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중도론(中道論)-4. 마음에 머물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완전하다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4:57

 

 

지식에 몰두하는 것은 실제로 그대의 무지를 감추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학자나 판디트처럼 그대가 지식이나 학문에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에 몰두하면 할수록 그대는 지혜로 가는 길이 점점 막히게 되는 것이다. 지혜는 어떤 지식에도 물들지 않을 때 나오는 것이다. 그대가 모든 지식에서 벗어나는 순간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남는 것은 순수한 어리석음이다.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이다.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곧 열반이다. 어떤 고뇌와 번민, 어떤 탐욕과 분노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열반인 것이다. 그대는 진짜 집에 도착했고 그 집의 이름이 바로 열반인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은 피안(彼岸)에 다다른 것이다. 마음이 사라질 때, 마음과 함께 이 세계는 모두 사라진다. 마음과 함께 모든 무지가, 모든 지식이, 삶의 모든 악몽이 사라진다. 마음은 그대가 보고 있는 이 모든 드라마를 만들어낸 주역이다. 마음이 한번 사라지면 그 즉시 피안이 나타난다. 그것은 점점 가까워지며 뚜렷해진다.

피안이야말로 그대의 진짜 집이다. 피안이야말로 그대의 불멸성이며 영원성이다. 차안(此岸)은 죽음과 질병, 늙음과 모든 불행을 갖고 있다. 그러나 피안은 희망이다. 해탈의 희망, 구원의 희망, 모든 살아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악몽으로부터 구출 받을 수 있는 희망이다. 그리고 그 비밀은 간단하다. 그것은 그대가 그대의 마음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구름 없는 맑은 하늘처럼 순수한 의식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치우치지 않은 진리의 빛 속에서 본다면 중생은 성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치우치지 않은 진리는 중생도 꿰뚫을 수 없고 성자도 행할 수 없다."고 했다. 치우치지 않은 진리는 오직 보살과 부처만이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라한을 간과했다. 그가 잠시 눈이 멀었던 점이 바로 이곳이다. 비록 달마는 큰 눈을 가졌지만 그는 간단한 한 가지를 보지 못했다. 위대한 아라한은 위대한 붓다나 보살들과 같은 존재이다.

죽음을 삶과 다르게 보거나, 정(靜)을 동(動)과 다르게 보는 것은 이미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번뇌와 열반의 본성이 똑 같은 공(空)이기에 그 둘이 다르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거나, 열반에 들어갔다거나, 아라한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열반이라는 망상의 덫에 걸린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틀린 말이다. 아라한은 보살과 같은 경지에 있는 존재이다. 단지 길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도달하는 정상은 같은 것이다. 출발점이 다른 길이 하나의 봉우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물론 소위 성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열반이라는 망상의 덫에 걸릴 수 있다. 하지만 아라한은 다르다. 아라한은 보살이나 부처와 똑 같은 존재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라한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생각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다. 아라한들은 오직 자신의 깨달음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보살들은 다른 사람의 깨달음에도 관심을 가진다. 그것이 차이점이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경험은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같은 경지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라한도 보살도 아니면서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물론 그들은 금욕적인 고행을 한다. 그들은 자신을 학대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그것이 보살이나 아라한과 다른 점이다. 그것은 자발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사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앞과 뒤를 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견에 빠져있다.

나는 그들을 '소위 성자라고 하는 이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거의 부처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깊은 내면에는 어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본성을 깨닫지 못했다. 삼매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수만 갈래로 나누어지고 방황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들의 위대한 고행, 위대한 금욕, 위대한 훈련이 모두 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열반이라는 망상의 덫에 걸린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이다. 그대는 깨달음을 얻기를 갈망해서는 안 된다. 바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장벽이다. 그대가 깨달을 수는 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질 수는 없다. 그대가 욕망을 갖는 순간 그대는 덫에 걸리는 것이다. 그대는 욕망의 덫에 걸린 것이다.

그대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인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그것은 야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이런 덫에 걸려있다. 그들은 깨달음이니, 해탈이니, 모크샤니, 열반이나 하는 것들을 목표로 잡는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에고의 여행이 시작된다. 그것은 매우 지독한 덫이다. 한번 걸려들면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덫인 것이다.

