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각성론(覺醒論)-2. 준비를 갖추고 그대의 상속권을 요구하라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19:23

 

 

 

달마의 각성론(覺醒論)-2. 준비를 갖추고 그대의 상속권을 요구하라

 

"준비를 갖추고 그대의 상속권을 요구하라." 달마는 이 세상을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지 않았다. 그는 모든 분별에 반대했다. 우주는 하나의 전체적인 유기체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가지 구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어떤 다른 곳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그대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대가 의식적이지 못할 때, 그대는 하나의 중생이다. 그대가 의식적일 때, 그대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그대가 무의식적일 때, 그대는 세상을 하나의 속된 것으로 본다. 성스러운 것은 이 세상을 초월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대가 의식적일 때, 각성해 있을 때, 부처가 되었을 때, 그때는 어떤 것도 성스럽거나 속되다는 분별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하나이다. 이 하나됨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분별심은 우리의 표면 의식이나 무의식에서 나온다. 그것은 우리의 안목이다. 태양 아래에서 눈을 감고 서 있으면서 어둡다고 생각한다. 어둠은 그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밖은 찬란하고 싱그러운 빛이 비치는 아침이다. 새들이 노래하고 꽃들이 태양을 향해 자신을 활짝 여는 그런 아침이다. 그러나 장님에게는 그런 찬란한 색채도, 꽃도, 태양도 없다. 그의 눈이 시력을 회복하는 순간 갑자기 어둠의 세계가 빛의 세계로 바뀐다. 그는 그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런 변화는 그가 장님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존재계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런 관점에서 달마는 엄청나게 중요한 말을 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철학자와 종교가들의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을 나누어 놓았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해 놓았다. 그들이 존재계를 물질과 정신으로 나누고,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하는 것은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구분하는 사람은 항상 내부의 갈등으로 시달린다. 그들의 전 에너지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말라 버린다. 그런 사람은 그 에너지를 자신의 꽃을 피우는 데 사용할 수 없다. 봄이 오건만 꽃을 피울 어떤 에너지도 그에게는 없다. 그는 이미 지쳐 있다.

세상에서 축적된 부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항상 피곤에 지치게 만든다. 그들은 사람들이 돈을 벌고 재산을 유지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다 써 버리도록 만드는데, 그것은 넘쳐나는 에너지로 인해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쳐 버린 사람은 더 이상 불의나 거짓에 대항해서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최소한의 에너지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을 망하게 하는 기본적인 갈등이 시대를 따라 항상 이어져 왔다. 분별, 그것은 모든 통치자들의 기본 규칙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정치가보다 그것을 더 사랑했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분별하는 것이었다.

나누어지지 않는 개인의 더 이상 노예가 되지 않는다. 분별은 일종의 카스트(caste)제도와 같다. 멍에가 없는 자유로운 한 마리의 황소를 보라. 그대는 그 황소로 하여금 그대의 수레를 끌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완전히 자유로워서 그대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힘세고 자유로워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다. 그것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암소를 만나면 자유롭게 노닌다.

그러나 멍에에 매여 있는 소는 얼마나 불쌍한가? 그대의 수레를 끌고 그대가 원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 그대는 그 소의 아름다움과 에너지와 자유로움을 파괴해 버렸다. 똑같은 소이지만 멍에를 매고 매지 않은 것은 그만큼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성직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대의 아름다움과 힘과 잠재력은 완전히 파괴된다. 그대는 하나의 노예로 변한다.

왜 인간이 모든 종류의 노예 제도를 참아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에너지는 어디로 갔는가? 그는 그 에너지를 자기 자신과 싸우도록 교육받았다. 그대가 자신과 싸우는 동안 그대는 완전히 자신을 파괴시킨다.

달마의 가르침은 그대 자신의 본성을 알라고 하는 것이 전부다. 그것은 어떤 것으로도 나누어질 수 없다. 물질이나 정신으로, 성스러움과 속됨으로 나누어질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분별을, 모든 이중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대 속에 있는 이 초월성이 바로 그대의 본질이다. 그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모든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축복의 원천이다. 그것은 그대 속에서 자연스럽게 존재의 꽃을 피어나게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은 자연스럽다.

인간은 자신을 부자연한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그는 고통과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부자연한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지옥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대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 바로 천국이다. 거기에 또 다른 지옥이나 천국은 없다.

