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각성론(覺醒論)-4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19:25

그는 질문했다.
"오늘은 무슨 축제가 있습니까?"

그들이 대답했다.
"아니다. 우리는 매일 축제 분위기 속에 산다. 축제가 곧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그는 또 물었다.
"고타마 붓다가 여기 있습니까? 소크라테스도, 에피쿠로스도 이곳에 삽니까?"

그들이 말했다.
"그들은 모두 이곳에 산다. 길 옆에 있는 정원을 보라."

정원에는 고타마 붓다가 정원사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소크라테스도 거기에 있었고 에피쿠로스도 보였다. 이렇게 선한 사람들이 모두 지옥에 와서 모든 상황을 다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말했다. "이제, 지옥이 진자 천국이 되었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모든 것을 다 바꾸었다. 삶은 이제 하나의 춤이 되었다. 그들은 시와 음악과 예술을 가져와서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그 상황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그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버크도 벌써 와서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주교 정도 되면 분명히 보통 사람들보다는 침착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설교를 시작했다. "나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꿈으로 나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꿈이 무슨 해답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꾸었던 꿈을 이야기했다.
"이런 어리석은 말을 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나는 그 말을 다시 고치겠습니다. 진짜로 선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악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부처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만일 그대에게 확신이 없다면 행동하지 말라.
달마의 이 말은 "전체성 속에서 행동하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대 존재 전체가 의식적일 때, 그대의 행동은 더 이상 업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의 일부분에서 나온 행동은 그대를 얽어맨다. 그대에게 업이 되게 한다. 전체적으로 행동하라. 강렬하게 행동하라. 절대적인 깨어 있음과 자발성 속에서 행동하라. 그때 그대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좋은 것이다.

만약 그대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행동한다면 그대의 마음은 분열된다. 그리고 그때에는 반드시 작은 부분은 의식적이고 큰 부분은 무의식적이다. 그러면 그대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겉으로는 좋게 보일 수 잇지만 그 결과는 속일 수가 없다.

예들 들면, 그대는 가난한 사람에게 적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의 행동에는 확신이 없다. 누구라도 그 행동은 선한 행동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대는 분명히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 것이다. 그러나 달마나 석가모니 부처 같은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대의 행동에 문제점이 많다. 그대는 그의 가난에 진정으로 자비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자신의 에고를 만족시킨 것일 뿐이다. 그대의 마음을 안심시킨 것이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보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대가 가난한 사람에게 적선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에서 적선한 사실은 그대 자신밖에 모른다. 아름다워 보이는 행동이 사실은 그대에게 독이 되는 것이다.

한번 그대가 행동하면 그대는 생사의 바퀴 속에 빠져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를 후회할 것이다. 이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행위 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

이 구절은 약간 비논리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명상에서 나온 철학에서 보면 이 말은 가장 논리적인 말이다. 행위 없는 행동! 이것은 달마의 가르침에 있어서 근본 도리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자발적인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그대 마음의 갈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전체성에서 나오는 행동이라고 부른다.

그대가 자발적으로 행동할 때, 그대는 사실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삶의 원천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행위 없는 행동이다. 그대가 무슨 행동을 하려고 결심할 때 그대는 마음이 개입하게 된다. 과거의 경험이 개입하게 되고 그래서 그 행동은 그대의 업이 된다. 그대가 결정을 내렸기에 그대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존재계 자체가 그대를 통해서 흘러나오도록 한다면 그대의 마음이 더 이상 간섭하지 않는다. 그대는 무심의 상태 속에 있는 것이다.

완전한 침묵 속에서 자신의 본성이 자발적으로 흘러나올 때 그대는 행위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거울과 같다. 그대가 거울 앞에 설 때, 거울이 "이 친구를 비추어 줄까 말까."하면서 망설이지 않는다. 또한 "이 친구는 색안경을 끼면 마피아 두목 같겠군."하고 거울이 생각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잘생겼고 어떤 사람은 못생겼다. 하지만 거울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거울을 보는 사람이 결정할 문제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를 비출 뿐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더라도 거울은 그녀에게 감사하지 않는다. 낙타처럼 생긴 남자를 보아도 거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다.

위대한 신비주의자 아슈타바크라(Ashtavakra)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아슈타바크라'란 말은 세상에서 가장 못생겼다는 뜻이다. 그의 몸에는 여덟 개의 점이 있었다. 그는 꼭 낙타처럼 생겼다. 제자리에 붙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눈은 하나가 왼쪽을 보면, 다른 하나는 오른쪽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걸을 때 그의 다리는 한쪽은 이리 가려고 하고, 또 다른 한쪽은 저리 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매우 이상한 친구였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지 않고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자나크 왕의 궁전에서 왕과 학자들이 영적인 문제로 심오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전국의 위대한 학자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다. 아슈타바크라의 아버지 역시 그곳에 있었다. 그는 유명한 학자로서 항상 토론 때마다 이겼다. 그리고 이기는 사람에게는 항상 후한 상이 내려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슈타바크라의 어머니는 그에게 말했다.

