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중도론(中道論)-2. 마음에 머물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완전하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4:54

 

마음에 머물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완전하다. 달마의 선어록은 순금과 같다! 다만 한가지만 제외하고는! 달마는 아라한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갑자기 장님이 되어버린다. 아라한에 대한 그의 편견이야말로 그가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유일한 결함이다. 그가 궁극의 지혜로부터 추락해서 자신의 견해에 집착할 때마다 나는 그대에게 일러 줄 것이다. 달마처럼 큰 인물도 어떤 상황에서는 무지한 사람들처럼 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또한 이것은 그대가 자신의 견해에 너무 집착하지 않도록 타산지석이 되어 줄 것이다.

모든 견해는 결국 그대를 장님으로 만들어 반대편 견해를 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순수한 이해에 도달한 사람은 어떤 선택도 하지 않고 모순되는 것들 모두에게 마음을 열어 놓는다. 그는 선택하지 않고 다만 고요히 깨어 있을 뿐이다. 그는 모든 반대 극부가 궁극에 가서는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안다. 삶은 죽음과 만나며 낮은 밤과 만난다. 사랑은 증오와 만나며 '예'는 '아니오'와 만난다. 모든 견해를 벗어난 사람에게 '예'란 단지 하나의 부분이며 '아니오' 또한 부분이다. 사실 양극이 만나 하나로 녹아들 때, '예'는 더 이상 '예'가 아니며, '아니오' 또한 더 이상 '아니오'가 아니다. 절대적으로 정의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들은 서로 만나서 본래의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마 같은 사람조차도 어떤 점에 대해서는 눈이 멀 때가 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전인류의 십분의 일이 색맹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십분이 일이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은 어떤 색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버나드 쇼(Bernard Shaw)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 그는 60년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가 60회 생일을 맞이했을 때 한 친구가 아름다운 옷을 선물했다. 그런데 그 옷에 어울리는 넥타이를 보낸다는 것을 깜빡 잊었다. 버나드 쇼는 그 송이 매우 마음에 들었고 넥타이를 사러 가자고 비서에게 말했다. 그는 그날 밤 생일잔치에서 친구들이 오면 자기는 그 옷을 입을 작정이라고 말했다.

버나드 쇼는 비서와 함께 고급 넥타이를 파는 상점에 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서 많은 넥타이를 구경하다가 드디어 그가 넥타이 하나를 골랐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점원과 비서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노란 넥타이를 고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비서와 점원은 참지 못하고 동시에 말했다.
"그 색깔은 매우 이상하게 보입니다. 초록색 옷에 노란색 넥타이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버나드 쇼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것은 같은 색깔인데."

그는 노란색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노란색이 초록색으로 보인 것이다. 그는 여태껏 노란색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매우 우연하게 일어난다. 이 세상에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 버나드 쇼는 40년을 더 살았지만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아마 일 세기를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다. 비록 자신이 위대한 각성을 얻었을지라도 어떤 점에 있어서는 완전히 장님이 될 수도 있다. 그에게서 맹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깨달음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완성되지 않은 불완전한 것이다. 달마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너무나 정확했고, 완전히 각성한 채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점들에 있어서는 보통사람들이 갖는 편견과 선입견의 마음을 갖고 대한 적이 있었다. 그대는 이 점을 기억해서 그에게서 한 가지 비밀을 배워야 한다. 그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이 어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실체를 찾으려고 마음을 사용하는 것은 망상이다. 모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와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다. 위대한 사상가들 역시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실체를 알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눈으로 음악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눈은 음악을 들을 수 없다. 귀로 그대가 빛을 보려 한다면 그대는 그 일을 성공할 수 없다. 귀는 빛을 보는 통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 통로이며 눈은 빛을 보는 통로이다. 그것은 각각 다른 차원의 기능을 갖고 있다. 마음의 기능은 생각, 꿈, 공상, 환각 등 모든 종류의 신기루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의 기능은 실체를 찾아내기 위한 통로가 아니다

실체를 찾는 데에 마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깨어있는 것이다. 마음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실체를 찾는 길이다. 어떤 생각에도 매달리지 않는 깊은 침묵 속에서 투명한 유리처럼 남아 있을 때, 그 투명함, 그 맑음 속에서 실재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그때 안과 밖이 하나가 되어 드러난다. 실체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과 밖을 둘로 나누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마음이 떨어져 나가면 분별 역시 떨어져 나간다. 그때 그대는 실체가 된다. 가장 멀리 떨어진 별 조차도 그대와 연결되며 풀잎 하나도 그대와 둘이 아니다. 존재계 전체가 하나인 것이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분리된 개체가 아니다. 그대는 전체 속으로 들어가고 그대와 존재계 사이의 벽은 허물어지고 만다.

이것을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의 경험이라고 부른다. 이제 그는 현자가 되었고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나는 신이다.'란 뜻이다. 그 말은 에고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겸손함의 극치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그대는 전체와 하나가 된다.

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해탈을 얻은 사람이다. 이 짧은 말속에는 경전의 모든 내용이 담겨있다. 달마는 단순한 사람이다. 그는 유식한 비유나 거창한 문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진리와 궁극적인 경험을 단순하고 일상적인 단어로 말했다.

말로부터 자유로는 사람은 해탈을 얻은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든지, 그대의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하지 않았다. 돈이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도 없다. 단지 말로부터,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할 뿐이다. 그것은 그대의 세계가 말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아내가 정말 말 외에 아무것도 아닌가? 한때 그녀는 그대의 아내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직자가 그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주문을 외운 후 그녀는 그대의 아내가 되었다. 사실 성직자가 거행하는 결혼 의식에 쓰여지는 말들을 전부 이해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한 산야신이 며칠 전 결혼을 했다. 그녀는 내게 와서 자신의 성직자에게 매우 놀랐다고 말했다. 성직자의 주례사가 한 시간 반이나 계속되었고,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이 5루피를 주자 그 순간에 성직자의 설교가 바로 끝났다는 것이다. 그 후 나머지 순서는 사진사가 사진을 찍는 것까지 합쳐서 15분 안에 모두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 성직자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잠시 멈추었을 뿐 다시 시작했다. 도대체 말장난을 떠나서 아내가 무엇이며 남편은 또 무엇인가?

그대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떤 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또한 죽을 때도 아무것도 갖고 갈 수가 없다. 어느 날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꿈이 될 것이다. 임종의 순간에 그대는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의 꿈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실제적인 것들이 죽음의 순간에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인다. 단지 마음속에 있는 말들처럼 말이다.
진짜로 포기할 것은 이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을 포기하고 히말라야나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진짜로 버려야 할 것은 그대 마음속에 있는 말들이다. 그래서 그대는 그저 고요하게 지켜보는 자로 남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달마가 말하는 자유이며 해탈인 것이다.

감각에 물들지 않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그대가 진정한 종교적인 자세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감정이나 분위기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가 마음의 장난에서 벗어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깨어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적 자세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은 자신의 집을 떠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대해서 두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은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것은 집이 아니다. 진정한 집은 그대가 향해 가는 곳이다. 이 세계는 그대의 진정한 집이 아니다. 이 세계를 집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위로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바그다드에서 살았던 산 수피 신비주의자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밤 왕은 자신의 왕궁 지붕 위로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