자신의 본성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어록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띠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인 지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온 그대의 모든 행동은 지극히 아름답고 선하다. 그것은 억지로 나온 행동이 아니다. 장미 넝쿨에서 장미가 피어나듯이, 그대가 한번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면 모든 아름다움과 선이 자연스럽게 피어난다.
이것은 존재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앎이다.

"세속을 위해서 초월을 포기한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모두 중생이다."

초월의 의미를 그대는 먼저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모든 이중성을 넘어서는 것이다. 존재계와 하나됨이라는 말을 잊어버린 사람은 불필요하게 중생이 된다. 그때 거기에는 삶에 반대하는 죽음이 있다. 그리고 정신에 반대하는 육체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양극으로 나누어져 서로 대립하게 된다. 거기에 증오에 반대하는 사랑이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근본적인 사실을 기억하라. 양극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사랑은 미움이 될 수 있고, 미움은 사랑이 될 수 있다. 그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친구가 적으로 바뀔 수 있고, 적이 친구로 변한다.
그대는 행복이 슬픔으로, 슬픔이 행복으로 바뀔 수 있음을 잘 안다. 비록 그것들이 대립적인 것이지만 그것들은 쌍둥이와 같다. 환경이 조금만 변해도 그것들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그래서 그대는 초월의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존재계는 모두 이 초월에 속해 있다. 그것을 나누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는 계속 이중성으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부처는 좋고 나쁜 운명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성공이나 실패란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가 잘 알고 있든지 절대적으로 모르고 있든지, 그가 누구이든지 혹은 아무것도 아니든지, 이 모든 이중성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그의 각성은 가장 위대한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것을 가졌을 때 그대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지 않는다. 그대는 대통령이나 수상이 될 필요가 없다. 그런 것들은 어린아이들이, 덜 떨어진 사람들이 벌이는 장난이다.

야망을 쫓아서 끝없이 달리는 사람들은 축구선수보다도 더 지성적이지 못하다. 그들의 게임은 이름이 다를 뿐 실상은 똑같다. 그들은 계속해서 고통을 맛본다. 성공해도 고통스럽다. 내일이면 그 자리를 놓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들이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이제는 성공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리를 잡고 매달리기 때문에 또 고통스럽다. 권력의 자리에 앉는 것은 가장 기분 좋은 일이라서 모든 사람들이 그대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앉으려 한다. 어떤 사람은 그대의 손을, 어떤 사람은 그대의 발을,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대의 머리를 잡아당길 것이다. 죽든지 살든지 그대가 그 자라에 앉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소위 성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평화롭게 살 수 없다. 그대가 성공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대는 가장 큰 실패감을 맛볼 것이다. 그것이 좋은 시절이라고 과거에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대가 나빴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오히려 좋은 시절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똑같다. 성공도 지나가고 실패도 지나간다.

그대는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봉우리처럼 남아 있다. 홀로 우뚝 솟음, 이것이야말로 그대의 초월적인 본성이다. 아무것도 그대를 긁을 수 없다. 인도의 신비가인 까비르(Kabir)가 하루는 "죤 키 티온 다르 디니 차다리야(Jyon Ki tyon dhar dinhi chadariya)'라고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나는 이제 신께 돌아왔다."란 뜻이다. 그리고 "신께서 나에게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입으라고 주신 옷을 더럽히지 않고 처음 받을 때처럼 깨끗하게 다시 돌려드린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자의 경험이다. 그는 칠흑 같은 밤에도 침묵 속에서 살았고 대낮에도 침묵 속에서 살았다. 그는 아무런 분별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분별을 초월한 자리에서 머물렀고 분별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그런 능력으로 인해서 그는 업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업이라고 해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문장은 그대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야 할 말이다. 그대는 그리스 왕 미다스(Midas)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전생애를 살면서 항상 신에게 이렇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내 소원을 들어주소서. 내가 만지는 모든 것은 황금으로 변하게 해주소서."

신은 매일 졸라대는 그의 억지에 지쳤다. 사실 신에게 드리는 그대의 기도는 졸라대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가엾게도 신은 수많은 사람들이 수백만 년 동안 졸라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래도 자살해 버리지 않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아마 그렇게 졸라대면 아무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결국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대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제발 이제 나를 그냥 내버려두라."

그러나 무의식적인 인간은 나아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그대의 모든 기도가 이루어지면 그대는 가장 지독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한 말은 정말 옳았다. 그대의 기도는 그대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내용을 알지 못한다. 신이 차라리 귀머거리가 되어 그대의 기도를 듣지 못하는 것이 훨씬 낫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왜 내가 그런 기도를 했던가?"라고 후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