열반은 그대 속에서 꽃피워져야 한다. 그대가 모든 욕망과 함께 마음을 비워 버릴 때, 그것의 모든 야심과 탐욕을 내던져 버릴 때…… 돈에 대한 탐욕이나 깨달음에 대한 탐욕이나 모두 같은 것이다. 그것은 어떤 차이도 없다. 마음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그 대상을 계속 옮겨 다닌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탐욕으로 가득 찬 똑 같은 마음이다.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깨달음이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그대 자신의 본성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갑자기 그대의 내면에 연꽃이 피어나고, 그대의 존재 전체는 그 향기로 가득 차게 된다. 그 향기는 아라한이나 보살의 향기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두 부처이며 그대 역시 부처이다.
나는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어떤 특정한 교리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않는다. 나는 단지 나 자신에게 속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 쳐 놓은 이념이 덫에 걸리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보살과 같은 존재들도 아라한의 생각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보살이라는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살의 경우뿐만 아니다. 아라한들 역시도 보살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누가 어떤 영역에도 속해 있든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영역에 속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독립해 있다. 그런 나의 독립이 바로 나의 문제이다. 그것은 내가 나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든 즐거워하지 않든 전혀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매우 이상한 곳이다. 만약 내가 그대를 즐겁게 하는 말을 한다면 그대는 그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대를 즐겁게 하지 않는 말을 한다고 해도 그대는 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그대는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예수에 대해서 어떤 기독교인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한다. 나는 2천년 동안의 어떤 기도교인보다도 예수를 더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예수에 대해서 칭찬할 때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즐거워하고 한 마디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예수에 대해서 몇 마디의 비판을 한다면 그 즉시로 기독교 전체가 나를 반대하고 일어선다. 그들은 거의 전세계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내 말을 적어 놓은 책들은 교황이 직접 금서령을 내렸다. 단지 몇 개의 기독교 단체들만이 예수에 관한 나의 책들을 출판했지만, 내가 예수에 대해 몇 마디의 비평을 하는 순간 예수를 칭찬한 나의 모든 책들을 즉시 불태워 버렸다.

사람들은 너무 과민하게 반응을 한다. 만약 그대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이 이해된다는 단순한 사실에 즐거워한다. 그것은 예수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문제이다. 내가 예수에 대해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을 할 때면 기독교인들의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

예를 들면 나는 달마에 반대하는 말을 몇 마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은 그에게 찬성하는 말을 훨씬 더 많이 한다. 하지만 내가 좋은 것을 말할 때는 다 잊고 있다가 반대하는 말을 몇 마디 하면 대승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즉시 나를 싫어하게 된다. 그러나 내 삶의 모든 노력은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어 그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고통의 본질이 공허하다는 사실을 알며 공허함에 머무르기에 항상 열반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열반은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며 열반이라는 것 자체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보살에 관한 말이지 아라한에 관한 말은 아니다. 나는 아라한이나 보살이 서로 차등이 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말해 두고 싶다.

마음이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열반으로 들어간다. 열반은 바로 텅 빈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란 말은 잘못 해석될 수도 있다. 나는 차라리 그 말을 '마음 없음'으로 부르고 싶다. 마음이란 결코 텅 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텅 비게 되는 순간 그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텅 빈 마음이란 말의 모순이다. 그것은 역설적인 표현이다. '텅 빈 마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사념의 흐름이다. 그것은 항상 생각이나 감정 혹은 꿈과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이 텅 비게 될 때 '마음 없음(無心)이 거기 있다. '텅 빈 마음'이 라고 할 때에는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대가 마음의 상태를 바꾸어 그런 마음을 갖고자 한다면 결코 그대는 마음을 비울 수 없다. 그대가 마음을 갖고 있는 한 사념들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는 마음을 떨쳐 버리든지 아니면 그것에 집착하게 되든지 둘 중 하나이다. 거기에는 어떤 타협도, 어떤 중도도 있을 수 없다.