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봉우리에 몸 숨긴 독수리
선지식들은 다들 나름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어떤 스님은 근엄하고, 어떤 스님은 소탈하며, 어떤 스님은 사교적이고, 어떤 스님은 늘 진지하다. 경봉 노사는 늘 웃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 안의 자신과 대면한 쑥스러움과 여유에 다름아니다.
“문(問): 쯧, 무정한 주인공아 이제사 만났으니, 왜 이렇게 늦었는고. 답(答): 허허, 내가 그대 집에 있었건만, 그대 눈이 밝지 못해 이처럼 늦었다네.”
자신과 만나고 나면, 여시(如是)라,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을 향해 징징대지 않는다.
“영리한 주인공, 주인공아, 그대 말이 ‘이와 같고 이와 같으니’, 오늘,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은 부드러우며, 산 층층(山層層) 수 잔잔(水潺潺)하니, 산꽃은 웃고 들새는 노래 부르니, 손을 마주 잡고 태평가나 같이 불러보세.”
야부도 <금강경> 6장에서 같은 노래를 불렀다. “내 집안의 보물을 얻고 나면, 지저귀는 새, 산에 핀 꽃들이 온통 봄의 찬양임을 알게 된다(冶父: 若能信得家中寶, 啼鳥山花一樣春).” 내 손 안에 천하의 보물을 쥐었으니, 나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閒道人),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證道歌)! “공부도 작파하고, 할 일도 없는 한가한 사람, 그는 망상을 제거하겠다고 부산떨지 않고, 진리를 구한답시고 용을 쓰지 않는다.”
그는 어디 있는가
웃음은 대개 여유에서 온다. 그것은 “더 이상 추구할 목표도, 씨름해야할 문제도 없다”는 것의 증거이다. 아직 더 나아가야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고, 때로 신경질적이다. 나는 스님들의 법력을 얼굴의 웃음기에서 찾는 고약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
자신 속에 있는 무가보(無價寶)를 얻은 사람은, 두두 물물이 다 평등(平等)하고 원만(圓滿)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 이상 악착할 것이 없다. 그는 악인들을 비난하거나 중생들을 타박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어떡하든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말이 자신과의 대면이지, 그 주인공에게는 얼굴이 없다. “법상(法相)은 없다!” 그 소식을 영축산(靈鷲山)에 빗댄, 스님의 절창을 보라.
“영축산이여, 유시(有時)에는 구름도 일고, 유시에는 안개도 끼고, 유시에는 비도 내리고, 하여도, 구름이 일어도 머무름이 없고, 유시에는 만화(萬花)가 방창(芳暢)하고 새들도 지저귀지만, 이것도 사라져 버린다. 이것이 영축산의 진상이다. 산도 이러한데 어떤 글이나, 말을 남겨둘 것도 없는 것이다. 말과 글을 남겨둔다는 것은 망정(妄情)이지 영축산의 진상이 아니다. 영축산의 진상이 아닌 것을 두려는 것이 망상이요, 어리석은 일이다.”
‘신령스런 독수리’는 자신의 얼굴을 산봉우리 저쪽에 숨기고 있다. 그러니 불응취법(不應取法), 작은 지식을 진리의 이름으로 행세하지 말라. 노사의 웃음과 관용은 “그러니 내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방편의식에서 피어난다.
산대놀이에 담긴 불법(佛法)
스님은 노장, 유교, 기독교 등의 근엄한 교설에도 능했지만, 일상의 연극이나 구전의 이야기에서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확인하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설득하는데 뛰어났다.
쉬운 이야기를 하기가 제일 어렵다. 이는 강의를 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바다. 대학에서도 학부 초년생들을 두고 하는 <철학개론>은 원로 교수에게 맡긴다. 이제 갓 박사를 받고 강단에 선 사람은, 그동안 코를 박고 읽은 몇 줄의 텍스트를 새기는데 바빠, 지식들을 종합하고, 그것을 일상의 지혜로 전달하는 기술이 모자란다.
나는 불교든 유교든, 노장이든, 기독교든, 여타 서양철학이든, 심지어, 지금 뜨고 있는 분야인 IT나 등등에서, 선이해가 없는,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을, 근기와 눈높이에 맞게, 설해 주는 실력으로 그의 수준을 가늠하는 버릇이 있다.
