정이 필요 없다. 도는 형체나 소리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미묘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대가 물을 마실 때에야 그 물이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찬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도의 맛은 오직 여래만이 알 수 있을 뿐 인간이나 신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중생의 인식은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그들이 모양에 집착하는 한 그들의 마음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사물의 모양에 집착하는 실수 때문에 도를 잃어버린다.
만약 그대가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안다면 그때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한번 그대가 집착하게 되면 그대는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한번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면 그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경전이 된다. 수천 가지 경전이 오직 밝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이해는 그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때 그 가르침은 얼마나 명쾌하겠는가?
궁극적인 도(道)는 언어를 초월한다. 교리 역시 말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는 말없음이다. 말은 환상이다. 그것은 꿈에서 나타나는 사물과 다르지 않다. 꿈에 보물과 궁궐을 보았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윤회의 요람이 될 뿐이다. 그대가 죽음에 임해서라도 이 사실을 명심해라.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는 모든 장벽을 넘어갈 것이다. 머뭇거리는 순간 그대는 마귀의 수하에 떨어질 것이다. 그대의 진신은 순수해서 그 무엇으로도 상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미혹에 빠진 까닭에 그대는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따라서 그대는 헛되이 업으로 인해 고생한다. 그대가 즐거움을 느낀 곳은 어디든지 거기에 속박이 있다. 그대가 한번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우치면 그대는 더 이상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달마어록(達磨語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도론(禪道論)-3 (0) | 2008.08.15 |
---|---|
선도론(禪道論)-2 (0) | 2008.08.15 |
진여론(眞如論)-5 (0) | 2008.08.15 |
진여론(眞如論)-4 (0) | 2008.08.15 |
진여론(眞如論)-3 (0) | 2008.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