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에서 손을 놓는 것이 장부
경봉 스님의 <금강경>을 듣고 나니, 야부의 노래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1. 金佛不度爐, 木佛不度火, 泥佛不度水. 三佛形儀總不眞, 眼中瞳子面前人. 若能信得家中寶, 啼鳥山花一樣春.
“금부처는 용광로를 견디지 못하고, 목불은 불길을 뚫지 못하며, 진흙으로 만든 부처는 물에 그만 뭉개지고 만다. 이 세 부처의 형상은 진짜가 아니다. 눈동자는 그저 눈앞의 사람을 마주볼 뿐. 진실로 집안의 보물을 얻고나니, 문득 우짖는 새 산꽃이 다들 봄을 노래하고 있더라.”
- “눈동자는 눈 앞의 사람만 본다”가 무슨 말일까. 1) 신문을 읽든 뉴스를 보든, 남의 말에서, 또 학자들의 게임인 발제와 논평에서든, 사람들은 그 말의 꼬투리를 잡고 싶어한다. 그 전에 잘 듣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데 정말 어렵다. “경청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성공한다.” 2) 자기 수준만큼 세상을 본다.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시각, 남을 평가하는 언사는 곧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자신의 가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흡사 거울과 같다. 무학대사의 만고 격언처럼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3) 위의 둘은 한담이고, 지금 야부의 노래는 인간의 눈이 밖을 향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늘 밖을 향해 헉헉대고, 그리하여 내면적으로는 불안하고 빈곤하다는 실존적 사태 하나를 알려주고 있다.
돈교(頓敎)를 기억하라. 혜능과 야부가 한 목소리로 외친다. “너는 부자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보다 투자의 귀재라는 워랜 버핏보다 더 부자다. 진짜다.”
<무문관>에는 청세의 구걸이 실려있다. “저, 청세는 외롭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 좀 베풀어주십시오.”
조산이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보시오, 청세! 청원의 백가주를 석 잔이나 들이키고도 입술을 축이지 못했다 하시오.”
2. 種瓜得瓜, 種果得果. 一佛二佛千萬佛, 各各眼橫兼鼻眞. 昔年親種善根來, 今日依前得渠力. 須菩提, 須菩提, 著衣喫飯尋常事, 何須特地 生疑.
“오이를 심어 오이를 얻고, 과일을 심으면 과일을 얻는다. 한 부처 두 부처, 천만 부처를 보아하니, 하나같이 안횡(眼橫)에 비직(鼻眞)이라. 눈은 옆으로 찢어지고, 코는 아래로 뻗어있네. 예전에 심은 선근, 오늘에 그 힘을 얻었으니, 수보리여, 수보리여, 옷 걸치고 밥 먹는 이 일상사에, 다시 무슨 일을 기대하고 의심을 내는가.”
- 보물은 자기 안에 있으나,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직 자기젓이 아니다. 6바라밀, 베풀고, 참고, 규율을 지키고, 정진 노력하고, 좌선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을 환상없이 바라보는 통찰력을 키우면, 모든 부처들이 얻은 그 열매를 너도 얻을 수 있다. 장담한다. “콩 심은데는 콩이 나게 되어있다.” 그 보물이 기지개를 켤 때, 외부의 영향력을 줄어들고, 내면의 충만과 고요는 더욱 깊어간다.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축복은 일상의 자연일 뿐, 괴력이나 마술같은 초자연적 힘이나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능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발 신통에 목매달지 마라.
3. 圓同大虛, 無欠無餘. 法相非法相, 開拳復成掌. 浮雲散碧空, 萬里天一樣.
“세상은, 그리고 너도 완전하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 진리와 비진리 사이라, 주먹을 펴면 손바닥이다. 뜬 구름은 푸른 하늘로 흩어지고, 만리는 다만 한 하늘로 길게 걸려있다.”
- 쇼핑하러갈 때는 공복에 가지말라는 아줌마들의 지혜가 있다. 배고플 때 운전대를 잡으면 조급해지고 난폭해진다. 누가 끼어들면 성질부터 낸다.