스님의 법문에는 시정의 한담과 설화가 은하처럼 흐르다가, 유머와 예화가 어느덧 뒤섞인다. 놀라와라, 거기 소리소문 없이 삶과 불교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다. 스님의 법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하나를 소개한다.
“산두 박첨지라는 허수아비놀이가 있었다. 동네 한 복판에 기둥을 네개 세우고, 포장을 치고 나서, 그곳에서 수많은 허수아비들을 움직여, 탈바가지 뒤집어쓰고 놀게 한다. 처음 부채가 흔들흔들 지나가고, 다음 털보가 지나가면서, ‘어, 오늘 사람 많이 모였다’고 한다. 인간들이 입도 맞추고 노는 장면이 있고, 사자 호랑이가 놀다가, 스님네들이 나와서 절을 지어놓고 의젓하게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기도 한다. ‘다만 법부의 지혜만 지워라, 별로 성현의 지혜란게 없느니라.’ 이렇게 온갖 장면들을 다 보여주다가 나중에 홍동지라는 어린아이가 발가벗고 나오는데, 자지가 어찌나 크던지, 제 키보다 큰 그것을 어깨에 을러메고 나와서 그것으로 이리치고 저리치면, 춤추고 놀던 놈들이 쫓겨 어디로든 숨고 사라진다. 법사고 사자고 간에, 이 물건으로 치면 다들 사라지니 사람들이 웃고 야단이다.”
스님은 이것이 불법(佛法)의 심오한 법문 중의 법문이라고 찬탄한다. 여기 산대의 네 기둥은 인간과 세계를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상징하고, 거기 노는 허수아비들은 인생의 울고 웃는 모습들을 빗대고 있다.
이 허수아비들의 연출자는 그 장막 밑에 있다. 연출자가 주인공이라면 홍동지는 ‘벌거벗은(淨裸裸) 지혜’라 할 것인데, 이 지혜의 방망이 앞에 분별과 차별의 온갖 모습들은 지워지고, 온전한 순금의 당체(當體)만 오롯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다.
중국의 여배우 꽁리가 주연한 <인생>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그림자 놀이를 기억할지 모르겟다. 손가락 위에 올려진 다양한 인형들의 동작을 장막에 비추고, 거기다 변사의 입담을 곁들이면, 음모와 전쟁, 사랑과 이별의 드라마가 실감나게 펼쳐진다.
우리네 삶이 그렇다. 이렇게 책도 읽고 컴퓨터도 치고, 근엄하게 정치도 하고, 사기도 치고 당하기도 하고, 울기도 웃기도 하는 희노애락 중중무진의 꼭두각시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이들 꼭두각시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자아(自我) 혹은 페르소나(persona)에 익숙하다 보면, 문득 “나는 어디 있지”하고 돌아보는 때가 온다. 자기 아닌 것에 자신을 맡겨버린 이 일상화된 비극을 현대철학과 종교는 ‘소외’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럼 주인공은 어디 있는가. 불교는 이 물음을 끌어안고 해결을 모색하는 개인화(individuation)의 순례요 등정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덮고 길을 나서라
책을 열어야 길을 확인할 수 있지만, 책을 덮어야 길을 나설 수 있다. “말이 너무 길고 많으면 재미가 없다... 능금이나 배를 한 개 다 먹어야 맛을 아는 것이 아닌 것처럼….”
관건은 역시 삶이고 경험이다. 말을 이해하고, 소식을 접하려면 직접 격외(格外)의 실참을 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스님은 말한다.
“과수원의 과목 키우는 법을 배우는데, 칠판 강의를 듣거나, 말과 글로써 배우더라도 자기가 직접 과수원에서 이삼십년간 과목을 키워보면 선생에게 배운 그 이상의 것을 자기도 모르게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
수처작주(隨處作主, 立處皆眞)! 우리는 각자의 보고서를 준비해야 한다. 때가 되면, 우리 자신이나 혹, 저 위의 누군가가 틀림없이 보자고 손을 내밀 것인 즉….
■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붓다뉴스 http://news.buddha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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