"너는 가서 아버지에게 말해라. 시간이 너무 늦으면 음식이 모두 식는다고. 얼른 와서 식사를 하고 또 돌아가서 토론을 계속할 수 있다고 여쭈어라. 토론은 오늘 하루에 끝나지 않고 아마 며칠씩 걸릴 것이다."

그래서 아슈타바크라는 궁전으로 갔다. 그런데 그가 등장하자 갑자기 거기에 모인 학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그렇게 못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 한 곳 올바르게 생긴 데가 없었다. 아슈타바크라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왕에게 물었다.
"저는 왕께서 이 나라에 가장 현명한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으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모두 구두장이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나의 존재를 보지 못합니다. 이들은 단지 나의 껍데기만 보고 있습니다. 혹시 이 사람들은 구두장이나 푸주한들이 아닙니까? 이들은 확실히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웃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의 웃음은 자신들의 수준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단지 내 육체만 보고 나를 우습게 보니 말입니다. 그런데 나의 몸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인식입니다."

자나크 왕은 그의 말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못생긴 한 청년이 학자들의 맹점을 한 순간에 드러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왕은 학자들에게 말했다.
"이제 나는 그대들이 필요 없게 되었다. 나는 깨어 있음을 아는, 내면 존재를 아는 이 사람의 말을 듣고 싶다. 그리고 그의 말이 옳다. 그대들은 단지 학식만 많을 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깨달은 사람은 비판을 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는 무심한 상태에서 행동한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그처럼 아름답고 우아하며 그 속에 신성마저 깃들여 있는 것이다. 그대는 행위 없는 행동을 해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그대는 여래의 안목으로 사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가 깨어 있지 않는 한, 자발적이거나 행위 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그대는 깨달은 사람의 안목을 가질 수가 없다.

나는 그대에게 여래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어떤 것에 대해서 특별히 비난하거나 더 좋아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낙타는 낙타로서 완전하며, 사자는 사자로서 완전하다. 그것은 그들의 진여(眞如)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본성을 꽃피우는 것일 뿐이다.

여래의 안목이란 모든 사람이 어떤 판단이나 비난도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경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는 다른 사람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그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비폭력성이며 사랑이며 자비이다.

그러나 그의 안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대가 자신의 본성에 좀더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 그대는 행위 없는 행동을 알아야 하며, 마음의 간섭 없는 삶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그대의 존재가 완전히 빛으로 가득 찰 때만이 가능하다. 그대가 깨달았을 때 모든 어둠이 그대 속에서 사라진다. 달마는 이제 그대에게 몇 가지 암시를 준다. 그는 그대에게 삶의 목적지인 여래를 가르쳐 주었다. 여래는 이제 도의 초심자에게 몇 가지 암시를 주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처음 도를 만날 때 그대의 의식은 잘 집중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마치 꿈이나 환상을 보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이 모든 장면들이 다른 곳에서가 아닌 모두 그대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꿈 같은 장면에 집착하지 말라. 그것이 아무리 달콤하더라도 말이다. 선(禪)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그대가 길에서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여라."

이 말은 그대가 명상 중에 부처를 보면, 그것은 그대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뜻한다. 그때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석가모니 부처마저도 내 마음에 나타났으니 나는 이제 완전히 깨달았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석가모니 부처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 마음의 장난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예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소위 성자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꿈 같은 현상에 집착해 있다. 그리스도를 본 기독교 성자들도 있다. 그들이 본 그리스도는 그들의 마음이 투사한 투사체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힌두교도도 그리스도를 본 적이 없다. 힌두교도는 크리슈나를 본다. 또 라마를 본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크리슈나나 라마를 보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상황이다. 그대가 침묵 속으로 조금 들어가면 그런 상황들이 영화 장면처럼 그대 앞에 펼쳐진다. 그대가 완전히 속을 만큼 그 장면은 생생하다. 그래서 달마는 그대가 명상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려 주고 있다. 그것은 그대 마음의 투사체일 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그것을 없애 버리라. 그것이 부처이든 그리스도이든 크리슈나이든 말이다. 그대는 그것을 지나가야 한다. 아무것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한 점을 향해서 말이다. 그때 모든 마음의 투사체는 뒤로 남겨진다.

그때 그대는 초월에 이르게 된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본성을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