일시적 생리학적 결핍은 적절한 조처로 쉽게 해결된다. 문제는 심리적 결핍이다. 늘 허기져 있고, 불안한 사람이 있다. 탐욕과 공격성은 그 징후이고 결과이다.
불교의 바라밀은 이들을 치유하는 처방이다. ‘뜬 구름’은 벌떼처럼 머리속을 앵앵대며 오가는 상념들, 즉 심리적 분열과 결핍의 파편들을 상징한다. 바라밀의 수행실천과 더불어 의식이 통합되고, 그와 더불어 상념과 이미지들은 점점 희석되고 약화되다가 결국 흩어진다.
<금강경>은 이를 일왕래(一往來)에서 불래(不來)의 진행으로 설명한다. 어떤 사건의 흔적들은 찌꺼기로 남아 마음의 바탕을 물들이다가, 그 상념들은 결국 더 이상 훈습되거나 반복되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구름 걷힌 하늘이 온통 푸른 한 빛이다!” 마음에 결핍과 분열이 없을 때 세상은 당연히 완전하다! 그때 우리는 구분은 하지만 차별은 없다.
4. 金不 金, 水不洗水. 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 水寒夜冷魚難覓, 留得空船載月歸.
“금은 금을 주조하지 못하고, 물로는 물을 씻지 못한다. 나무에 올라 가지를 휘어잡는 것은 신기할 것이 없다. 아득한 절벽에서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 진정 장부이다. 물은 차고 밤은 추워 물고기 흔적이 없으니, 빈 배에 달빛을 실어 집으로 돌아올 뿐.”
- 우리는 진리를 책을 통해, 이미지를 통해 접근하는데 익숙하다. 그 바탕에 나는 지금 비참한 중생이라는 생각이 있다. 나 중생은 이제 이런 저펀 유위(有爲)의 방편을 쓰고, 한편 부처 등 외부의 힘에 의지해서 저 행복의 언덕으로 건너가리라는 점차(漸次)의 기대가 있다. 이 점교(漸敎)의 길을 야부는 “나무를 의지해서 가지를 휘어잡는다”로 비유했다. 그러나 진리는 지성의 구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해체를 통해서 만난다. 저 언덕은 여기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미 와 있다! 행복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왜냐. “너는 이미 다이아몬드 칠보(七寶)를 은하수만큼 가진 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존을 그치고, 절벽에서 그만 손을 놓아라. 나머지는 불성이 자연 길을 인도할 것이다. 이를 어느 시인은 “잊어버림으로써 기억한다”고 썼다.
때로 우리는 원래의 맥락과 의미를 놓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옛글들을 쓰기도 하는데, 그 둘 사이의 엇갈림과 충돌을 곱씹다가, 가끔 손뼉을 치거나 밥알을 튀기기도 한다.
5. 水到渠成. 終日忙忙, 那事無妨. 不求解脫, 不樂天堂. 但能一念歸無念, 高步毗盧頂上行.
“물이 드디어 물길에 들었다! 종일을 바쁘지만, 무슨 일이든 무슨 상관이랴. 해탈을 구하지도 않고, 천당을 기꺼워하지도 않으니…. 다만 일념을 무념으로 돌릴 수 있어, 비로봉 정상을 어깨 펴고 걷는다.”
- “물이 드디어 물길에 들었다.”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들이 자연의 길을 따라 흐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슬프면 웃고 기쁘면 웃는다. 그의 마음은 무념(無念)이라, 비어있기에, 상황에 따라 자극에 따라 반응한다. 주자학이라면 이를 “소리개는 하늘에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고 표현하기를 즐겨 한다.
영어에 샤덴프로이데(Shadenfreude)라는 말이 있다. 기원은 독일어인데, 이 말은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인간 내부의 오래된 사악함을 지적한 말이다. 이렇게 오물로 덮여있으면, 불성의 물은 제 길을 가지 못하고 시궁창처럼 썩고 만다. 이 비참한 삶을 종식시키고 싶지 않은가. 정화하자,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이 시궁창을 대청소해야 한다. 그러고 싶어한다면, 그럴 수 있다. 누구나….
■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 붓다뉴스 http://news.buddha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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